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1.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형제 울부짖던 날 손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 진리를 외치는 형제들 있다…." 농민들이 집회에서 주로 부르는 '농민가'의 가사다. 여기서 '삼천만'이라 한 것을 요즘 정황 속에서 해석하자면, 국민이 4000만 명이고 그 가운데 3000만 명은 잠을 자고 있는 새벽부터 1000만 명의 농민들은 농사일을 시작한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우리나라 농가인구는 2004년 현재 341만여 명이다. 우루과이라운드(UR)가 타결된 1994년에만 해도 농가인구는 517만여 명이었다. 전국농민회 관계자는 "10여 년 전만 해도 집회에서 '600만 농민 단결하여…'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어느덧 '300만 농민 단결하여…'로 바뀌었다"고 푸념했다.
풍경 #2.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이 있었다. 세파에 상관없이 연구에 매진한다는 뜻의 '상아탑'에 빗대어 대학을 풍자한 말로, 대학에 자식을 보내기 위해서는 '소 몇 마리 팔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실제 1960~70년대에는 자식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보내기 위해 소는 물론 전답까지 파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이제 이것도 옛말이 됐다. 농민단체 관계자는 "농가의 평균연령이 57세가 넘는다. 이제 농촌에는 대학에 보낼 자식이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풍경 #3.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한 시위에 참가하려고 곧 출국해 홍콩으로 가려고 하는 전북 부안의 한 농민은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어떤 신문 기사에 '비행기 타고 홍콩에 데모 하러 가겠다는 걸 보니 농민들이 이제 살기가 괜찮은 모양'이라고 났습디다. 너도 나도 해외여행 가는 세상인데, 그럼 농민들은 평생 비행기 한번 못 타보고 땅만 파야 합니까? 이게 다 '농민들은 찢어지게 가난하다' '농민들은 가난해야 한다'는 관념이 기자들과 국민들 사이에 박혀 있기 때문이죠."
풍경 #4.
"1990년대 초반 우루과이라운드가 타결되던 당시의 신문들을 다시 한번 뒤져 보세요. 그때나 지금이나 농업 관련 기사의 내용과 제목이 똑같다는 걸 알 테니. 그때도 10년 동안 농업의 경쟁력을 키운다고 했는데, 과연 키웠습니까? 지금도 그 때랑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앞으로 10년 동안 과연 경쟁력이 생길까요?" 한 농업전문가의 말이다.
〈그래프〉 농가수 및 농가인구 20년간 통계(자료: 통계청)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직후 정부는 10년 간의 관세화 유예를 받아냈으니 "앞으로 10년 간 농업 경쟁력을 키워 개방에 맞서겠다"고 부르짖었다. 결국 농가인구가 줄어들고 경지면적은 늘어나는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농촌에서 젊은이들이 떠나고 노인들만 남았고, 정부는 또 다시 '앞으로 10년'을 외치고 있다.
***"이제 아무도 농업 걱정 안해…농민이 원하는 건 돈 아닌 희망"**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제 아무도 농업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민승규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농업경제학 박사)은 꼬집었다. 농업이 국가발전을 해치는 애물단지이자 장애물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농업 문제를 아예 말도 안 한다는 거에요. 김영삼 정부 시절 우루과이라운드가 타결될 때만 해도 우리 국민들이 신토불이라면서 농업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 72조를 풀고도 농가부채만 남았다고 하는데, 이번에 또 119조를 푼다고 하니 소비자 입장에서 냉담한 거죠. 나는 무엇보다 이게 지금의 가장 큰 위기요소라고 봐요."
민 박사는 얼마 전 자신이 받은 한 농민의 편지를 소개하며 이렇게 우려했다. 그 농민은 편지에서 "우리도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다 안다. 그러나 우리가 정부에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닌 희망"이라고 호소해 왔다.
민 박사의 주장은 "농업 또한 자생력 있는 산업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이 국민소득 3만 달러 수준인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의 농가처럼 '보조금'을 받아가며 가격경쟁력으로 승부할 수 없는 이상 뭔가 '차별화'로 살아남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진 민승규〉
"농민정책을 이원화 해야 합니다. 산업을 끌고 갈 수 있는 리더 그룹과 복지관점에서 농촌에서 먹고 살게끔 해줘야 할 그룹으로요. 그 분들을 버리면 도시빈민으로 전락하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농촌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안전망으로 온전히 기능하게 해야죠."
***"망하는 농협, RPC 나와야 농민이 산다"**
그는 "경영 하면 브랜드 얘기가 나오는데, 지금 브랜드가 없어서 쌀이 어려운 게 아니다. 오히려 넘친다. 브랜드는 이미 1000개가 넘는다"며 "지금 쌀은 농민들만 혼자서 열심히 생산한다고 잘 팔리는 게 아니다. 농민들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쌀을 가공하고 판매하는 미곡종합처리장, 즉 지역농협 RPC(Rice Processing Complex, 미곡종합처리장)가 제 역할을 못하는 데 있다"고 단언했다.
농협 RPC는 반(半)독점인데, 농민들이 자기 지역에 어떤 경영력을 가진 RPC가 있느냐에 따라 쌀소득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이다. 그는 "농협 RPC에 정부가 엄청난 돈을 퍼붓는데도 이득 내는 데가 별로 없다. 이들은 가격하락을 주도하는 대형 할인점의 구매 파워를 탓하지만 다 핑계"라고 일축하며 "그럼 전국에서 제일 밥맛이 떨어지는 곳으로 알려진 경남에서 쌀을 20% 비싸게 팔면서도 300억의 매출을 올리는 민간 RPC가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반문했다.
밥맛은 토질과 벼의 품종뿐 아니라 보관 및 유통에도 크게 좌우되는데, 농협 RPC들이 농민들을 볼모로 잡고 긴장 없이 경영하다가 수익이 안 나오면 배 째라 하는 식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다보니 그 피해가 다 농민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도대체가 소비자 지향성이 없다. '미곡종합처리장'의 '처리장'이라는 단어가 '쓰레기 처리장', '폐기물 처리장' 등과 혼동돼 어감이 안 좋다고 몇 년 전부터 누누이 말해도 그 이름 하나 못 바꾼다. 이제는 농민들이 RPC도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망하는 농협 RPC도 나와야 된다. 농민들이 자신의 경영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줘야지 예전같은 물량주의 농정은 수명이 다했다."
***"한국사회는 실은 농업경쟁력 원치 않아"**
'벤처농업대학'의 창시자답게 민 연구원은 "이제는 과거처럼 정책의 초점이 1차적인 먹거리 생산에 맞춰져서는 안 된다. 농업이 산업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는 자만이 미래를 말할 수 있다"며 어떠한 악조건에도 농민의 주체적인 변화와 행동을 주문했다.
그러나 농업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과연 농민이 무지하고 게을러서 시장경쟁력을 못 갖추고 지원만 요구하나? 그럼 우리의 법과 제도가 정말 농업경쟁력을 원하는 사회가 취할 수 있는 것인지 한번 꼼꼼히 뜯어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한국사회는 실은 농업경쟁력을 원하지 않는다. 경쟁력이 생기면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수입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의 공산품을 파는 대신 내줄 '무엇'이 없어진다. 한국사회는 오히려 농업경쟁력을 억압해 왔다. 빚을 줘서 농가의 크기를 키우고자 했던 지난 10년은 '농업 안락사'의 기간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사진 송기호〉
송 변호사가 지적한 '소농의 시장경쟁력을 막는 구조'는 ▲과거의 통일벼 강제보급을 포함한 증산책과 농약과 비료를 고투입하는 관행농의 관성 ▲'감이 비타민C 함량이 높고 배는 소화에 도움을 준다'고 표시해 '의약품'으로 과장했다고 처벌하는 식품위생법 체제 ▲자국 농산물 사용을 의무화하는 학교급식법을 막는 행정부와 사법부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박정희 시절부터 정착된 증산책과 관행농법이 이젠 '효자'가 아닌 것도 있지만, 우리는 식품위생법만 봐도 우리 농산물이 보통 서민들의 건강 유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역할도 막고 있다"며 고구마가 식이요법에 좋다고 광고하면 '의약품으로 혼동될 가능성이 있다'며 처벌하는 것을 예를 들었다.
"지역에서 농민들은 영세 자영업자로서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무척 노력한다. 이와 같은 식품위생법, 농협, 식품·제약 자본들과의 역관계에서 제일 억눌려 있다. 학교급식법만 해도 농민들이 급식시장을 확보하려고 얼마나 노력한 거냐. 그러나 행정부의 WTO 운운과 대법원의 브레이크 걸기로 결국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다."
***"고립된 소농들, 이대로 가다간 시장서 퇴출"**
그는 또 "지금처럼 고립된 소농은 더 이상 시장에서 유지될 수 없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격폭락에 그대로 빚으로 남을 부채를 대주는 규모화가 아니라 시장교섭력"이라며 "이를 위해선 책임을 농가부채에 짓눌려 있는 농가에 다 미룰 게 아니라 농협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프랑스나 일본 등 다른 나라의 농민조직에 비해 농협의 경쟁력이 터무니없이 낮다"고 지적했다.
"농민들이 행정단위가 아니라 경쟁력에 따라 농협을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전제는 농협이 시장대응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중앙회 인력 1만5000명의 74%가 신용사업에 종사하고 조합장이 신용사업만 해서는 농협이 지역 농가들에게 도움이 될 수 엇다. 마케팅 전문 경영인이 경영을 하는 체제를 농협에 도입해야 한다"
이에 대해 신기엽 농협연구소 부장은 "농협 RPC들이 '품질미 생산'과 농민들의 쌀 판매를 보장하기 위한 책임경영에 더 신경 써야 한다는 건 이제 자명해졌다"며 "향후에도 쌀 공급과잉 상태가 계속되면 지역간 RPC 사이의 경쟁도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흥범 농협중앙회 RPC지원팀장 또한 "현재 읍면조합은 규모가 너무 작아 시군단위 통합을 준비하고 있다"며 "또 RPC들이 가공시설은 있는데 좋은 쌀 만들기에 필수적인 건조보관시설이 많이 부족해 보강하려고 노력중"이라고 답했다.
〈사진 윤석원〉
윤석원 중앙대 교수는 "흔히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뒤에 쌀 수매가를 낮추지 못해 가격경쟁력을 막은 게 지난 10년 농정의 실패라고 지적하는데, 이런 말은 경쟁력이 문제가 아니라 농촌이 진작에 망했어야 한다는 얘기나 다름없다"며 "'잃어버린 10년'은 단순히 가격을 낮추기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농민들에게 빚만 안긴 채 품질과 안전성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제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렇게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참여정부에서도 계속되는 '규모화 전업농'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농업이 경쟁력을 갖춰 살아남는 길은 무엇일까. 다음 회에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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