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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내가 해리 포터의 헤드위그가 되어 줄께"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점퍼'- 서문(序文)

'침대와 책', '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등의 매혹적 독서기 그리고 립글로스처럼 촉촉하고 반짝거리는 칼럼으로 적잖은 매니아들을 보유하고 있는 CBS 정혜윤 PD가 <프레시안>에 매주 주말 여행기를 연재한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행복한 책읽기> 등 CBS의 간판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만들어 온 라디오 PD인 정혜윤은 현재 <시사자키>와 <뉴스쇼 스폐셜-책과 문화>를 만들고 있다.


▲ 정혜윤 CBS PD
앞으로 몇 달 간 정혜윤과 런던 여행을 떠나보자.

물론 피쉬 앤 칩스나 기네스 맥주잔을 들고 런던 뒷거리를 헤매는 것도 흥미로울테다.

하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이랑 수다 떨기, 책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사랑하기, 책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따라 하기, 책에 나오는 음료수와 음식 먹어보기, 책에 나오는 음악 찾아 듣기 , 책이 알려주는 장소 가보기, 읽었으면 행동하기 등 자칭 '책 행동학가'인 정혜윤과 함께 하는 여행도 즐거우리라.

어떠랴? 언젠가 당신이 정혜윤의 여행기를 들고 런던에서 '책 행동학가'가 돼보는 것도 짜릿하지 않겠나?

일명 '점퍼', 데이빗 라이스(영화 '점퍼'의 주인공)는 원하는 곳으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지만 우리의 '점퍼' 정혜윤과 떠나는 여행은 공간의 벽 뿐 아니라 시간의 벽도 뛰어 넘을 수 있다.

앞으로 정혜윤은 런던을 헤집고 다니면서 수많은 소설과 영화 그리고 노래의 주인공들을 주워 섬길 테다. 뭐 어때? 아는 이름이 나오면 반기고, 모르는 이름이 나오면 무시하던지 그게 아니면 질투하면 된다.


정혜윤과 우리는 단지 당신의 헤드위그가 되고자 할 뿐이다. 당신의 역할은 해리 포터다.

그대 잠을 깨라. 어느새 태양은
밤의 들판에서 별들을 패주시키고
하늘에서 밤마저 몰아낸 후
술탄의 성탑에 햇빛을 내리쬔다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 中)


<편집자 주>

런던에서 점퍼가 되고 싶은 사람을 위한 안내서

▲ 영화 <점퍼>의 한 장면.

사실은 나도 점퍼다. 최초의 징후는 이스탄불에서 카파도피아로 가는 버스가 어딘가에 충돌했고 마침 버스의 제일 뒷좌석에 앉아 방심한 채 mp3로 <오아시스>의 음악을 듣던 내가 데굴데굴 굴러 버스 중간의 문에 쾅 부딪혔을 때 나타났다. 그 순간 중성자의 밀도로 머리 속이 꽉 차면서 나는 내가 상상한 공간으로 바로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며 이동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내가 착륙한 곳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뒷 배경으로 술탄 메흐메드 2세와 호자가 걸어가고 있는 바로 그 옆이었다.

그들은 이제 막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이야기며, 루메릭 요새를 지은 것이 최고의 결정이었단 이야기며, 아야 소피아 성당을 그대로 둔 것은 역사가 기억할 것이란 이야기 등 을 진지하게 나누고 있었다. 호자는 "좋은 이야기는 처음 부분은 동화처럼 천진해야 하며 중간 부분은 악몽처럼 무서워야 하고 마지막 부분은 이별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처럼 슬퍼야 한다"고 "위대한 술탄의 삶과 죽음 역시 그래야 한다"고 콧수염 밑으로 근엄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코란 읽는 소리가 대포 소리, 금화 쩔렁 거리는 소리, 여인의 낮은 한숨소리, 아이들의 뜀박질 소리 같은 온갖 도시의 소음에 섞여 들려오는 와중에 베네치아인인지 제노아인이지 언뜻 구별이 안가는 노예들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고 있었고 호자의 이야기를 듣던 메흐메드 2세가 어쩐지 그들을 한숨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는 바로 그 때, 나 역시 이스탄불과 터키 함대의 풍경을 마치 그 안에 내 과거가 있는 것처럼 내려다보았으며 곧 다가올 일몰의 찬란한 빛과 훗날 맘 속 깊이 익숙해질 이 도시의 어둠에 대해서 상상해 보았다.

나는 이 도시의 술탄에게 반은 믿을만하고 반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고, 그래서 머지않아 등장할 최측근 최정예 호위병인 예니체리를 조심해야 한다고, 언젠가는 이만장이 넘는 타일로 장식한 푸른색의 모스크를 세우게 될 것이라고, 타클라마칸 사막 너머에 아름다운 도시가 있어 낙타를 타고 그 도시의 진귀한 도자기를 실어 날라 톱카프 궁전을 채우게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 때 나는 불현듯 내가 타고 있던 버스를 떠올리는 바람에, 다시 나를 둘러싸고 내가 죽었느니 살았느니 기절했으니 따귀를 때려야한다느니 물을 끼얹어야 한다느니 가슴을 풀어야 한다느니,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한다느니 하며 적어도 4개 국어로 웅성대는 사람들 속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옷장 속의 나니아 나라를 발견한 루시의 심정이 된 나는 이후에도 홀로 자주 점퍼가 되었고 그건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나는 낯선 도시 문간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자리에 걸터앉아 도시의 망루, 종탑, 은색 돔, 지친 여행객들, 9월의 과일, 소나기, 무역풍, 서로 서로 닮은 도시들, 상상도 못한 도시들, 분홍빛으로 해가 지는 분홍도시, 흰빛으로 해가 지는 흰 도시, 크로와상 같이 생긴 도시, 물의 도시, 빛의 도시, 모래의 도시, 초상화를 그리는 부인들, 발코니에 앉아 부채를 흔드는 귀부인들을 한도 끝도 없이 지켜보았는데 훗날 시간이 흐른 뒤에 보니 그 풍경들이말로 내 여행의 청사진이었고 내 여행의 일정표였다.

▲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중 한 장면. 영화 속 주인공 해리포터와 부엉이 헤드위그.

런던에선 어땠을까? 그게 아마 7월이었을까 8월이었을까? 류트 음악 잔잔한 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스페인과 프랑스 사절들을 애태우며 템즈강의 뱃놀이를 즐길 때 보석광인 그녀의 진주 중 하나가 유난히 영롱하게 강물에 마치 달처럼 비치는 것을 보았고, 해적이자 애국자인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배가 스페인의 금덩어리를 빼앗아 돛을 펄럭이며 멀리서 들어올 때 100대의 관악기 소리가 물결 위에 즐거운 웃음처럼 번져 나가는 소리도 들었으며, 별이 높이 뜬 밤 런던탑에서 밤이면 더욱 커지는 간수들의 소리를 들으며 비운의 천일의 앤이 곧 잘려나갈 긴 목을 들어 창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옥스퍼드에선 자신의 이름을 단 핼리 혜성을 발견할 운명의 외로운 핼리가 뉴턴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을 보았고 오스카 와일드가 비참하게 옥중으로 끌려갈 줄도 모르고 천재의 방종한 웃음을 터트리며 짖궂은 행복을 만끽하는 것과 C.S 루이스와 톨킨이 테이블 앞에 얼굴을 맞대고 각기 경건한 상상력으로 성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살던 소호의 집 뒷문지방에 앉아서 한쪽은 웃음과 번영으로, 한쪽은 슬픔과 빈곤으로 제각기 다른 색깔로 어둠을 맞는 런던의 거리를 지켜보며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영어 이니셜 g와 h 사이에 다름 아닌 I자가 자리한 사실을 떠올렸던 것, 역시 결코 잊을 수 없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어디쯤에서 콜레라가 발생했을 수도 있으리라. 그 콜레라 덕에 저 템즈강에서 우리는 더 이상 악취를 맞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르리라.

거리의 산책자, 쇼핑객, 미식가, 방랑자. 노름꾼, 순수 알콜중독자, 사진작가, 시대의 증인, 구경꾼, 역사학자, 탐정, 애송이, 뜨내기, 길 잃은 자, 연인, 바람둥이, 사냥꾼, 야행성동물, 사기꾼, 악사, 학생, 화가, 모험가, 탐험가, 영업사원, 지도 그리는 사람, 실패한 사람, 명품족…. 멋진 여행자가 되는 백만 가지 방법에 대해 우리는 목록을 채워볼 수 있지만 내가 택한 여행자의 포지션은 시공간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점퍼다.

내게 여행은 상상의 다른 이름이며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위대한 명장면, 유인원이 하늘로 던진 뼈가 우주선으로 바뀌는 그 장면을 생각나게 하고 "요람 같은 지구에서 우주 속의 미래를 향해 손을 뻗는 인류의 모습" 이란 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비밀이고 부분적으로는 공공연한 여행지의 모든 풍경들은 전 시대 사람들의 염원과 체험,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 살아본 삶과 살아보지 못한 삶, 성공과 실패, 조상과 후손들의 이야기를, 엄마들의 기도와 자식들의 배신을, 보도블록으로, 다리로, 종탑으로, 성당으로, 거리 이정표로, 성벽으로, 묘지로, 지하수로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런던 하면 떠오르는 내 눈 앞의 풍경은 BBC 클래식 프로그램을 벽에 꽂아놓고 이따금 그 프로그램을 올려다보며 마치 생의 모든 즐거움이 한 번의 콘서트에 있는 것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림질을 하는 카리브해 계열의 뚱뚱보 세탁소 아저씨다. 그의 조상이 영연방 어느 나라에서 어떻게 배를 타고 어떤 해안에 내렸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런던이란 도시를 이루는 것은 과거 그의 조상들의 염원과 수년째 가보지 못한 먼 고향 나라의 체험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런던의 히스패닉 음악, 다양한 커리 냄새, 양고기 냄새와 최초의 로마인이 두고 간 미트라 신의 조각, 노르만족이 만들었다는 런던탑 성벽, 웨스터민스터 사원의 성가대석, 크리스토퍼 랜 경의 세인트 폴 돔은 모두 함께 런던의 풍경을 만든다.

우리는 이제 원자력 에너지 준위 g정도의 강력한 에너지로 점퍼가 되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런던 발 세기의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때 우리 등 뒤에서 이런 시를 읊조려주길 바란다.

우리는 탐험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탐험이 끝날 때면
출발한 곳에 닿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곳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T S 엘리엇 )


스페이스 오디세이 식으로 말하면, 별의 아이라면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장난감이 바로 눈앞에 있다. 바로 지구라는 이름으로. 여행의 아이라면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장난감도 바로 지구다. 지구에서 첫 생명체가 태어난 곳이, 바다와 파도가 만나는, 조수가 밀려오는 바로 그 곳이었던 것이 지금 이 순간 생각이 난다. 우리도 우리의 바닷가에 서 있다.

그 바닷가에서 긴긴 여행을 통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달고도 오묘한 모든 사랑이 그런 것처럼, 우리가 인생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여행은 내가 당신이 되고, 당신이 내가 되는 여행이라는 것. 나는 카리브출신 배불뚝이 세탁소 주인,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 런던탑의 죄수, 로마군인,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켈트인, 최초로 큰 배를 만들어 안개 낀 섬으로 항해를 떠난 노르만 족 선원, 교통 혼잡세를 매기는 런던 시장. 순결한 올리버 크롬웰, 앤 블린, 메리 스튜어트, 비비안 리, 로렌스 올리비에, 기네스 펠트로, 세익스피어의 연인, 해적, 올리버 트위스트, 톨킨의 골룸,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을 단 미이라가 되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별과 항성이 쏟아져 내리는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마치고 현실로 귀환한 보먼(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주인공)처럼 아직 시험을 거쳐보지 않은, 새롭게 생겨난 자신의 힘을 믿고 기다릴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사는 동안 우리는 우리 역시 어느 날 어딘가에 뚜렷이 존재하게 될 것이란 걸 믿게 된다. 도시의 빛과 어둠 속으로. 기억 속으로. 풀리길 기다리는 수수께끼 속으로.

그리고 여러분이 점퍼가 될 때 외로우면 날 불러 달라. 해리포터의 헤그위드처럼, 혹은 상기된 뺨을 가진 작은 새처럼 날개를 퍼덕이며 옆에 있을테니. 지지배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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