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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48.0%를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바꾸자"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복지운동 주체는 국민

18대 대선이 끝난 지 열흘이 지났다. 보수 쪽은 "다시 한번 잘 살아보세"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어 있는데, 진보 쪽은 패배원인에 대한 분석을 계속하고 있다. 그만큼 트라우마가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1987년 대선(노태우 승리)은 소지역 선거였고, 1992년 대선(김영삼 승리)은 대지역 선거였고, 1997년 대선(김대중 승리)은 지역연합 선거였고, 2002년 대선(노무현 승리)은 인물 선거였고, 2007년 대선(이명박 승리)은 정권심판 선거였다. 이와 비교해 2012년 18대 대선은 보수와 진보의 한판 승부였다.

국민이 대선마트에 간 까닭은?

이번 대선의 화두는 단연 복지였다. 민주당은 보편적 복지상품을 들고 나와 복지국가를 외쳤다. 새누리당은 선별수준이긴 하나 이전보다 개량된 복지상품을 내놓았다. 대선마트 복지코너에서 지갑을 만지작거리던 소비자가 막상 선택한 것은 '새누리표 복지'였다.

품질에서 보자면 '민주표 복지'가 훨씬 우위였음에도 소비자가 의외의 선택을 한 것은 왜일까? 복지상품을 보는 안목이 소비자에게 없었나, 아니면 민주표 복지의 마켓 론칭이 미숙했었나? 그도 아니면 소비자가 대선마트에 간 것은 복지 상품보다는 식료품 구매가 주된 목적이어서 복지 코너에서의 고민은 대충했다? 이도 아니라면, 대선 마트에서는 아이 쇼핑만 하고 투표장으로 기 싸움하러 간 걸까?

많은 사람들이 48.0% 득표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복지운동 차원에서 보면 민주진보 대오가 들고 나온 공약(일자리, 경제민주화, 복지국가)이 이만큼 지지를 받은 것이 과분하기도 하다.

48.0%도 과분하다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민주진영이 압승을 거둔 것은 복지운동 출발의 기회였고, 2011년 8.24 서울의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이어 치러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두 번째 기회였다. 그런데 이 두 번의 기회를 '분위기' 정도로 흘려보내 버렸다. 복지국가에 대한 일관된 철학과 원칙이 결여된 전략 부재가 2012년 총선과 대선의 패배로 이어졌다. 더군다나 총선 비례득표에서 (새누리당과 자유선진당에 비해) 0.8% 앞선 민주진보진영이 대선에서 3.6%로 역전패한 것은 (투표율 54.2%와 75.8%의 분석과는 별개로) 명백한 패배이다.

2010년 이후 복지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등장한 것은 신자유주의 산물인 국제금융위기의 여파로 삶의 환경이 망가져 버린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민주진보 진영은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세 번의 선거에서 승리하였지만, 이 분위기를 '운동화'하지 못하여 뒤이은 2012년 두 번의 큰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역사의 전환점을 놓쳤다.

대중의 공감을 막는 장애물들

복지운동은 복지혁명과 다르다. 혁명은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행동세력이 집권세력을 붕괴시킨다면, 운동은 쟁점에 공감하는 대중이 (때로는, 선거를 통하여)세상을 바꾼다. 운동이 성과를 내는 데는 쟁점을 만들어내는 의제생산 능력과, 쟁점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관리 능력 있어야 하고, 의제생산과 과정관리를 총괄하는 (집단 또는 개인적) 세력이 있어야 한다.

2010년 이후 복지쟁점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중심으로 격렬하게 생산되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정치권을 공동저작권자로 인정하는 것까지 주저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공동생산자로 끌어들이고 유통시키려 했다. 이 시도는 천둥·번개와 같이 한순간에 정치권을 경악스럽게 장악하였지만, 2012년 4.11총선을 전후로 복지국가 태풍은 잦아들었다.

4.11총선을 통해 복지정당 출현에 올인 했던 전략이 차질을 빚으면서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안팎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그것은 곧바로 우리 사회 복지 쟁점 생산력에 영향을 미쳤다. 사실 복지 쟁점 생산이 어느 한 싱크탱크(두뇌집단)에 지나치게 의존해 온 현실이 문제였다. 사회복지학자와 현장 사회복지사들, 정치인들, 시민사회단체들은 복지 쟁점 생산에 앞장설 책무가 있음에도 그들은 소극적이었거나 무능력했거나 개념이 없었다.

논점이나 의제설정을 포함함 복지 쟁점 생산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다. 생산자의 대부분이 지식층이거나 운동권이란 전제에서, 그들의 뇌에서 생산되고 그들의 언어로 포장된 복지 담론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데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다. 하나는 대중소통에 대한 그들의 의지와 능력이 부족하고, 하나는 언론시장의 90%를 보수성 매체가 차지해 정보환경도 열악하다. 이에 더해 가장 큰 장애물은 지난 100년 동안 대부분의 세월을 우리 국민들은 반복지적 환경에서 숨을 쉬면서 살아와 그 삶의 역정이 우리 사고의 틀을 결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단도 통로도 모두 여의치 못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생산과 공감을 일정하게 총괄하는 국민적 세력이 있었나? 정치권, 시민사회단체, 사회복지계를 비롯한 학계 어디에도 없었다. 개별세력이 없으니 연대세력도 없다. 사회복지계에 '복지국가사회복지연대', 시민사회단체계에 '복지국가실현연석회의' 등이 있으나 역사가 일천하고 개점휴업상태와 다름없다.

복지운동은 섬세하고 대범해야

위와 같은 복지운동 환경을 감안할 때, 복지국가를 내세웠던 문재인 대선후보의 48.0% 득표는 엄청난 성과이지만, 그것을 오롯이 복지운동의 결실이라 말하기에는 낯간지럽다. 48.0% 안에는 복지국가의 지지보다 정권교체의 열망이 더 컷을 것이다. 4~5년 주기의 선거 때마다 정권심판(여당에서는 정권수호나 정권연장)을 주무기로 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옹색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국가'가 우리 사회 발전단계의 순리라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수많은 사회·경제·정치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좋은 대안이라면, 복지국가운동을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

굳이 '종합'이라는 단서를 단 것은 앞으로의 복지(국가)운동이 다원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복지쟁점의 생산과 유통[공감]과 관리의 삼각편대가 고공전과 지상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생산의 다원화가 (학계, 정치권, 시민사회)각각의 영역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생산의 다원화는 쟁점의 다양성을 낳고, 복지운동의 기반을 확대하고 공고하게 할 것이다.

복지 쟁점이 유통을 통하여 공감되는, 공감하는 과정에서는 특히 복지계와 시민사회계의 현장 활동이 중요하다. 생산과정을 고공전이라 한다면 공감과정은 지상전이다. "저소득층이 가장 보수적이다", "50대가 신보수층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경로당에서, 재래시장에서, 주부들 모임에서, 은퇴자 모임에서 복지쟁점이 유통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언어로, 그들이 말하도록 해야 한다.

무엇을? 복지 쟁점 그 자체가 주제가 될 것이 아니라 삶의 규범이 주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 무상급식이나 무상의료나 국민연금기금문제가 아닌,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몸이 아플 때는 병원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후세대 양육에 모든 것을 써버린 퇴직세대의 인생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위에서 말한 공감형성의 수단과 통로의 불리함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쟁점이 아닌 규범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가 복지운동의 관건이다.

복지운동은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개념과 사회 구성원의 그러한 삶(인권)을 담보해내는 사회구조에 대한 규범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결정하는 사회적 여건(정치적·사회적·경제적 인권)에 대한 개념과 규범을 공유하는 과정이 지루하고 지난할 수도 있지만, 이 과정 자체가 복지운동이고 인권운동이다.

마지막으로 복지운동의 연합세력 즉 연대의 문제이다. 연대에는 실질적이고 다양한 개별세력의 존재가 전제된다. 연대의 또 하나 전제는 인권과 복지국가에 대한 규범을 세우고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다. 복지국가가 장기간에 걸친 복지운동의 결실이라면, 지속적인 복지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섬세하고 대범한 행위가 필요하다. 연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섬세함을 간과했거나 대범함에 주저했을 것이다.

48.0%를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바꾸자

(조장과 선동의 문구로 종종 사용되는)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하지만, 2012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진보는 단결했지만 패배했다. 자기들만의 단결로는 안 된다는 증거이다. 국민과 소통해야 한다. 국민과 함께해야 한다. 국민들 편에서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소통이 (선거철에만 반짝할 것이 아니라) 복지운동과 시민생활의 일상이어야 한다. 결국에는 국민이 복지운동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될 때, 이 땅에 복지국가가 들어설 것이다. 시민단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처럼, 보통 시민이 보편적 복지의 규범으로 깨어나, 국민이 복지운동의 주체로 조직화 된다면 복지국가는 현실이 될 것이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과정을 뛰어넘는 결과는 없으니 시간은 괜찮다. 우리가 길을 정하고 그 길을 함께 가고 있다면.

정권교체의 열망이었던 48.0%를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바꾸는 것은 어떨까?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 정의, 인권, 평등, 민주주의라는 초석들이 필요한데, 대개 이것들을 주창하는 이들은 세력이 왜소하다. 이들이 50.1%의 지지를 연합해 낼 수만 있다면 의회와 행정부를 통한 복지국가계획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2012년의 48.0%를 복지국가에 대한 온전한 지지로 바꾸는 것을 복지운동의 1차 목표로 설정해보자. 불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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