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 가장 주목을 끌었던 것은 '핵보유국 조선(북한)의 비핵화 구상'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20일 오후 늦게 게재된 이 기사는 6자회담 북한 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18일 기조연설에서 했던 발언의 일부를 공개하며 이번 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핵포기 논리'를 상세히 전했다.
이에 조선신보 기사에 나온 북한식 한반도 비핵화 명제를 하나하나 해부해 본다.
1. 북한의 최종 목표는 한반도의 비핵화다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말은 북한 사람들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캐치프레이즈다.
그러나 북한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의 개념은 '북한의 일방적인 핵무장 해제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 미국 사이에 조성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모든 핵전쟁 위협을 근원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논리는 언제나 여기에서 출발한다.
조선신보는 "조선반도(한반도)에 핵무기가 남아 있으면 이러한 목표는 달성될 수 없다"며 이번 6자회담에 참가한 북한 대표단도 이같은 입장을 천명했고 "우리에게는 그 어떤 핵야심도 없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한반도에 핵무기가 없어야 한다는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것은 일견 모순이다. 조선신보는 핵무기라는 '전쟁억제력'의 확보를 통해 "조선반도와 그 주변에서 모든 핵전쟁 위협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보다 과감하고 적극적인 외교 공세를 펼치게 됐다"며 핵보유를 정당화했다.
2. '핵무기 폐기'와 '현존 핵 계획의 포기' 문제를 분리하겠다. 현 단계에서는 핵무기 폐기 논의를 할 수 없다
핵무기 폐기와 핵 계획 포기를 분리하는 것은 북한이 이번에 새롭게 내 놓은 카드다. 핵무기 폐기는 말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를 없애는 것이다. 핵 계획 포기는 영변 핵시설 가동 중단,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 핵실험장 폐쇄 등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계획을 중단하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에 제시했다는 핵 폐기 '사전이행조치'가 여기에 해당된다.
지난해 채택된 9.19공동성명에는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 내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했다"고 되어 있어 핵무기와 핵 계획의 개념이 이미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개념은 일반적으로 '핵폐기'라는 말로 뭉뚱그려져 인식됐다. 하지만 10월 핵실험으로 핵무기 보유를 기술적으로 증명한 북한은 그 둘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카드를 쪼개서 협상하겠다는 것이다. 조선신보는 김계관 부상이 일단 핵무기 폐기는 받아들일 수 없고 핵 계획 포기 문제만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2.1. 새로운 상황
핵무기 폐기를 논의할 수 없는 이유로 북한이 들고 있는 것은 9.19공동성명 이후 조성됐다는 '새로운 상황'이다.
조선신보는 "미국은 공동성명의 원칙을 배반하며 조선에 대한 핵전쟁 위협과 제재 압력 책동의 도수를 높였다"고만 말했을 뿐 '새로운 상황'의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핵전쟁 위협'과 관련해 북한이 언론을 통해 거론한 사항들을 돌이켜 보면 '새로운 상황'이란 북한을 핵 선제공격 대상으로 지목한 미국의 2001년 핵태세검토보고서(NPR)에 따른 각종 전투태세 정비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6월 3일 "지난 수십년 간 조선에 1000여 개의 핵무기를 들여온 것은 미국"이라며 "공화국에 대한 핵선제공격까지 정책화했다"고 비난했다.
이어 조선중앙방송은 6월 7일 "부시 호전세력은 미국의 세계제패전략, 핵전략의 운명을 미사일방어체제(MD) 수립에 걸고 발악적으로 추진시키고 있다. MD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핵전쟁 도발을 노린 것이다"라며 일본에 구축중인 MD체제를 지목했다. 조선중앙통신과 공산당 기관지 노동신문도 같은 날 스텔스기의 남한 배치 등 미국의 군사적 움직임을 거론하며 핵전쟁 도발을 기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같은 보도들이 7월 미사일 시험발사와 10월 핵실험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긴장고조 조치가 시작되기 한 달 전인 6월경이었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당시 한반도에 조성된 '군사 정세'를 과거와 다른 상황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6월에는 미국의 핵잠수함이 추가로 배치된 괌 해상에서 '용감한 방패 2006' 훈련이 있었고 그 직후에는 '환태평양 해군연합훈련(림팩 2006)'이 있었다. 북한은 '베트남전 이후 최대 규모'로 평가된 한반도 주변의 무력시위를 '새로운 상황'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의 '새로운 상황'인 '제재압력책동'은 "미국이 조선 대 미국 사이의 문제를 조선 대 유엔 사이의 문제로 둔갑시켜 대조선 제재 압력의 국제화를 기도"했다는 조선신보의 기사로 볼 때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채택한 대북 결의 1695호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2.2. 핵무기 폐기의 조건
그렇다면 북한은 어떤 조건이 될 때에야 핵무기를 폐기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우선 앞서 언급한 '새로운 상황'이 소멸됐을 때다. 조선신보는 "미국의 위협과 압력이 극한점에 달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핵무기 문제를 논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북미관계가 호전되어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될 때에야 핵무기 폐기가 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조선신보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종식되어 신뢰가 보장되고 조선이 그 어떤 핵위협도 느끼지 않을 때에 가서는 한 개의 핵무기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종래의 입장을 되풀이 했다"는 김계관 부상의 말로 핵무기 폐기의 궁극적인 조건을 규정했다.
3. 조건이 성숙하면 현존 핵 계획을 포기하는 문제의 논의는 가능하다
"기조연설 때와는 달리 실질적인 협상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라는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의 20일 저녁 발언은 북한의 이같은 입장을 두고 했던 말로 보인다. 비록 핵무기 폐기는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북한이지만, '조건이 성숙되면' 핵 계획 포기의 논의를 진행할 용의가 있다는 것으로 볼 때 협상의 실마리가 아예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숙해야 할 조건이 간단치 않다.
조선신보는 9.19공동성명에 나온 '행동 대 행동' 원칙을 거론하며 "예컨대 미국이 조선을 적대시하는 법·제도적 장치들을 유지하면서 제재 봉쇄를 계속 강화하는 조건에서는 조선도 폐기를 전제로 한 핵시설 가동중지를 결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을 '적대시하는 법·제도적 장치'는 우선 미국의 불법행위방지구상(IAI)에 따른 대북 금융제재로,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핵폐기 논의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 부상은 이미 16일 베이징 도착 때부터 "제재 해제가 선결조건"이라고 선을 긋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이번 6자회담에서 '동결(핵시설 가동중단과 IAEA 사찰)에는 서면 체제 안전보장, 핵시설 신고에는 경제지원'이라는 상응조치를 북한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제재는 북미 금융제재 실무회의에 맡기고, 6자회담에서는 핵폐기 논의에만 집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신보는 21일자 다른 기사에서 "경제지원이나 서면안전담보를 미국의 정책전환을 보여주는 '실물'로 인정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며 "9.19공동성명발표 직후에 발동된 경제제재의 해제조치를 통해 미국의 정책전환의지를 판별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제재가 해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핵 계획 포기에 따른 상응조치 논의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또 북한이 금융제재 문제 외에 다른 논의를 사실상 거부하는 것이고, 이번 6자회담이 다음 회담의 날짜만을 잡는 최소한의 합의만 가능하며, 결국 내달 뉴욕에서 예정된 2차 북미 금융제재 실무회의의 향배가 핵 계획 폐기 논의의 진로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신보는 핵 계획 포기 논의를 진행하는 조건의 다른 하나로 경수로 지원을 제시했다. "현존 핵 계획 포기에 들어가자면 조선의 핵동력공업발전정책에 부합된 경수로 제공과 그것이 완공될 때까지의 대체에네르기(에너지) 공급이 상응조치로 상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9.19공동성명에는 "적절한 시기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데에 (참가국들이) 동의했다"고 나와 있다. 이는 핵폐기에 따른 경수로 제공을 고집하는 북한의 입장을 미국이 어느 정도 수용한 것인데, 미국의 수용 과정에서 나타난 진통으로 볼 때 경수로 제공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앞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4. 현 단계에서 핵무기 폐기를 논의하려면 핵군축회담을 하자
조선신보에 나온 이 주장은 비핵화 구상의 일단이라기보다는 언론 보도에 대한 해명의 성격이 짙다.
김계관 부상은 18일 기조연설에서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현 단계에서 핵무기 문제를 논의하고자 할 경우 핵군축회담으로의 진행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말한 것으로 당일 전해졌었다.
이를 두고 국내외 언론은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현 단계'라는 김 부상의 전제를 거두절미한 채, '핵군축회담 요구'를 부각시킴으로서 회담 전부터 우려해 왔던 북한의 핵군축회담 요구가 가시화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김 부상의 말은 조건의 성숙, 즉 금융제재의 해제를 강조하는 데에 방점이 찍혀 있었고, 핵군축회담을 요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제재 해제를 압박하려는 수사학이라는 평가가 더 타당하다.
이에 조선신보는 "우리는 6자회담이 비핵화회담으로 되기를 바라지만 현 단계에서 핵무기 문제를 논의대상으로 삼으려 한다면 부득불 핵군축 회담이나 핵군비통제회담을 진행할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김 부상의 발언을 그대로 소개하며 핵군축 회담 논란을 잠재우려 했다.
이어 "미국이 새로운 상황을 무시하고 핵무기 포기를 요구해 나선다면 조선으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지만' 핵무기의 수량을 조절하는 핵군축회담의 틀거리 안에서 논의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라고 덧붙였다.
제재 해제에나 관심이 있을 뿐 '부득불' 해야 할 핵군축회담에는 자신들 역시 '별로 달갑지 않'다는 걸 우회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조선신보는 "북한이 핵실험을 했지만 그런 방안(핵군축회담)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미 국무부 대변인의 발언을 인용해 "조선도 같은 입장"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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