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미국과 이스라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압바스 수반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지난 해 1월 하마스의 총선 승리 이후 중단됐던 미국·유럽의 재정지원을 재개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으로부터 거둬들였으나 그동안 지급치 않았던 세금을 압바스의 새 비상내각에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서안 우선' 정책, 성공할 수 있을까?
게다가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는 급거 미국 워싱턴으로 날아가 19일(현지시간) 부시 대통령과 회담을 통해 '압바스 지원, 하마스 고사'를 강력하게 요청할 계획이라고 한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한 정치인은 19일 압바스를 돕기 위해 현재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는 파타 지도자 마르완 바르구티를 석방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압바스에 대한 팔레스타인인의 지지가 미약한 만큼 바르구티 같은 신망 있는 지도자가 그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같은 태도 변화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협조적인 서안지구에 대한 대대적 경제지원을 통해 압바스 치하의 이 지역이 번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가자지구의 하마스를 압박·고사시키면서, 만만한 압바스 정권을 상대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입맛에 맞는 중동평화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서안 우선(West Bank First)'정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구상에 대해 아랍은 물론 서방의 전문가들도 그들만의 '희망사항'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동지역에서 가장 모범적인 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하마스정부를 고사시키려는 미국의 분열정책이 정당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현실적으로 하마스를 말살시킬 수도 없으며, 팔레스타인 전체의 저항만을 불러와 중동의 불안정만 가속시킬 것이라는 분석이다.
허약한 지도자 압바스, 지지율 3%의 올메르트
우선 압바스나 올메르트 모두 제 나라 국민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허약한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7만의 파타 병력을 보유하고도 고작 1만의 하마스에 맥없이 무릎을 압바스 수반. 지난주 가자에서 하마스 병사들의 공격이 들어오자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고 사실상 도주해버린 파타 병사들의 모습은 압바스의 무기력을 드러냈다.
유라시아그룹의 분석가인 조프 포터는 18일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의 눈에 파타의 그런 모습은 바로 압바스의 모습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이스라엘의 뜻을 따르는 압바스의 정책은 현재 하마스에 비해 근소한 우위를 보이고 있는 서안지구에서조차 민심의 이반을 가져올 수 있다. 만일 서방의 원조가 재개되어 파타가 장악하고 있는 서안 주민들을 위해서만 쓰일 경우 하마스에 대한 가자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져 하마스는 가자에서조차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 15개월간 취해진 봉쇄조치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가 미국의 희망과 달리 하마스가 아닌 미국과 서방을 향했듯, 가자 봉쇄 역시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전망이 서방 언론을 통해 집중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올메르트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해 7월 섣부르게 시작했다가 호되게 경을 친 헤즈볼라의 전쟁 덕택에 그의 지지율은 3%대에 머물러 있다. 압바스와 함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한 서안지역의 유대인 정착촌을 일부 해체하거나, 서안과 이스라엘을 분리시키는 보안장벽 건설을 중단하는 정도의 양보를 해야 하는데 올메르트의 지도력으로는 꿈도 꿀 수 없다는 지적이다.
압바스 비상내각의 수명, 길어야 2개월
이보다 더 긴급한 문제로는 압바스가 미국 등 서방의 경제지원을 받아 지도력을 확보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압바스의 비상내각은 1개월 내에(법률 해석에 따라 2개월이라는 주장도 있음) 팔레스타인 의회의 추인을 받아야 하는데 현재 하마스가 지배하고 있는 의회가 이를 추인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현재 하마스 의석은 전체의 3분의 2에 가까우며 이중 절반 가량이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다)
물론 압바스 수반이 법을 무시한 채 비상내각을 끌고 갈 수는 있겠지만, 이는 사실상 쿠데타로 그의 정통성은 더욱 취악해지고 팔레스타인의 민심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때 야세르 아라파트의 정치고문을 지냈으며 20여년간 중동지역 전문가로 활동해온 마크 페리는 지난 17일 미 잡지 <하퍼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른바 중동평화과정은 이미 오랫동안 중단상태에 있었다.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에 강력한 지도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팔레스타인의 경우 파타가 아닌 하마스가 효율적이고 정직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미국과 이스라엘은 하마스라면 질색을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현재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대해 강경한 레토릭을 구사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협상에 나설 것이라며 미국과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협상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현 정책 강행하면 "가자지구, 이슬람주의 세력의 천국 될 것"
이스라엘군의 포위로 경제적 파탄에 빠진 가자가 하마스 내 강경 세력은 물론 이슬람주의 단체들의 거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가자 봉쇄가 미국의 의도대로 귀결될 수 없다는 예측을 뒷받침한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하마스의 지지자들이 고립될수록 그들은 더 과격하게 될 것이며 평화의 전망은 어두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별도의 칼럼을 통해 "하마스의 가자 점령은 이슬람 극단주의자와 지하드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저변을 넓혀가고 있는 현상과 함께 봐야 한다"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지하드 운동에 지원하는 사람들을 늘게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칼럼은 또 "알카에다와 연계된 무장집단들이 가자지구에 이미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말리아나 아프간 같은 나라가 자신들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고 초조해 하고 있다"며 "가자지구에 고립되어 절박한 상황에 빠진 140만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명 이스라엘의 안보에 커다란 위협요소로 성장할 것"이라며 경고했다.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15일 하마스와 파타가 임시정부를 세우도록 아랍권 국가들이 중재하고, 그 임시정부는 국제사회로부터 감시를 받는 새로운 선거를 치러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신문은 18일에도 미국과 EU가 팔레스타인의 내분에 개입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며 파타를 향해 현 상황을 이용하려고 들면 안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나아가 미국도 하마스의 일부 무장단체에 대해서는 기피하지만 하니야 총리와 같은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며 하마스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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