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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진성여왕에 대하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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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다시 진성여왕에 대하여 1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46>

오래 전에 진성여왕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글 말미에서, "경문왕의 딸이며, 헌강왕과 정강왕의 누이동생이며, 그에 못지 않게 숙부 위홍 각간을 사랑한 여인이기도 했던 진성여왕 운운"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뭇 단정적인 어조로 내렸던 그 판단이 좀 섣불렀던 것 같다.

그 동안 진성여왕에 관한 글들을 찾아 읽다보니 진성여왕을 달리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가 새롭게 하나의 수수께끼로 떠오르고 있었지만 그 수수께끼를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부족이었던 것이, '결정적'이라고 할 만한 자료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귀한 자료가 하나 나오기는 했었다.

2년 전 해인사에서 진성여왕과 관련이 있는, 아니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짤막한 문건을 하나 공개했는데 다름 아니라, 해인사 장경각 안 법보전에 있는 목조 비로자나불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불상에 금칠을 다시하고 복장(腹藏)유물을 봉안하는 개금불사를 준비하던 중에, 불상의 복장물 납입 공간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誓願大角干主燈身賜弥右座妃主燈身O
(서원대각간주등신사미우좌비주등신O)
中和三年癸卯此像夏節柒金着成
(중화3년계묘차상하절칠금착성)

▲ 해인사 쌍둥이 비로자나불 @해인사

해인사 측에서는 이 두 문장을 두고, 첫줄을 "서원하옵나니 대각간님께서 자신을 밝히시어 은혜로 가득 채우시고, 오른쪽 자리의 왕비님의 등불 몸도…"로 읽고, 두쨋줄은 "중화3년 계묘에 이 상(像)을 하절에 옻칠과 금칠을 착수하여 이루었다"로 읽고 있다.

묵서명의 두 번째 줄 첫머리에 쓰여진 '중화3년 계묘'라는 귀절이 불상의 조성연대를 말해주고 있는데, 헌강왕 9년인 883년이다. 이렇게 연대가 밝혀지면서, 이 불상은 지금까지 발견된 우리나라 목불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같은 해인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지고 있던 비로자나불이, 먼저 발견된 법보전 비로자나불과 크기와 형태가 같고 복장유물도 일치한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두 불상은 같은 시기에 조성된 쌍둥이 불상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렇게 되자 해인사 측은 두 비로자나불을 각각, 묵서명에 나오는 대각간과 비(妃)의 원불(願佛)로 보고, 나아가서 대각간을 위홍으로, 비(妃)를 진성여왕으로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추정에 대해 일부에서는 묵서명에 나오는 헌강왕 9년에는 위홍이 살아 있었고, 진성여왕도 왕이 아닌 북궁 장공주(北宮 長公主)로 불리우던 시절이어서, 두 불상이 각각 위홍과 진성여왕의 원불이라는 주장에 무리가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 해인사 법보전 비호자나불 묵서명 @해인사

그러나 해인사 측에서는 두 불상이 대각간 위홍과 진성여왕의 원불이라고 기정사실화면서 2005년 9월부터 100일 동안 '두 분 비로자나부처님 친견대법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6년 여름에는, 칠월 칠석날에 '비로자나데이' 축제를 열면서 축제의 부제를 '천년의 사랑'이라고 붙여 두 사람의 사랑을 기리는 행사를 대규모로 벌이기까지 했다.

이제 와서 솔직해지자면, 나는 먼젓 글에 썼던 것처럼 진성여왕이 "숙부 위홍 각간을 사랑한 여인"이었던지에 대해 자신이 없다. 아니 근래에 들어와서는 도리어,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있었던가를 의심하기 시작한 편이다. 내가 이렇게 옛 주장을 번복하려는 데에는 나름대로 뒤늦은 깨달음이 있기도 하다. 그 깨달음을 말하기 전에 진성여왕에 관한 기본 텍스트로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부터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진성여왕의 이름은 만헌(曼憲)인데 곧 정강왕의 동모매(同母妹)이다. 왕의 배필(配匹)은 위홍 대각간이니 추봉하여 혜성대왕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진성여왕과 위홍이 부부였다는 얘기다. 해인사 측에서 두 불상을 위홍과 진성여왕의 원불이라고 단정하여 '비로자나 데이'라는 행사를 벌인 데에는 바로 이 대목이 근거가 되었던 것같다.

그러나 정사(正史)로 꼽히는 『삼국사기』의 기사는 『삼국유사』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진성여왕 즉위년조 기사를 보면 "휘(諱)는 만(曼)이요, 헌강왕의 여제(女弟)이다."라 했고 그 2년조 기사에서 "왕이 전부터 위홍과 좋아지내더니[與魏弘通], 이 때에 이르러는 항상 입내(入內)하여 용사(用事)케 하고 …… 위홍이 죽으니 그를 추시(追諡)하여 혜성대왕이라 하였다. 왕은 이후로 비밀히 2, 3명의 소년 미장부를 불러들여 음란(淫亂)하며 이에 그들에게 요직을 주고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 논조 자체가 판이하다. 전자(前者)가 "왕의 배필…" 운운하여 위홍을 진성여왕의 배필로 지칭하고 있는 데에 비해, 후자는 "위홍과 통(通)했다"고 하여 불륜관계로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위홍이 죽은 후에는 2, 3명의 소년 미장부를 불러들여 음란한 행위를 했다"는 직설적 표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두 기록 중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두 기록 중의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진성여왕 관련 기사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진성여왕과 위홍은, 『삼국유사』에서는 '부부(夫婦)' 사이고, 『삼국사기』에서는 '사통(私通)' 관계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문헌은 하나의 사실을 두고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음이 드러나는데, 그 '하나의 사실'이란 두 사람이 잠자리를 같이했던 사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막말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섹스를 즐겼던 것일까? 나는 그건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국왕이나, 대각간이라는 지위 자체가 부담스러워서라도 그렇게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왜?"라는 물음이 뒤따른다. 숙질(叔姪) 사이면서 군신(君臣) 관계에 있었던 두 사람이 적지않은 부담을 떠안으면서까지, 왜 남녀의 관계로 다시 얽히게 되었을까? 이쯤에서 우리는, 진성여왕과 위홍 두 사람의 관계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보다 넓은 시야에서 당시의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왕위 계승과 관련되는 정치적인 상황을 세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같다.

진성여왕은 작은 오빠인 정강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정강왕은 그 형인 헌강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고, 헌강왕은 또 그 아버지 경문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한 마디로, 경문왕 이래로 그 맏아들, 둘째 아들 그리고 딸이 차례로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이는, 신라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3대(代)에 걸친 '형제 상속'이었으며, 진성여왕은 그런 '형제 상속'이라는 변칙적인 왕위계승의 마지막 주자라는 위치에 처해 있었다.

'하대(下代) 신라'에서는 왕위 계승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38대 원성왕 이후부터 살펴보자면 태자의 계위(繼位)를 통한 정상적 왕위계승이 네 번 있었고, 나머지 네 번은 찬탈에 의해 이어졌다. 특히 42대 흥덕왕 이후에 43대 희강왕, 44대 민애왕, 45대 신무왕이 연이어 찬탈(簒奪)을 통해 왕위에 오른다. 이런 변칙적인 과정 끝에 46대 문성왕이 자신의 숙부인 헌안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어서 47대 헌안왕이 유조(遺詔)로 사위인 경문왕에게 48대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말하자면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 결과 왕권이 경문왕 집안으로 넘어와 4대에 걸쳐 왕위가 계승되고 있었는데 정강왕 이후, 경문왕가는 진골(眞骨) 남자의 대(代)가 끊기어 경문왕의 딸인 만(曼)이 진성여왕으로 왕위를 잇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진성여왕을 뒤이을 후사(後嗣)가 없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경문왕이 죽은 후 국정은 경문왕의 동생인 위홍이 이끌어가고 있었다. 위홍은 친형인 경문왕이 죽은 후, 자신의 장조카인 헌강왕이 10여 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상대등이 되어 헌강왕을 보좌하면서 주도적으로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그러한 사정은 헌강왕이 10여년 재위 끝에 죽고, 그 동생이 정강왕으로 즉위하였을 때에도 여전했다. 위홍은 경문왕 재세(在世) 때부터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경문왕 말년에 이찬 근종의 모반을 진압했을 뿐 아니라, 헌강왕 5년에 모반하려던 일길찬 신홍을 복주(伏誅)한다든가, 정강왕 2년에는 한주(漢州)의 이찬 김요가 일으킨 반란을 토주(討誅)하는 등 오랫동안 조카들의 왕권을 지켜주고 있었다. 이처럼 위홍이 섭정 역할을 하면서 경문왕가의 왕위가 유지되어 왔는데 진성여왕 즉위 후에는 후사(後嗣)의 부재로 왕권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갈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홍은 자신의 가문에서 계속 왕위를 이을 수 있는 대책 마련에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뾰죽한 대책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진골 남자가 있어야 하는데 경문왕가에서 위홍 말고는 다른 진골 남자가 없었다. 나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이러한 위기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苦肉策)으로, 위홍 자신이 독신이었던 진성여왕과 결합하는 방안을 내놓았으리라고 한번 생각해 본다. 다시 말해, 위홍이 자신과 진성여왕과의 사이에서 소생을 보아 왕통(王統)을 이으려는 도박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숙질 간의 결합이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윤리적으로 부당함을 넘어 엽기적으로까지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같다. 그 이유는, 진흥왕이 자신의 고모와 결혼했다든가, 흥덕왕이 자신의 질녀(姪女)와 결혼했다든가 하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 왕실에서는 근친혼을 금기(禁忌)로 여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몇몇 학자들이 당시 진성여왕은 20대 초반, 위홍은 40대 중반으로 그 나이를 추정하고 있음에 비추어, 두 사람 다 충분히 생산(生産)을 기대할 수 있는 연령이었다는 점도 그런 결합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진성여왕 2년에 위홍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러한 시도는 무위(無爲)로 끝났다.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은 위홍을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시(追諡)했는데 이는 위홍의 노고(勞苦)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성여왕은 바로 황음(荒淫)에 빠지게 되어, "왕은 이후로 비밀히 2, 3명의 소년 미장부를 불러들여 음란(淫亂)하며 이에 그들에게 요직을 주고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였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는, 경문왕가의 후사를 이으려는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 버린 데에다, 듬직한 패트론으로 믿고 의지해 오던 위홍마저 죽은 데에 대해, 진성여왕이 자포자기했던 정황을 극명히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었을지?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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