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체제 내에서 중견국가의 개념과 그 행태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다. 예컨대, 전쟁론으로 유명한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는 강대국의 안보와 유럽의 안정을 위한 중견국가의 유용성을 논했다. 특히 그는 전략적이고 지리적 특징을 강조하면서 중견국가는 전략적으로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갖고 있으며, 지리적으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있는 특징을 띤다고 설파했다. 중견국가는 일종의 완충국가로서 강대국 간의 경쟁과 긴장을 완화시킬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밖에도 중견국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오다가, 오늘날에는 중견국가 정의와 관련해 국가의 능력보다는 행태와 규범적 측면이 보다 강조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 경향에 의하면, 중견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영토 규모, 인구, 지정학적 위치 이외에 중간 정도의 경제력과 군사능력을 갖추는데 그치지 않고, 다자외교와 국제기구에의 참여가 강조된다. 나아가 중견국가는 평화선호에 더해 실제 평화유지와 평화집행에 있어 매우 적극적이다. 선량한 국제시민이 되고 보편적 이익과 국제적 공공재 창출에 기여하는 것도 중견국가의 주요 행태적 유형이다.
따라서 중견국가는 현실주의 전통에 입각한 '능력'을 기반으로 삼아 자유주의 전통에 따른 국가의 기능과 행태, 규범을 중시하는 국가다. 규범적 측면에서 중견국가들은 다른 국가들보다 신뢰할만한 행태, 국제적 협력 강조, 국제적 갈등의 평화적 해결, 다자적 제도화 선호 경향을 보인다. 즉, 중견국가들은 국제적 시민의식, 다자적 행동주의, 연합, 제도 구축과 중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상의 간략한 이론적 검토에 입각해 중견국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중견국가는 지역적‧국제적 분쟁 해결을 위해 협력적 노선과 평화적 방법을 선호하며, 이를 위해 관련 쟁점 영역에서의 제도화 구축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중견국가는 비상위정치 영역에서 다른 중견국가들과의 유대 강화를 통해 자신의 입장과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기 위한 외교적 행태를 보인다.
어느 국가가 중견국가에 속하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이론적 관점이 무엇인가에 따라 범주화가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이며 동태적인 방법론에 입각해 중견국가를 분류해내야 한다는 인식 아래, 일단 중견국가들은 세계체제 분석에서 원용되어온 '반주변부'(semi-periphery)에 속한다고 본다. 그런 포괄적 관점 아래 구체적인 범주화는 특정한 시기에 따라 능력과 행태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전통적 중견국가로는 캐나다와 호주가 대표격이고 유럽에서는 스웨덴, 네델란드, 벨기에가 대표적인 중견국가에 속한다.
한국은 이미 상당 정도 중견국가로서 특징과 면모를 보이고 있다. 거의 세계 10위 안팎에 이르는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류' 바람에서 확인되듯이 연성국력에 있어서도 우위를 확대해가고 있다.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붉은 악마'와 같은 역동적이면서 질서정연한 면모를 통해 각인된 이미지가 있다. 국제사회에서 '공공재'의 창출을 위해 다각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개도국의 경제 사회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ODA(공적개발원조) 규모를 대폭 확충해가고 있으며, 분쟁 지역의 재건 및 평화유지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하였고,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등 국제기구에의 참여나 국제협력에 능동적으로 임해왔다. 동(북)아시아에서 평화와 공동번영을 지향하는 공동체 구축을 제안하기도 했다. 2008년 금융위기 국면에서 '한중일 3국정상회의' 개최에 적극적이었고, 그 회의의 제도화에 이바지한 나머지 사무국을 유치하기도 했다.
한국의 이런 면모 때문에 '글로벌'이라는 용어 사용이 가능하고 필요하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개방국가이며, 통상국가다. 세계화의 흐름에 역동적으로 대응해왔고, '지구성'(globality)에 부합하고자 노력해온 국가다. 편협한 경제적 국익 추구로 일관하지 않았으며, 국제적 보편 기준에 힘을 보태기 위해 노력해온 국가다. 국제기구는 말할 것 없고, 동아시아 역내 다종다기한 지역 기구들에 적극적으로 임해왔다. 분단국가로서 평화촉진자 역할을 강조해왔으며, 소통과 가교 역할을 담당하고자 했다.
글로벌 중견국가로서 한국은 세계화로 인해 야기된 국제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유념해 그 해결에 적극적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국제적 협력을 통해 공생적 국제질서 정립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지정학적 위치를 국가전략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대외정책에 긍정적으로 반영하고자 한다.
▲ 2011년 11월 부산에서 열렸던 세계개발원조총회 ⓒ연합뉴스 |
한국이 지향해나가야 할 글로벌 중견국가의 새로운 외교안보전략구상은 1) '중용의 안보 정체성', 2) '신중 외교', 3) '균형 안보'라는 3가지 핵심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글로벌 중견국가' 대한민국은 협력을 매개로 한 평화와 공동번영을 지향점으로 삼는다.
먼저, 중용의 안보 정체성은 정체성의 객관적 조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물론 적중의 선택과 사려깊은 판단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견국가의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한국의 대외적 표방인 것이다. 여기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외교 관계에 있어서 특정 국가로 경도되지 않겠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다양한 외교안보 쟁점에 내재되어 있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특수성과 지구적 보편성 간의 편차를 조화롭게 줄여 나가고자 하는 한국의 자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더불어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해 협력의 증진, 평화의 촉진, 소통의 가교, 대화와 외교를 통한 중재 역할을 자임하고자 한다. 중용의 안보 정체성을 통해 그간 특정 국가에 경도되어왔던 한국의 부정적 안보 정체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신중 외교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대외환경의 특성을 감안해 남북관계와 동북아 주변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그리고 지구적 국제관계에서 한국의 사려 깊고 분별 있는 외교적 행태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신중 외교는 무엇보다도 강자에게 비굴하지 않을 정도의 자존(자긍심)과 약자에게 오만하지 않을 정도의 선린(포용)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신중 외교는 수동적이고 정책결정 과정의 시간 지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중 외교는 국익 증진의 경합장인 외교 무대에서 강자에게는 관용과 유연성을 주문할 수 있어야 하고 약자에게는 지원과 배려를 발휘할 수 있는 외교적 역량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외교적 역량은 중견국가의 역할을 담당할 한국 외교의 핵심적 구비 요건이다.
균형 안보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지역적‧국제적 안보환경에서 한국의 국가 생존을 담보하고 한국의 평화와 번영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실질적인 경성권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개념이다. 즉, 균형 안보는 전통적 안보와 비전통적 안보 간의 균형, 한반도와 동북아의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지정학적 안보와 지구적 보편성에서 연유하는 기능적 안보 간의 균형, 평화와 안보간의 적절한 조화를 유지하면서 공동 안보(common security)론에 입각하여 동맹과 다자안보협력 간의 균형 모색, 지역적‧국제적 정세를 감안한 전통적 안보와 비전통적 안보 간의 균형 등을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인 쓰임새를 갖는 개념이다.
새로운 외교안보전략구상은 이러한 3가지 핵심 구성요소를 근간으로 한반도와 동북아를 평화와 번영의 지정학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포괄적이고 입체적인 구상이다. 이 구상은 한국이 글로벌 중견국가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담당해 나가는 데 필요한 틀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새 외교안보전략구상의 핵심 구성요소인 중용의 안보 정체성, 신중 외교, 그리고 균형 안보를 바탕으로 지역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외교적 노력(다자주의, 연합, 제도 구축, 중재 등)을 발휘하여 궁극적으로 외교안보정책의 자율적 공간 확보 및 이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를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을 거쳐 통일의 비전을 앞당기고 우리에게 전통적이었던 대륙지향성을 회복해나가면서 동(북)아 협력 범위와 가능성을 한층 높여나가야 한다. 게다가 그런 노력이 국제사회의 여러 쟁점들을 협력을 통해 해소해나가고, 그런 과정에서 제도 구축에 이바지하며, 인류 전체의 평화와 공생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 차기 정부의 외교·안보 전략에 대한 이수훈 경남대 교수의 제언 7편 중 여섯 번째 글이다. 이 교수는 12월 대선에 앞서 진보·개혁 진영의 대외 전략이 새롭게 마련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새누리당의 새 정강정책에 대한 비판(1편)을 시작으로 남북관계(2편), 한미관계(3편), 한중관계(4편), 동북아 협력 문제(5편), 중견국가론(6편), 국제협력 외교(7편)를 논한다. 필자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노무현 정부 당시 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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