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1928-1967년)를 말할 때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280km 떨어진 인구 20만의 도시 산타 클라라를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엔 체 게바라 혁명기념탑과 아울러 거대한 체 게바라 동상이 넓은 광장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리고 동상 지하에 만들어진 기념관 안엔 체 게바라를 비롯,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무장 게릴라활동을 펴다 죽은 17명의 혁명투사 시신들이 잠들어 있다. 볼리비아 정부군은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의 시신을 몰래 파묻었지만, 30년만인 1997년 다시 파내져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졌다.
사진 1. 체 게바라가 사살된 볼리비아 라 이게라 마을의 담벽에 그려진 체 게바라 초상.@김재명
쿠바 카스트로 정권이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 시신을 산타 클라라로 옮겨온 것은 바로 그곳에서 체 게바라가 쿠바혁명사에 커다란 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1958년 12월 28일 게바라 사령관이 이끄는 한 무리의 혁명군은 산타 클라라에 주둔하고 있던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의 군대를 공격했다. 그 다음날 무장열차에 타고 들어오던 정부군 지원부대를 기습, 항복을 받아냈다. 산타 클라라가 혁명군에게 점령당하고 쿠바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바티스타에게 “더 이상 당신을 도울 수가 없다”고 통보했고, 바티스타는 바로 망명길에 올랐다. 1959년 1월 2일 카스트로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결정적 분수령이 바로 산타 클라라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그로부터 8년 뒤, 11개월에 걸친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활동(1966년 11월-1967년 10월)은 끝내 그에게 좌절과 죽음을 안겨주었다. 볼리비아 게릴라 시절 체 게바라는 현지 주민들을 만나면, 반드시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샀다. 그냥 빼앗는 일은 없었다. 체 게바라가 남긴 <볼리비아 일기> 1966년 9월 26일자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 일행이 그날 새벽 2,280미터 고지의 외딴 산간마을인 피카초에 들어서자 “농부들이 (우리들을) 매우 잘 대해주었다”고 적고 있다.
***“식량을 빼앗지 않았고 예의 발랐다”**
피카초 마을은 열흘 뒤 게바라가 볼리비아 특수군에 붙잡힌 채 압송돼 와 사살 당했던 라 기에라 마을에서 3km쯤 떨어진 곳이다. 그 마을에서 체 게바라를 만났던 여인을 만났다. 이름은 알레한드리나 스모야(67). 오랜 찌든 가난 탓일까, 이빨이 하나만 남은 게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들려준 얘기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사진2.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죽기 열흘 전 그를 만났던 볼리비아 여인(피카초 마을).
“그때 볼리비아 정부군들은 나쁜 사람들이 떼지어 다니니까 조심하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엔 라디오 같은 게 없으니,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질 잘 몰랐다. 그런 어느 날(1966년 9월 26일) 새벽, 체 게바라 일행이 우리 마을에 들어섰다. 그들은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거칠고 거만한 볼리비아 군과는 달랐다. 그들은 우리에게 돈을 주고 식량을 사선 불을 피워 끓여 먹었다. 몹시 시장해 보였다. 지금도 체 게바라를 기억한다. 그는 비교적 건강이 좋아보였다. 내 어린 아들(시실로 바냐와, 당시 두 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씩하게 커야한다’고 말해주었다”
1967년 10월 8일 라 기에라 마을 바로 북쪽 유로(Yuro) 계곡에서 부상당한 채 체포된 체 게바라는 곧바로 라 기에라 마을로 압송돼왔다. 그리곤 그 마을의 작은 학교에 갇혔다. 학교라야 교실 두 개뿐인, 한국으로 치면 분교(分校)쯤에 해당하는 학교였다. 그때 함께 붙잡혔던 ‘윌리’와 체 게바라는 각각 다른 교실에 갇혔다. 볼리비아 광산노조 출신으로 1932년생인 윌리의 본명은 시몬 쿠바. 모이세스 게바라가 이끄는 볼리비아 광부 12명과 함께 1967년 2월 체 게바라의 혁명기지인 낭카와수 강변에 이르렀다. 운명의 날인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와 함께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됐다가 다음날 게바라보다 먼저 처형됐다.
***한 여교사의 증언하는 게바라의 최후**
체 게바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여인이 있다. 이름은 훌리아 코르테즈 오시우아가. 8년 전 교단에서 물러난 뒤 바예그란데에서 가정주부로 살고 있다. 그녀가 체 게바라를 만났던 날은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가 부상을 당한 채 포로가 돼 라이 귀에라의 한 작은 학교교실에 갇혀 있을 때였다. 훌리아는 그때 막 사범학교를 마치고 시골학교 선생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사진3. 체 게바라가 사살된 라 이게라 마을의 학교는 체 게바라 박물관이 됐다.
20대 초반의 여인은 어느덧 50대 후반의 부인이 됐다. 그녀의 증언.
“오후 어스름할 무렵 체 게라바가 다른 한 명의 포로와 함께 잡혀와 학교 교실에 갇히자,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을 지니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체 게바라에게 가까이 가는 걸 막았다. 그렇지만 나는 에외였다. 나는 학교 선생이었고, 무엇보다 젊고 예뻤기에 군인들이 나를 막지는 않았다. 그때 체 게바라는 두 손이 뒤로 묶이고 두 발도 묶인 채 교실 벽을 바라보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누더기나 다름 없이 헤어지고 찢어졌고, 신발은 군화가 아닌, 소가죽으로 만든 누런색 샌들을 신고 있었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에 따르면, 그는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다가 군화를 강물에 빠뜨렸다. 이어지는 훌리아의 증언. “게바라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다리는 총상을 입은 탓에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병사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체 게바라가 결혼을 했는지, 아이들은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그에게 왜 이런 투쟁을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의 투쟁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나의 이상(ideal)이 무엇보다 앞선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살아서 바깥에 나간다면, 당신같은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고 했다”
<사진4. 체 게바라가 죽기 직전 앉아있었던 의자.
“게바라와 밤늦게까지 얘길 나누면서 우린 친구가 됐다. 기억나는 대로 그의 말을 옮긴다면 이렇다. ‘이 학교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학교를 새로 고쳐 짓고 현대적인 학교로 만들겠다. 그리고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대주겠다. 트랙터를 보내 길을 넓혀 주겠다.’ 나도 그때 형편이 비참하고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얘길 나누는데 한 볼리비아군 장교가 들어서더니, 나더러 나가달라고 했다. 무장군인들은 체 게바라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가더니, 사진을 찍었다. 그때 게바라의 손은 앞으로 묶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를 지켜봤다. 게바라는 마치 아는 누군가가 마을사람들 속에 섞여있나 찾듯이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그리곤 나를 발견하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사진을 찍은 뒤 군인들은 다시 게바라를 교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조금 뒤 나도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게바라와 얘길 나누진 못했다. 게바라는 군인들이 지키고 보는 앞에서 나와 얘길 하는 걸 삼가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런데...(이 대목에서 훌리아는 잠시 울먹이는 표정이 됐다) 총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보니, 그 총소리는 게바라가 아니라 그와 함께 체포된 윌리를 겨냥한 총소리였다”
“엄마는 체 게바라에게 주려고 조촐한 식사를 만들었다. 그리곤 내게 갖다주라고 했다. 게바라는 배가 고팠던 듯 접시를 다 비웠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식사는 근래에 내가 먹어본 것 가운데 가장 맛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 나는 빈 접시를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내게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겨우 한두 숫갈을 뜨려 하는데, 총성이 들렸다. 나는 게바라가 죽임을 당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학교로 달려갔다. 이상하게도 그곳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게바라는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눈을 뜬 채 죽어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진5. 1967년 체 게바라가 죽기 바로 직전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전 학교여선생 훌리아 코르테즈 오시우아가(57).
훌리아는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당시 현장에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볼리비아군 장교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와 있었다. 당시 베트남전쟁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존슨 미 행정부와 볼리비아 군부독재정권은 체 게바라의 처리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결론은 즉결처형 쪽이었다. 이미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된 체 게바라를 재판에 붙여 국제사회의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이나 볼리비아 양쪽 다 득보다 실이 크다는 판단에서였다.
게바라는 사살된 뒤 다른 게릴라 동료 시신들과 함께 볼리비아 군 헬기로 바예그란데로 실려갔다. 바예그란데는 인구 8천명의 작은 도시. 게바라의 시닌은 그곳 세뇨르 드 말타병원의 세탁장에 눕혀진 채로 일반에 공개됐다. 그런 뒤 비밀리에 시 외곽 마우솔쿰 지역에 묻혀졌다. 세상엔 그의 시신이 볼리비아 밀림지대에 그냥 내던져졌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사진6. 즉결처형된 체 게바라의 시신이 헬리콥터로 옮겨진 다음 일반에 공개됐던 세뇨르 드 말타 병원 빨래터 (바예그란데).
쿠바와 아르헨티나 공동조사팀의 끈질긴 노력 끝에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굴된 것은 정확히 30년 뒤. 게바라는 함께 암매장됐던 동료 게릴라 유해 6구와 함께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졌다. 볼리비아 혁명과정에서 죽은 다른 11명의 유해도 그 비슷한 시기에 옮겨졌다. 카스트로 정권은 게바라가 1958년 쿠바혁명 당시 바티스타 친미독재 정부군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던 산타 클라라에 거대한 혁명기념탑을 만들었고, 그 밑에다 게바라를 비롯한 볼리비아 혁명전사들의 시신을 안장해놓았다.
***성취의 땅 쿠바, 좌절의 땅 볼리비아**
30대 나이의 체 게바라가 사회혁명의 이상을 품고 투쟁했던 곳이 쿠바와 볼리비아다. 그 두 지역은 게바라 개인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선다.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희망의 땅이었다면, 볼리비아는 좌절과 실패의 땅이다. 볼리비아는 게바라의 혁명적 이상이 움틀 곳은 아니었다. 산타 크루즈 국립대학에서 만났던 로헤르 뚜에로 교수(정치학)는 “우리 볼리비아 지식인들은 체 게바라에게 정신적 부채를 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진7. 바예그란데 외곽 체 게바라의 시신을 몰래 파묻었던 곳. 1997년 발굴돼 쿠바로 보내졌다.
게바라가 처형됐던 안데스산맥의 작은 마을 라이게라는 따지고 보면, 게바라를 돕기는커녕 외면했던 곳이다. 게바라가 1966-67년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투쟁하면서 날마다 하룻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기록해 남긴 <볼리비아 일기>의 한 기록(1967년 9월 27일)에 따르면, 피카초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아침을 때운 게바라 일행이 라 이게라 마을에 들어서자, “남자들은 다들 사라지고 몇몇 부인들만 남아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렇게 게바라를 외면했던 마을 사람들이 지금은 게바라 박물관이며 제법 큰 동상을 세워놓고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다. “이제와 체 게바라의 죽음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것이냐”는 눈총을 받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바라가 라이게라 마을에서 사살된 뒤 헬리콥터에 실려와 일반에 공개됐던 바예그란데(라이게라 북부 50km 지점에 있는 인구 8천의 작은 도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곳 문화센터가 만들어놓은 관광 프로그램은 체 게바라와 관련된 여러 곳들을 돌아보는 것이 전부라 할 만했다. 체 게바라의 시신이 놓여있던 세뇨르 드 말타병원의 세탁장, 그리고 동료 6명과 함께 비밀리에 암매장했던 시 외곽 마우솔쿰 지역, 그 지역 화가들이 그린 체 게바라 그림들을 전시해놓은 산타클라라 카페 등등...
바예그란데 문화원 안에 있는 박물관 자체가 체 게바라 관련 유품과 지도들을 빼면 볼 것이 없을 정도다. 안데스 산맥말고는 이렇다할 관광자원이 없는 가난한 나라가 볼리비아다. 그런 까닭일까, 체 게바라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던 볼리비아가 다시 그의 죽음을 상품으로 팔아 달러를 벌어들이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필자 이메일: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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