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의 1차적인 의미는 북한의 핵무기가 체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협상용이라는 뜻이었지만,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있는 거 아닌가요? 왜냐하면 문제는 (보유보다) 확산이라는 얘기도 했으니까...
이와 관련해서 걱정스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미 작년 말부터 미 합참 소속의 기관 두 군데서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문서를 간행했고,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도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 같은 표현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미국 군산복합체의 음모일 가능성이 짙다는 얘기를 하면서 경계해야 한다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정세토크 12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한다" 바로가기), 데니스 블레어 국장이 또 다시 그런 얘기를 하니까, 듣기에 따라서는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여러 가지로 불안합니다.
▲ 지난 13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아시아 순방에 앞서 아시아 서사이어티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공식 정책과 진짜 전략 다를 수 있어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19일 서울에 오는데 체류하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아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선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확실히 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정보기관이나 국방부 계통, 또는 군산복합체와 연결된 사람들은 핵보유국 지위를 사실상 인정하는 반면 국무부는 얘기가 다릅니다. 국무부는 북한이 핵을 폐기할 준비가 돼 있으면 국교 정상화까지 하고, 경제적 지원까지 하겠다는 얘기를 하죠. 또 북핵 협상의 책임이 국무부에 있기 때문에 일단 안심은 됩니다. 그래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천명한 정책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고, 폐기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공식 정책과 리얼 스트래티지(진짜 전략)는 다를 수 있어요.
북핵을 확실히 폐기시킴으로써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를 완전히 회복해야겠다는 게 오바마 시대 반확산 정책의 확실한 방침이라고 보는데, 그렇다면 미국이 북한의 핵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은 훨씬 더 높습니다.
그러나 군산복합체라든지 국방부 쪽의 이해관계 측면에서 보면, 미국이 관리할 수 있는 범위, 그런 수준의 핵을 북이 보유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는 자기네들의 이익에 보탬이 된다고 보고 어영부영 하다가 인정하는 쪽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핵보유국 북한'에 대한 주변국들의 속내
미국으로서는 북한이 핵을 몇 개 가지고 있어도 사실 겁날 건 없어요. 그러나 북한이 비록 저급한 수준의 핵폭탄이라도 몇 개 가지고 있다는 게 확인되는 순간...지금은 우리 정부에서도 확인할 길이 없고 북한도 몇 개라는 얘기를 하지 않고 실체를 보여주지 않으니까, 이른바 NCND(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음)로 나가니까 국민들이 '아니겠지' 하면서 불안을 크게 느끼지 않고 그런대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미국 대북 정책의 실수나 착오 때문에 북한의 핵보유가 기정사실화되는 순간, 핵무기의 실체가 확인되는 순간부터 우리 한국은 정치권 지도자들이고 일반 국민들이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핵을 가지면 안 된다는 점에서는 중국이 미국보다 훨씬 더 확실한 입장이라고 나는 봐요. 북한이 핵을 가지면 일본의 핵무장론에 탄력을 실어 주어 결국 핵무장을 불러오기 때문이죠. 일본이 현재 가지고 있는 플루토늄 양으로도 중국은 위협적인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북핵 제로를 지향하는 점에서 중국의 입장은 우리랑 유사해요. 중국은 일본이란 변수 때문에 막아야 하고, 우리는 북핵 그 자체가 위협이 되기 때문에 막아야 하죠.
일본의 입장은 두 갈래라고 봅니다. 우선 '절대로 핵무장을 해선 안 된다. 핵으로 피해를 받은 일본이 핵을 가지고 누구에게 피해를 주겠는가'라면서 비핵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에서는 북한이나 누구든 핑계를 대서 일본의 경제력에 걸맞은 군사대국이 되기 위해 핵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북이 핵을 가지면 일본이 핵무장을 할 가능성이 커요.
'핵보유국 북한'이 민족적 재앙이 되는 까닭
우리로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예단할 수 없지만…일단 핵무장론이 득세하게 되면 문제가 되죠. 그리고 한미 원자력협력이라든지 한미동맹이 가진 구속력 때문에 핵무장을 못 하고 미국의 핵우산이 제공하는 보호를 받고 살아야 하는 경우, 우리 국민들이 느끼게 될 좌절감이랄까…또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지불해야 하는 국방 관련 비용, 방위비 분담금, MD(미사일 방어) 문제 등과 관련해서 생각보다 훨씬 많은 돈을 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할지 모르지만, 한미동맹만 강화하면 된다는 얘기만 계속 하고 있으니까 모든 걸 미국에 의존하는, 따라서 미국에 의지하면 북한의 핵보유도 겁날 게 없다는 식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게 봤을 때, 북이 핵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는 반북(反北) 여론이 강하게 일어날 겁니다. 북한에 핵이 용인되는 순간 우리는 안보면에서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국민 정서까지 반북으로 흐르면 통일은 어려워집니다.
북한의 핵보유 문제에 이렇게 심각한 의미가 있다는 걸 정부가 인식하고 힐러리 방한 기간 동안, 물론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힐러리가 공식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게 미국의 리얼 스트래티지가 될 수 있도록 한미공조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핵을 폐기시키는 쪽으로 한미가 손잡고 나가자는 식으로 단단히 다져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미동맹이란 건 그런 걸 확실히 하는데서 의미가 있는 거예요. 미국산 무기 많이 사주고 한국군 전시작전통제권 가져오는 거 늦추고... 그런 것보다는 '북핵은 확실히 폐기시킨다.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지 못하게 한다. 6자회담 참가국들이 갹출을 해서라도 우크라이나 방식으로, 경제 지원 해주면서 핵을 폐기시킨다'는 식으로 확실히 방향을 잡아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까지 폐기시키기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비용, 그건 각오해야 합니다. 북핵이 폐기되지 않고 북한이 핵보유국이 될 경우 우리가 심리적으로 전전긍긍하고 미국에 매달리면서 미국이 팔고 싶어 하는 신형 무기나 MD를 사야하는 비용과, 북핵 폐기를 위해 우리가 내는 비용에 대해 냉철히 비교 계산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북이 완전히 등지면 미일도 대북 접근 어려워
북한도 핵보유국이 될 경우의 이점과, 핵보유국 욕심을 버릴 때의 이점을 냉철하게 계산해야 할 겁니다. 핵보유국 되면 우선 남북관계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습니다. 남쪽의 어떤 정부가 핵보유국이 된 북한하고 뭘 하겠다는 얘길 할 수 있겠어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북한이 거기까지는 안 갈 거라고 판단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했죠. 그런데 힐러리 국무장관도 지적했듯이 부시의 대북정책 때문에 핵실험까지 하게 되면서 지난 10년간 우리의 대북정책 때문에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는 누명을 썼지만…북한은 핵보유국으로 됨으로써 국내적으로 정치적 효과기 크다고 생각할 수 있고, 남한의 도움이 없어도 미국만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남한이 북한을 도울 수 없게 되면 미국도 사실 경제 지원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일본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되면 북한은 경제적으로 계속 어려운 상황이 될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북한이 그 득실을 잘 따져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이 핵보유국이 된다고 해서 우리가 벌벌 떨면서 '아이고 이제는 북한이 하자는 대로 해야겠다'면서 통일의 주도권을 북한에게 주는 그런 상황은 절대 안 일어납니다. 오히려 통일이 정말 어려워지기만 하죠.
▲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리언 파네타 중앙정보국(CIA) 국장(왼쪽), 데니스 블레어 국가정보국 국장(오른쪽). 오바마 행정부에서 새로 임명된 두 명의 최고위 정보 당국자들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겠다는 뉘앙스가 담긴 발언을 해서 주목을 끌었다. ⓒ로이터=뉴시스 |
평화협정 당사자 문제에서 드러난 미국의 속내
힐러리 장관이 첫 순방 대상으로 아시아를 꼽았다는 건 여러 가지로 의미가 큽니다. 미국은 지금 대서양 건너로는 유럽과 손잡고, 태평양 건너로는 동북아시아와 협조해서 경제·안보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경제적인 면만 보자면 동북아 쪽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일본과 중국이 있으니까.
유럽에는 프랑스, 독일, 영국이 있지만 요즘엔 말을 잘 안 듣거든. 프랑스하고 독일은 이라크 파병도 안 했잖아요.
아프가니스탄 파병 하면 돈으로나 몸으로나 어쨌든 때우는 데가 이쪽(아시아)이라고 보고 오는지 모르겠지만, 아프간 얘기를 꺼내면 우리는 물론 신중히 대응해야겠죠. 그렇지만 그러한 미국의 관심사에 대해 대응하는 것에만 시간을 쓰지 말고 우리의 아젠다를 확실히 제시해서 미국이 앞으로 핵보유국 문제에 대해 우리를 간단히 보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4월에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미 정상회담을 한다던데, 이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놔야 합니다. 이번에 답을 못 들어도 앞으로 계속 그 문제를 가지고 우리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단초를 열어놔야 합니다.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국 문제를 가지고 계속 치고 빠지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단 말예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미국 정부의 입장이라고 하면서도, 핵보유국으로 명기된 인쇄물을 지우지도 않고...쭉 흘려 놓고 한국이 따지고 나서면 그게 아니라고 하고 있으니 본심이 뭔지…나중에 그 결론으로 몰고 가게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면요…평화협정 당사자 문제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북한은 1974년 3월 전까지만 해도 남북이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베트남전에서 월맹과 미국이 직접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걸 보고 74년 3월부터 북미 평화협정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대해 미국은 평화협정은 남북이 하라고 하면서 '2+2'에서 앞의 '2'는 남북, 뒤의 '2'는 미중이라고 했어요. 중국과 미국은 보장만 하는…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한반도 평화협정을 4자회담 방식으로, 사실상 미국과 북한이 주역이 되는 회담을 미국이 즐기더란 말예요.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
기우(杞憂)이기를 바라지만, 참으로 챙기고 또 챙겨야 할 문제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 문제입니다.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現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석좌교수)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찾아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