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이라를 보기 전에 이집트의 건축왕, 가장 큰 동상과 아부심벨 신전 건축으로 영원히 역사 속에 남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가장 자기선전에 능했던 인상적인 군주 람세스 2세의 흉상 앞에 서 보았다. 이 쾌락적인 왕은 참으로 많은 것을 누렸다. 그는 여러 부인들과의 사이에 79명의 아들과 59명의 딸을 낳았고 자식들을 신전 벽에 새겨 넣었다.그가 그 많은 신전을 지을 때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어느날 모세와 아론은 람세스 2세를 찾아가 이제 그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로 떠날 것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이 바로 출애굽기 5장의 내용이다. 기원전 1300년경의 일이니까 33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떠났지만 곧 후회한 왕은 이집트 병거 600대를 동원해서 추적하게 하였다. 이 명령은 신하들 사이의 편지로 전달되었는데 그때 그 편지가 바로 'papyrus anastasi I'란 이름으로 대영 박물관에 남아 있다. 언젠가 나는 이 3300년 전 서신의 내용을 읽은 적이 있는데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황급한 시기의 편지 사이에 이런 글들이 섞여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자네는 담장 없는 포도원에 들어가 포도를 지키고 있는 어여쁜 소녀를 발견하고 소녀는 자네를 편안하게 생각하고 자네에게 자신을 허락할걸세. 그러면 곧 자네는 사람들에게 잡히고 망신당하겠지. 자네는 도와달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못 들은척하겠지'
친구에게 다가올 불행을 조롱하는 건지, 친구에게 행여라도 좋은 일이 있을까봐 내심 질투하는 건지, 아니면 염려를 담아 진지한 경고를 하는건지 애매한 3300년 전의 편지를 읽다가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들의 우정은 아리따운 여자 앞에선 예나 지금이나 여우처럼 교활하며 복잡하니 믿을게 못된다.
▲ 이집트의 아부심벨 신전. |
팔목에 팔찌를 주렁주렁 찬 이집트 미인들, 세금을 세는 관리들, 지팡이를 든 사제들, 구불구불한 나일강과 사막, 춘분과 추분 때 석양의 햇빛이 그 머리를 통해 신전 안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스핑크스, 대추나무와 낙타. 람세스란 이름을 가진 파라오들, 이집트 최고의 미인 왕비이자 여제사장이었다던 네페르티티에게 입을 맞추는 이크나톤 왕, 햇빛 속에서 등장하는 태양신 아톤신, 어스름한 신전의 불빛과 어둠 속에서 선택받은 자에게만 나타나는 아몬신, 지하 세계와 죽음 곁에서 죽은 자들의 여행을 돕는 가장 위대한 부활의 신인 오시리스신. 오시리스신의 아내인 이시스, 시기심 때문에 오시리스와 싸움을 벌이고 결국 그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그의 동생인 세트신, 재칼의 머리를 가진, 최초의 미이라를 만든 아누비스신, 잠시 살아난 오시리스와 이스시가 사랑을 나눠서 생겨난 매의 머리를 가진 하늘의 신이자 파라오의 보호자인 호루스 신, 아몬신의 살아있는 상징이란 뜻의 투탕카멘, 석회암 파편에 적힌 수천년 전의 연애시 시누혜, 죽은 이의 시중을 드는 소녀 인형 샤부티들의 이야기는 하나로 흘러간다. 바로 왕들의 죽음과 미이라이다.
이집트 왕들의 모든 피라미드와 미이라를 합해서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영원한 BOY KING 투탕카멘일 것이다. 그의 짧은 인생은 형인 이크나톤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크나톤은 막강해진 사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다신교를 몰아내고 유일신을 숭배하는 이집트식 종교개혁을 일으켰는데 그때 그가 선택한 신은 아톤 (태양의 회전 이란 뜻) 이었다. 밝고 강력하게 빛나는 태양신 아래서 예술 작품도 부드러워져서 왕은 왕비에게 몸을 기울여 키스하고 왕가의 가족들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에겐 해결하기 어려운 마음속의 혼란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건 죽음과 부활, 영생은 누구에게 맡겨야 하는가? 였다. 그들이 미이라를 계속 만드는 한 죽음의 신인 오시리스는 포기할 수 없었다.(오시리스가 죽음을 극복했다면 이집트인들은 자신도 죽음을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오시리스야말로 수천년 동안 이집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이었다) 이크나톤이 죽자 불만에 가득 찼던 사제들이 이크나톤의 유일신 종교개혁을 싹 무시하고 꼭두각시처럼 내세운게 바로 어린 투탕카멘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 투탕카멘은 아톤이 아니라 아몬신의 살아있는 상징이란 뜻이다. 투탕카멘이란 이름으로 잠깐 통치하던 소년왕은 별 업적 없이 열여덟 나이쯤 죽어 버렸는데 당시 이집트의 번영으로 보아서 틀림없이 화려했을 그의 무덤 흔적은 아주아주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22년. 다른 발굴 작업을 하던 인부들의 막사, 지하 16계단 중 첫 번째 계단에서 봉인된 입구 하나가 발견 되었다.봉인된 문을 열자 또 봉인된 문이 나왔다. 고고학 역사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순간이라고 이야기되는 장면이다. 그 봉인된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가자 5000점의 물건으로 꽉 찬 무덤 한가운데 투탕카멘이 잠자듯 손길 한번 타지 않고 온전히 수천년 전의 고요 속에 나타난 것이었다. 향수, 구운 오리고기, 송아지 고기, 금세공한 슬리퍼, 그가 더울 때 부칠 타조 깃털 부채, 몸을 움직이고 싶을 때 탈 전차의 부품, 어렸을때 가지고 놀던 배, 금으로 만든 호신용 단검.3밀리미터 두께의 황금관. 그리고 저기 저 무덤 제일 안쪽 깊숙한 곳에 있던 것이 바로 아마포 붕대로 감싸진 몸에 황금 마스크를 쓴 그의 미이라였다. 그의 무덤 안에 있던 수많은 물건들의 목록을 읽어보았지만 다른 무엇도 황금 가면의 이마께에 놓여있었다던 한 묶음의 화환만큼 내 마음을 움직이진 못했다. 누군가 몸을 숙여 그의 이마에 마지막 키스를 하고 꽃다발을 두었을 때 그 꽃이 3천년 후에나 빛을 볼 것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 꽃다발에 금실이 좋았다던 왕비의 눈물 한 방울 떨어졌을까? 격식을 차린 요란한 예술 작품 속에서 한 다발의 수수한 꽃다발은 이집트 왕족을 어쩐지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끼게 만든다.당신보다 이쁜 것은 못봤어.이런 고백을 하던 가공되지 않은 마음.
▲ 대영박물관에 있는 투탕케멘은 검은 돌로 만들어져있다. 투탕카멘 피라미드에서 나온 유물들은 이집트 밖으로 반출되는게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인데 바로 그 점 때문에 하워드 카터의 투탕카멘 발굴팀은 도덕적 칭송을 받는다. |
사실 왕들에게만 미이라만 있는게 아니었다. 왕, 신하, 부유한 사람, 서민, 심지어 황소. 모두에게 있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을 눈앞에 보는 순간에도 그들 자신을 쾌락에 내맡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평소에도 잔칫상 위에 관을 올려놓는 관습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듣자마자 그 이야기에 대단히 열광했다. 찰나를 즐기자는 생각을 밥상머리에서도 그만큼 철저하게 실천한 민족이 또 있었을까? 찰나를 즐기면서 동시에 영원한 삶에 그렇게 집착한 민족이 또 있었을까? 다시 지상에 돌아오길 그렇게 열렬히 꿈꾼 민족이 또 있었을까? 나일강과 사막이 삶과 죽음의 상징처럼 나란히 펼쳐져 있던 나라에서 삶과 죽음은 더 복잡하게 가시적으로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미이라를 보면 묻고 싶어진다. 넌 살아있는 동안 누구였느냐?
미이라가 된 영혼은 훗날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상형 문자로 적힌 친절한 안내서의 도움을 받는데 그 안내서는 우리가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자의 서이다.사자의 서의 핵심 내용은 42가지 죄에 대해서 42명의 신 앞에서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는 친구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저는 고아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습니다..같은 것들이다. 영혼이 신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도덕적 결백을 맹세하면 그의 심장은 접시저울 위에 놓인다. 그리고 접시저울의 또 한쪽 접시에는 진실을 나타내는 타조 깃털 하나가 놓여있다. 심장이 타조 깃털만큼 가벼우면 영혼은 오시리스와 함께 내세의 쾌락을 영원히 누릴 수 있지만 심장이 죄로 무겁다면 죽은 자의 심장을 먹어치우는 괴물이 그 심장을 낼름 먹어 버린다. 그래서 사자의 서에는 심장에 대한 주문도 들어있다. 오! 함께 많은 세월을 겪은 심장아! 내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증인으로 나서지 말아라. 내 말에 귀를 좀 기울어 주렴.
▲ 이집트의 사자의 서 중 일부. |
이런 이집트인들의 심장에 대고 외치는 안타까움을 현대 과학이 도와줄 수 있을까?
1985년 스웨덴 웁살라 대학의 과학자들은 기원전 400년경의 한 살짜리 사내아이 미이라에서 유전 물질을 추출해 복제했다. 그들은 사내아이의 유전자를 키우는데 성공했다. 죽은 이집트인의 체세포 염색체를 살아 있는 난자에 집어넣은 다음 대리모의 자궁 속에 이식한다면 그 염색체는 아기로 태어날 것이다. 기원전 400년 전 나일강변에서 태어난 그때와 똑같은 아이로. 그렇게 된다면 한 살짜리 사내아이를 미이라로 만들었던 엄마의 정성은 보답 받게 되는 것일까? 언젠가 미이라의 얼굴을 현대 과학으로 복원해 낸 사진을 본 일이 있었다. 두개골과 치아가 얼굴 윤곽을 제공해주니 거기에다 얼굴 조직이 갖는 평균 깊이를 바탕으로 밀랍으로 살을 올리고 가짜 속눈썹을 붙이고 유리눈을 끼우고 검은 뱅 스타일 이집트 가발을 씌워보면 대략 비슷한 얼굴을 만들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미이라 뒤에서 나타난 얼굴은 사춘기도 채 안 된 나 어린 소녀의 것이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그대로 뛰어나가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나일강변을 뛰어다닐 것만 같았다. 그런데 등 뒤에서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를 수 없다.
대영박물관의 모든 미이라 중 사람을 가장 헷갈리게 하는 것은 아르테미도루스일 것같다. 그는 이집트에 사는 그리스인이었는데 그의 용모는 어느 이집트인과도 닮지 않았다. 그의 고향인 파이움 가까운 곳에는 파로스의 등대가 깜박깜박 빛나는 위대한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있었다.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조상은 그 어느날 알렉산더 대왕을 위해 싸웠을 것이고 그 도시에 그대로 남아 이집트 여인들과 결혼해 이집트의 종교와 이집트의 죽음 방식을 받아들였을 것이란 것 정도다. 어느날 파이움을 정복한 로마 사람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집트인인가? 그리스인인가? 어느 날인가는 화가가 와서 아르테미도루스의 얼굴을 그렸을텐데 그는 죽은 뒤에 자신의 관을 그 그림으로 덮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초상화가 앞에 서있던 날로부터 몇 년 뒤에 몇 살의 나이로 그가 죽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미이라를 본 사람은 누구나 명료하고 큰 눈으로, 볼륨감 가득한 얼굴로 무슨 일 있나요? 하고 묻는 영원히 젊은 절정기의 눈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그의 미이라 관의 그림에서 오시리스신은 그의 영혼을 다시 깨워 지상으로 돌려보내려 하고 있는데 그 밑엔 엉뚱하게도 그리스어로 이런 말이 써있다. FAREWELL 아르테미도루스! 우리는 그를 보내줘야 하나? 붙잡아야 하나? 어쨌든 그 시기의 파피루스들이 대영 박물관에 많이 남아있으니 이젠 우리 파피루스를 만날 때다. 파피루스들은 탈 때 연기 냄새가 좋아서 이집트 농부들이 연료로 많이 썼다고 들었다.
▲대영박물관 최고의 자랑거리인 로제타석. |
대영박물관 최고의 자랑거리인 로제타석에서 칭송한 왕은 포틀레마이오스 5세이다. 그는 투탕카멘 왕보다 더 어린 나이인 여섯 살에 왕이 되었다. 그는 사원에 관대했기 때문에 이집트의 신관들은 그를 칭공하는 송덕문을 잔뜩 작성했다. 송덕문은 로제타석에 똑같은 내용으로 세 번 기록됐다. 두 번은 이집트 문자로,나머지 한번은 그리스어로 .이것을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이 로제타 마을에서 발견한 뒤에야 제대로 된 이집트학이란게 생겨나고 암호는 해석되고 학자들은 파피루스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적어놓은 파피루스의 사연들을 읽어보면 가슴이 어쩐지 뭉클하다.
"저는 노예로 팔려가게 될까요?"
"제가 부자가 될까요?"
"제가 이혼할 운명입니까?"
"누군가 저를 죽이게 될까요?"
"제 자식들이 저와 화해할까요?"
그들은 이 파피루스를 들고 신탁으로 뛰는 가슴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귀를 쫑긋거리며 듣고 있는 그들의 귀에 신탁은 알듯 모를 듯 은유로 가득 찬 말들을 들려줬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새벽길을 걸어 금성을 보면서 자신의 도시 속으로 돌아갔을 건데 그 풍경이 내겐 다시 파피루스속의 한 장의 이집트 그림으로 남는다. 질문을 품고 자신이 출발했던 곳으로 걸어 돌아가는 것. 나 역시 비슷한 생각에 빠져 그 옆에 맨발로 동행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걷는 내 눈앞엔 세상에서 가장 긴 강인 나일강이 흐르고 그 강엔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화강암 오벨리스크를 실어 나르는 배가 떠있고, 그 강엔 곧 올 새벽의 요란스러운 흥정을 위해 선잠깬 상인들과 어부들이 모여들고 그리고 강 옆의 집에선 지상에서 착하게 살면 꼭 다시 살아온다고 믿는 선량한 사람들이 새벽잠을 자고 있는, 그런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글자로 이뤄진 시 라고 표현한다. 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어려서 엄마에게 처음 붓글씨를 배울 때 큼직한 붓으로 제일 먼저 그려본게 한자의 부수들이었다. 마음 심이나 손 수 ,눈 목 같은 글자들에 대해 엄마는 이것은 손으로 더듬어 만져야 알 수 있음을 뜻하는 글자이고 이것은 마음으로 헤아려야 알 수 있음을 뜻하는 글자이고 이것은 열심히 지켜봐야만 알 수 있음을 뜻하는 글자라고 오래 오래 설명해 줬었다. 다른 사람의 세계로 이동하는 길잡이가 '시'라고 막 학교에서 배웠던 나는 글자가 그렇다면 시 로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 대영박물관의 미이라. 유럽, 미국에서는 미이라가 동양적 신비와 에로의 대상으로 폭력적으로 다뤄진 시기가 있었다. |
한가지 이집트 미이라에 관해서 꼭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유럽, 미국 사람들에게 미이라는 동양적 신비와 에로의 대상으로 폭력적으로 다뤄진 시기가 존재했었단 것이다. 미이라 사기꾼, 미이라 흥행사, 미이라 밀매꾼까지 존재했었다. 외교관들도 한 덩어리는 대영박물관에 또 한 덩어리는 루브르 박물관에 또 한덩어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미이라를 챙긴다는 말이 돌았었고 그건 사실이었다. 심지어 미이라를 갈아서 그 분말을 약처럼 마시던 때도 있었다. 나폴레옹은 나일강 전투에서 패해 빠져 나올 때 미이라 두 개를 챙겨서 하나는 자신이 갖고 하나는 아내 조세핀에게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로 모든 이집트 여행자들은 자신의 모험과 용기의 상징으로 미이라를 기념품으로 갖고 싶어 했다. 이집트를 여행했던 플로베르도 자기 책상위에 미이라 발 조각 하나를 놔두고 있었다고 한다.(루앙에 살던 플로베르의 꿈은 아랍에 가서 동정을 잃는 것이었다) 이런 이상스런 이집트 열풍에 관한 이야기 중 으뜸은 미라의 붕대를 벗기고 내장을 보이며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된 순회 흥행사 글리든에 관한 것이다. 그는 어느날 대충 미이라 몇 구를 구한 다음에 자신이 상형 문자를 해독해 보니 그 미이라는 지체 높은 사제의 딸이었다고 뻔뻔스럽게 선언했고 언론은 아예 그녀를 왕족의 공주로 둔갑시켰다. 공주 미이라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밝히겠다고 선언한 강연회의 마지막 날,드디어 스트립쇼를 연상시키는 조명 아래 공주 미이라의 붕대는 한꺼풀 한꺼풀 풀려나가고 송진 덩어리는 제거되고 마침내 그녀의 허리를 두르고 있던 마지막 아마포 한 조각마저 파르르 벗겨졌을 때, 관객들은 두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성인지 신음인지를 내뱉고 말았다. 공주의 허리에 붙어 있던 것은 바로 바로 바로 남근이었던 것이다. 그 미이라는 남자였던 것이다. 거짓말과 허세 때문에 조롱거리가 된 그는 두고두고 삼손의 여우 꼬리를 갖고 있는 사람, 요나의 고래에서 막 꺼낸 싱싱한 달팽이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놀림 당하다가 아편 중독으로 죽어 버렸다. 미이라가 대영 박물관의 귀빈이 되기 전 이렇게 야만적으로 구경꺼리가 되면서 이집트란 나라 자체에 대한 우리의 정확한 판단 능력도 마비되어 버렸을 수도 있다.
그래도 미이라에 대한 우리의 원초적 호기심. 그것은 오래 전에 죽은 이의 몸을 구경해 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이라의 호소력은 어쩌면 흔적 없이 영원히 사라지기도,영원히 잊혀지기도,영원히 잊어버리기도 결코 원치 않는 우리의 끈질긴 꿈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헤르도토스는 이집트를 여행하고 피라미드에 대해서도 이런 글을 썼다
"케옵스의 사악함은 자금이 부족하자 얼마간의 목돈을 구해오라는 명령과 함께 자신의 딸을 매음굴에 팔아버리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그녀는 그 돈을 마련하였다.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영속시키는 유적을 남길 결심을 하였고 각 남자에게 돌 하나씩을 선물해 줄 것을 요청했다.이 돌을 모아 그녀는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는데 그것은 각면이 150피트에 달하는 거대한 피라미드의 정면에 있는 또 다른 세 개의 피라미드의 중간쯤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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