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빈틈이 없는 분이었다. 공사의 구분도 지나치리만큼 철저하셨다. 자식이나 제자에게도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제자들 취직하는데 부탁 한번 하는 법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선생님이 내가 대학에 자리를 잡을 때 추천서를 써주셨다. 지금은 그만둔 당시 한일신학대학교 교무처장에게 공식적으로, 그리고 총장에게 사신으로 추천서를 보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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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학에 지원하는 걸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서류를 제출한 지 한참 지난 후 갑자기 학교에서 리영희 선생님 추천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선생님은 그 대학 총장을 모른다며 써줄 수 없다고 하셨다. 미리 상의 드리지 않은 괘씸죄였다. 사실은 민중 신학자인 김용복 총장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며칠 고생을 시키더니 미국을 떠나시는 날 아침 전화를 해서 추천서를 써놓았다며 가져가라고 하셨다.
교수초빙 담당 부서 책임자인 교무처장에게 보내는 공식추천서와 더불어 특별히 총장에게 나의 채용을 부탁하는 사신까지 써놓으셨다. 이런 거 공개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총장은 결정해놓고 선생님 추천서를 받아보고 싶어서 사실상 비공식적인 절차를 뒤늦게 요구한 것이니 무방할 것이다. 그 대학교수가 돼서는 김용복 총장과 막역하게 지냈다.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추천서를 복사해서 내게 주셨다. 지금 읽어보니 새삼 선생님 생각에 눈물이 난다.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추천서와 편지의 서체와 내용에는 선생님의 성품이 녹아있다.
추천서의 내용은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의 지침서와도 같았다. "아직 높은 수준의 학문, 전공적 영역에는 당연히 미달일 수 있지만, 성실히 노력하는 형인 까닭에 교수직이 요구하는 적절한 소장학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성실히 노력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선생님은 또 "그는 서적을 통한 이론적 추구에 못지않게, 그 이론과학적 정신을 실천적 영역에서 합일시키려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지식인입니다. 지난 군사독재 언론탄압 시기에 그는 민주사회의 언론자유를 위해서 학문적 이론을 실천적 정신으로 구현하고자 애썼습니다." 라고 하셨다. 나는 이 지침에 따라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지난 10월 17일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나는 인생에 아무런 회한도 없다. 다만 이렇게 고통스럽게 가는 게 너무 힘들다." 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선생님...선생님...나의 선생님. 이제 편히 쉬십시오.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지침대로,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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