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출범하는 박근혜 새 정부의 외교안보 환경이 녹록치 않다. 역대정부 그 어느 때보다 어렵고 복잡한 상황이다. 남북관계는 꼬일대로 꼬여있고 북한은 핵개발을 멈추지 않는다. 미국의 대중국 견제, 중국의 군사대국화, 일본의 우경화 등 동북아 주변환경 또한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북한의 3차 핵실험은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다. 우리가 20년 넘게 견지해 온 북한 비핵화는 이제 물 건너 간 것 아니냐는 자조적 시각이 팽배해 있다. 우리 사회에 북한 붕괴론, 레짐 체인지가 다시 고개를 든다. 북한은 북한대로 이번 핵실험이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차기 정부와는 선을 긋기 위해 이명박 정부 기간 내 핵실험을 서둘러 실시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현재 북한은 체제유지의 딜레마에서 벗어나 미국과 최종적으로 담판을 벌이고야 말겠다는 결사항전적 기세다.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하고야 마는 북한 지도부의 선택이 그만큼 위태롭고 절박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 북한이 핵실험 이후 연일 강경한 입장을 내보이고 있다. 사진은 지난 12일 북한 외무성에서 핵실험은 1차 조치였다며 미국이 적대적으로 정세를 복잡하게 하면 2, 3차 대응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
어쨌든 박근혜 새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무수한 가변성과 유동성을 안고 첫 시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당분간 강화된 제재국면 속에서 남북관계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안보리 제재국면에 맞추어 우리도 당근보다는 채찍을 들게 될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북한의 돈줄을 죄는 방식으로 제재를 강화할 것이고 중국도 예전과는 다르게 북한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은 해양세력으로부터의 완충지대로서 북한의 생존을 지원할 뿐이다. 어쨌든 북한은 국제사회의 압박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추가적인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대남 도발 등을 통해 한반도의 긴장을 지속적으로 고조시킬 것이다. 서해교전 및 연평도 사태 재발, 나아가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꽃을 피우기도 전에 지게 될지도 모른다. 피해는 고스란히 남과 북의 몫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기 국면에서 해법은 없는가?
우선, 인내심을 갖고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통해 실효적인 대응조치들을 조용히 추진해 나가야 한다. 북한 3차 핵실험이후 우리 사회는 핵무장론, 선제타격론, 북한 붕괴론, 6자회담 무용론 등 각종 안보이슈가 무분별하게 난무하고 있다. 국민들은 더더욱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둘째, 이번 북한 핵실험을 정확하게 평가하여 앞으로 북핵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필요하다. 지난 20년이 넘게 우리는 북핵문제를 다루기 위한 모든 방법을 강구하였고 많은 교훈을 얻은 바 있다. 북한의 핵집착이 워낙 크고 협상과 파기를 반복해 왔기 때문에 문제해결이 어려웠지만 과연 우리도 지난 기간 동안 일관된 접근을 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핵을 가진 자와 악수할 수 없다는 논리로 5년을 허비하였고 미국의 강경한 대북정책아래 한미관계의 균열을 경험하면서 우왕좌왕했다. 북한의 선의만을 무작정 기다리는 전략적 인내로 북한에게 시간만 벌어주었다. 새 정부는 그간 교훈을 바탕으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접근법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명박 정부도 비핵 개방 3000과 그랜드바겐과 같은 포괄적 접근법이 있었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북한이 굴복하고 나오면 지원을 해주겠다는 일방주의적인 대북인식이 깔려 있다. 이제 북한이 기술적으로 핵보유국이 된 이상 북한의 핵폐기를 위한 우리의 주장, 북한의 주장, 주변국들의 입장 등을 모두 테이블 위해 꺼내놓고 가능한 옵션들을 정리해 나가야 한다. 1990년대 중반에 추진한 4자회담과 같이 평화체제 문제까지 포함하는 대화체를 구성할 필요가 있으며 그 이전에라도 한미중 3자 협의체를 서둘러 가동하여야 한다.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끼고 협의를 진행해야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다. 작금의 비확산이나 비핵화냐는 논쟁은 의미가 없다.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향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바탕으로 우선 수평적 수직적 비확산에 집중하여야 한다. 그리고 협상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비핵화를 해나가야 하는 기조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6자회담도 사문화되었다고 함부로 폐기해서는 안된다. 그간 6자회담의 결과들은 향후 북한과의 협상에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셋째, 북핵외교를 강화하는 동시에 남북관계에서의 독자성과 유연성을 점차 회복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간 역사적 경험에서 볼 때 제재와 대화를 병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제재가 강화될수록 대화의 목소리는 약화되었다. 제재를 통해 북한을 굴복 혹은 붕괴시키려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대화는 북한에 쓸데없는 환상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 거부되어 왔다. 앞으로도 대화의 부재 상황이 계속된다면 더 이상의 남북관계 진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대북 압박과 국제공조는 지속하되, 남북간 대화에서 운신의 폭을 넓혀나가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남북관계의 화해무드는 주변국들의 대북정책에 긍정적인 역할을 미쳤다. 6.15 남북정상회담은 북미간 공동성명 도출과 북일 공동선언에도 영향을 주었다. 남북이 싸우는데 어느 나라가 북한과의 접근을 시도하겠는가? 군사적 옵션을 통한 북한문제의 해결을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이상 남북대화의 시작은 북핵협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북핵문제와 남북관계의 선순환 구조'인 것이다. 비단 북핵문제와의 관계만이 아니더라도 남북간에는 해결해야 할 사안이 산적해 있다. 우리가 제재국면 속에서도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주장하지 못한다면 향후 남북관계는 이명박 정부 때와 다를 바 없다. 남북관계 신뢰프로세스의 이니셔티브는 막가파식으로 나가는 북한의 태도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략적 영역에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남북대화는 앞으로 5,10년을 내다보면서 차분하고 의연하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 북한의 3차 핵실험 국면은 당분간의 조정기를 거쳐 협상의 국면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도 어느 순간 유화적인 태도로 나설 것이고, 한반도 긴장고조를 바라지 않는 미국과 중국도 남북대화를 중재하려 할 것이다. 어차피 남북대화가 진행되어야 한다면 우리의 첫 단계 전략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추진 의지를 명확하게 북한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은 새정부에 대한 비난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우리가 선언적 의미에서도 남북대화 의지를 보여준다면 북한과의 직접 대화 고리는 일단 연결된 것이다. 2단계로 공식, 비공식 접촉 등 가용한 수단을 동원하여 북한과의 대화를 본격화 해 나가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을 안한 것이 결과적으로 잘된 것이다라는 논리는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잘못된 인식 속에 지난 5년간 대화의 실종은 오해와 갈등만을 양산하였다. 대화 자체가 없는데 남북간 신뢰가 조성될리 만무하다. 물론 그간 북한과의 대화 속에 늘 북한의 진정성이 의심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북한이 구태의연한 대남통전전략을 버리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우리 또한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진정성을 요구하여 대화의 문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측면도 있다. 단기간 성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남북대화를 통해 당장 5.24조치를 해제하고 북한에 대규모 지원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설사 논쟁만으로 끝나는 합의문 없는 대화도 해 나가야 하는 인내와 차분함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이명박 정부시기 대북 강경론자들은 잃어버린 10년을 비판하면서 자기들의 대북원칙만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잃어버린 15년이 되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남북대화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확보해 나가지 않는 이상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거대 비전은 성공하기 어렵다. 박근혜 새정부의 지혜롭고 현명한 대응을 기대한다.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소장 이수훈)가 발행하는 <한반도포커스> 2013년 3·4월호(제22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번 호의 전체 주제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 전망과 제언'입니다.
* 원제 :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 전망과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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