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은 위대한 예술가다. 아마 편안한 시기 유럽 어느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베토벤이나 리스트처럼 인기와 명예를 한껏 누리면서 한평생 행복하게 예술혼을 불태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세계의 근저를 아우르는 민족이라는 화두는 아이러니하게 가장 순수했던 음악가를 가장 정치적인 인물로 변형시켰다.
▲ 윤이상 ⓒ뉴시스 |
윤이상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 마다 그 이름을 드러냈다. 박정희 정권이 본격적인 반민주 독재체제를 구축하려던 시기에는 <동백림사건>을 통해 오명을 뒤집어썼고, 한국사회의 정치적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990년대에는 그의 귀국을 둘러싸고 음악계도 한국사회도 둘로 갈라졌다. 마치 알제리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사르트르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양분된 평가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육신의 죽음과 함께 그를 둘러싼 논쟁도 한시대를 마감하며 사라졌던 것과 달리, 윤이상을 둘러싼 논란은 그의 죽음을 넘어 현재진행형이다.
15년도 더 전에 죽은 윤이상의 이름은 최근 이른 바 <통영의 딸> 문제로 다시 쟁점이 되고 있다. 1985년 독일에서 체류 중이던 오길남 박사가 "윤이상의 꾐에 빠져" 가족과 함께 평양에 입북했다가 탈출하였는데, 최근 통영 출신인 부인 신숙자씨와 두 딸이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돼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서명 운동이 시작되자, 윤이상 선생이 오박사 가족의 비극을 둘러싼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것이다. 수구 언론은 윤이상 선생의 생전 북한 관련 활동을 연일 보도하며 마치 그를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친북간첩단의 수괴이자 종북주의자로 그려냈다. 1967년 <동백림사건>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어떤 증거나 정황에서도 이번 사건과 윤이상 선생의 직접적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서울대를 나와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학위까지 수여받은 불혹의 나이의 학자가 '누구의 꾐에 빠져' 가족을 데리고 교수자리를 찾아 당시 이미 공산 독재체제로 알려진 북한에 의거 입북했다는 것은 공상 소설 같은 스토리다. 더욱이 현대 의학의 발상지인 독일에 거주하던 사람이 부인의 치료 목적으로 의료 후진국인 북한에 갔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차라리 강제 납북됐다고 하는 편이 더 믿을 만하다.
이 사건과 윤이상 선생 간의 직접적 관련성을 찾지 못한 서명운동 관계자들은 이번에는 송두율 교수가 오 박사에게 재입북을 권유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송 교수의 입북 권유 의혹에 대해서 오 박사는 '송 교수는 원래 무슨 말이든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 편'이라며 '다만 방향 제시 정도는 있었다'고 말끝을 흐렸다. (동아일보 2003년 10월 2일자) 어찌 보면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 같은 오 박사 가족이나 윤이상 선생이나 결국 분단이 낳은 비극의 주인공일 뿐이다.
윤이상 선생의 <친북활동>이라는 것도 그를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로서가 아닌 냉전적 시각에서 평가하여 생기는 오해이다. 북한에서의 그의 언행은 주로 예술적 영감을 찾거나 음악과 관련된 것이었다. 김일성 주석조차도 "내가 윤이상 선생을 아껴야한다고 한 것은 음악계에서 그런 재간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드물기 때문입니다."(리철우, '내가 체험한 윤이상 음악,' 북한 발간 「음악연구」 2000년 28호)라고 하며 그의 음악적 재능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북한에서 칭송된다는 이유로 윤이상 선생을 빨갱이로 본다면, 박지원 선생이나 이준 열사도 모두 빨갱이가 되는 것이며, 음악을 위해 입북한 것이 죄라면 마에스트로 정명훈도 즉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정부의 자의적 허가 여부가 양심에 기인한 예술활동의 합법성을 판단하는 최후 보루가 될 수는 없다. 더욱이 예술인생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던 한국계 독일인에 대하여 분단시대의 냉전적 잣대를 들이대고, 심지어 국가보안법까지 운운하는 천박한 안목이 개탄스럽다. 윤이상 선생은 단지 분단된 조국을 동시에 사랑한 죄를 지었을 뿐이다. 피카소, 채플린, 카잘스, 쇼스타코비치도 그들의 예술혼 때문에 체제와 반목했지만 누구도 그들을 위험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이제 윤이상이란 이름은 한국사회 변화의 조짐을 상징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의 이름과 함께 다가올 변화는 분단 극복이라는 열망을 실현할 <2013년 체제>일 것이다. 이제 윤이상 선생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그의 영혼을 생전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통영 앞바다에 놓아드려야 할 시기이다.
*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주간논평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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