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새벽, 류현진의 3승이 또다시 좌절됐다. 류현진은 5회까지 메이저리그 데뷔 이후, 최고의 피칭(투구)을 선보였지만, 6회 말 메츠의 선두타자 루벤 테하다를 볼 넷으로 출루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류현진은 테하다를 상대로 두 개의 스트라이크를 잡으며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지만, 에르난데스 포수가 지나치게 높은 유인구를 고집한 탓에 볼넷을 내주고 말았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볼넷을 내줬기 때문인지 이후 류현진은 심리적으로 급격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타자인 댄 머피에게 밋밋한 슬라이더를 던지다 우전안타를 내줬고, 데이비드 라이트의 타석 때는 폭투까지 범해 무사 주자 1, 3루의 위기를 자초했다. 이후 테하다가 데이비드 라이트의 희생플라이로 홈을 밟으면서 류현진의 승리요건은 날아가 버렸다. 그 순간 중계방송과 SNS에는 에르난데스 포수의 리드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이 쏟아져 나왔다.
뿐만 아니라, 류현진 본인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론들은 "메이저리그 루키인 류현진의 입장에선 베테랑 포수의 리드에 무작정 고개를 가로저을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류현진의 3승 실패의 원인을 포수와의 호흡 탓으로 돌리는 분석 기사들을 하나, 둘 내놓고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 언론들의 분석을 보면 에르난데스 포수의 잘못으로 류현진의 심리가 흔들린 것이 오늘 3승 실패의 주된 요인이다.
냉정함과 컨트롤의 대가, 그렉 매덕스
▲ 그렉 매덕스는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 역사에서 4년 연속 사이영 상을 수상한 최초의 선수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75승 29패에 평균자책점 1.98을 기록했다. 한 회당 출루를 허용한 주자가 채 한 명이 안 된다. ⓒ구글 |
'컨트롤의 마법사', '제구력의 대가'라고 불리는 그렉 매덕스(Greg Maddux)의 말이다. 매덕스의 말처럼 야구에서는 투수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무수히 많다. 야수의 실책, 불규칙 바운드, 오늘 류현진처럼 포수와의 호흡이 맞지 않는 일 등등.
흔히들 매덕스를 가리켜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자기 공을 던지는 투수'라고 말한다. 매덕스에 대한 이런 평가는 그가 보여준 칼 같은 제구력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투수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매덕스는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전설의 욕쟁이 할배, 매덕스
정답은 "분노한 얼굴로 'F'자로 시작되는 욕설을 쏟아낸다"이다.
멘탈붕괴인가? 하지만, 이건 진실이다. 매덕스는 컨트롤뿐 아니라 욕설에 있어서도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매덕스는 자신이 던진 공이 볼로 판정받거나, 안타가 되면 그때마다 마운드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F'자 욕설을 쏟아냈던 투수다. 뿐만 아니라, 그는 타구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멀리 뻗어 나가거나,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도 욕설을 내뱉었다.
수비 실책이 나온다면? 실책을 범한 동료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매덕스의 육두문자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1995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샌프란시스코의 개막전 경기에서 당시 브레이브스의 신인이었던 치퍼 존스는 베리 본즈의 내야 플레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매덕스와 충돌해 넘어지는 실책을 범했다. 치퍼 존스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넘어지는 그 순간, 매덕스는 성난 얼굴로 자신을 향해 "이런 머저리 같은 자식아! 저리 가서 가만히 찌그러져 있어!"라고 소리치며 뜨거운 욕설을 퍼부어댔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 류현진처럼 포수와 호흡이 맞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없다. 왜냐하면, 매덕스는 포수의 사인대로 공을 던지지 않는 투수이기 때문이다. 1994년에 매덕스의 공을 받았던 하비 로페스의 말에 따르면, 매덕스에게 직구 사인을 냈을 때, 체인지업이 날아오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심지어 스프링캠프에서는 매덕스가 던진 공에 맞아 손가락 약지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매덕스가 포수의 사인과 다른 공을 던지는 이유는 타자와의 빠른 승부를 선호하는 그로서는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흔드는 그 시간조차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욕설은 나의 힘
그렇다면, 매덕스가 경기 중에 끊임없이 욕설을 뱉어냈던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야구가 기술과 전술로만 구성된 게임이 아니라, 감정을 가진 인간이 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매덕스의 심리상담사였던 하비 도프만 박사에 따르면, 매덕스는 "경기 내내 두들겨 맞을까 봐 겁이 나고, 두려웠다. 그래서 골치가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가 완봉승을 거둔 경기 직후에도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즉, 매덕스에게는 승리를 갈망하는 감정 못지않게 두려움이 컸다. 두려웠기 때문에 그는 아무리 잘 던지다가도 실수가 나오면 그것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분노를 즉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전의 상황을 털어내고 다음 타자와의 새로운 승부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는 선수들의 면전에 뜨거운 육두문자를 쏟아내 '헤어드라이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이 "할 말이 있을 때 선수들에게 즉각적으로 쏟아내야만 다음 경기를 준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우리는 투수가 야수의 실책으로 인한 마음속의 분노와 찜찜함을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둔 채 다음 타자와의 승부를 준비할 때, 한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매덕스의 욕설은 이전 상황에 대한 분노와 찜찜함을 모두 털어내고 다음 타자와의 승부를 준비하는 영리한 과정이며, 그의 냉정함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매덕스의 욕설은 경기 중 보이지 않는 이점(利點, advantage)으로 작용한다. 매덕스는 1회 첫 타자와의 승부 때 주심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공을 홈플레이트 좌우, 위아래로 던지며 주심의 스트라이크존을 확인한다. 이후, 그는 스트라이크존을 살짝살짝 벗어나는 공을 뿌려대는데, 주심은 이미 매덕스의 제구력을 신뢰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웬만한 공에는 손이 올라간다. 주심의 손이 올라가지 않으면, 매덕스는 욕설을 쏟아내며 불만을 표시한다. 이후 주심은 애매한 공이 들어오면 일단 먼저 손을 올리고 본다. 이는 지난 2002년 히딩크 감독이 한국 선수들에게 심판의 판정에 반항하고, 자꾸 자기 볼이라고 우겨야 심판으로부터 이점을 얻을 수 있다며 반항심을 키우라고 주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타자들에게 매덕스의 욕설은 자신들의 신경을 자극하고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일종의 '트래쉬 토크'가 된다. 실제로 매덕스는 타자와의 심리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타자를 향해 'F'자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수많은 타자들이 이런 매덕스의 욕설에 당황하고, 흥분해서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완벽하게 제압당했다.
▲ 그렉 매덕스의 투구 모습 ⓒ뉴시스 |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보면, 매덕스가 "당대 최고의 투수이자, 당대 최고의 투쟁심을 가진 선수인 동시에 역사상 가장 영리한 선수"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욱하는 성격과 욕설도 한 몫을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류현진이 매덕스처럼 메이저리그 마운드 위에서 'F'자 욕설을 서슴없이 내뱉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그런 류현진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참는 것이 미덕이고,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예절"이라고 배워온 동방예의지국 출신의 류현진이 매덕스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참고 또 참는' 캔디의 끝은 우울증
최근 들어 분노와 울화에 대한 담론들이 활발히 논의되면서 일부에서는 대한민국 사회를 '분노 과잉 사회'라고 지칭하며, "불평하지 말고, 다시 앞만 보고 열심히 뛰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높다. 일례로 지금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을 향해 기성세대가 내놓고 있는 해법은 "세상 욕하지 말고, 힘들어도 참고, 네 할 일이나 열심히 해라"이다. 요즘 나오고 있는 독한 자기계발서식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의 초라한 현실을 사회 탓으로 돌리는 것은 인생을 방치하는 것일 뿐이니, 불평하고 세상 고민할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독기를 품고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봐라"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덕스의 성공 방식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내가 처한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에는 매덕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 상황에 대해서 불평하고, 욕하고, 그래서 감정의 찌꺼기를 모두 배출해 낸 뒤에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실패했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그 감정은 가슴에 묻어두고 다음 단계에 집중하라"고 말하는 것은 가슴속에 분노와 찜찜함을 담아두고 다음 타자와 승부를 펼치다, 흠뻑 난타를 당하고 마운드에서 강판되는 투수가 되라는 말과 같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괴로워도 슬퍼도 안 울고, 참고 또 참는' 캔디의 끝은 우울증과 울화병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으며 마음속의 감정의 찌꺼기들을 모두 배출한 뒤, 그 분노를 자신의 이점으로 삼는 매덕스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100배는 더 낫다.
스포츠평론가 이종훈은… '무한경쟁과 승리의 스포츠'보다는 '힐링의 스포츠', '내가 응원하는 스포츠'보다는 '나를 응원해주는 스포츠'에 관심이 더 많은 자칭 비주류 스포츠평론가이다. 현재 MBC 라디오 <왕상한의 세계는 우리는>과 팟캐스트 <공짜 가라사대, 오빠가 쏜다!> 등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 위의 글은 <공짜 가라사대, 오빠가 쏜다!>의 코너인 [멘붕 스포츠]를 기사로 옮긴 것입니다. <공짜 가라사대>는 여행, 레저,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상품을 공짜로 나눠주는 팟캐스트입니다. ☞ 팟캐스트 바로 듣기 http://podbbang.com/ch/5783 ☞ '공짜 가라사대' 온라인 카페 http://cafe.naver.com/freeca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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