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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나의 심장을 어디에 묻을까"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에서 점퍼가, 웨스트 민스터 사원 1

워즈워드는 웨스트 민스터 사원을 처음보고 대지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본 웨스트 민스터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중간계 같은 곳이다. 선과 악이 만나고 절대 권력과 절대 반지를 두고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은 선이 승리하는.인간 세상은 희생을 통해 다시 한번 고결해지는.

반지의 제왕을 지은 톨킨은 방에다 언제고 중간계 지도를 걸어 놓았었다.런던도 지상에 웨스트 민스터를 걸어놓았다.

내가 본 웨스트 민스터의 첫인상은 황금색으로 짠 꿈이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기 직전에 굳어버린 것 같고 사랑하는 여인의 금빛 머리카락이 하늘에 올라가 별자리로 되기 전 지상의 끄트머리에 마지막 관능을 떨구느라 하체는 세속적이고 상체는 성스러운 것으로 화하는 찰나같고, 지상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말하지 못한 약속이 가득 수놓아진 섬세한 레이스가 하늘에 걸린 것 같고, 말을 타고 먼 길 달려온 온 중세 기사가 자신의 더러움과 먼지를 한 점이라도 그 안에 떨어 뜨릴까봐 두려움에 정결하길 바라는 호흡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결정체 같고, 누구라도 지상의 것은 잠시 놔둬라 라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 앞에 내리까는 속눈썹에 떨어지는 환영 같고,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것은 건물의 첨탑이 아니라 내 영혼이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내 몸이 황금색으로 도포되는 찬란함 같고, 그런 느낌이었다. 지상의 음울함은 이 건물 안에서 위로받기 보다는 망각되어야 하는 존재 같고 더 나은 미래는 의심할 여지없는 오래전 약속 같이 느껴진다. 이 안엔 황금성배, 원탁의 기사, 성스러운 돌, 첨탑 주위를 도는 혜성, 그날치의 물고기를 무릎 꿇고 바치는 가난한 어부, 낯선 여행자가 들어선 뒤에 환하게 불타오르는 라임 스톤. 돌로 된 손으로 기도하는 왕, 수백년 동안 자지도 않고 감지도 않고 지켜보는 눈동자같은 이야기가 가득할 것 같다. 일개 왕에게는 머리를 조아릴 수 없어도 이 건물이 주는 약속 앞에선 고개를 숙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건물이다. 이 건물 앞에서 보면 템즈강 건너편 사우스 뱅크의 현대적 건물들이 오히려 공정 라인을 타고 나온 기술 복제 상품, 두둑한 연봉과 보너스의 향연처럼만 느껴진다.

이 건물의 파트너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대로 범람하는 템즈강, 강에서 바다로가 아니라 바다에서 강으로 물이 흐른다는 그 템즈강과 그리고 하늘뿐이다. 이 건물에선 단정하게 정리된 유람선 떠다니는 템즈강을 보는게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이 건물에선 배와 인간들의 이야기와 악취와 역병과 화재, 왕들의 출정, 전쟁, 공습, 뱃놀이, 헨델의 수상음악에 얽힌 얼굴이 천겹 겹쳐 떠오르는 수세기 전부터의 회화적인 템즈강을 보는게 현실적이다

이 건물 앞에서 나는 북위 51.5도의 의미를 알아챘다. 이곳에서 어둠은 서서히 오는 것, 어둠은 황금색으로 오는 것. 어둠은 기다려야 하는 것. 그래서 그 어둠은 가슴 깊히 받아들일 수 있다.

▲ 웨스터 민스터 사원. ⓒ정혜윤

이 건물은 외양이야 어떻든 속사정은 전설과 현실,이야기와 역사 사이에 놓여 있다. 정복왕 윌리엄이 그랬던 것처럼, 십자군에 전사로 뛰어나가고 결국엔 남편인 헨리 2세를 밀어내고 자기만의 왕국을 갖고 싶어했던 엘리노어 왕비가 그랬던 것처럼, 엘리자베스와 메리스튜어트가 그랬던 것처럼. 다이애나와 찰스 황태자가 그랬던 것처럼.

1066년 색슨족에게서 노르만족으로 왕권이 넘어간 그 해부터 웨스트 민스터는 특별해졌다.

나는 참회왕 에드워드가 숨진 뒤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진 1066년의 일은 바이외 태피스트리 속으로 먼지로 쾍쾍 거리며 날아 들어간다.

내 눈 앞에는 영국왕의 자격이 거의 없던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교황을 설득해 베드로의 모발이 들어있는 반지를 받고, 전 유럽의 모험을 즐기는 귀족들이 윌리엄이 약속한 영국의 토지와 금전에 홀려 앙주, 브루따뉴, 플랜더즈, 아라곤에서 모여들고, 그들이 바다를 건널 750척의 선박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벌채하고, 마침내 기병으로 무장한 노르만군대와 보병인 영국군이 맞서 싸우고, 윌리엄은 위장 전술을 써서 후퇴하는 척하다가 적을 포위하고 그 전투에서 결국 영국군 섹슨계 해럴드 왕이 전사하는 풍경이 펼쳐져있는데 그 때 웨스트 민스터 사원 위에는 혜성이 하나의 징조처럼 걸려 있다.

▲ 바이외태피스트리의 일부.

1066년 크리스마스로 날아가 본다면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능수능란한 정복왕 윌리엄이 그 날 웨스트 민스터에서 웃음을 참으며 왕관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그 날 이후로 웨스트 민스터는 왕들의 대관식 장소가 되었다.윌리엄이 대관식 며칠 전에 런던탑의 기초가 될 돌을 막 놓았다는 것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다. 웨스트 민스터와 런던탑의 차이는 왕이냐 죽음이냐의 차이이고 이후 모든 대관식장을 걷는 왕과 여왕들의 발걸음엔 그런 사연들이 또각또각 따라붙는다.

나는 웨스트 민스터에서 대관식을 올리지 못한 두 에드워드 중 하나인 어린 에드워드 왕자의 이야기를 런던탑 블러디 타워에서 들었다.어느 날 삼촌을 따라 런던탑에 들어간 에드워드 왕자와 그의 동생은 그 뒤로 두 번 다시 탑에서 나오지 못했는데 누군가는 어린 소년의 얼굴을 창문으로 흘깃 보았다는 둥, 누군가는 두 소년이 런던탑 마당에서 노는 것을 보았다는 둥,누군가는 그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는 둥, 누군가는 형이 어린 동생을 달래는 밤의 나지막한 소릴 들었다는 둥,누군가는 그들의 어미가 런던탑 문 앞에서 섦게 울다 실신하디시피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는 둥,하지만 어느날인지부터 아무도 두 번 다시 왕자들을 보지 못했다는 둥. 몇백년 뒤 런던탑에서 어린 소년의 유골이 발견되었을 때 모두들 바로 어린 에드워드 왕자일 걸로 믿었다는 둥,그래서 그 유골도 웨스트 민스터로 옮겨졌는데 현대 과학의 힘을 빌어 유골에 대한 조사를 해보니 유골은 뜻밖에도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아이 것으로 밝혀졌다는 둥, 아직도 논란중인 그런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들이 결혼식장인 동시에 대관식장, 대관식장인 동시에 장례식장, 장례식장인 동시에 무덤, 무덤인 동시에 교회인 이곳을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중 일부를 바람처럼 내 귀에 속삭여 주었다.

언제나 중세 기사들의 로망을 생각나게 하는 첨탑으로 가득한 고딕 양식 웨스트 민스터는 지상 사람들에게 충성과 굳은 언약, 폭력 뒤의 연회, 전쟁 뒤의 보상, 다시 못 볼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왕녀와의 결혼, 화려한 수행단, 바스 기사단, 길거리에 뿌려지는 금화, 공짜로 나눠주는 포도주. 잉글랜드 왕관, 대관식의 봉, 네번째 손가락에 끼는 반지. 대관식 의자, 자주빛 휘장, 구경하느라 모여든 런던 시민들, 일제히 울려 퍼지는 종소리 같은 것을 끝없이 상상하게 하는데 결혼식, 대관식, 장례식, 무덤 중 관광객인 우리의 눈길을 영구히 끄는 것은 역시 무덤들이다. 그곳에서 무덤들의 역할은 고난도 검법을 수련중인 닌자들에게 주는 수행 교본 같은 것들이다. 이들의 삶을 보고 배워라. 바보와 악당들의 이야기도 들어라.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둔감한 너의 머리를 내리쳐라.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이빨 빠진 노파처럼 회춘을 위해 무덤의 비문을 읽는다.그 때 무덤의 비문을 에워싸고 있는 은은한 불빛은
나에게 묻는다.피곤한가? 끝내고 싶은가? 춤을 멈추고 싶은가? 아니면 햇살 속으로?

나는 이곳에서 가장 아이러니컬한 무덤인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의 무덤 사이로 날아갔다. 그 둘의 무덤은 이곳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선 자매처럼 가까운 곳에 있지만 그 둘은 살아있는 동안엔 만나지 못했고 (만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고) 불굴의 진 빠지는 기 싸움만 벌였다.

나는 메리스튜어트 하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새벽 4시의 결혼식장과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처형식장이 생각난다.

▲ 메리 스튜어트의 초상화.
태어나던 날 아버지가 죽어버림으로써 응애 할 때부터 여왕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운명은, 감히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는 모조리 죽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 남편 프랑스 왕은 병약해서 죽고, (그 사이에 애인들이 죽어 나가고,)두 번째 남편 헨리 7세의 증손자 단리는 살해당하고(필시 그녀도 가담한,왜냐하면 그때 그녀는 남자중의 남자 몸을 갖고 있는 보스웰을 사랑했으니까)세 번째 남편인 보스웰은 여왕과 함께 공모해 단리를 살해하고 왕권까지 탐했다는 죄목으로 쫓겨 다니다가 현상 수배에 걸려 감옥에 갇혀 죽는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새벽 4시의 결혼식은 바로 세 번째 결혼식이다. 남편의 살인자이자 자신의 정부였던 보스웰과의 범죄로 맺어진 결혼식에서 그녀는 남편이 죽은지 석달도 지나지 않아 상복을 입고 뱃속엔 보스웰의 아이를 품은 게 거의 확실한 상태로, 축하의 인사는 커녕 그나마 썰렁한 하객 모두들 겁에 질린 상태로, 미사도, 오르간 소리도 없이, 반지도 없이, 어두운 관속 같이 오싹한 예배당에서 있어야 했다. 사랑에 눈이 먼 그녀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여왕 자리도 가족도 친구도 버리겠노라고 맘 먹었었지만,결혼식 직후에 사랑은 사실상 끝나버렸고, 군중들은 성이 나서 이 간통한 갈보를 쫓아버리라고 하였고 귀족들은 등을 돌렸다. 그녀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해 결국 엘리자베스의 잉글랜드로 도망쳐 버리는 이야기는 북구의 전설 그 자체다. 호수 속 외로운 섬에 갇혀있는 왕비. 왕비를 사랑하는 용감한 기사. 몸숨 건 한밤의 탈출, 그리고 그 전설에 떨어지는 떨칠 수 없는 어두움은 뱃속에 있던 그녀의 아이.아이를 찾기 위해선 그녀가 포로로 갇혀 있던 저 쓸쓸한 스코틀랜드의 호수의 밑바닥을 파보아야 한다거나 프랑스의 어느 수녀원에 가봐야 한다거나 등등등. 메리 스튜어트에게 영국에서의 꿈은 엘리자베스의 숙적인 스페인을 움직여 웨스트 민스터에서 대관식을 올리는 것,그녀는 자신이 웨스트 민스터에 가고 엘리자베스가 런던탑에 가는 상상으로 전유럽에 비밀 편지를 보내며 끝없는 허망한 외교놀이에 일생을 바친다. 빨래 더미 속에, 책속에, 거울 뒷면에 넣어져 전 세계로 보내질 공허한 편지를 쓰는 동안 그녀는 얼마나 자주 이 웨스트 민스터를 열렬한 눈초리로 바라보았을까? 얼마나 저 앞에 서고 싶어했을까? 그리고 마침내 교묘하게 엉킨 음모 속에서 그녀는 엘리자베스의 시해를 기도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는데 사형장으로 가는 그녀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는 위엄 있는 여왕 그 자체였다. 그녀는 마치 축제의 의상을 고르듯 ,대관식을 준비하듯 정교한 의식에나 어울릴 가장 좋은 옷, 눈을 가릴 가리개, 마지막 피비린내 나는 순간을 위한 핏빛 속옷과 팔을 가리는 길다란 핏빛 장갑을 며칠에 걸쳐 정성껏 손수 골랐다.

낭만적이지만 위험한 북유럽풍의 음울한 발라드 같은 삶을 산 그녀의 무덤 옆에 있는게 바로 열정적이지만 수상쩍은 의도가 있는 소네트같은 삶을 산 엘리자베스 1세의 무덤이다.

엘리자베스는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대관식이 거행된 1월 15일은 매섭게 추웠는데.
.....

('런던에서 점퍼가, 웨스터 민스터 사원'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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