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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업, WTO 때문에 망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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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업, WTO 때문에 망한 게 아니다"

[성난 들녘에도 봄은 올까 -5(끝)]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까?

"위기, 위기 하는데 한국 농업은 20년 전에도 위기였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버텨오지 않았나. 절대 안 망한다. 농업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망하지도 않고 망해서도 안 되는 산업이다."(삼성경제연구소 민승규 박사)

"우리 농업이 세계무역기구(WTO) 때문에 망할 거라 그러는데, 내 생각엔 절대 그렇지 않다. WTO가 농업 실패의 원흉이 될 이유가 없다. WTO가 정부의 농정 실패에 면죄부가 돼서는 안 된다."(농업통상법 전문가 송기호 변호사)

***"한국 농업? 절대 망하지 않고 망해서도 안 된다"**

기자는 농업-농민 문제에 관한 이번 기획기사 시리즈를 준비하면서 '대안'을 찾는 일에서 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농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라는 물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답이 없다"고 말했다. WTO 체제 아래서 농업은 가격경쟁력이 없어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안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번 시리즈를 끝낼 수는 없었다. 정답은 아닐지라도 정답에 대한 힌트 정도는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자는 취재과정에서 만난 전문가들과 농민들의 의견을 일일이 되짚어보며,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를 찾아보았다.

무엇보다 WTO 탓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농업 위기의 원인을 WTO에서 찾기보다는 한국 농업 자체에서, 그리고 한국 정부의 농업정책에서 찾아야 한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의견이 새삼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한국 농업의 위기는 WTO로 인한 위기라기보다는 부산의 신발공장처럼 이미 퇴출산업으로 분류되어 구조적으로 외면당해온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의견을 가진 전문가들은 "WTO에 대응하기 위한 해법을 찾을 게 아니라 농업 그 자체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전략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들이 첫 번째로 꼽은 과제는 '농업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다. '답이 없다'는 체념성 인식 자체가 기본적으로 농업의 대안을 찾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윤석원 중앙대 산업경제학 교수는 "최근 표출된 농민들의 분노는 정부나 언론은 물론 우리 사회 전체가 농업과 농촌의 중요성과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분노"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농업과 농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철학을 바꾸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미국, 유럽연합(EU) 등 선진국들은 식량산업으로서 농업이 갖는 중요성뿐만 아니라 경관 유지, 환경 보호, 홍수 방지, 문화전통 보존 등에서 농촌이 갖는 가치를 이미 인식하고 있기에 막대한 재정부담에도 불구하고 보조금을 쏟아부으며 농촌을 지키고 농업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라며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WTO 체제의 신자유주의에 경도되어 농업을 국가발전의 걸림돌로만 보고 있다"고 말했다.

송기호 변호사도 "WTO 협정에도 농촌의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는 조항이 들어있다"며 "WTO 체제 아래서도 농촌을 살리기 위한 정책과 투자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송 변호사는 "미국이나 유럽 등 고투입 농업이 실시되는 농업 수출국들에서는 생산과잉의 문제뿐 아니라 식품의 안전성을 위협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농약과 비료의 과다 투입으로 인한 토양 침식, 습지 오염, 광우병 파동과 같은 문제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며 "우리도 농업을 단순히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봐서는 결코 해답이 나올 수 없다"고 지적했다.

EU는 WTO의 등에 올라탄 미국의 개방압력에 맞서기 위해 가격지지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직불제를 통한 농업보조금 지급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물론 친환경 농업으로의 전환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농업에 젊은 사람들이 뛰어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민승규 박사도 농업 자체에 대한 인식 변화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한편 "산업으로서의 농업에 대한 정책과 복지로서의 농민정책을 과감하게 분리해야 농업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단언했다. 전체 농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리더그룹을 만들고 그들을 통해 농업을 산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고령 인구가 대부분인 소규모 농가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복지정책 관점에서 '먹고 살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민 박사는 또한 "지금 한국 농업은 변해야 사는데, 변화가 힘든 60대 이상의 노인들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현재 우리 농업에 필요한 것은 도전정신으로 가득찬 젊은이들"이라고 지적했다.

'벤처농업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민 박사는 "과거 벤처붐 때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너도나도 벤처업계에 뛰어들었다"며 "이제는 사람들이 농업도 매력적인 산업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벤처업계의 스타인 정문술 사장과 같은 사람이 농업에서도 많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벤처 정신으로 농업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 성공하는 농민들이 생겨나면 인재와 자본이 농업으로 유입될 것이며, 이렇게 돼야만 비로소 농업이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민 박사는 "우리나라 농업이라고 수출 못 하라는 법 있습니까? 다만 지금까지 해온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지난 20년 동안 배웠으니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 박사는 농업을 '1차산업'이 아니라 '1.5차산업'으로 한 차원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작물 생산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정보기술(IT)과 생명공학기술(BT)을 접목하고, 농촌과 농업이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소비될 수 있도록 하는 등 농촌과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차별화만이 살 길이라는 것이다.

민 박사는 '물량 위주'의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민 박사는 "된다 싶은 것이 있으면 정부가 일률적으로 예산지원을 하기 때문에 너도나도 따라 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차별성이 상실돼 되던 것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며 "요즘 지자체에서 너도나도 예산을 들여가며 열고 있는 각종 축제만 봐도 전국 어딜 가나 비슷비슷해 매력이 없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태도를 갖지 말고, 이보다는 농촌과 농업에 대해서도 시장친화적인 방향에서 공정한 경쟁과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농림부에 식품관리 기능 부여해야"**

송기호 변호사는 농업분야의 개혁 방안 중 하나로 '농림부'를 '식품농림부'로 개편할 것을 제안했다. 송 변호사는 "현재 우리나라는 식품은 보건복지부에서, 농업은 농림부에서 각각 관장하는데, 농림부를 농업만 관장하는 조직으로 두지 말고 농산물의 생산에서부터 식품산업에 이르기까지, 즉 생산에서 소비까지의 모든 과정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변호사는 '술 산업'을 예로 들었다. 프랑스의 경우 와인 산업이 지역 포도농장들의 주도로 상당히 발전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민속주'를 술이라는 이유로 국세청에서 관리한다는 것이다. 국세청에서 관리를 하다보니 알콜 도수에만 행정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고, 재료에 따라 특색 있는 술을 개발하는 능력 등 전문성에서는 술의 경쟁력이 갖춰지기 어렵고 체계적인 관리도 안 된다고 송 변호사는 설명했다.

송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지역 별로 매우 다양하고 독특한 전통주들을 갖고 있었으나, 주류산업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해 그같은 장점을 살리기는커녕 오히려 전통주들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며 "지역의 신선한 재료로 만들어지는 민속주들만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관리했어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 변호사는 또한 "WTO나 자유무역지대(FTA) 협상에 임하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감시가 강화돼야 한다"며 "이를 위해 농업통상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정부는 독자적으로 외국과 각종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정부는 협상의 내용을 이해당사자들에게 잘 알려주지도 않을 뿐더러 비준동의권이 있는 국회도 사실상 협상 과정을 제어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송 변호사는 "미국같은 경우는 외국과의 통상 과정에서 의회에 어떻게, 어느 선까지 보고할 것인지, 의회는 어떤 경우에 청문회를 요구할 수 있는지 등이 모두 통상절차법에 규정돼있다"며 "우리나라도 이런 절차적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제2의 쌀협상 비준안 갈등이 또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희망을 주세요"**

정읍 농민회의 임만수 사무국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부 정책 홍보만 하는 주류 언론의 농업 관련 기사들도 문제가 많지만, 기자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야먄 농촌을 찾아와 돌아보고 가서 '농업이 어렵다. 농촌이 죽는다. 농민이 불쌍하다'라는 식의 기사를 써대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농업이 어렵고 농민들이 불쌍한거 누가 모르나. 다 아는 얘기 하지 말고, 이제 정말로 언론이 농업의 대안이 무엇인지를 찾아달라. 농약 마시고 자살하는 판인데, 농민들은 아무리 쓴 약이라도 받아 먹을 준비가 돼 있다. 우선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그런 대안 찾기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이미 지난 10년 간의 농정 실패로 인한 후유증으로 앞으로 10년 간의 농업에 대해서도 '체념'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농업의 희망 찾기를 중단할 수는 없다.

341만 명의 농민들은 모두 제각각이다. 재배작물도 다르고, 경지면적도 다르고, 가족구성도 다르다. 농민들 스스로가 모두 개별화된 경영자이자 노동자다. 따라서 구체적인 희망의 처방은 농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 다만 농업에 대한 인식 변화는 모든 농가, 아니 모든 국민에게 두루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농업은 국민 전체의 먹을거리와 관련된 산업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은 식탁에만 관심이 있지 농업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대한민국의 농업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농민들을 객체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농민들의 문제를 '우리 모두의 문제'로 여기는 범사회적인 관심이 어느 때보다 시급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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