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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韓人) 후예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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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韓人) 후예들을 만나다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11> “혁명으로 차별 없앴지만, 한국인 정체성 잃어”

올해 3월로 쿠바 이민사는 84년을 맞았다. 그 84년이란 세월의 두께는 고통과 절망, 그리고 억척같은 생존의지로 켜켜이 다져졌다. 두고 온 고국의 산하를 그리워하기엔 너무나 생존에 급했던 그런 나날들이었다. 쿠바 이민사는 수탈과 눈물, 생존의 몸부림과 두고온 고국 땅에의 그리움이 뒤섞인 한(恨)의 역사다. 카스트로의 쿠바혁명 뒤 높아진 교육기회에도 불구, 쿠바 한인들 대부분은 가난을 대물림해온 모습이다.

1921년 3월, 274명의 조국 잃은 유랑민들이 멕시코를 거쳐 쿠바에 닿았다. 1905년 한반도에서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애니깽 농장노동자로 떠났던 1천33명의 한국인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노예노동이나 다름없던 멕시코에서의 고단한 삶을 청산하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쿠바로 옮겨갔다. 그로부터 쿠바 이민사는 올해로 84년을 기록 중이다. 30년을 한 세대로 보면 세 세대가 죽고 태어날 만큼 쌓인 세월의 두께다. 쿠바 한인은 모두 쿠바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 숫자는 약 750명쯤. 우리말을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이들은 노년층 몇 명을 빼고는 없다.

***멕시코 애니깽 농장에서 쿠바로**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지난 2003년에 펴낸 <국외 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 3, 멕시코 쿠바> (김호일, 김도형, 김형목 공동집필) 자료에 따르면, 1921년 3월 6일 274명의 한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쿠바로 떠나, 닷새만인 3월 11일 쿠바 남쪽의 마나티 항구에 닿았다. 한인 노동자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탕수수밭의 중노동과 저임금이었다. 쿠바 한인사회의 중심인물인 헤르니모 임(79, 전 쿠바 산업부 국장, 동아바나 인민위원장 역임)은 부모들로부터 들었던 그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쿠바 마나티 지방에 내린 우리 할아버지 일행은 처음엔 사탕수수 농장에서 농업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나 임금이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우리 한인들은 멕시코에서 애니깽 농장에서 일한 경험은 있었어도 사탕수수 밭일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운이 나쁘게도 국제 설탕 값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일감이 줄어들었고 따라서 노임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야말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지자, 일부 사람들은 이럴 바엔 도로 멕시코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얘길 주고받았다고 한다. 마나티 지역의 사탕수수 농장 일이 기대했던 만큼 풀리지 않자, 우리 할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쿠바에 닿은 지 2개월 만에(1921년 5월) 마탄사스 지역으로 옮겨갔다고 들었다”

마탄사스는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동북쪽으로 80km쯤 떨어진 지역. 마나티에서 끼니를 굶으며 어렵게 살던 한인들은 그곳 마탄사스의 한 애니깽 농장에서 인력을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집단 이주했다. 그 농장 이름은 엘 볼로(El Bolo). 아바나에서 헤르니모 임과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장, 그리고 통역 겸 안내자인 줄리 문(문은례)과 함께 마탄사스를 향해 떠났다. 목표는 엘 볼로 농장. 지금은 애니깽을 재배하지 않고 농장도 문을 닫았지만, 1920년대 중반엔 1백여 가구의 한인들이 이국땅에서 삶의 터전을 닦아나갔던 곳이다. 농장은 마탄사스 시내 중심가에서 동남쪽으로 3km쯤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말이 농장이지, 지금은 덤불만 우거진 상태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폐가 한 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헤르니모 임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 건물은 마을 입구 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방 두칸 짜리 집으로, 혼자 사는 한인 노동자들의 집단 숙소로 쓰였다. 그리고 그 옆 공터에서 채소를 길러 김치를 담가먹곤 했다. 그곳 공터는 한인 노동자들이 모이는 일종의 공회장소였다. 밤이면 가스등불 아래서 음악회니 무용회를 열어 이국땅에서의 시름을 달래기도 했다”

***가난 속 독립운동 성금 보내**

쿠바의 가난한 한인 노동자들이 한푼 두푼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기부했다. <국외 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 멕시코 쿠바> 자료에 따르면, 쿠바의 한인들은 1937년부터 1944년까지 1,289 달러의 성금을 모아 국민회 중앙총회에 보냈다. 아울러 246달러를 따로 모아 중경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주석에게 보냈다. 쿠바 아바나에 있는 중국계 은행을 통해서였다. 헤르니모 임씨는 “그 무렵 1달러가 이즈음의 1백달러만한 값어치를 지녔다는 측면, 그리고 어려웠던 쿠바 한인들의 살림살이 형편을 떠올리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닐 것”이라 말한다. 날마다 쌀 한 숟가락씩 아껴 모았다가, 그걸 팔아 돈을 마련해 냈다는 얘기다.

쿠바 한인사회는 쿠바혁명이 터지기 전까지는 친미 바타스타 정권의 뿌리 깊은 외국인 고용차별정책으로 말미암아 가난의 늪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웠다. 필자가 쿠바 현지에 머물면서 만난 노년층 한인 후예들은 대부분 평생을 빈곤 속에 지낸 탓일까, 주름이 깊게 패인 얼굴에서 가난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쿠바의 한인들 가운데는 의사나 변호사, 교수 등 번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난을 대물림 해왔다.

아바나 구시가지인 비에하 지역의 빈민가에 사는 에스테반 안(한국 이름은 안남산, 82세)과 알레한드리나 주(주미엽, 81세) 부부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이들 부부가 사는 집은 계단이 허물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다 쓰러져가는 낡은 건물의 옥상이었다. 말하자면 옥탑방과 같은 것이었다. 사람이 살 만한 주거공간이라 보기엔 너무 초라해 마음이 아팠다. 알고 보니, 그 옥탑건물은 일제시대에 아바나에 살던 한인들의 모임터였다. <국외 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3, 멕시코 쿠바>에 따르면. 그곳에서 한인들은 한푼두푼 독립운동 성금을 모아 미국의 대한인국민회로 보냈다. 에스테반 안의 말에 따르면, 해마다 3월1일이면 그곳에 모여 기념식과 더불어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마음 맞는 사람 만나기 어려워 결혼 못해“**

쿠바 한인들이 거의 모두 우리말을 잊고 못하는 실정에서 또렷이 우리말을 할줄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아바나 남부 빈민가에 사는 루이사 박(한국이름은 박쌍주, 73세)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는 뚜렷한 우리말로 “나는 밀양 박씨이고, 아버님은 박영창, 고모는 박영희와 박영록”이라고 말했다. 집안 어른들은 마탄사스의 엘 볼로 농장에서 애니깽을 잘랐다. “아버지, 할아버지 하면, 언제나 새벽부터 일을 나가 밤늦어 돌아오시는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어릴 적엔 신발도 못 신고 맨발로 다녔고, 강냉이죽을 많이 먹었다”는 그녀의 말은 쿠바 한인들이 생존에 매달려야 했던 지난 세월을 압축해 들려주는 듯하다.

중학교를 나와 카스트로 혁명 뒤 국영 석유회사에서 타자수로 일했다는 루이사 박씨는 결혼을 하지 않고 홀몸으로 지내왔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이 나라 풍습도 다르고,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워서” 결혼을 단념했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한인 젊은이들의 숫자가 많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웬만하면 피하는 가까운 친척, 이를테면 4촌들끼리 결혼하는 일도 벌어지곤 했다. 본관이 같거나, 아니면 같은 성씨끼리의 결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같은 집안끼리 겹사돈을 맺는 일도 잦았다.

***쿠바혁명에 적극 참여하기도**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혁명(1959년)에 일부 쿠바 한인들이 적극 참여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헤로니모 임(우리말 이름은 임은조, 79). 아바나 서쪽 교외, 그의 집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쿠바공산당 창건당원증, 지하투쟁 메달, 내무부 훈장은 쿠바혁명 과정에서 그가 맡았던 나름의 역할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헤로니모 임은 아바나국립대학 법대 출신. 대부분의 쿠바 한인들이 가난한 탓에 학교 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질 못하던 시절, 헤로니모 임은 고학을 하면서 아바나 법대를 다녔다. 일에 쫓겨 강의를 듣지도 못하고 시험을 치르는 일조차 생겨났다. 때로는 학교를 쉬고 마탄사스의 집으로 돌아가 노동으로 학비를 벌었다. 그렇게 어려운 고학생활을 하면서 임씨는 당시 부익부 빈익빈, 외국자본가들의 쿠바자원 약탈 등 쿠바사회의 모순에 눈뜨면서 혁명적 생각들을 품게 됐다.

그가 쿠바혁명에 본격적으로 몸을 던진 시점은 1956년. 피델 카스트로를 우두머리로 한 일단의 젊은이들이 쿠바 동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를 근거지 삼아 일으킨 7.26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부터였다(1953년 7월 26일 청년변호사 피델 카스트로는 다른 36명의 청년들과 함께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몬카다 병영을 점령하려다 실패로 끝났다. 그로부터 쿠바혁명운동은 7.26운동이라 일컬어졌다). 헤로니모 임은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아바나 법대에서 공부를 했지만, 개인적으로 가깝게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혁명투쟁 과정에서 임씨가 맡은 역할은 아바나에서의 지하투쟁. 정보와 투쟁자금을 모아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둔 피델 카스트로 쪽에 건네는 도시 게릴라 임무였다. 그는 혁명 지지자들로부터 돈을 받으면, ‘보노(Bono)'란 이름의 혁명공채(일종의 영수증)를 건네주었다. 그는 바티스타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만큼이나 위험스런 임무를 아바나의 동지들과 더불어 맡아 처리했다.

1959년 1월 2일 쿠바혁명군이 아바나에 들어오자, 임씨는 동지들과 함께 경찰서를 접수해 무기를 압수했다. 그 뒤 산업부 관리로 들어가 1989년 국장으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일했다. 혁명 바로 뒤 체 게바라가 산업부장관으로 있을 때는 관리부서 일을 맡아 그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이 시리즈의 체 게바라 편에서 살펴보았듯, 출장길의 체 게바라 가방에 떨어진 양말만 보이자. 새 양말을 구해 넣은 일도 있다. 임씨는 퇴임 뒤 명예직인 동아바나 인민위원장을 3년동안 지냈다(1992-95년).

쿠바 한인 후예 가운데는 앙골라내전에 참전한 사람도 있다. ‘고깔’이라 일컬어지는, 마탄사스 지역의 한 작은 마을에 만난 토마스 호 차(한국 이름은 호영길, 74세)가 그러했다. 그는 1977년부터 79년까지 2년동안 쿠바군 군무원으로서 앙골라에 머물렀다. 아프리카 앙골라는 1960년대부터 만성적인 내전에 시달려 왔다.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았던 집권당 앙골라인민해방전선(MPLA)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군 앙골라 완전독립민족연합(UNITA) 사이의 유혈투쟁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이념에 동조해 앙골라를 자원해 갔다. 1960년대 초 체 게바라를 만난 적도 있다”고 자랑스런 표정이다.

1921년 쿠바로 옮겨온 274명 한인들 무리 속에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호흠덕(1921년 당시 28세)이 들어 있었다. 토마스 호 차는 1930년 쿠바 마탄사스 지역의 엘 볼로 농장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음식이 모두 한국식이었고, 징이나 꽹가리를 비롯해 한국 전통악기를 어른들이 두드려대던 일이 생각난다”고 오랜 기억을 떠올렸다. 엘 볼로 농장의 한인들은 그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피마자 잎으로 김치를 담가 먹었다. 호씨는 한국말을 잊었다. 그의 부인 로사 모레노(68)는 한인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쿠바 여인이다.

***“쿠바 혁명은 한인사회에 도움돼”**

쿠바에는 유대인들이 약 1,500명쯤 살고 있다.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유럽 땅에서 건너온 이들이다. 아바나에만 3개의 크고 작은 시나고그(유대인 교회당)가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세운 것들이다. 민족적 전통문화 가치를 버리지 않기로 소문난 유대인들이지만, 아바나 시나고그에서 만난 유대인 젊은이들은 “히브리 말을 말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쿠바의 한인사회는 이미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말하자면, 쿠바혁명이라는 이름의 용광로 속에 한인사회가 녹아들면서 지금은 쿠바 사회에 동화된 모습이다.

마탄사스에서 만났던 마르타 임(헤르니모 임의 여동생, 전 마탄사스 종합대 철학과 교수)는 쿠바혁명이 한인사회에 미친 영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쿠바혁명으로 교육과 의료 부분에서 지난날과 같은 불평등이 사라진 다음부터 우리 한인 후예들도 교육과 취업의 평등한 기회를 더 많이 누리게 됐다. 바티스타 정권 시절엔 돈이 있어야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이제는 본인이 공부를 따라갈 재능과 의욕만 있다면 대학교육도 어렵지 않다. 쿠바혁명으로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서면서 빈민층의 고용기회도 많아졌고, 우리 한인들에 대한 차별도 사라졌다. 우리 한인들이 우리말과 문화를 잊고 쿠바사회에 동화되기 시작한 것은 쿠바혁명의 영향이 크다. 게다가 남북한으로 둘로 나뉜 한반도의 현실이 사회주의국 쿠바의 한인들이 조국을 멀고먼 나라로 여기게끔 만든 한 요인일 것이다”

kimsphoto@yahoo.com

(사진설명 ⓒ김재명)
1. 인조섬유의 등장과 더불어 애니깽 농장은 문을 닫았다. 쿠바 한인들의 땀과 한숨이 밴 엘 볼로 농장도 지금은 버려진 땅이 됐다.
2. 마르타 임(전 마탄사스 종합대 철학교수)이 엘 볼로 마을의 한인 감리교회를 가리키고 있다. 지금은 쿠바 현지인의 살림집이다.
3. 쿠바 마탄사스 지역 엘 볼로 한인마을의 노동자 기숙사. 지금은 폐가가 돼 사람이 살지 않는다.
4. 아바나 구시가지의 3층 옥탑방에 사는 한인 후예 에스테반 안(안남산)과 그의 부인 알레한드리나 주(주미엽) 부부는 사탕을 팔아 어렵게 살아간다.
5. 앙골라내전에 참전했던 토마스 호(호영길)
6. 쿠바혁명에 적극 뛰어들었던 헤르니모 임과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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