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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종전선언, 핵폐기-평화협정 동시 진행의 '입구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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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종전선언, 핵폐기-평화협정 동시 진행의 '입구전략'"

[한반도평화아카데미]<2강>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인제대학교와 한반도평화포럼, 프레시안이 공동 주최하는 제1기 한반도평화아카데미 제2강이 지난 18일 서울 중구 인제대학교대학원에서 열렸다.

이날 강연은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이 '10.4 남북정상선언과 한반도 종전선언'을 주제로 진행했다. 프레시안은 지난 1강에 이어, 백 전 실장의 이날 강연 내용을 정리해 지상 중계한다.

25일 예정된 3강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9.19 공동성명과 한반도 평화체제'를 주제로 강의하고, 11월 1일 4강은 문정인 연세대 교수가 '이명박 정부와 한반도 평화체제의 쟁점'을 이야기한다. 끝으로 11월 8일에는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한반도평화포럼 대표)이 '남북 화해·협력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주제로 강의할 예정이다.

한반도평화아카데미에 관한 문의는 한반도평화포럼(www.koreapeace.co.kr 02-707-0615)으로 하면 된다. <편집자>


10.4 남북정상선언의 의의

2007년 10월 2~4일 2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나온 10.4 정상선언은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위한 남북 정상의 의지를 재확인했다. 군사적 적대관계의 종식과 한반도 평화 보장 문제, 서해 우발적 충돌 방지, 군사적 신뢰 구축, 한반도 핵문제 해결, 종전선언 추진 등에 협력하기로 합의한 내용이 선언의 3, 4항에 들어가 있다. 이는 2000년 1차 정상회담 때 6.15 공동선언에는 없었던 것들이다.

또한 10.4 정상선언은 남북관계에서 평화와 번영을 선순환적으로 병행 추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평화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남북 간 다방면의 경제협력을 통해 '남북경제공동체' 건설을 앞당기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남북연합을 지향하는 남북 간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불행히도 현재에 와서 이 선언은 사문화됐다고 할 정도로 정부의 관심 밖에 있다. 그러나 워낙 역사적 선언이고, 앞으로도 남북관계 발전에 있어 필요하기 때문에 다시 짚어볼 가치가 있다.

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 배경

▲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프레시안(최형락)
2006년 12월 1일 내가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으로 부임했을 무렵 한반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해 7월 미사일 발사, 10월 1차 핵실험으로 북한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1718호 결의 하에 광범위한 대북 제재를 받고 있었다.

남북관계에선 핵실험 뒤에 정부의 대북 쌀, 비료지원이 중단됐음은 물론이고 민간 차원의 대북 사업들도 하향세로 접어들었다. 국내 보수파들의 대북 정책에 대한 비판도 계속됐다.

노무현 정부는 6자회담 재개와 남북관계 개선을 선순환적으로 병행한다는 입장이었는데 나 역시 그 정책에 동의했다. 그러나 당시로선 2005년 9월부터 진행되고 있던 방코델타아시아(BDA)를 둘러싼 대북 금융제재 건이 풀리지 않는 이상 그 선순환을 만들기란 불가능했다. 북한은 이 문제 해결 없이는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남북 간 비공식 접촉 때도 BDA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전반적인 검토를 끝낸 뒤 대통령께 첫 업무보고를 드렸다. "BDA 관련 대북 금융제재 문제가 잘 풀려서 6자회담 재개와 남북관계 개선이 잘 진행된다면 어느 시기에 가서는 남북 정상회담도 가능하다. 그렇게 되도록 정책적·외교적 측면에서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대통령 반응은 "알았다"가 전부였다. 외교안보실은 그 말을 '객관적으로 상황이 이만큼 어려운데,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뜻으로 해석했다. 나중에 대통령이 퇴임 뒤 기자들에게 당시 상황에 대해 "북한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 다 모여도 남북관계 문제는 잘 안 풀리더라"고 말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과 그것이 성사되려면 정책적인 노력과 함께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 환경을 '신뢰'라고 봤다. 정상회담을 위해서는 단순한 정책적 노력 이상의 남북 지도자가 신뢰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돼 있어야 하는데 당시엔 그런 여건이 안 돼 있던 게 사실이다.

어쨌든 BDA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 정부는 대니얼 글레이저 미 재무부 테러금융·금융범죄 담당 부차관보에 여러 차례 문의를 했는데, 재무부로서도 의회 등의 반발로 인해 제재를 풀기 쉽지 않다는 반응을 들어야 했다. 글레이저도 고민이 많았을 거라고 본다.

이 문제는 결국 2007년 6월 20일, BDA에 동결돼 있던 북한 자금이 러시아 은행의 북한 계좌로 입금되면서 21개월 만에 풀리게 된다. 그 전에 이미 북미 양자회담에서 2.13 합의를 통해, 미국이 한 달 내로 금융제재를 해제시켜주고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 감시 복귀 등 핵 폐기를 위한 초기조치를 실시하기로 했었지만, 출발선인 제재 해제가 (북한 자금) 송금처와 방법을 두고 난항을 겪으며 늦어졌다.

2.13 합의를 계기로 남북도 20차 남북 장관급회담을 할 수 있었다. 미국이 한 달 내로 금융제재 해제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만 다행히 남북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5월 말 21차 남북 장관급회담이 열릴 무렵, BDA 문제도 출구가 보이는 것으로 예상되자 우리는 대통령께 좀 더 구체화된 남북 정상회담 구상을 보고 드렸다. 금융제재가 6월 초 내로 풀릴 것으로 예상하고 일을 진전시키면, 8월 15일을 기점으로 남북정상회담을 할 수 있을 거라고도 봤다.

이때는 대통령도 승인을 했다. 그래서 청와대를 중심으로 정상회담 추진팀을 구성했다. 북한은 회담 추진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을 꺼려했고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부담이 됐기 때문에 8월 초까지는 비공개로 진행됐다. 당시 많은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대북 접촉을 했던 것은 정상회담 추진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대북 접촉은 철저히 정부 차원에서, 물밑에서 이뤄졌다.

10.4 정상선언의 의제에 대한 합의

당시 남북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슈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였다.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서해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그곳에 남북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해 관리하자는 얘기가 오갔지만 NLL이 문제였다. 남북 공동어로구역을 NLL 기준으로 설정하면 NLL을 인정하는 꼴이라는 얘기였다. 북측은 북측대로 자기들이 설정한 '평시 해상사격구역'을 해상 군사분계선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이 문제로 장성급회담은 7월 말까지 합의를 보지 못한다.

그때 북측 대표단의 김영철 단장이 회담 후 비공식적으로 "남쪽 장성급회담 대표단이 결정권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국방위원회 지침을 받기 때문에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다"며 "남쪽에서 실질적 결정권을 가진 청와대 안보실장이나 국정원장이 회담에 나오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방부는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남측 대표를 무시하는 태도이며, 장성급회담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가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반면 청와대 중심으로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팀에서는 '한 번 상의를 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김영철 단장의 제의를 받으면서 장성급회담을 무력화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는 '안보실장이든 국정원장이든 장관급 대표를 보낼테니 북측에선 국방위 부위원장급을 보내라'는 역제의를 하게 됐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가 '국방위 부위원장급'을 언급한 역제의를 했기 때문에 (서해상 충돌 방지) 문제가 국방위에 보고되지 않을 수 없었던 거고, 그래서 국방위에서도 논의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길로 김만복 국정원장과 북측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간 비밀 접촉이 이루어지게 됐고 거기서부터 2차 정상회담의 물꼬가 트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상회담 추진팀은 핵문제 해결, 2.13 합의의 진전, 남북 경제 협력, 서해상 우발적 충돌 방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 등의 안건을 이미 개조 형태로 만들어 뒀기 때문에 의제 설정엔 어려움이 없었다.

북한이 제시한 안건은 '우리민족끼리' 문제, 통일 문제 등 정치적인 사안 위주였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통일 얘기는 너무 이르다면서 그 문제를 안건에 포함시킬 경우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처음부터 통일 문제는 논의하지 않으면서, 북측이 제의할 경우엔 '6.15 선언 정신'에 따라 합의한 걸로 하자고 했다. 당장 통일보다는 그 전 단계인 평화와 경협 문제를 풀어가면서 남북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그 논리였다.

보통 나라 간 정상회담이라면 회담 전 완성된 선언문을 가져가 발표 전 문구 한두 개 고치는 정도지만 남북 사이에선 그게 안 된다. 마지막까지 선언문이 합의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에 도착한 10월 2일, 김영남 상임위원장과의 회담에서도 의제로 진통을 겪었다. 대통령이 우리 의제를 말하자 김 상임위원장이 속주머니에서 서너 장의 메모지를 꺼내더니 40~50분 동안 쉬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 소위 자주통일의 문제를 꺼냈다. 남한이 미국에 의존하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어려워지는 것이라는 얘기와 함께, 개성공단 등의 경협도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이튿날 진짜 정상회담을 하고 보니 김 상임위원장이 우리 쪽의 의중과 대통령의 반응을 보기 위해 소위 '근본문제'들을 한 번 걸고넘어진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각보다 정상회담 준비를 철저하게 한 것 같았다. 물론 김 위원장도 오전 회담에서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했던 얘기를 거론했다. 하지만 오후 회담에선 우리 대통령이 '일단 평화를 정착시키고 경협부터 차근차근 해야 후대에 (자주)통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김 위원장도 동의하면서 의제 문제가 풀려가기 시작했다.

▲ 한반도평화아카데미 2강 '10.4 남북정상선언과 한반도 종전선언' ⓒ프레시안(최형락)

한반도 종전선언에 관한 합의가 나온 배경과 그 의미

10.4 선언 4항에 나와 있듯이 남북은 정전체제를 종식시키자는 인식을 같이 하고 이와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종전선언 문제가 합의된 배경을 보자.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 때,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부탁'을 김정일 위원장에게 전했다. 부시 대통령은 2006년 11월 베트남 하노이 한미정상회담 때 '한반도의 전쟁 상태를 끝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북미 정상 간 대화가 있어야 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결심을 해야 한다. 북한이 핵문제를 해결하면 북미 간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부시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 직전인 9월 시드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도 노 대통령에게 다시 이 얘기를 꺼내면서, 정상회담 때 김 위원장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그렇게 말하니까 김 위원장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면서, 이 문제를 한 번 풀어보는 게 좋겠다고 답했다.

당시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북한은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2.13 합의에 따라 핵 폐기를 위한 초기조치는 거의 완료되고, 이제 다음 단계인 핵 프로그램 신고와 핵 시설 불능화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진전이 어려웠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평화협정 논의를 하겠다고 하고, 북한은 평화협정 논의가 되면 핵을 폐기하겠다고 하며 몇 년 째 평행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이 입장이 조율되지 않으면 도저히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없다. 결국 핵 폐기와 평화협정 논의가 동시에 출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고, 북미 간 대화와 관계 정상화, 대북 에너지·경제 지원 등이 다 들어 있는 '포괄적 접근'을 할 수 있는 입구를 마련해야 했다. 우리는 종전선언이 그 입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북한이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평화협정은 너무 어려운 문제다. 유엔 사령부는 어떻게 할 것이며 군비통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다룰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니 그건 나중에 하고, 일단 전쟁이 끝났다는 선언을 '정치적'으로 하자는 게 노 대통령의 종전선언 구상이었다. 각국이 반드시 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고 협정 후 국제협약과 같이 의무성을 가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일종의 신사협정으로, 정상들이 한 데 모여 '선언으로서의 선언'을 하자는 것이다. 그 다음에 각각의 어젠다로 다시 협상장에 모이자는 얘기다.

그걸 설명하자 김정일 위원장도 동의하면서, '3자 혹은 4자의 정상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선언문 4항이 나오게 됐다. 그런데 이 '3자 혹은 4자'가 선언 발표 전까지 골치였다. 북한은 그동안 남한을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3자 혹은 4자'로 하면 결국 3자에 남한이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하면서 한반도 평화협정에서 남한을 제외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러나 밤새 문구 협상을 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북한은 '3자 혹은 4자'라는 표현을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북쪽 대답이 걸작이었다. "정상회담 때 김정일 위원장이 한 발언이라 손 못 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로선 할 말이 있어야지. 설득이 안 되는 거다. 고심 끝에 우리는 우리대로 '3자 혹은 4자' 앞에 '직접 관련된'이란 말을 넣자고 관철시켰다. '한국은 빠지는 것 아닌가', '북쪽 전략에 말려든 것 아닌가'라는 식으로 예상되는 언론의 의혹, 국민들의 비판에 우리도 설명을 반드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종전선언 문제가 다시 제기되려면 먼저 남북관계가 풀려야 한다고 본다. 남북관계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어야 종전선언을 생각할 수 있는 거다. 남북관계가 풀리려면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 올해 강하게 대치했던 남북관계에 약간의 유화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은데 우리 정부는 아직까지 아무 반응이 없다.

남북관계가 풀리고 난 뒤, 핵 폐기 협상에 들어가려면 또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그것은 북미가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또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선에서의 전략이어야 한다. 2007년 정상회담 당시 우리는, 바로 종전선언을 통해 그것을 시작하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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