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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이라는 수수께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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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이라는 수수께끼 2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44> 처용의 행적과 정체


"제49 헌강대왕 때에 서울로부터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가옥이 즐비하고 담이 연(連)해서 초옥은 하나도 없으며 도로에 생가(笙歌)가 끊이지 아니하고, 풍우가 사시(四時)에 골랐었다."

'처용랑 망해사'조 기사의 첫머리이다. 생가(笙歌) 즉, 생황과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니, 백성들의 살림이 부유하고 기후마저 순조로워 태평성대였으리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때 대왕이 개운포에서 놀다가 장차 돌아올 새, 낮에 물가에서 쉬더니 홀연히 운무가 자욱하여 길이 희미한지라 괴상히 여겨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라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풀 것이라 하매 유사(有司)에게 조칙해서 용을 위하여 근경(近境)에 절을 세우려고 영(令)을 내렸더니 운무가 흩어졌으므로 개운포(開雲浦)라 하였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칠자(七子)를 거느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덕을 찬양하여 춤추며 풍류를 아뢰고 그의 일자(一子)는 임금을 따라 서울에 와서 정사(政事)를 도우니 이름을 처용이라 하고 왕이 아름다운 여자로 안해를 삼게 하여 머무르게 하며 또 급간(級干)을 시켰었다."
▲ 망해사터 부도 ⓒ김대식

처용은 이렇게 역사에 등장한다. 동해 용의 일곱 아들 중 하나라는 처용의 존재를 두고 학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하고 있다. 해석은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역사학자들은 동해 용이 '어떤 인간 존재'를 상징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중앙의 정권과 대립하던 울산 지방의 호족이 화해하려는 의도에서 질자(質子)를 바친 것으로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이슬람 상인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이재(理財)에 능한 서역인을 관리로 썼던 중국의 예를 끌어오기도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헌강왕 5년 조에 "3월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할 때,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 앞에 나타나 가무를 하였는데, 그 모양이 해괴하고 의관이 괴이하여 사람들이 산해(山海)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라는 대목이 이방인의 존재룰 암시한다는 점에서『삼국유사』의 기사와 짝을 이루기도 한다. 아무튼 처용은 헌강왕을 따라 서라벌로 와서 급간 벼슬을 하면서 왕의 정사(政事)를 돕게 되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의 안해가 매우 아름다워서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해서 밤에 그 집에 이르러 가만히 함께 자더니 처용이 밖으로부터 집에 이르러서 두 사람이 누워 자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물러가게 하니 노래에 가로되,

동경 밝은 달에
밤 이슥히 놀고 다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고나
둘은 내해었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다마는
빼앗는 걸 어쩌리
(홍기문 번역)

그때에 신(神)이 현형(現形)하여 앞에 꿇어앉아 가로되 내가 공(公)의 안해를 부러워하여 범하였으나 공의 성낸 것을 보지 못하니 감사히 여겨 지금부터는 맹세하여 공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門)에 들어가지 않겠다 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인(國人)이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가 나게[辟邪進慶] 하였다."
▲ 처용가비와 처용암 ⓒ김대식

저 유명한 '처용가'라는 향가의 유래이다. 누군가가 처용의 아내와 통정하다가 처용에게 들키게 되었는데, 간통 장면을 목격한 처용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나고, 간부(姦夫)는 그렇게 물러난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서, 자신을 보고도 성을 내지 않으니 그것이 감사하여 앞으로는 처용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간통을 들킨 평범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처용이 간통 현장을 목격하고도 노래부르고 춤추면서 물러난 점이 이상하지만, 간부가 무릎꿇고 빌었던 것으로 사건이 일단 해결된 것으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평범한 사건이 상식적인 선을 넘어 지나치게 윤색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통상적으로 간부(姦夫)라고 불리어야 할 자가 신(神)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역신(疫神)이라면 인간의 병(病)을 주관하는 신이란 뜻이겠는데 무슨, 신이라는 존재가 여염집 여자 하나를 관계하고는 그 남편에게 무릎꿇고 맹세까지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 역신이 무릎꿇고 빌면서 "당신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처용을 문신(門神)으로 만들어 준 것도 허풍스럽다. 그러나 어쨌든, 처용의 입장에서 보자면, 헌강왕에게 발탁되어 신라의 벼슬아치가 된 후, 아내의 간통 사건이 희한하게 수습된 끝에 자신은 신(神)의 지위로까지 오르게 된 셈이다

민속학 쪽에서는 처용을 용신(龍神)의 사제자(司祭者)로서의 무당, 또는 역신을 쫓는 의무주술사(醫巫呪術師)로 봄으로써 역사학자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처용의 정체를 밝히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역신이 '처용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점에서 처용은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주술력을 갖는 문신(門神)으로 떠받들려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처용에 관한 인식의 변화와, 그 결과로 생긴 처용의 변신을 목격하게 된다.

"용(龍)에서 인간으로, 불사(佛寺) 창건의 발원자에서 왕정의 보좌자로, 보좌자에서 질병물림의 주술사로, 주술사에서 문신으로, 문신에서 풍류꾼으로, 풍류꾼에서 나례(儺禮)의 가면 쓴 극적인 역할자로, 그리고도 모잘라서 희생양일 수도 있는 주물(呪物)인 제옹으로, 처용은 전신(轉身)하고 또 변신(變身)해 나아갔다. 이 다변(多變)의 연쇄 어디에나 처용은 존재하고 있다. 그게 모두 처용이고 처용 아닌 것은 그 가운데 하나도 없다. 헌데 이 변화는 일차원적인 혹은 단선적인 변화가 아님에 유념하고 싶다. 이것은 적어도 서로 다른 종(種)과 종 사이의 상호전환이라서 역시 다시 한번 '범주의 전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처용은 곧잘 물구서고 둔갑하곤 한다."
▲ 개운포 성터 ⓒ김대식

일찌기 처용을 민속학적, 신화학적으로 접근해왔던 김열규 교수가 묘사하는, 처용 정체의 변이 과정이다. "곧잘 물구서고 둔갑하는" 처용의 변신 과정에서 『삼국유사』는 용에서 인간, 불사 창건의 발원자에서 왕정의 보좌자, 거기에서 다시 주술사, 문신으로 변하는 과정까지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처용은 그 이후에도 풍류꾼으로, 다시 가면쓴 역할자로, 더 나아가서는 주물(呪物)인 제옹으로 계속 변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끊임없는 변신 속에서 처용의 정체성(正體性)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정체성이란 어떻게 보면 정체성(停滯性)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무릇 모든 존재는 어느 한 곳,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머무름으로써 머무른 그 장소, 그 순간의 제 모습과 노릇, 즉 정체(正體)를 가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처용의 정체란, 처용이 거쳐온 모든 시간 속의 모습과 노릇의 총합이면서, 그 총합을 이루고 있는 분절된 시간 시간의 순간적인 모습과 노릇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동해 용의 아들, 급간이라는 벼슬아치, 부정한 아내의 남편, 간부(姦夫)를 교화시킨 남자, 외입장이 사내들로부터 여인들을 지켜주는 문신(門神). 이러한 모습과 노릇은 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풍류꾼으로, 나례의 가면쓴 연기자로, 드디어는 "희생양일 수도 있는 주물(呪物)인 제옹"에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는데, 이쯤 되면 우리는 이 모든 모습들과 노릇들을 처용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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