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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는 달을 가리켰고, 그들은 손가락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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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는 달을 가리켰고, 그들은 손가락을 봤다

YS 때는 '고장난 비행기' MB 땐 '포스트 김정일'?

"미국은 북한이 조만간 후계 문제를 둘러싼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우려한다. (…) 김정일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내부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지도체제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북한과 인근 국가의 긴장이 고조될 수 있을 것으로 우려한다."

"누가 김 위원장의 뒤를 이을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감안할 때 북한 핵문제에 대한 전략을 신속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목표는 북한의 행동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그들이 생각하는 다음 조치가 무엇인지 직접 듣길 원한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 분명히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나 이것이 공동의 책임이 되길 원한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19일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했던 발언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힐러리의 발언에는 특히 보수언론들이 솔깃하는 눈치였는데 '힐러리까지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후계를 둘러싼 암투가 심상치 않은가 보다' 혹은 '북한이 곧 위기에 빠지는 구나'하는 해석을 내놨다.

북한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후계 문제를 힐러리가 직접 거론한 것에 의미를 두면서 북한의 반발과 그에 따른 한반도 정세의 파장을 예상하는 언론도 있었다. 또한 '오바마 행정부가 이명박 정부의 일관된 대북정책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대북정책에 대한 견해차가 있는 중국을 겨냥한 메시지'라는 '독특한' 분석도 있었다.

▲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20일 이화여대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바마의 대북 특사 발표 왜 서울에서 했나?

그러나 힐러리가 20일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가진 공동기자회견을 들어 보면 보수언론들의 그같은 해석은 엉뚱한 곳에 방점을 찍은 자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힐러리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김정일의 건강이나 후계자와 관련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한 말이냐'는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대신 그는 "우리는 현존하는 (김정일) 정부와 협상을 하고 있다"며 "(북한에는) 부통령도 없고 총리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그나마 건재한 지금 빨리 북한과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뜻으로 읽히는 말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지금 현재 있는 북한의 그 정부에 대처하고, 현재의 지도부를 어떻게 6자회담 틀로 복귀시킬 것이냐는 것"이라는 힐러리의 다음 발언 역시 같은 의미였다. 그는 "분명한 것은 기존의 (북한) 지도부가 우리의 회담에 동참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사실 힐러리는 비행기 내에서 이같은 맥락의 말을 이미 했다. "누가 김 위원장의 뒤를 이을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감안할 때 북한 핵문제에 대한 전략을 신속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대목이 그러하다.

이는 북한에 서둘러 특사를 보내려는 오바마 행정부에 탐탁찮은 시선을 보내는 이명박 정부를 겨냥한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스티븐 보스워스 북한 특사 임명을 서울에서 공식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보수언론 헛발질, MB 정부에도 영향 미칠까

이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힐러리 발언의 강조점은 '북핵 문제를 빨리 풀어야 한다'는데 있다며 '위기'와 '후계' 부분에만 관심을 두는 해석은 오류라고 지적했다.

정 전 장관은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 분명히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나 이것이 공동의 책임이 되길 원한다'는 힐러리의 기내 발언을 예로 들며 "이명박 정부가 오바마 정부의 대북 구상을 따라와야 한다는 말"이라고 분석했다.

정 전 장관은 이어 "힐러리의 기내 발언과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그의 말이 뭘 뜻하는지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한 정부 당국자는 "의도적이거나 준비된 발언은 아니었다"며 "(후계 관련) 정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투명하고 우려된다는 것"이라고만 설명했다.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도 20일자 <프레시안> 기고문에서 유사한 해석을 내놨다. 그는 "북한에 대한 적대적 성격을 가진 발언이라고 볼 수 없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체제가 존속하는 시간 안에 보다 빠르고 실질적인 외교적 성과를 거두는 것이 매우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이어 "이명박 정부에게는 이런 한반도의 불확실한 상황을 악화시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통미봉남 불러온 YS의 '고장난 비행기'論

문제는 보수언론들의 이러한 왜곡된 해석이 이어질 경우 그들과 정세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가 다시 '희망적 관측'(wishful thinking)이나 '집단 사고'(group thinking)의 늪으로 빨려 들어갈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의도를 곡해한다면 결국 잘못된 정책을 낳을 수밖에 없다. 김민웅 교수는 "(북한의) 위기를 강조하는 입장은 강경 대응으로 연결되는 조처를 선택하기 쉽다"며 "그것은 위기의 증폭과 상황의 악화로 결말 지어진다"고 지적했다.

정세현 전 장관은 힐러리의 발언을 곡해하는 것과 유사한 사례가 과거에도 있었다며 김영삼 정부 시절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당시 클린턴 미 행정부의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북한은 고장난 비행기와 같다. 그러나 그 비행기가 경착륙(hard-landing)하도록 내버려두면 어떤 혼란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연착륙(soft-landing)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발언을 들은 김영삼 대통령은 '연착륙' 부분을 떼어 버리고 '고장난 비행기'만을 부각시키며 '미국도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본다'라는 식으로 정세를 인식했다.

정 전 장관은 "김영삼 정부가 통미봉남(通美封南. 북한이 남한을 무시하고 미국과만 대화함)의 덫에 걸렸던 것은 그처럼 미국의 뜻을 잘 못 읽었기 때문"이라며 "이명박 정부가 잘못된 해석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 시절과 같은 오류를 되풀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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