고(故) 리영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는 20세기 한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전쟁'을 평생의 화두로 삼았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리 교수의 이런 작업이 갖는 의미를 짚으며 오늘날 우리의 학문적, 실천적 과제를 제시한다.
김동춘 교수와 사계절출판사의 동의를 얻어서 이 글을 전재한다. 이 글이 실린 <리영희 프리즘>은 고병권, 김현진, 안수찬, 오길영, 은수미, 이대근, 이찬수, 천정환, 한윤형 등 당대의 지식인이 각자가 선 자리에서 리영희 교수의 사상을 성찰한 글을 묶은 것이다.
<편집자>
리영희와 전쟁 : 전쟁의 세기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은 모든 것의 왕이고 노예와 자유로운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즉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 중에서 전쟁은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배와 피지배 관계, 즉 정치의 기본 질서를 좌우한다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전쟁은 물질적인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건설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지만,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관계들도 파괴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래서 전쟁은 일종의 혁명이지만, 가장 파괴적이고 비극적인 방식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국제 관계의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린다. 그리고 역사상 모든 제국은 전쟁을 통해서 만들어졌고, 전쟁은 문명 전파와 문명 이식의 촉매제였다. 나폴레옹은 독일과 러시아를 침략하면서 프랑스 혁명을 수출하였다. 영국은 19세기의 인도 폭동에 대한 잔인한 진압 작전, 아프리카 쟁탈 전쟁과 보어전쟁을 치르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었고, 미국은 필리핀 침략을 시작으로 태평양·대서양 연안 양측에서 동시에 제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영국을 대신하는 제국으로 등장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을 겪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중국은 사회주의 민족 해방을 성취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과 소련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이 강대국 간의 전쟁에서 별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조선은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되고 말았으며, 1950년 한국전쟁으로 남북한이 초토화됨과 동시에 휴전 협정으로 남북한 대결 체제가 고착화되었다. 오늘의 한미 관계, 한일 관계, 남북한 대결 체제, 남북한의 대립되는 정치경제 체제는 모두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아직 한국은 북한과 전쟁 상태에 있다.
그리고 조선인은 태평양전쟁기 식민 국가인 일본의 군 위안부, 병사와 군속, 노동자로 동원되어 노예의 삶을 살았고, 20세기 역사상 가장 참혹한 동족 간의 살상인 한국전쟁을 3년 동안이나 겪었다. 그 후 한국의 젊은이들은 1965년부터 10여 년 동안 남의 나라의 전쟁인 베트남전쟁에 동원되었다. 한국전쟁기에 징집되어 상이용사가 된 증조할아버지나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가 고엽제 피해자가 되어 보상 한 푼 받지 못한 한국의 할아버지들은 여전히 자신의 증손자와 손자가 군대에 입대하여 이라크에 파병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전쟁은 본디 '제국'의 프로젝트이며, 제국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다. 그래서 강대국이 주도해 온 세계사는 전쟁사를 빼고서는 한 페이지도 쓸 수 없으며, 20세기 세계사와 그 와중에 버텨 온 한국 현대사 역시 이들 한반도 주변 강대국의 전쟁 프로젝트의 귀결이었다. 비록 근대 이후 한국인들이 외세를 침략하여 전쟁을 벌인 적은 없지만,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진 전쟁의 역사를 모르면 오늘의 국제 정치의 연원, 한반도 분단과 남북 관계의 연원을 알 수가 없다. 또 스스로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휩쓸려 간 한국의 현대사와 한국전쟁을 변수로 포함시키지 않는 사회과학, 한국전쟁의 정치학을 중요한 설명 변수로 고려하지 않는 국제정치학,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동시에 살펴보지 않는 동아시아 역사 서술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20세기에서 21세기를 걸쳐 살아오면서 한반도 주변에서 일어난 전쟁, 그리고 미국이 개입했던 동아시아 전쟁들이 오늘의 각국 현실을 어떻게 가져왔는지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 지식인은 문제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과연 그렇다면 한국인들 중 누가 이 20세기 한반도와 한국인들의 운명을 가장 심대하게 좌우했던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다음, 그것을 필생의 작업 과제로 받아들였는가? 비록 베트남전쟁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였지만, '자유 세계'의 최전선임을 자처했던 한국의 군대가 베트남에 파병하게 된 현실과 대면하였던 1960년대의 젊은 리영희가 그러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미군사고문단의 통역장교로 복무한 것을 포함하여 무려 7년 동안 군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한국전쟁을 누구보다 진하게 체험한 전쟁 세대였다. 그는 '한국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을 미군의 지휘권 아래에 놓인 한국군으로 체험함으로써 한미 관계, 남북 관계, 한국 정치의 큰 물줄기와 만났다. 그러한 체험을 기초로 하여 이후 기자로서 베트남전쟁을 진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1960년대 들어 베트남전쟁이 확대되고 한국이 참전하게 되었을 때 지배하던 담론은 '보은론', 즉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어 자유를 찾았으니 우리도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베트남에 가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리영희는 여기서 매우 명백한 논리적 허점을 발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미국의 은혜로 나치의 마수에서 벗어난 영국은 왜 단 6명의 의장대만 베트남에 보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미 관계를 설명하는 '혈맹론', 베트남 파병을 정당화했던 '보은론'은 허구임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즉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은 한미 관계의 실상을 드러내 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개입했던 베트남전쟁은 사실상 베트남 이전의 전쟁(The War before Vietnam)인 한국전쟁의 연장이었으며,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정확하게 본다는 것은 그 이전의 한국전쟁, 나아가 동아시아와 한미 관계의 정치학, 한국의 정치와 사회 그 자체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만 국내적으로는 냉전의 서슬이 시퍼렇던 당시의 정치 실정에서 남북한 분단, 한미 관계, 그리고 한국 정치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베트남이라는 우회로를 거쳤던 것이다.
사실 '국가'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1960년대의 남베트남과 한국은 분명 북베트남과 북한으로부터 공산화 위협을 당하는 공통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헛되이 미국과 한 몸이라고 보았던 당시의 '제1세계론'의 시각을 벗어던지고 보면, 베트남전쟁은 프랑스·일본·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민족 해방 투쟁의 일환이었다. 남베트남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은 군사 독재와 부패, 그리고 종속국이라는 베트남의 현실에서 기인하는 것이었고, 그들은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자기가 살던 땅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던 약소국의 백성에 불과했다. 식민 통치의 대리자들이 또다시 지배자로 군림하는 나라의 독재, 부패, 부정의 현실을 '자유'라고 말한다면 언어의 유희도 도가 지나친 것이리라. 이 오염된 언어, 잘못된 이름 붙이기에 대해 발끈하지 않는 지식인이라면 역시 거짓 지식인일 것이다.
내전으로서의 한국전쟁, 식민지의 야만적 폭력에서 벗어난 지 5년도 안 된 시점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양심을 가진 사람이 정면으로 대결하기에는 너무도 힘겨운 현실이었으며, 리영희가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였듯이 반인간성, 비인간성, 비생명성 그 자체였다. 전쟁에서 잔인무도한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군대에 대한 증오감 등을 느끼면서 그는 평화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렬해졌다.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은 그것을 뼈와 살로 겪은 소수의 맑은 사람들에게는 필생의 숙제를 던져 주었다.
정치로서의 전쟁
▲ 고(故) 리영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김하영) |
전쟁을 거치면서 한편에서는 만세의 영웅이 만들어지고 다른 편에서는 무명용사, 피학살자, 성폭력 희생자, 신체장애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는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역사의 뒤안길에 남겨진다는 전쟁의 논리와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침략의 기획자들은 언제나 전쟁을 신성한 명분과 고상한 가치로 포장한다. 그리고 이제 장차 닥쳐올 전투에서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이 어린 병사들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자식을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가족들은 국가가 선전하는 이 고상한 대의와 가치, 펄럭이는 깃발과 애국가 합창에 스스로를 위무하고, 국가가 주는 알량한 급료와 사망자 위로금에 자위하면서 이 엄연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려 한다.
전쟁을 거치면서 수없이 많은 전승탑, 기념탑, 충혼탑, 위령탑이 만들어지지만 백성들은 그 탑들 앞에서 고개 숙일 여유도 없고, 또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자신에게 겨냥될 총탄을 만드는 일에 동원된다. 설사 그 총탄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전멸시킬 무기라고 해도, 약간의 급료와 보너스, 주식 배당액을 챙길 수 있다면 자청해서 그 일을 하려 한다. 전쟁의 참화를 몸으로 겪은 사람은 가능하면 자신이 겪은 전쟁을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리려 하며, 한번도 전쟁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오늘날의 사람들은 삼국지와 수호지, 나폴레옹과 이순신을 연상하거나, 심지어는 전자 오락게임과 같은 것으로 상상한다. 그래서 전쟁으로 발생한 비극과 상처, 전쟁이 가져온 파괴는 살아 있는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특정 정치 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해석되고, 집단적 망각 속에서 힘을 가진 집단은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한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다가오지만 질병은 그렇지 않듯이,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닥치지만 직접 전쟁에서 죽을 확률은 사람마다 다르다. 미국은 20세기의 거의 모든 전쟁에 관여했지만, 한 세기 동안의 모든 크고 작은 전쟁에서 죽은 미군 병사의 총수는 3년 동안의 한국전쟁 당시 죽은 한국인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전쟁은 장교나 병사 모두에게 죽음의 가능성을 극도로 높이지만, 철통같은 경비를 받는 CP 깊숙이 근무하는 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매일 몇 시간씩 순찰해야 하는 말단 병사들이 죽을 확률의 1%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이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 간의 계급적 차별의 원칙이 적나라하게 작동하는 현장이듯이, '전장'도 이러한 계급 원칙이 매우 적나라하게 관철되는 현장이다. 죽을 확률이 0.1%에도 미치지 않는 군인과 죽을 확률이 10%가 넘는 사람을 같은 군인으로 취급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으며, 이들 모두를 전쟁의 피해자라 말하는 것도 모순이다. 전쟁, 비상계엄 선포로 작전 지역 내의 민간인과 병사들에 대한 권한이 거의 군주의 반열까지 오르는 현장 지휘관의 처지가 보급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민간인의 쌀독과 가축에까지 손을 대야 하는 병사들과 같은 정도로 비인간화된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인간 세상에 전시만큼 불평등한 세상, 권력과 민중의 격차가 극대화되는 시기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전쟁으로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쟁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타락시키고 부패를 극대화하고 사회의 안정된 질서와 규범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특정한 정치경제 상황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적·인문학적 현실임과 동시에 가장 적나라한 정치적·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전쟁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겪은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에게 동일하게 체험되지도 않는다. 19세기의 나폴레옹 전쟁과 20세기의 제1차 세계 대전은 사용된 무기의 성능과 질, 살상된 비전투 민간인의 수, 피침략국의 지성인들이 그 전쟁을 받아들이는 방식, 전쟁 이후 변화된 정치 체제가 매우 다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참전한 전쟁이지만, 유럽의 제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의 제2차 세계 대전은 달랐다. 한쪽에서는 미군이 주로 공중전에 의존하면서 지상전에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투입되었고 핵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다른 쪽에서는 미군이 지상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핵이 사용되었고 인종주의 원칙이 전쟁 과정에서 작동하였다. 파시즘 군국주의를 부순다는 사명감에 불탔던 미군 지휘관들은 공산주의와 대결한다는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나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였다. 처음에는 흰 옷 입은 민족 구성인들끼리 싸우는 내전에 왜 자신들이 개입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왜 그렇게 부패하고 무능한 이승만 정권을 지탱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에는 왜 그 전쟁이 그렇게 지연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패잔병이 된 일본군의 처지는 비참했지만, 더 비참한 것은 남의 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군속들이었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일본군의 구타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에 영문도 모른 채 낯선 전쟁터에 내던져진 나이 어린 미군들의 처지도 비참했지만, 자기 나라 군과 경찰의 일상적 테러와 폭력에 노출되고 외국 공군기가 퍼부은 폭탄 세례를 받고 자기 집 안방에서 죽어 갔던 한국 민간인들의 처지는 그들보다 몇 십 배 비참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이승만 정부에 의해 동원되어 천 리 길을 굶으면서 걸어 내려가다 더러는 동사하고, 더러는 병에 걸려 죽은 국민방위군의 처지는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리영희는 이 국민방위군의 처참한 처지에 대해 분노하면서 전쟁의 현실에 눈을 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근무했던 부대 인근에서 벌어진, 한국 측 군경과 인민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했다면, 아니면 한국군에 징집되어 그러한 일에 동원되었다면, 그 전쟁에 대해 더욱더 크게 좌절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리영희가 체험한 한국전쟁, 그리고 기자로서 취재하고 분석했던 1960년대의 베트남전쟁도 가장 정치적인 전쟁이었다. 한국과 베트남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전쟁의 주역이 아니었다. '전쟁 만들기'의 주역인 제국주의는 '문명'으로 대량의 살상을 포장하지만, 어떠한 가치로도 인도되지 않은 군대는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화의 기제를 갖고 있지 않다. 리영희는 한국전쟁 시기 군인들의 타락한 규율과 부정적인 모습, 후방에서의 환락과 사치, 극단적 이기주의를 체험하면서도, 한국인들의 민족성을 개탄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제국이 아니라 아류 제국인 옛 일본의 천황 군대를 그대로 옮겨 놓은 한국군의 실체, 즉 일본군 출신 지휘관들의 성향, 야만적인 일본 군대의 폭력주의를 그대로 이어받은 지휘관들, 그 사디즘 체계의 최말단에서 신음하던 사병들의 비참한 처지를 주목하였다. 한국전쟁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힘없는 부모의 자식들이 죽음의 최전방에 서게 되고, '빽'이 있는 사람들은 전쟁터에서도 살아남고 돈도 버는 현실이 있었다. 또한 국민방위군의 비참한 처지 뒤에는 이승만 정부의 반인륜적인 행태와 전시에 민초들이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있었다. 그는 미군 통역을 하면서 미군의 참전은 결국 그들의 정치경제적 이해를 위해서라는 것과, 미군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 정부와 한국의 적나라한 처지를 이해하였다. 결국 그가 본 한국전쟁은 그의 국가관, 전쟁관, 미국관, 한국 정치관, 사회관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경험보다 더 좋은 교사는 없는 법이다.
과연 전쟁터로 변한 남베트남을 공산주의의 위협 속에 있는 '자유 세계'라고 불렀던 당시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세상을 정직하게 본 것일까? 이 당연한 의문에서 출발한 리영희의 일련의 베트남전쟁 관련 논문과 에세이는 베트남전쟁을 통해 국제 냉전 질서, 한미 관계의 국제정치학, 새 패권 국가이자 자본주의의 맹주인 미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 제3세계 민중들의 처지, 그리고 바로 그 자신과 한국 사람들이 겪은 한국전쟁과 한국 정치와 사회의 모든 현상을 우회적으로 다시 보려는 지적인 시도였던 셈이다. 베트남전쟁은 확실히 베트남 사람들의 전쟁이 아니라 제3세계 민중들의 전쟁이었다. 1960년대에 전 세계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양심과 세계관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었다. 오로지 한국인들만 베트남전쟁에 대한 이러한 국제적 논란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으며, 한국의 지식인들만 그러한 논란이 한국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았다.
베트남전쟁은 "현대 모순의 집약적 표현"이었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곧 냉전 체제, 미소가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한국 사람들이 그 전쟁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북한의 침략'이라는 매우 익숙한 공식으로 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즉 한국전쟁 체험을 일방적으로 해석한 한국전쟁관은 한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만 굴절시킨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각도 굴절시켰다. 남베트남을 '월맹의 침략'을 받은 '자유 우방'이 아니라, 식민지화의 역사를 청산하려는 항불·항일·항미 운동의 주체로 본다면 문제는 완전히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 리영희는 프랑스의 베트남 진입을 "조선에서 패배한 일본이 종전과 함께 한국에 군대를 진주시킨 상황"으로 이해하였으며,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지배 세력이 변화된 이후에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후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한 명분은 도미노이론, 즉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다른 나라가 연쇄적으로 공산화된다는 논리였는데, 이 논리는 사실상 한국전쟁기 미군 투입의 명분이기도 했다. 한국은 천연자원도 풍부하지 않은 가난한 나라에 불과했지만, 미국이 한국을 방관할 경우 미국의 의중을 시험한 전 세계의 공산주의 세력이 파상적으로 공격을 해올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한국의 방위는 미국의 '자유세계' 방위의 시험대였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베트남전쟁기의 국방장관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자신들이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 전쟁에 개입하였다고 실토하였고, 베트남전쟁 당시 대학 교수였던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 역시 당시 학생들이 왜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소련 사회주의가 망한 이후 미국의 패권주의가 유지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과거의 무지를 실토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의 청년 지식인들이 베트남전쟁을 이해하는 데는 그렇게 많은 노력이나 우회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지적으로 성실하기만 했다면 말이다. 한국인들에게 그것은 별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치 않은 정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냉전 체제
어쨌든 1970년대 이후 미·소의 화해, 일본 부흥, 월남 패망이라는 전환기적 사실들이 숨 가쁘게 진행되어도 냉전의 단세포적 인식에 머물러 있던 남한에서는 '유신'의 억압이 세상을 보는 눈을 더욱 외골수로 만들었고, 주체의 사회주의 노선을 강화시키는 북한의 대남 강경 노선과 맞물려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당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패망과 더욱 경직된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이제 전쟁은 국제적 문제가 아니라 과거부터 지속되던 남북한 간 냉전 체제의 해체 문제로 점점 더 다가오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리영희의 관심이 이제 중국의 변화, 일본의 우경화와 침략주의, 남북한의 군사적 대결 체제, 북한의 핵무장 문제 등 주로 한반도 내부와 주변의 문제로 관점이 이전하는 이유도 이제 지구적 냉전은 한미 관계, 남북 관계 문제로 집약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쟁점은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여 남북한 냉전 체제를 지속시키려는 세력 문제로 집약되었다. 여기에는 군사 정권의 지배 하에서라도 한국의 군사적·경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북한의 입지가 약화되었다는 현실이 피할 수 없는 전제로 깔려 있었다. 1980년대의 한국은 아직 농업 국가였던 베트남이나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가 되었다. 북한은 경제력에서는 물론 군사력에서도 남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전쟁 상태에 있었지만, 민주화와 더불어 국가 내부의 군사주의도 크게 후퇴하였고 자체의 자본주의 발전을 이룩한 한국 사회에서 전쟁은 저 먼 과거의 일이거나 우리 주변에는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의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느끼는 냉전 이데올로기는 남한 내부의 지배를 위해서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래서 리영희는 이제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불평등한 한미 관계, 남한 내부의 냉전 이데올로기, 북한의 위협에 대한 과대 포장을 일삼는 남한 내부의 전쟁 지속론에 맞서서 한미 관계의 정상화, 냉전이데올로기의 극복,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필요성 등을 역설하는 일련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집약하면 민주화의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냉전 질서를 유지 존속시킴으로써 지배 체제를 유지하려는 극우 반공주의 세력에 맞서서 새로운 정치와 사회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이 냉전 논리의 뿌리, 즉 미국 혈맹론과 미국 의존 불가피론, 북한 군사 위협론, 북한 핵 위협론 등에 대한 비판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서 전쟁 위협을 과장하고, 전쟁 지속을 강조하는 논리와 체제는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남한 기득권 세력의 경제적 이해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한 사회의 진정한 민주화, 즉 남한 사회가 진정으로 전쟁의 흔적을 지우고 폭력의 논리 대신에 법의 논리가 작동하는 문명국가로 변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냉전도 사실상의 전쟁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냉전 체제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 아래 다수의 정치적 반대자를 '빨갱이'로 덧칠하여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시킬 수 있는 체제다. 냉전 체제는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조차 국가의 적으로 모는 자본 독재 체제다.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작동하더라도, 매카시즘이라는 유령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반공과 국가 안보의 폭력과 고문, 국정원·기무사·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의 권력화, 이들 정보기관이 지목하는 내부의 적에 대한 일상적인 사찰과 감시가 지속되는 체제다. 그래서 정치적 민주화가 달성된 1987년 이후에도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양산되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여전히 제약을 받았다. 남북한의 경계를 넘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체포되었다. 노골적인 고문과 폭력은 사라졌으나 '빨갱이 사냥'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제는 국정원, 기무사 등 사찰 기관 대신 여론을 독점하고 있는 언론이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군사 정권하에서 투옥되었던 사람들은 민주화된 이후에도 투옥되었다. 민주화는 반공 이데올로기, 즉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서 정지되었다.
1990년대 이후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문제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등장한 북한의 핵개발 관련 의제는 한반도에서 여전히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다. 또, 2006년 용산의 미군 기지 평택 이전을 둘러싸고 한국인들 내부에서 벌어진 사실상의 전쟁 상태는 외적인 전쟁 상태가 내부에서 진행된 것일 따름이었다. 각종 시민단체 집회에 나타나서 '힘'을 행사해 판을 깨는 '열혈 노인'들의 행태나, 신문의 하단을 장식하는 우익단체 광고에서 나타나는 '험악하고 전투적인 언사'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 총만 들지 않았지 사실상 적을 없애야 내가 산다는 논리, 여차하면 동족을 살해할 수 있는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다.
시장과 전쟁
열전이든 냉전이든 전쟁은 탐욕이 활개를 치는 공간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시장 확보와 원료 약탈의 탐욕, 절대 권력을 누리려는 군주나 총통의 권력욕, 자신과 종교와 핏줄이 다른 인간에 대한 적대와 증오가 여과 없이 표출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약탈이고 성폭력이고 안면 몰수의 부도덕과 무도덕 그 자체이며, 무법과 불법과 탈법이며, 약삭빠른 인간, 무지하고 난폭한 인간이 제 세상 만난 듯이 설치고 양심과 지조와 소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 완전히 설 자리를 상실하게 되는 거대한 약육강식과 이전투구의 난장판이다. 그래서 지난 1989년 이전의 냉전의 역사 역시 국제 무역, 해외 투자, 금융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적 탐욕이 여과 없이 표출되었던 또 다른 전쟁터이기도 했다. 또 공산 독재의 붕괴 이후에 다가온 자본의 독재, 군사 독재 대신 등장한 '시장의 독재'도 냉전 이후의 새로운 전쟁 체제의 시작을 의미했다.
확실히 시장과 전쟁은 형제지간이다. 전시에 민간인 희생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언제나 '군사적 필요'의 급박성이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일본에 핵을 터트리는 것이 '군사적 필요'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밝혔으며, 이라크를 침략한 부시도 자신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 미국은 이라크 석유를 놓치면 21세기의 패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있었다. 중국 역시 아프리카 등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석유 자원을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 한다. 군사적 필요의 급박성은 시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 기업의 논리와 동일하다. 지구적인 무한 경쟁은 국가라는 보호막 속에 안주하던 기업을 완전경쟁에 노출시켰으며, 최소한의 양심과 공정거래의 규범을 벗어던지고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논리를 정착시켰다. 따라서 전쟁터와 마찬가지로 경쟁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가 작동하는 신자유주의하의 무한 경쟁 시장에서도 법과 규범은 사치가 된다.
지구화, 신자유주의하에서 강화된 시장과 경쟁의 논리, 소련 사회주의의 붕괴, 더 이상 적이 없어진 자본주의의 오만, 민주화된 이후 탈냉전의 정치적 해빙에 두려움을 느낀 구냉전 세력의 공격적인 대응 등이 199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여과 없이 나타났다. 지구적 탈냉전과 한국 냉전 체제의 불일치, 지구화된 자본주의 질서의 압박 속에서 전쟁은 다른 형태로 지속되었으며, 대중의 삶은 경제 전쟁 속에서 더욱 피폐해졌다.
반공, 전쟁, 국가주의의 우상
한국전쟁 후 60년 동안 한국 사회는 한국전쟁을 자신의 방식대로 되새김질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져 왔다. 한국전쟁은 약소국의 서러움, 강대국이 짜놓은 장기판의 졸이 된 민족의 불행한 처지, 반공/친공 이데올로기의 허망함, 학살과 폭력의 야만성에 대한 절절한 반성과 남북 화해와 평화에 대한 열망, 외세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는 방식으로 체험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휴전 체제로 끝난 전쟁은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 맹목적인 반공주의, 권력순응주의,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존성, 국가지상주의 등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도 체험되고 해석되었다.
물론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사망하였다. 특히 일제 말, 즉 제2차 세계 대전의 궁핍과 한국전쟁의 고통을 철이 든 다음 겪은 80대 이상의 사람들의 수는 더욱 적어졌다. 이들은 가장 비참하고 힘들었던 두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그 누구보다 공포와 충격, 고통과 배고픔, 절망과 소외, 차별과 억압, 굴욕과 분노, 무기력감을 겪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어떤 처지에서 어떻게 겪었는가, 그리고 전쟁 후에 어떤 위치에 서게 되었는가는 사람마다 천지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 전쟁 체험을 독점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한국 사회 주류의 체험과 해석은 평화의 열망보다는 "원수를 쳐부수고 압록강에 태극기를 꽂자"는 식의 북한과의 전쟁불사론에 가까운 것이었다. 북한을 침략의 책임자, 전쟁범죄자, 악의 원천으로 보고 오로지 북한만 없어지면 선에 도달한다는 사고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을 미워한 나머지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미국인들보다 더 미국의 국익에 신경을 쓰는 월남한 '반공' 투사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 한국 거대 신문과 지식인들이 바로 이러한 시각의 소유자들이다.
리영희가 평생 싸워 왔고, 또 그로 인해 피해를 당해 온 것이 바로 이 반공과 반북, 그리고 국가주의라는 우상이지만, 이 우상은 60년 동안 세를 유지해 왔고 아직도 건재해 있다.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인 대만과 중국 간의 화해도 급진전되고 있으며, 급기야 미국이라는 우산 속에서 전후 60년 체제를 유지해 온 일본조차도 오키나와 미군 기지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주권을 내세우고 '국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한반도에서 '사실상의 전쟁'은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으며, 그만큼 비정상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이 너무도 오래 정상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압도해 왔다.
제국의 전쟁, 그리고 평화
오늘날 미국이 개입한 이후 최대의 서방군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급기야는 나토(NATO)도 철수를 서두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국제사회'와의 공조 운운하면서 한국인 보호를 위해 파병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외교부 수장의 모습을 우리는 바라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어떤 나라인가? 한국과 마찬가지로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20세기 내내 제국주의 강대국에 시달린 나라이고, 영국·소련·미국 등 강대국의 이해 다툼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전쟁 상태에 있는 나라이자 심각한 내적 균열과 정치적 부패가 만연한 나라다. 외신은 2009년 5월 4일 아프가니스탄 그라나이(Granai)의 이슬람 성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140여 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사실을 보도했다. 이곳에서 살아남은 일곱 살 노리아(Noria)는 두 명의 언니와 함께 고아가 되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은 60여 년 전 한국의 노근리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은 부패한 카르자이 정부가 국제적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이며, 이제 다시 전 국토의 상당 부분을 점령한 탈레반은 UN 소속 민간인 지원단에게까지 공격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에게는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온 UN 소속 사람들, '개념 없는' 한국 선교자들은 모두 문명의 이름으로 자기 땅을 침략하려는 외세와 그 하수인들에 불과하다. 아프가니스탄 재건에 참여하는 한국 기업도 세 번이나 공격을 당했다고 한다. 오바마의 미국도 부시가 만든 용어인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충실한 우방 한국은 여전히 '테러와의 전쟁'을 사용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의 들러리를 자처하고 있다.
리영희는 이미 1980년대에 이스라엘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 문제,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분단 한국의 처지에서 분석한 매우 선각자적인 평론이었다. 냉전의 우상 속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의 외교관들이나 국제정치학자들에게는 팔레스타인 문제나 아프가니스탄 문제는 오로지 '미국의 관점'에서만 보일 것이다. 여전히 한국 언론의 '국제'면은 미국발 보도의 번역판이다. 응당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탐욕과 이해관계 때문이거나 무지 때문이다. 임진왜란 후 일본에 끌려가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잘 보고 와서도 일본의 기술과 생산력 발전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조선인 선비들이나, 청나라가 지배한다는 점만 중시했지 중국의 새로운 기술과 지식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조선 외교관들이나 지식인들의 사대주의에 기초한 허구적 주류 의식과 무지몽매함은 한국전쟁의 참화와 분단국의 서러움을 겪고서도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 주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터전에서 부모 형제가 죽음을 당한 것을 목격하고 가산이 불에 타 공중으로 사라지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과, 오직 남의 땅에 가서 전쟁을 하다 부상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 병사들을 통해서만 전쟁을 체험한 '제국'의 사람들이 과연 전쟁을 같은 무게와 깊이로 이해할 수 있을까? 제국주의는 언제나 자신이 대량의 살상 무기를 개발하지만, 주로 남의 나라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데 사용할 뿐이고, 식민지 종속국은 언제나 남의 나라 군대에 의해 자신의 혈육이 살해당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한다는 비극을 안고 있다.
위구르, 티베트의 소수민족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중국의 신군사주의와 '촌스러운' 제국주의는 21세기 우리의 일차적 경계 대상이다. 일본의 탈미 자주독립 노선, 하토야마의 아시아주의도 또 하나의 위협이다. 전쟁의 비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쟁의 역사와 전쟁의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극우 반공주의의 전쟁 위협 조장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냉전 시기 미국의 프로젝트였다. 물론 그 프로젝트의 우산 속에서 지금까지 한국이 얻은 경제적 성취가 놀라운 것도 사실이고 중산층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궁핍에서 벗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리영희가 언제나 강조하였듯이 군사 외교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면 힘없는 백성들의 '생명'은 외세의 무력에 내맡겨지게 된다. 그리고 시장과 자본주의의 미덕을 과도하게 찬양하거나 도그마로 받아들이면 시장의 실패자, 사회 내의 약자는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올 수 없다.
▲ <리영희 프리즘>(고병권 외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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