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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빚을 줄 테니 규모를 키워 보라고? 또?"

[성난 들녘에 봄은 올까 3] 농민들 "대농 되면 크게 망해"

"그래도 시골에 살면 재미있어요. 농사는… 농민이니까 계속 짓긴 지어야죠."

김규태(41) 씨는 어려운 사정만 잔뜩 물어본 뒤 돌아서는 기자에게 굳이 이 말을 하며 웃어보였다. 21년차 베테랑 농부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피워 올렸지만 근심의 기운을 쉬이 없애진 못했다.

김 씨는 지난해 쌀농사만 3만4500평(11.4ha)을 지었다. 정부가 쌀농가 경쟁력 제고방안으로 내놓은 정책이 '6ha 이상 전업농 육성'임을 감안할 때 김 씨는 분명 정부가 키우고자 하는 '전업농'의 모델이고, 그 중에서도 대농(大農) 축에 든다.

그러나 김 씨라고 쌀값 폭락을 당해낼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크게 지으면 크게 망한다는 말이 맞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는 쌀값 하락을 예상해 임대료 부담이라도 줄이려고 임대한 논 중 일부를 반납하는 등 경지면적을 2만5500평(8.4ha)으로 줄였다. 여기에 쌀값까지 폭락하고 보니 매출액은 평년의 절반 정도로 떨어질 것이 예상된다.

〈표1〉 김규태 씨의 수입-지출 명세

〈표1〉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작년만 해도 추곡수매 덕분에 쌀값이 16만 원선을 유지했기에 2720만 원의 흑자를 냈고, 은행에 이자를 다 갚은 뒤 논농사 직불금을 받아 1830만 원 가량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농약, 비료, 면세유 등 기본 농자재 가격이 작게는 10%, 크게는 50%까지 인상돼 생산비 자체가 크게 올랐다. 그러나 반대로 쌀값은 15% 이상 폭락해 경작면적을 3ha 줄였을 뿐인데도 순수입은 작년에 비해 4분의 1가량이 줄었다. 게다가 이자까지 합하면 270만 원 가량의 적자가 예상된다. 설상가상으로 시장에서는 쌀값이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돼 도매상들이 매입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가을 나락의 태반을 아직도 팔지 못하고 그저 쌓아놓고 있다.

다만 쌀값 하락으로 인한 농가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정부가 올해부터 실시하는 '쌀소득보전직불제'가 있어 1300만 원 가량을 보상받는 것이 위안거리다. 하지만 이마저도 적자분을 때우고 나면 손에 남는 돈은 1035만 원이 고작이다. 인건비 지출 없이 부부가 2만5000평이 넘는 논을 피땀흘려 경작한 인건비 치고는 박하기 그지 없다.

〈사진1〉 김규태

정부는 "쌀소득보전직불제로 98%가량의 소득을 보장해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김 씨의 사례만 놓고 보면 그래봐야 작년 소득의 55% 수준밖에 안 된다.

이에 대해 농림부 관계자는 "소득 계산에 농협 이자를 포함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농협 대출이 순수 농사 목적인지도 알 수 없고, 부채가 그렇게 많은 농가도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자 부분을 빼고 계산해도 김 씨의 올해 농가소득은 작년에 비해 70%가 채 안 된다. 게다가 "원래부터 땅 부자가 아니라면 규모화 영농을 위해서는 부채를 짊어지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현장에서 만난 농민들의 설명이다.

이렇게 '98% 소득보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정부와 농가 소득보전의 현실에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 농민단체들은 "정부가 세운 '목표가격' 자체에 생산비 인상이 반영되지 않았고, 일정 비율의 소득감소가 불가피한 구조적 여건에서는 규모가 클수록 피해액이 커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이윤이 발생하면 크게 지을 때 크게 남지만, 손해가 분명한 상황에서는 '1ha에 100만 원 손해라면 10ha일 경우는 1000만 원 손해'라는 공식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구입한 논 반납하고 싶지만 땅값 떨어져 그것도 어려워"**

김 씨는 "2003년에 농업기반공사로부터 구입한 2만5000평의 논도 반납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영농후계자'이기에 연 3% 이자, 30년 상환이라는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땅을 구입했다. 그런 조건이라면 농부로서는 당연히 땅 욕심을 낼 만했다. 하지만 '쌀 농사의 앞날'에 대한 비전이 사라지면서 논값이 평당 2만9000원에서 2만6000원으로 하락했다. 게다가 땅을 팔려면 시세차익을 고스란히 농업기반공사에 보상해야 하기 때문에 땅을 팔 수도 없다.

김 씨는 기자와 만났을 때 마침 내년 농사 준비를 위해 농협에 2000만 원의 대출을 문의하러 가는 길이었다. 생활비는 어떻게든 농외소득으로 충당한다 해도 내년 농사를 지으려면 종잣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김 씨는 빚 없이 농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몇해 전부터 생산비와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쌀값은 제자리 걸음이어서 빚이 늘었고, 경작면적을 키운 뒤 땅값 이자까지 갚느라 어느덧 한 해에 값아야 할 이자만 2000만 원이 넘기에 이르렀다.

〈사진〉 부부

"4년 전부터 논을 산 사람들은 다 저처럼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빚 없이 농사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빚이 4억입니다. 정부 빚 받아서 대농이 됐지만, 어찌된 게 소농시절보다 소득은 줍디다. 농사를 지어도 소득이 있어야 말이죠. 농민들이 이자로 정부와 농협 살만 찌워주는지… 원."

농사로는 대학생 딸과 올해 수능을 본 아들의 교육비를 충당할 수 없는 그는 투잡스족, 아니 스리잡스족이 된 지 오래다. 전주에 유학 중인 두 자녀에게 들어가는 1년 교육비는 2000만 원이나 된다. '그냥 집에서 키우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소먹이 볏짚 일도 하고, 비농기 때 일용잡부 일도 하고, 트랙터로 남의 논 갈아주는 일도 하죠. 트랙터 일을 하면 기름값을 포함해 ha당 32만 원 받습니다. 6개월 동안 내 땅에 농사지은 수입보다 기계 굴려 남의 땅 갈아주고 버는 수입이 더 많으니 허탈하죠."

김 씨가 다 털고 농촌을 뜨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소먹이 볏짚 일, 트랙터 일도 그나마 농사를 짓고 있으니 생기는 '큰 부수입'인데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빚 연대보증으로 얽혀 있어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부도를 내면 마을 전체가 몰락한다. 그는 쌀농사를 최대한 줄이는 대신 하우스 감자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에겐 '한국 대농의 그림자'가 이미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소득보장 안 되는데 '규모화'가 무슨 의미가 있나?"**

〈표2〉부안군 농민회가 산출한 2005년 쌀 생산비(오른쪽 작게)

전문가들은 그간 정부가 펴 온 '전업농 육성 정책'에 한결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민승규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애초부터 농업을 규모화해 생산을 싸게 하는 데서만 경쟁력을 찾으려고 한 것이 문제"라며 "전업농의 기준이 지금은 6ha이지만 예전엔 3ha였다"고 말했다. 3ha로는 소득이 안 되니까 6ha로 기준이 높아진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10년 뒤엔 어쩔 것인가. 땅 크기로만 본다면 우리 농가는 미국 농가의 100분의 1인데, 애초부터 규모로 승부가 되겠느냐"고 그는 반문했다. 미국 쌀 농가의 평균 경작면적은 136ha다.

민 연구원은 "우리가 싸게 생산하는 걸로 승부를 걸려고 해봐야 품목별로 경쟁력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심지어는 인삼도 그렇다"며 "차별화로 가야 경쟁력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참다래를 봐라. 가격으로는 뉴질랜드산 키위와 비교도 안 되지만 차별화로 유통시장을 꽉 잡고 있다"며 "참다래는 규모가 아니라 경영능력에 의해 경쟁력이 생겨난 경우"라고 주장했다.

윤석원 중앙대 교수는 '규모화 농정'이 허구인 이유로 '수확의 절반에 가까운 지대'를 꼽았다. 윤 교수는 "상위 10%를 제외한 한국의 대다수 농가가 현재 임차농을 겸하고 있다. 임차료로 매년 수확물량의 30~50%를 지주에게 떼인다"며 "이런 현실에서 무슨 가격경쟁력을 주문하는 거냐"고 반문했다.

윤 교수는 "법으로는 농지 임대차가 금지돼 있지만 수도권은 70~80%, 전국 평균으로는 50%의 농민이 임차농인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대규모로 농사를 지어도 임대와 부채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실제 농가에 돌아가는 소득은 미미하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이런 구조에서는 규모를 키워 경쟁하라고 할 게 아니라 농사를 1ha로 하든 5ha로 하든 작은 규모의 농가라 하더라도 위험이 닥쳐도 농사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규모를 키우면 모든 일을 기계와 농약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경영 면에서도 문제가 있지만 안전한 농산물의 생산을 보장하기도 어렵다"며 "작지만 강한 농업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ha로 136ha를 이기라고 우기는 격**

농업통상 문제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도 "미국 등 땅이 넓은 선진국들은 대규모 경작지에 농약과 비료를 대량으로 살포하고 전적으로 기계에 의존하는 '고투입 농업'을 하고 있다"며 "이러한 고투입 농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석유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송 변호사는 "경작면적도 훨씬 작고 산유국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그런 '고투입 농업'을 해서 경쟁력을 갖춘다는 발상 자체가 무모하고 반환경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자연의 방식이 아닌 유전자조작 등의 방식에 의해 인위적으로 대량생산된 농산물이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 심각한 지구적 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라며 "먹거리의 안전성을 위해 우리 농업이 어떤 체질을 가져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부터 72조 원의 투융자를 통해 부분적으로 농가의 규모를 키워 온 정책은 농업의 '자생력'과 '경쟁력'을 실현하기는커녕 '쌀값 폭락'과 '농가부채'라는 결과만 낳았다. 그 뒤 김대중 정부 시절에 김성훈 당시 농림부 장관이 '소농'의 가치를 중시하는 정책을 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다시 119조 원 규모의 투융자 지원을 약속하며 "빚을 줄 테니 규모를 키워 가격경쟁력을 갖춰보라"고 농민들에게 주문하고 있다. '6ha의 논을 갖고 136ha의 논을 가진 미국 농가를 이기라'고 우기고 있는 셈이다.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 이후 한국 농정의 목표는 '규모화'가 아니어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 농촌과 농정은 그 '잃어버린 10년' 동안 과연 무엇을 했어야 했나? 4회에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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