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에 2억원의 정치후원금을 내기로 했다는 LG-칼텍스가스의 공시를 계기로 정치권의 대선자금 모집이 시작됐음이 드러나면서, 과연 대선후보들의 법정상한선 준수 공약이 지켜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
특히 올해의 경우 정치자금 모집의 주된 대상이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사상최대 규모의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치권의 협조요청이 거센 것으로 알려져 재계의 대응이 주목된다.
***LG-칼텍스가스 정치후원금 공시의 세가지 의미**
그동안 대선자금과 관련한 대기업들의 대외적 입장은 "정치권으로부터 자금요청을 받은 적도 없고 먼저 줄 생각도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요즘같이 국내외투자가들의 감시 눈길이 살벌한 판에 어떻게 회사자금을 정치자금으로 줄 수가 있겠느냐"는 주장도 함께 펴왔다.
그러나 LG-칼텍스가스의 케이스를 보면, 실제 상황은 그렇지만도 않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번 해프닝은 재계의 최대비밀중 하나인 대선자금 지원과 관련, 세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시사해주고 있다.
첫번째는, 정치권의 대선자금 협조 요청이 이미 시작됐다는 것이다. LG-칼텍스가스가 한나라당에 2억원을 후원키로 한 것은 자체의 결정이 아니라 LG그룹의 지시였다는 사실이 본지 취재결과 밝혀졌다.(12일자 "LG의 도박?" "NO, 민주당에도 똑같이 낸다" 참조)
이번에 LG-칼텍스가스가 2억원을 내기로 한 한나라당뿐 아니라 민주당에서도 지원을 요청해왔고, 이에 LG그룹은 법이 정한 범위내에서 두 당 모두에게 공평하게 지원을 해주기로 하고 계열사 사정에 맞춰 할당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밖에 이번에 대선후보를 내지 않고 자민련도 최근 어려워진 재정상황 때문에 재계에 손을 벌리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다.
두번째는, 이같은 후원금을 내는 기업들이 과거에 비자금에 의존하던 것과는 달리 회사공금을 사용하는 게 아니냐는 점이다. LG-칼텍스가스의 경우 증여금 형태로 회사공금을 사용해 정식으로 이사회 결의를 거쳐 후원금을 냈다. 이는 주주감시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비자금 조성이 힘들어졌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업들이 떳떳히 회사돈을 내도 될 정도로 '정치의존도'가 크게 줄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긍정적 신호이기도 하다.
세번째는, 정당들이 기업들에게 요구하는 지원 규모가 여전히 상당히 큰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이번에 2억원을 내기로 한 LG-칼텍스가스는 LG그룹의 여러 계열사 가운데 중간정도 규모의 기업이다. 따라서 다른 계열사들에게도 그룹으로부터 같은 지시가 내려졌다면 이들 계열사가 낸 대선후원금 액수를 합할 경우 상당한 규모가 될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이런 요구가 LG그룹뿐 아니라 다른 대기업들에게도 가해졌을 것이라는 추정까지 하면, 정당들이 현재 재계로부터 모으고 있는 정치자금 규모는 상당한 규모가 되리라는 추정도 가능해진다.
이처럼 LG-칼텍스가스 파동은 재계와 정치권의 최대비밀인 정치자금의 일단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여러 모로 의미 있다.
***말로만 지키겠다는 법정선거비용**
지금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등 각 대통령후보들은 예외없이 대통령선거비용의 법정상한선을 지키는 '깨끗한 선거'를 치루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이번 대선비용의 '법정상한선'이 얼마나 될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이를 정하는 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공영제 대폭확대를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마련해 제출해놓은 상태로, 국회가 이를 통과시켜야만 법정상한선이 확정되는 탓이다.
현재 선관위는 대통령후보들의 미디어 선거운동 비용 거의 모두를 국고로 보조함으로써 약 4백억~5백억원대로 추정되는 법정선거비용 가운데 국고부담율(공영비율)을 85.6%로 끌어올리겠다는 방침이다. 지난번 선거때의 국고부담율은 64.3%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정부가 이처럼 선거공영제를 목표로 후보 1인당 3백억원대의 자금을 국민세금으로 지원한다 할지라도 대선후보들이 법정선거비용만 사용하리라고 믿는 국민들은 거의 없다. 거액의 정치자금 요청을 받은 LG그룹의 예 이외에도 이같은 국민의 의구심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들은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그런 대표적 예가 지난 7월말 있었던 선관위의 선거공영제 확대안을 주제로 한 공청회때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등 각당 토론자들이 보인 한결같은 반응이다. 선관위는 대선때 국민세금 투입규모를 늘리는 대신에 1백만원이상의 후원금을 낸 후원자들의 명단과 후원금액을 공개할 것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각당은 "정치는 이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이유를 들어 한 목소리로 반대했다.
한마디로 말해 더 많은 국민세금으로 선거비용을 지원받는 데에는 대찬성이나, 비밀리에 정치자금을 모으는 행위는 중단할 수 없다는 입장 표명이었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선관위가 정하는 법정상한선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이같은 태도를 보이는 정당의 대선후보들에게 과연 국민세금으로 선거비용을 늘려 지원해줘야 하는가 자체가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80~90년대 대통령선거때마다 조단위의 선거비용 사용**
그렇다면 도대체 대선을 치루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기에 각후보들은 법정선거비용 준수를 이처럼 꺼리고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 몇 가지 참고할만한 자료들이 있다.
우선 주목할 것이 재계출신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9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드러난 역대 정치자금의 실체이다. 10여년간 전경련회장을 맡기도 했던 재벌총수답게 정 명예회장은 정치자금의 흐름에 누구보다 정통했다.
대선열기가 극에 달했던 지난 92년 12월10일 정주영 후보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 김영삼씨가 쓰고 있는 천문학적 숫자의 돈이야말로 기업으로부터 비밀리에 거둬 비밀리에 사용하고 있는 기업의 비자금"이라며 "김씨가 1백80억원 상당의 손목시계 수백만개와 사발시계 몇십만게를 만들었는데 돈 한푼 벌지 않은 그가 이런 돈을 어떻게 마련했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선친의 선거운동을 돕고 있던 정몽준 의원은 이와 관련해 "지난 87년 대선때 주요 재벌기업들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2백억~3백억원씩을, 노태우 민자당후보에게는 별도로 1백억원씩을, 노후보와 동서간인 금진호씨 등에게 50여억원씩을 선거자금을 바쳐야 했다"며 "특히 금진호씨의 경우 현재 대구.부산 등지에서 중소기업으로부터 1억~2억원씩 정치자금을 짜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폭로했다. 현대등 주요재벌들이 87년 대선때 재벌당 4백억 안팎의 대선자금을 내야 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었다.
92년 대선자금 규모도 그 실체를 드러낸 적이 있다.
"대통령이 당선된 후 어느 날 YS는 언론사 간부들과 청와대에서 회식을 한 적이 있어. 회식 도중 선거자금에 대해 묻자 YS는 배석했던 정무수석에게 얼마나 동원되었느냐고 물었어.
'공식적인 것은 잘 모르겠지만 7천억~8천억원으로 추산된다'고 정무수석은 말했어.
적어도 조원대의 자금이 여야에서 살포되었다는 항간의 소문이 사실로 입증되었지."
언론계 사장 출신인 손광식 본지고문이 본지에 인기리에 연재됐던 '한국의 이너서클'이라는 취재비사에서 밝힌 증언이다.
80~90년대 대통령선거때마다 조원대의 천문학적 정치자금이 사용됐음을 말해주는 증언들이다.
***14일 재벌총수 골프회장 결과 주목거리**
2002년 대선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채 1백일도 안 남았다. 당연히 대선자금이 각 대선주자들의 현실적 과제로 급부상하고 있고, LG-칼텍스가스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이미 대선자금 모집활동은 시작됐다.
이에 비례해 재계의 물밑 움직임도 부산해지고 있다.
12일 전경련이 회장단 모임을 갖고 '주5일제 반대'입장을 밝힌 데 이어, 주말인 14일에는 재벌총수들의 골프회동이 예정돼 있다.
이번 재벌총수들의 골프회동은 지난 6월, 7월에 이어 올 들어서만 세번째로 이뤄지는 대단히 이례적 회동이다. 춘천에서 열리는 이번 회동은 두산그룹의 박용오 회장 초청으로 삼성그룹의 이건희, LG그룹의 구본무, 현대차의 정몽구 회장 등 우리나라 재계의 실세들이 모두 참여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임의 외형적 성격은 친목도모. 그러나 대선을 코앞에 둔 현시점에서 과연 골프만 치다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대선에 대한 의견교환, 더 나아가선 입장조율이 있지 않을까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모 그룹의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부득이 대선자금을 지원하기는 해야겠으나 최근 LG그룹이 이사회 결의를 거쳐 공식적으로 회사돈으로 자금을 지원한 데서도 알 수 있듯, 재계가 과거처럼 정치권에 저자세로 끌려가는 모양새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IMF사태후 시장경제가 대폭 확대발전하면서 정부가 재계에 줄 수 있는 특혜는 많이 사라졌다"며 "단지 차기정권에서 집단소송제 같이 재계에 민감한 정책들이 도입되지 않도록 하는 압력수단 정도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요컨대 정치권에 자금을 지원하되 반대급부는 확실히 챙기겠다는 것이 재계의 현입장인 셈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