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선 체 게바라를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거리엔 대형 게바라 초상화가 내걸려 있고, 곳곳에 게바라 관련 상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카리브 해의 파도가 시원스레 넘실대는 풍경이 바라보이는 아바나 고급호텔의 벽걸이 그림도 게바라다. 빈민가가 들어선 아바나 비에하 지역의 곧 쓰러질 듯 퇴락한 건물 안에 옹색하게 사는 도시빈민의 방에서도 게바라의 눈길과 마주친다. 지난 1967년 게바라가 죽임을 당했던 볼리비아에서도 쉽사리 체 게바라를 만난다. 볼리비아 내륙 제2의 도시 산타 크루즈의 토산품 가게를 들어서면, 어김없이 체 게바라 티셔츠와 그의 얼굴을 새긴 나무조각품들이 늘어서 있다.
<사진 01 볼리비아 산악지대의 체 게바라 활동 근거지를 가리키는 팻말@김재명
쿠바와 볼리비아뿐 아니다. 지구촌 어딜 가나 체 게바라와 만난다.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그의 브랜드라 할 별 달린 모자를 쓴 젊은이들, 가슴에 그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긴 여인들, 그리고 평전을 비롯한 수많은 게바라 관련 책자들, 그의 얼굴을 담은 목걸이, 시계, 재떨이....지난해엔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다시 한번 대중의 가슴에 다가왔다.
***쿠바혁명 이어 남미혁명의 꿈**
1928년 6월 14일생인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스네스토 게바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동쪽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을 지닌 중상류 가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대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장래에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지닌 평범한 젊은이였다. 1950년, 1953년 두 번에 걸친 남미 여행길에서 게바라는 빈곤층 민중들의 고단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혁명을 생각하게 됐다.
<사진2 1966년말 낭카와수 강변에 세워진 체 게바라 혁명기지 터.
1956년 11월 게바라는 멕시코 툭스판에서 쿠바 정치망명객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82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했다. 그러나 정부군 기습을 받아 15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에 대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게바라가 이끄는 일단의 무장군은 1958년 12월 28일 치밀한 작전과 대담한 공격으로 쿠바 중부도시 산타 클라라를 점령, 쿠바혁명 성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그 바로 뒤 바티스타는 미국으로 망명했고 1959년 1월 2일 혁명군은 수도 아바나를 접수했다. 그 뒤 1964년까지 게바라는 국제사회(특히 제3세계 비동맹권)으로부터 쿠바혁명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데 힘썼다. 유엔을 방문해 연설하고 러시아, 중국을 찾았다. 1960년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1965년 4월 게바라는 “쿠바에서 내가 해야 할 의무를 다했으며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한 또 다른 투쟁을 이끌기 위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내용의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보내고 아프리카 콩고로 떠났다. 제3세계의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을 바치겠다는 결의였다. 6개월만에 아프리카에서 비밀리에 쿠바로 돌아온 게바라는 다시 볼리비아를 남미혁명기지로 삼기 위한 준비작업을 벌였다.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1966년 11월 3일 변장한 채 위조여권으로 라 파즈 공항을 거쳐 볼리비아로 입국하는 데 성공했고,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 11월7일 낭카와수 강변의 혁명기지에 닿았다.
***낭카와수 강변에 남미 혁명기지 세워**
체 게바라가 남미혁명의 꿈을 가슴에 품고 볼리비아에 설치했던 근거지는 남미대륙을 위아래로 관통하는 안데스산맥의 기슭이라 할 저지대인 낭카와수 강변. 오가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외딴 지역이다. 그곳을 찾아가려면, 먼저 산타 크루즈에서 버스를 타고 6-8시간쯤 남쪽으로 달려 ‘라구아니스’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로 가야한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았다.
<사진3 체 게바라 혁명기지 가까운 곳에 흐르는 낭카와수 강. 리오 그란데 강의 지류다.
중남미에서 아이티와 더불어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는 나라가 볼리비아다. 1인당 평균 국민소득이 연 9백 달러도 안 된다. 그러니 도로를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투자가 빈약할 수밖에 없다. 비만 조금 왔다 하면, 도로가 물에 잠기거나 끊기기 십상이다. 버스 승객들마저 힘을 합쳐 파인 도로를 흙이나 나무로 메우는 작업을 거듭하며 나아가곤 했다. 오후 1시에 산타 크루즈를 떠난 버스는 예정 도착시각 7시를 넘겨 밤 10시에야 라구니아스에 닿았다.
문제는 다음날이다. 숙소에서 밤새 내리는 빗소리가 그치길 마음 졸이며 바라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하늘이 맑게 개인 아침이다. 숙소 주인의 주선으로 마을 주민으로부터 브라질산 4륜 구동차를 빌렸다. “차는 빌려 줄 수 있지만, 급한 사정으로 현장에 함께 갈 수는 없다”는 말에 운전대를 직접 잡았다. 볼리비아 군에 입대했다가 휴가차 나왔다는 주인집 아들과 그 남동생이 안내자로 따라 붙었다. 게바라가 설치했던 혁명근거지는 북쪽으로 50km쯤 떨어진 곳. 이 지역 일대를 흐르는 리오그란데 강의 한 지류인 낭카와수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까지 닿는 데도 거의 3시간이 걸렸다. 비포장 도로 곳곳의 비포장 도로가 밤새 내린 비로 무너져 내렸거나 나무들이 쓰러져 있는 탓이었다.
<사진4 체 게바라 혁명기지 터에 살고 있는 볼리비아 원주민.
체 게바라의 혁명기지는 지금 누군가의 농장으로 쓰여지고 있다. 현장에 들어서니, 남루한 옷을 입은 소작인 부부가 맞아준다. 그들의 두 아들 가운데 동생은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닌다. 그 꼬마에게 “체 게바라!”라고 말을 건네자, 그도 잘 알고 있다는 듯 환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위로 향해 가느다란 손을 쭉 내민다. 체 게바라는 그곳에 함석지붕으로 된 가건물을 지어놓았다. 그래서 그 혁명기지는 게릴라들 사이에 통칭 ‘함석집’(zinc house)으로 일컬어졌다.
***볼리비아 현지세력과의 갈등**
체 게바라와 함께한 게릴라는 모두 50명. 국적별로는 쿠바인 18명(체 게바라 포함), 페루인 3명, 볼리비아인 29명이었다. 총인원이 50명에 지나지 않았던 까닭은 볼리비아 현지 좌익세력과의 협력이 이뤄지지 못한 탓이었다. 1966년 12월 31일 볼리비아 공산당 지도자 마리오 몬헤가 낭카와수 강변의 함석집을 비밀리에 방문, 체 게바라와 마주 앉았다. 몬헤는 “볼리비아 땅에서 벌어지는 혁명운동은 내가 지도해야 한다”고 고집했고, 체 게바라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 따라 몬헤는 이미 게바라 대열에 합류한 볼리비아 출신 게릴라들에게 그만두라고 요구했고, 당시 쿠바에서 무장훈련을 받은 뒤 낭카와수로 향할 예정이던 볼리비아인들에게도 합류를 거부하도록 명령했다.
<사진5 낭카와수 강변에 세워진 체 게바라 혁명기지로 가는 도로사정은 전날 몰아친 비바람으로 곳곳에 장애물이 널려 있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자체의 사회혁명보다는 볼리비아를 혁명기지로 삼는 데 더 관심을 기울였다. 볼리비아를 근거지 삼아 그의 혁명을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들(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파라과이)로 수출한다는 점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그의 전략적 목표를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볼리비아 현지 좌익세력의 협조를 받아내지 못한 것은 게바라에겐 결정적 타격으로 작용했다. 볼리비아 공산당은 게바라를 모스크바와는 이념을 달리하는 ‘모택동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근거지를 잘못 골랐다“**
볼리비아는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른바 남미의 심장부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굳건한 혁명기지를 세움으로써 남미에 사회주의 혁명을 전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게릴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적어도 3년 전부터 사전준비작업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작업을 도왔던 인물이‘타니아’(본명은 하이데 타마라 붕케, 1937-1967년)란 이름을 가진 유태계 아르헨티나 여인이다. 1964년 체 게바라는 타니아를 볼리비아로 파견, 사전 탐색작업을 맡겼다(타니아는 1967년 3월 낭카와수 강변의 근거지에 왔다가 게릴라부대에 합류, 그 5개월 뒤 볼리비아 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볼리비아에서 극적으로 탈출, 쿠바로 돌아왔던 3인 가운데 한 사람인 폼보(아리 빌레가스)가 남긴 한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가 처음 세웠던 계획은 낭카와수 기지를 후방 안전기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실제 게릴라 활동무대는 그보다 훨씬 북쪽 지역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그 지역들에서 무장활동을 펴가면서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쿠바에서 훈련 받은 볼리비아 게릴라들을 낭카와수 지역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럼으로써 볼리비아 내륙을 위아래로 관통하는 안데스 산맥 줄기를 타고 혁명기지를 넓혀간다는 것이 체 게바라의 복안이었다.
<사진6 체 게바라 게릴라 부대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안데스 산맥 지류에서 볼리비아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폈던 볼리비아인 형제가 있다. 볼리비아 공산당원 출신으로 일찍부터 페루와 아르헨티나 산악지대를 근거로 반정부 게릴라활동을 폈던 ‘코코’(본명은 로베르토 페레도, 1938-1967년), 볼리비아 군 포위망을 가까스로 뚫고 살아남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무너진 조직을 정비하면서 재기를 노리던 중 사살됐던‘인티’(귀도 알바로 페레도, 1937-1969년)다.
그 두 사람의 동생 오스발도 페레도는 현재 볼리비아 제2의 대도시 산타 크루즈의 시의원. 모스크바에서 의대를 나온 오스발도도 형들을 따라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 활동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볼리비아 산 속의 체 게바라가 날마다 일어난 일과 감상을 적은 남긴 ‘볼리비아 일기’에도 ‘코코와 인티의 동생이 다른 동지들과 함께 곧 합류할 예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볼리비아로 가기 위해 쿠바에 머물던 중 체 게바라 피살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울었다. 산타 크루즈 시의원 사무실에서 가진 오스발도 페레도(65)의 증언.
“당시 많은 볼리비아 인들이 체 게바라 대열에 합류할 목적으로 쿠바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볼리비아 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대부분이 낭카와수 기지로 가지 않고 이탈했다. 1967년 10월 체 게바라가 죽은 뒤에도 극적으로 살아남았던 형 인티를 볼리비아 라파즈의 아지트에서 만나, 무엇 때문에 우리의 혁명투쟁이 실패로 돌아갔는가를 함께 논의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볼리비아 공산당의 배신적 행위였다. 우리 형제들은 그런 볼리비아 공산당에서 스스로 탈당을 했지, 공산당 지도자 몬헤가 지배하는 당에서 쫓겨난 게 아니다. 몬헤는 배신자로서의 더러운 이름을 지닌 채, 지금도 어디에선가 살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가 생각한 또다른 실패요인은 볼리비아 내륙 낭카와수 강가의 혁명기지가 너무 인적이 드문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보안을 유지하기엔 적절할지 몰라도, 체 게바라의 사회혁명 이념을 일반민중에 퍼뜨리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노동운동과 혁명의 경험이 축적된 볼리비아 북부 코차밤바 같은 지역이 혁명 근거지로선 더 적절했을 것이다”
***게바라의 품성 말해주는 일화들**
볼리비아에서 죽임을 당하기 몇 개월 전부터 체 게바라는 몹시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다. 게바라가 남긴 <볼리비아 일기>에 따르면, 게릴라들은 볼리비아 특수부대의 포위공격을 견디느라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일부는 스스로의 오줌을 받아마시기도 했다. 게바라의 몸도 갈수록 쇠약해갔다. 어렸을 때부터의 지병인 기침(기관지 천식)이 도져 그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괴롭혔지만, 약은 없었다. 비밀 아지트에 숨겨두었던 기침약은 이미 볼리비아군의 수색으로 뺏겨버린 상태였다. 페레도는 체 게바라의 도덕적 품성과 관련,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
<사진7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의 펴다 죽었던 형제(코코와 인티)의 친동생인 오스발도 페레도. 그도 모스크바와 쿠바를 거쳐 볼리비아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형 인티가 볼리비아 보안군에게 사살되기 전 라파스의 비밀 아지트에서 내게 말해준 바에 따르면, 낭카와수 강변의 함석집 시절 체 게바라는 게릴라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 남들과 똑같이 주어진 의무를 다하려 했다. 식사 당번이나 청소 당번, 그리고 외곽 보초도 남들처럼 똑같이 섰다. 게바라는 그 무렵 기관지가 약해져 고생을 했다. 천식이 도지자, 동료들이 행군할 때 무거운 배낭 메는 일에서 체 게바라를 뺀 적이 있다. 그러나 게바라는 혁명전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곧 배낭을 메고 앞장서 걸어갔다”
다른 게릴라들에 비하면 게바라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튼튼한 편이었다. 그 시절의 체 게바라를 고민하도록 만든 또다른 문제가 게릴라 가운데 병약자와 부상자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움직이다가는 행군 속도가 느려, 볼리비아 추적군에게 몰살당할 위험마저 있었다. 페레도의 증언.
“형 인티의 증언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부상자와 병약자들을 버리지 않았다. 게바라는 사단 규모의 볼리비아 군이 주둔 중이던 바예그란데를 기습, 약국에서 약품들을 얻어내 병약자들을 치료한다는 대담한 작전마저 세웠다. 그러나 미 군사고문단의 훈련을 받은 볼리비아 특수부대원들의 포위를 뚫지 못하고 끝내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부상자들을 버리는 쪽으로 결정했더라면, 아무리 볼리비아군의 포위가 삼엄했다 하더라도 나의 형 인티가 그랬던 것처럼, 게바라도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아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었다고 믿는다”
체 게바라가 콩고(1965년)와 볼리비아(1966-67년)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1960년대는 말 그대로 격동의 시대였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고, 유럽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변화와 개혁을 외치며 거리를 메웠다. 한편으로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지구촌 곳곳에선 좌익게릴라들이 사회변혁을 꾀하고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던 체 게바라. 볼리비아를 근거지 삼아 남미혁명을 꿈꾸었던 체 게바라는 말 그대로 꿈을 좇았던 몽상적 행동가였나, 아니면 철저한 자기희생에 바탕한 휴머니스트였나.
필자 이메일: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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