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비문서의 요지는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휘하의 보안병력과 파타당 내 미 동조세력을 강화해, 올 가을 쯤 현 하마스 주도의 팔레스타인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총선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현 팔레스타인 정부에서 하마스 세력을 축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극비문서는 미 정보기관의 영문 문서를 요르단정부가 아랍어로 번역한 것으로 요르단 정부의 한 관리가 신문사 측에 건네준 것이었다. <알 마즈드>의 한 간부는 이 문서가 "미국과 아랍 측이" 작성한 것으로 "한 아랍국가 정보기관 책임자에 의해 압바스 수반에게 전달됐다"고 밝혔다.
문서 내용은 폭발적인 것이었다. 만일 압바스 수반이 이 계획에 동의했다면(그가 동의했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자기 자신의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방조한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요르단 정부 당국은 그날 밤 <알 마즈드>를 인쇄하던 인쇄소를 급습해 인쇄를 중단시켰다. 요르단의 안보와 국익에 해가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위의 글은 미국의 중동전문가이자 한때 아라파트의 정치고문을 지냈던 마크 페리가 지난 5월 17일 <아시아타임스>에 기고한 기사의 일부다. 현재 베이루트에 본부를 둔 '콘플릭츠 포럼'의 공동 사무국장이기도 한 페리의 이 기사의 핵심은 미국이 언제나 하마스를 제거하고 압바스를 지원하려 했다는 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18일 하마스가 배제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경제적·정치적 제재를 해제하고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을 두고 <뉴욕타임스>는 "전광석화와 같은 대응"이라고 평가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대응'의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미 국무부가 이처럼 이례적인 민첩함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모든 상황이 미국이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압바스가 감행한 '하향식 쿠데타'에 미국이 지지를 보낸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압바스는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압바스가 내각 해산을 선언한 것뿐 아니라 하마스와 파타당 지지자들 간 유혈충돌도, 더 거슬러 올라가 하마스와 파타당 간 공동내각 구성이 오랫동안 지체되며 갈등의 불씨를 키워 온 것부터도 모두 철저하게 미국의 계획 하에 이뤄진 일이었다.
국무부를 움직인 것은 엘리엇 아브람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을 위시한 행정부 내 네오콘 세력이었고 팔레스타인을 내전의 위기로까지 몰아가면서 이들이 도모한 것은 이스라엘을 인정치 않는 하마스의 축출이었다.
팔레스타인 유혈 충돌이 반가운 네오콘
알바로 데 소토 전 유엔 중동특사가 지난 5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부시 행정부가 하마스와 파타당 간의 분열을 획책해 온 과정이 자세하게 기술돼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에 급진 테러세력으로 '찍힌' 하마스는 작년 1월 총선에서 승리한 직후부터 온건 파타당과 공동내각 구성을 추진했다. 그러나 화해와 통합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미국이었다.
데 소토 전 특사는 "미국은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하마스를 구분해 내는 경계선이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는 물밑에서는 파타당이 하마스와 손을 잡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으면서 대외적으로는 '하마스가 일방적으로 정부를 운영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는 원조를 봉쇄했다. 이스라엘 역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의 관계를 끊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대신 거둔 월 5500만 달러의 세금을 넘기지 않았다.
지난 3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재로 하마스와 파타당이 만나기 직전까지도 부시 행정부는 팔레스타인의 양대 정치세력이 대립하길 바란다는 시그널을 끊임없이 보냈다.
급기야 '메카 회의'로 이름 붙여진 이 회동을 일주일 앞두고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미국 대사는 다른 나라 대사들을 만나 공공연하게 "나는 현재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폭력 상황을 좋아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가자 지구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하마스에 대항하고 있다는 의미"라며 흡족해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회의에서 파타당은 하마스와의 공동내각 구성에 합의했지만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보안군과 보안기구 공유 합의는 지키지 않았고 이는 두 세력 간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스라엘도 럼스펠드도 반대한 '하마스 배제 구상'
팔레스타인 내전의 씨앗을 뿌린 것은 급진 하마스가 아니라 하마스를 고사시키려는 부시 행정부였다는 얘기다.
하마스 고사 작전이 부시 행정부 내에서 어떻게 구상되고 실행됐는지는 서구와 이슬람 국가 간의 외교관계를 연구하는 <콘플릭츠 포럼(www.conflictsforum.org)>에 지난 1월 게재된 보고서를 통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보고서는 이미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승리한 직후부터 엘리엇 아브람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이 팔레스타인 쿠데타를 예고했다고 밝혔다.
백악관이 팔레스타인 사업가들을 초청해 만찬을 베푼 자리에서 아브람스는 "미국이 하마스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쿠데타를 지원하겠다"고 공언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팔레스타인인들 앞에서 아브람스는 한 술 더 떠 "지금까지 미국이 파타당에 무기를 공급해 왔으니 파타당은 팔레스타인 정권을 되찾기 위해 하마스와 싸울 능력이 된다"며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미국이 파타당 내 반 하마스 세력에 무기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랍 세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파타당 지지세력 주거지인 서안지구에서 유통되는 소총과 총알은 모두 미국의 지원 아래 중동 내 친미국가인 이집트나 요르단에서 공수된 것이다. 아브람스의 계획에 따라 이집트에서 소총 1900여 정이, 요르단에서 3000여 정이 파타당에 지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무기를 지원했다고 해서 요르단의 압둘라 왕이나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이 아브람스 계획의 성공을 기대한 것은 아닌 듯하다.
미국의 한 고위 관료는 "미국 외에 어느 국가가 팔레스타인의 내전을 바라겠느냐"며 "팔레스타인 사람이 자기 나라 인구의 50%가 넘는 요르단 국왕이 팔레스타인 내전에 동조할 리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중동 내 미국의 동맹조차 아브람스의 하마스 배제 계획이 백해무익하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미국이 밀어붙이니 할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었다.
아브람스 계획의 실효성에 의문을 표한 것은 중동 국가들뿐만이 아니었다.
중앙정보국(CIA)도, 이스라엘 내 미국 대사관도 이 계획을 반기지 않았고 하물며 같은 네오콘 진영의 도널드 렘스펠드 전 국방장관마저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동 친미국가들 내 이슬람 세력들을 극단적으로 몰아갈 수 있으며 특히 이라크 내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을 자극해 이라크 주둔 미군의 위험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중동 상황을 좀 안다고 하는 백악관 보좌관들은 모두 난색을 표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 내전을 일으켜선 안 되며 내전을 일으킨다고 해서 약해질 하마스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가 작년 12월 25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스라엘 정보기관조차 "하마스는 다른 세력으로 대체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런 시도는 파타당을 붕괴시킬 것"이란 요지의 보고서를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결국 아브람스의 계획에 동조한 것은 딕 체니 부통령과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일부 네오콘 세력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국무부의 '중동 파트너십 이니셔티브'에 하마스 배제 작전을 포함시키는 데 성공했고, 팔레스타인 내전을 일으킬 구상이 중동평화지원방안으로 포장돼 의회 승인까지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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