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몸조심에 나섰다. 최근 대선기류가 '미묘'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 회장, "이회창, 노무현 노사관 다른 게 없다"**
지역상공인들의 연합체인 대한상공회의소의 박용성 회장은 11일 평화방송(PBC)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재계가 당초 대선후보들의 정책평가 결과를 발표하기로 한 것과 관련, 그럴 생각이 없다고 단언했다.
박 회장은 '재계 일부단체가 이번 대선후보들의 정책평가를 발표하기로 한 것은 특정후보 편들기가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이 있다'는 진행자의 질문에 대해 "이 문제에 대해선 몇 달전에 경제 단체장들이 모여 '대선후보들의 공약에 대해서 큰 원칙적인 부분만 평가하자' '시장경제 원칙에 어긋나는 정책인가 아닌가 그것만 평가하자'는 얘기가 있었다"며 "그런데 현재 대선에서 앞서가는 두 분이 시장경제의 큰 원칙을 지키겠다고 말했기에 대한상공회의소는 더이상 여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이어 "일부 단체에서 아마 공약내용을 평가해 발표하는 것 같으나 대한상공회의소에선 두 분이 시장경제 원칙을 철저히 지켜 경제를 운영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더 이상 공약을 평가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덧붙였다.
박 회장은 또 대기업그룹들의 연합체인 전경련이 얼마 전 차기정부에 정책건의를 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이번 대선에서 재계가 지지하는 후보를 발표하겠다고 한 것과 관련해서도 "별로 현실적 가능성이 없는 것 같다. 특정 후보를 사실상 지지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고 실현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는 "어떤 분이 대통령이 되든 이제 우리 경제 규모가 GDP 세계 11등, 교역량 13등의 큰 경제 규모"라며 "이렇게 큰 경제가 어느 한 분이나 극소수 몇 사람의 생각으로 이리 틀고 저리 틀고 할 시기는 지났다"고 덧붙였다.
박 회장은 또 이회창·노무현 후보의 노사관에 대해서도 "두 분은 큰 원칙에서 크게 다른 게 없다"며 "둘 다 국제경쟁력 제고 방향으로 노사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같은 말하고 있다"고 종전과 뉘앙스가 달라진 답을 했다.
박 회장은 또 이-노 후보 사이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재벌개혁과 관련해서도 "외환위기 이전엔 '대마불사'라는 신화가 있었으나 이제는 누구나 자기가 기업 운영 잘못하면 정부가 나서서 구제금융해서 살려주고 그런 것은 없다. 또 시장의 힘이 커져서 시장에서 잘못 보이면 주가가 떨어지고 주가가 떨어지면 투자자들의 항의를 받고 은행들의 신용등급이 낮아진다. 시장의 힘이 작용하는 마당에 구태여 '보이는 힘'에 의한 규제가 필요하겠나"고 조심스레 답했다.
***'소신파'의 몸조심?**
박용성 회장은 평소 할 말은 하는 '소신파'로 유명하다. 그는 그동안 정부에 공개서한을 보내면서까지 주5일제 도입 반대, 사외이사제, 증권 집단소송제 등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누차 밝혀왔다. 재벌의 기업지배 문제도 정부 규제가 아닌 시장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같은 박 회장의 평소 지론은 노무현 후보의 대선 경제공약과 정면배치되는 것이기도 하다. 노 후보는 10일 TV경제합동토론에서도 "재벌개혁을 안 하면 제2의 경제위기가 올 수 있다"며 재벌개혁에 재차 강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반면에 박 회장 생각과 이회창 후보의 대선 경제공약은 상당히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런 만큼 TV경제토론회 다음날인 11일 박용성 회장이 이처럼 이회창, 노무현 후보 모두와 '중립적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사실은 재계는 물론 각계로부터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박 회장이 자신과 직접 관계가 없는 전경련에 대해서까지 "전경련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대목은 그의 발언이 단순한 개인 또는 대한상의 차원을 넘어선 재계 일반의 인식임을 드러내주고 있다.
박회장의 발언은 그 동안 친이회창 노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온 재계의 물밑 기류가 바뀌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기에 충분한 발언이라 하겠다.
***"지지율 10% 이상 벌어지면 상황끝"**
실제로 최근 재계 분위기는 한마디로 '초긴장' 상태다.
재계는 외형상 정치중립을 표방해왔다. 하지만 물밑 사정은 그렇지 않다. 삼성, LG 등 주요 대그룹들의 경우 구조조정본부 등이 중심이 돼 가용할 수 있는 정보 네트워크를 총동원, 실시간으로 대선 기류를 체크하고 있다.
모 대그룹 고위관계자는 11일 최근의 재계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유명한 소신파인 박용성 회장이 말조심을 할 정도로 최근 재계 분위기는 '조심' 그 자체이다. 대한상의뿐 아니라 대그룹 모임인 전경련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만난 노무현 후보의 천적격인 한 메이저신문의 사장이 '이러다 진짜 노무현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할 정도이니, 재계가 바짝 긴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요즘 여론조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주위사람들을 만나보면 내 주위에는 아직도 이회창 지지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여론조사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요즘 ARS에 많이 의존하는 여론조사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한두 군데에서만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 모든 여론조사에서 비슷한 결과가 나오고 있다는 데 있다.
얼마 전 만난 민주당 의원들조차 '10%대 지지율이 단숨에 이렇게까지 오를 줄은 몰랐다'고 놀랄 정도로 최근 여론 조사는 노 후보에게 유리하게 나오고 있다. 재계에서는 모든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으로 벌어지면 '상황끝'으로 보고 있다."
***모그룹이 분석한 향후 대선변수**
그는 앞으로 8일 남은 대선 기간동안에 몇가지 변수가 작용할 소지가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대여섯 가지 변수가 작용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첫번째는, 정몽준 대표가 노무현 후보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돕느냐이다. 정 대표가 적극 나설 경우 상당한 파괴력이 예상된다.
두번째는, 이인제가 과연 이회창 후보를 지원할 것인가이다. 하지만 정몽준과 비교할 때 그 파괴력은 적어보인다.
세번째는, 막판 지역감정 작동 여부다. 이 후보 패색이 짙다는 위기감이 확산될 경우 과거 97년 부산 초원복집 사건때처럼 특정지역과 보수층이 똘똘 뭉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네번째는, 오늘 터진 미국의 북한 미사일 적발사건이다. 미국발 북풍이 불어올 가능성도 주목하고 있다.
다섯번째는, 오는 14일 시청앞 촛불집회에서 폭력등 돌발사태가 터지지 않을지 여부다. 만약 폭력사태 등이 발생한다면 여론은 급속히 싸늘해질 공산이 있다.
이밖에도 예기치 못한 여러 돌출상황이 나올 수 있는 만큼 신경을 곤두세우고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만약 사태에 대비해 인맥찾기에도 분주**
재계는 이처럼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동시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노무현 후보쪽과 접촉가능한 인맥도 점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맥 관리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A그룹의 경우 L모 구조조정본부장이 노 후보의 부산상고 1년 선배라는 점과, 구조조정본부의 재무팀장인 K모 부사장이 노 후보 부인 권양숙 여사와 같은 동네에 살며 이웃으로 친하게 지냈다는 점 등이 주목되고 있다. 계열사에 노 후보 아들이 취직한 B그룹을 비롯해 다른 그룹들도 인맥 체크에 들어선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계의 일반적 분위기는 아직까지는 '설마'이다. 과연 '설마'가 '역시나'로 끝날지, 아니면 '으헉'이라는 신음으로 터질지 앞으로 8일 뒤면 알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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