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은 이제 더 이상 나의 커버리지(취재 영역)가 아니다. 나는 이제 그런 문제에서는 졸업하고 싶다." "한국 새 정부의 정치·경제 정책 등에 대해서는 미국서 본 시각으로 보도를 하려 한다." "대외정책을 민족 우선주의적 관점에 경도돼 결정하는 데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워싱턴 이사(理事)기자라는 특이한 직책을 맡고 편집인 자리에서 물러나는 김대중 전 조선일보 편집인이 13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자신의 향후 거취와 방향이다. 조선일보는 13일 신문 지면에 대한 총괄책임직인 편집인에서 퇴진하는 김대중 전 편집인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1면과 8면 3꼭지의 기사에 걸쳐 김 전 편집인의 이력과 향후 행보 등을 다뤘다.
<사진 조선일보가 퇴진하는 김대중 전 편집인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13일 1면과 8면에 걸쳐 그의 이력과 향후 거취를 자세하게 다뤘다.>
지난 65년 조선일보 입사 이후 조선일보와 한국의 보수적 시각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한 김 전 편집인의 퇴진에 대해 조선일보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주필을 지낸 김대중(金大中) 전 편집인이 현장 기자로 다시 뛴다"고 평가했다. 또 "김 전 편집인은 2월 중 이사(理事) 기자 자격으로 미국 워싱턴 조선일보 지사에 부임, 한·미 관계와 북한 문제는 물론, 미국서 본 한국 정치·경제·사회 문제 등에 대한 기사, 칼럼, 인터뷰 등을 보도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회사 고위 간부의 퇴진에 대한 예우 때문인지 퇴진이 아니라 '현장기자로의 복귀'에 무게를 둔 것이다. 조선일보 편집국의 한 간부는 13일 김 전 편집인 관련보도가 "무엇보다 오랜 기간 조선일보에서 근무해온 김 전 편집인에 대한 예우 차원이며 또 언론계는 물론 사회 각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어 보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일보측에 따르면 김 전 편집인은 앞으로도 그동안 연재해온 '김대중 칼럼'을 계속 집필할 예정이며 워싱턴 현지 취재를 통해 워싱턴특파원의 영역과는 다른 인터뷰와 칼럼, 논설 등을 쓰게 된다. 즉 김 전 편집인은 퇴진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로서의 현장복귀를 통해 이전보다 더 왕성한 언론인 활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논조를 좌지우지하던 김대중 편집인 시대는 갔다"**
하지만 조선일보 내부의 시각을 살펴보면 김 전 편집인의 워싱턴 발령은 사실상 현직복귀가 아니라 퇴진이라는데 무게가 실리는 게 사실이다. 그동안 편집국장으로서, 주필로서, 편집인으로서 조선일보 지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김 전 편집인이 더 이상은 지면제작이나 신문논조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김 전 편집인이 앞으로 쓰게 될 글들을 편집국에서 일일이 데스크를 보고 자르는 경우는 많지 않겠으나 일단 지면운영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든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조선일보가 전직 고위간부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신문지면에서 최고의 열독률을 보이는 1면 사이드 상자기사까지 동원해 보도한 것은 조선일보 특유의 인사관리 관행으로 분석된다. 언론계에서 불문율로 회자되는 이야기중 하나가 조선일보 출신은 회사를 나와서도 회사 비리를 말하거나 욕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 조선일보는 정치인으로 입문하거나 다른 분야에 진출하는 자사 기자들에게 전직 바로 직전의 승진인사를 통해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어두는 것이 관행이다. 회사를 떠난 사람들에게도 수시로 인사와 선물 등을 통해 조선일보와의 인연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오너 방씨 일가의 독특한 노무관리 기법인 것이다.
아무튼 김 전 편집인이 13일 조선일보가 보도한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앞으로 어떤 글을 쓰게 될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노무현 정권은 자신의 취재영역이 아니라며 "이제 3김 시대는 막을 내렸고, 386세대를 포함한 노무현 정부 인사들을 저는 잘 모른다"면서도 "그러나 한국 새 정부의 정치·경제 정책 등에 대해서는 미국서 본 시각으로 보도를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과 한국 노무현 정부의 대미관·민족관이 대립하고 있어 일찍이 지금처럼 한·미관계와 한국 안보 문제가 난관에 부딪친 적이 없다"며 "워싱턴 특파원(1972~1979년) 경험을 살려 미국서 본 대 한반도·아시아 정책을 보도하고, 우리 입장을 미국측에 역으로 전달하는 기사도 쓰겠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현실 정치에 대한 간섭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자제하겠지만 노무현 정부의 정치·경제 정책 등에 대해 미국서 본 시각으로 보도를 하겠다는 게 김 전 편집인의 각오다.
<사진 워싱턴 이사기자로 파견되는 김대중 전 조선일보 편집인의 지난 11일자 칼럼.>
***노무현 정부 출범은 점령군의 진주?**
그의 각오를 잘 표현한 칼럼이 바로 지난 11일자 조선일보의 '김대중 칼럼: '점령군'의 進駐?'다. 그는 노무현 정권을 '점령군'으로 표현하고 현재 상황이 "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에서 일상화돼야 하는 정권교체의 범주를 크게 일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전 편집인은 불과 57만표 차이로 대선에서 승리한 이긴자들이 패배한 반대자들을 숙청하는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다며 " 새 정부와 새 대통령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선거에서 불가피하게 노정될 수밖에 없었던 대립과 갈등과 불안과 우려를 가능한 만큼 봉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명제가 성립한다면 새로이 형성되는 이른바 '혁명'도 권력화될 것이며 그 권력도 부패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란다.
그런데 묘하게도 미국 워싱턴 파견근무를 명 받은 그가 대선에서 진 쪽을 언급하며 "초상난듯이 침울하고 거의 패닉상태에서 이민을 들먹이는 상황"을 거론했다. 김 전 편집인이 워싱턴 이사기자로 떠나는 심경의 일단이 그대로 드러난 말이다.
경향신문은 13일 '기자메모: 김대중 이사 기자에게'를 통해 "무엇보다 후배 언론인들이 지적했던 '사실 왜곡과 여론 호도'를 또다시 글쓰기의 기조로 삼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굳이 과거의 사례로 거슬러 올라갈 것 없이 '편집인 명의'로 마지막으로 쓴 지난 11일자 '김대중 칼럼' 같은 기사를 '기자 명의'로는 쓰지 않았으면 한다"며 "아무리 '노무현 차기 정권'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하더라도 사회 현상을 왜곡해가며 국민통합에 어깃장을 놓는 그같은 곡필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전했다.
"김대중 전 편집인이 존경받는 선배가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다시 '본받아서는 안될 언론인'으로 지목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지난해 5월 전국언론노조는 김대중 조선일보 편집인 퇴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사실왜곡을 통한 악의적인 여론조작을 중단하고 그만 붓을 꺾으라는 비판이었다. 김 전 편집인이 워싱턴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글을 쓰게 될지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으나 미국의 이기주의적인 세계경찰주의를 반영하는 글들보다는 오랜 언론인 경험을 되살려 북핵위기가 고조된 한반도의 긴장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미국측을 설득하는데 노력해주기 바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