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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소>는 어떻게 탄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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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소>는 어떻게 탄생했나

[강제윤의 '통영은 맛있다'] <20> '이중섭의 르네상스', 통영 시절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곱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 이중섭 <소의 말>

통영에서 그려진 <흰소>, <황소>, <달과 까마귀>

▲ 이중섭이 통영 시절 그린 1953년 작 <황소>

그림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이중섭(1916~1956)의 <소> 그림 한 점쯤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미술 교과서에 <소> 그림이 실려 있고 방송을 통해서도 자주 소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중섭의 대표작 <소> 연작이 통영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중섭은 젊은 시절부터 소에 푹 빠져 지냈다. 종일 소만 바라보며 보낸 날들이 많았다. 어느 해인가는 원산의 송도원 들판에서 끊임없이 소들을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인 받기까지 했을 정도다. 이중섭이 소를 관찰하는 동안 소들은 하나둘씩 이중섭의 몸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중섭의 몸 안에는 드넓은 초지가 생겼고 소떼가 풀을 뜯었다. 이중섭은 스스로 목장이 되어버렸다.

한국전쟁이 나고 피난민이 되어 부산으로, 제주로 떠도는 동안에도 이중섭은 소들을 키웠다. 자신은 굶어도 소들은 풀을 먹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 키우던 소떼를 몰고 이중섭이 통영으로 왔다. 통영에서 이중섭은 깨달았다. 제 안에 기르기엔 소들이 너무 커져 버렸다는 것을. 이중섭은 마침내 기르던 소들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풀려난 소들이 이중섭의 손끝을 타고 화폭으로 쏟아졌다. 이중섭의 화폭 위, 통영의 들판에서 흰소도, 황소도, 포효하는 소도 마구 뛰어놀았다. 통영은 어느새 소떼들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제주 서귀포처럼 통영도 피난 시절 이중섭에게 안식을 준 땅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중섭 일가는 여러 곳을 떠돌며 전전했다. 부산과 서귀포 피난 생활 후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이중섭은 한동안 통영에 머물렀다. 기존의 연보들에서는 이중섭이 6개월 남짓 통영에서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연구와 증언을 통해 이중섭이 1952년 늦봄에 통영에 와서 1954년 봄까지 2년 동안 통영에 머문 것으로 밝혀졌다. 이중섭은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통영에서 활동하던 공예가 유강렬의 도움으로 통영 생활을 시작했다. 통영의 공무원 김순철은 저서 <통영과 이중섭>에서 통영 시절 이중섭과 한방에서 생활했고 전시회도 함께했던 전혁림 화백 등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중섭의 통영 체류 기간과 통영 시절 그린 작품을 밝혀냈다.

이중섭의 대표작 <흰소>와 <황소>, <달과 까마귀>, <부부>, <가족>, <도원>등이 모두 통영 시절 작품이다. 이중섭은 통영의 풍경도 많이 그렸다. 시인은 사랑하면 시를 쓰고 화가는 사랑하면 그리게 되는 것이다. 통영 그림으로 보아 이중섭의 통영 사랑도 깊을 대로 깊었던가 보다. 그래서 통영 소녀를 사랑한 백석은 <통영>이란 시를 세 편이나 썼고 통영을 사랑한 이중섭은 통영을 그리고 또 그렸다. <세병관 풍경>, <통영 앞바다>, <통영 풍경>, <통영 유원지>,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충렬사 풍경> 등이 통영을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다.

가히 통영 시절은 "이중섭의 르네상스"였다. 이중섭은 유강렬뿐만 아니라 통영의 화가 김용주와 초대 통영 시장 김기섭 등의 후원으로 통영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며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래서 통영을 떠날 때는 감사의 표시로 김기섭에게 자신의 대표작 <흰소>를 선물하기도 했다. 특히 통영 출신 화가 김용주는 이중섭의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이중섭에게 물감과 캔버스 등 미술 재료를 공급해주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생을 이어가는 데 필수품인 쌀과 된장, 간장, 김치 등 먹거리를 책임져 주었으니 생명의 은인이다.

원산미술가동맹 위원장 이중섭

▲ 이중섭의 1953년 작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무대인 남망산 아래 풍경. ⓒ강제윤

이중섭은 1916년 4월 10일, 평양 인근 평원군에서 부농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유복자였던 그는 청상과부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고 유년기 대부분을 외가에서 보냈다. 그의 외조부 이진태는 서북 농공은행장, 초대 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한 거물 실업가였다. 이중섭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일곱 살 때 장마당에서 외할머니가 사준 사과를 먹지 않고 집에 가져와 실물 크기로 그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중섭은 민족 교육의 산실이던 오산학교에 다녔고 함석헌 선생에게 배우기도 했다. 뒷날 이중섭 일가는 원산으로 이주했다. 그의 형 또한 원산 최초의 백화점 '백두'의 사장이 됐다. 일본 도쿄로 유학한 이중섭은 그곳에서 '동방의 루오'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났다.

졸업 후 정혼자인 마사코를 두고 원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최승희의 수제자 다야마 하루코, 피아니스트 서덕실 등과 잠깐 연애에 빠지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마사코가 원산으로 건너오자 둘은 결혼했고 마사코는 이남덕이란 이름을 새로 얻었다. 해방되고 소련군이 진주하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중섭은 환영받았지만 그의 형은 친일파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는 원산여자사범학교 교사가 됐으나 사흘 만에 그만두고 고아원 교사로 아이들과 어울렸다. 이때의 경험이 <군동화>를 낳았다. 생계를 위해 양계를 했고 이 경험에서 <투계도>가 나왔다. 그의 그림들은 철저하게 현실 경험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 예술이었다. 그 때문에 이중섭은 소련 비평가들로부터 마티스나 피카소 수준이라는 격찬을 받았고 원산미술가동맹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선전화를 그릴 수 없었던 이중섭은 곧 배척당했다. 한국전쟁 직후까지 원산에 머물던 이중섭은 1·4 후퇴 이후 어머니를 두고 월남했다.

이중섭의 르네상스, 통영 시절

▲ 이중섭이 살았던 도립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 ⓒ이상희 사진가

북의 원산에서 배를 타고 남쪽의 부산으로 피난 내려온 이중섭은 1951년 4월, 다시 해군 경비정을 얻어 타고 제주도 서귀포로 건너갔다. 이중섭은 현치수라는 농부의 배려로 방 한 칸을 얻어 서귀포에 정착하면서 모처럼 안정을 찾고 평화를 누렸다. 7개월 동안 서귀포에 체류하던 이중섭은 12월에 다시 부산으로 나왔다. 1952년,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내 마사코와 아이들은 일본으로 떠나고 이중섭은 부산에서 한동안 부두 노동자 생활을 하다 1952년 늦봄 통영 생활을 시작했다. 통영 생활 중 이중섭이 대표작들을 마구 쏟아낸 것은 통영 친구들의 후원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또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예술혼에 기름을 부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통영시 항남동 241-1번지, 경남 도립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이중섭은 그곳 책임자였던 유강렬의 배려로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에서 전혁림, 김경승, 남관 등과 함께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했고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 등과 통영의 호심다방(=녹음다방)에서 4인전을 열기도 했다. 성림다방에서는 개인전도 했다. 당시는 다방이 화랑 같은 기능도 했던 때다. 4인전에 대한 고 전혁림 화백의 회고다.

"통영 호심다방에서 연 4인전은 이중섭이 통영에 있었고, 그와 친했던 섬유 예술가 유강렬, 장윤성 그리고 제가 공감대를 같이하여 개최된 전시회였습니다."
- <한려투데이> 2009년 12월 18일

▲ 통영 시내 버스 정류장에 새겨진 이중섭 화백의 사진. ⓒ이상희 사진가
이중섭은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서 학생들에게 데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통영 옻칠미술관의 김성수 관장도 이중섭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다. 또 1953년 12월에는 항남동의 성림다방에서 4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현재 도립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가 있던 '21c 카라오케' 건물 앞에는 이중섭이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문화마당에는 이중섭의 그림과 연보판이 세워져 이중섭을 기리고 있다.

이중섭은 항남동 포트극장 근처 '복자네 집'이란 술집에서 청마 유치환을 비롯한 통영의 벗들과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다 한다. '샘이집'이라는 술집에서는 다다미방 바닥에 잉크를 부어 손으로 그림을 그리다 주인 할머니의 타박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 그림은 아마도 낙서 취급을 받으며 지워지고 말았을 것이다. 통영에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렸던 이중섭은 통영을 떠난 후 진주, 서울, 대구 등을 전전하던 중 1956년 9월 6일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간장염으로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이중섭이 통영에 살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미술사는 한결 초라해졌을 것이다. <소> 연작을 비롯한 그의 대표작들이 그려지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 미술계는 통영에 큰 빚을 졌다. 통영 시절의 이중섭과 교유한 김춘수는 이중섭에 대한 시를 여러 편 남긴 바 있다. 그 시를 읽으면 만날 수 없는 아내 마사코를 절절히 그리워하던 이중섭의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진다. 충무는 통영의 한때 지명이다.

충무시(忠武市) 동호동(東湖洞)
눈이 내린다.
옛날에 옛날에 하고 아내는 마냥
입술이 젖는다.
키 작은 아내의 넋은
키 작은 사철나무 어깨 위에 내린다.
밤에도 운다.
한려수도(閑麗水道) 남망산(南望山),
소리 내어 아침마다 아내는 가고
충무시(忠武市) 동호동(東湖洞)
눈이 내린다.

- 김춘수 <이중섭5>


□ <섬학교> 4월 답사 안내

강제윤 시인이 이끄는 인문학습원 <섬학교>가 4월 답사를 떠납니다.
4월 답사지는 <자산어보>와 홍어의 고장 흑산도입니다.
관심 있는 분은 여기로 ☞"흑산도, 그 깊고 푸른 물빛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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