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대선을 30일 앞두고 차기정권을 향한 재계 요구가 분출하고 있다. 전형적인 '대선 현상'이다.
특히 올해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하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역대 어느 선거때보다 재계가 선호하는 대선후보가 일찌감치 가시화된 탓이다. 아울러 IMF사태후 숨 죽여온 재계의 '목소리 되찾기'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대선 D-30을 맞아 재계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점검해본다.
***봇물 터진 재계의 대(對)차기정권 주문**
자본주의는 규제가 없으면 '카지노 자본주의'로 변질된다. 자본주의 본산이라는 미국이 대표적 예다. 지난해말부터 미국의 대기업들은 분식회계 혐의로 줄줄이 파산하고 있다. 미국은 급기야 지난 8월 분식회계 근절을 위한 초강력 기업회계개혁법을 통과시켰다. 민간에 맡겼던 회계감독권한도 빼앗아왔다.
미국에서 법안이 통과되자 우리도 서둘러 금융감독위원회와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원, 공인회계사회 등이 참여한 '회계제도개선 실무단'을 출범시켜 석달여만에 회계제도 개혁방안을 지난 7일 내놨다. 아메리칸 스탠다드는 곧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기 때문이다. 별도의 회계감독기구를 설치하는 것만 빼고는 거의 미국 법안 그대로다. 하지만 관계법령을 개정해야 하는만큼 원안대로 시행되느냐 여부는 차기정권의 의지에 달려 있다.
아니나 다를까 재계가 강력반발하고 나섰다.
대그룹 이익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지난 14일 성명을 통해 "지난 7일 정부가 발표한 회계제도 개혁안은 우리와 기업여건이 다른 미국제도를 지나치게 성급하게 받아들였다"며 "CEO에 대한 포괄책임 부과, 이미 타 법률에서 규제하고 있는 사항에 대한 중복규제, 제도수용 인프라 미비 등의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재계는 특히 사업보고서 등에 최고경영자(CEO)나 최고재무담당자(CFO)의 인증을 의무화하는 것은 중복규제라면서 시행을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장단은 이밖에 이달부터 시행된 공정공시제도와 관련해서도 "대상정보의 기준 및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불명확해 선의의 위반사례가 나타날 수 있다"며 "공정공시 대상기준을 보다 구체화하는 한편 제재조치 완화와 제도의 일정기간 적용 유예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재계는 정부가 추진중인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도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집단소송제란 기업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은 소액주주중 한사람이라도 소송을 내 승소하면, 나머지 모든 소액주주들도 함께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는 혁명적 제도다. 이미 미국등 서방선진국들은 모두 이 제도를 도입, 소액주주의 권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기업 오너 및 경영진들의 전횡을 예방하고 있다.
전경련측은 이에 대해 "미국에서는 이 제도로 인해 소송이 남발하고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법률개정안이 하원에 계류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런 문제있는 제도를 한국에서 서둘러 도입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계의 주문사항은 이뿐이 아니다. 계열사간 과다출자를 제한하고 있는 출자총액제한제도, 이사회의 절반이상을 사외이사로 구성하도록 의무화한 사외이사제도도 불만대상이다.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의장은 지난달 30일 기자간담회에서 "새 정부가 들어서면 해외에서도 문제점이 드러나고있는 집단소송제, 출자총액제한제도, 사외이사제도를 먼저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IMF사태후 도입한 일련의 기업개혁안을 원점으로 돌리자는 주장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경제적 앙시앙레짐'이라 부르고 있다.
***정부와 재계의 팽팽한 신경전**
재계가 이처럼 강력대응에 나선 것도 일면 이해간다. 정부가 새로 도입하고자 하는 기업개혁 조치 내용이 결코 간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정부가 도입키로 한 기업회계 개혁법안을 살펴보자.
새 법안은 CEO 인증제도 도입을 의무화하고 있다. 회계보고서에 대해 CEO 등 경영진의 민형사상 책임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자산 2조원이상의 공개기업과 금융기관들에 대해서만 주요주주·특수관계인·임직원에 대한 자금대여시 이사회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모든 상장·등록기업에게 이 의무가 강제된다. 특히 대여나 담보제공시 만기, 이자율 등 지급조건을 상세히 공시해야 한다.
기업이 제출해야 할 기본 재무제표도 개별기업 재무제표에서 연결재무제표로 바뀐다. 연결재무제표란 지배·종속관계(지분 30% 이상 소유 기업)에 있는 모든 기업을 하나의 회사로 보고 작성된 손익계산서와 대차대조표를 뜻한다. 지금은 분·반기 보고서의 경우 연결재무제표 작성이 의무화돼 있지 않고, 연간 연결재무제표도 보충자료로만 공시되고 있어 투자자들이 종속회사의 재무상태를 적시에 파악하지 못하는 폐단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분·반기 보고서 제출때 반드시 연결재무제표를 기본으로, 개별재무제표를 보조자료로 공시해야 한다. 이 제도가 실시되면 기업이 개별기업 실적보다는 연결실적을 중시하게 될 것이고, 실적을 부풀리기 위한 관계회사간 내부거래도 자연히 줄어들게 된다.
재계는 당연히 펄쩍 뛰며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CEO인증제도가 필요없다는 재계 반발에 대해 금감원은 일축하는 분위기다. 금감원 관계자는"현재 회사의 실무자들은 사장의 도장을 항상 갖고 있으면서 필요한 서류에 기계적으로 찍고 있어 CEO는 고의.중과실에 해당되지 않아 처벌을 피해나가고 있다"며 CEO 인증제도 도입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공정공시제도에 대한 반발에 대해서도 코스닥위원회는 "공정공시제는 기업들에는 부담이지만 개인투자자들에게는 직.간접적 이익을 가져다 준다"면서 "재계는 공정공시제 이전에 상장. 등록사들이 개인투자자들을 얼마나 불법적으로 홀대했었는지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반박했다.
***재계는 이회창 후보 지지하는 분위기**
문제는 그러나 이같은 기업개혁 법안이 정권말기에 마련됐다는 데 있다. 이런 제도를 도입하느냐 마느냐는 현 정권이 아닌 차기정권 몫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대선후보들의 반응이다.
이같은 재계-정부간 쟁점 현안에 대한 유력 대선후보들의 정책은 분명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한 예로 현재 최대 현안인 증권 집단소송제와 출자총액제한제도에 대한 후보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증권 집단소송제 도입에 강력반대하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 역시 보완장치를 만든 뒤 폐지한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둘 다 찬성하고 있다.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도 출자총액제 한시적 유지와 집단소송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집단소송제가 도입돼 제 기능을 하면 출자총액제한제는 실효성이 없어지는만큼 폐지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차별성이 분명하다보니, 당연히 재계의 반응은 이회창 후보쪽에 호의적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책을 보고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냐"며 "앞으로는 재계를 규제하기보다는 재계의 활력을 북돋아주는 쪽으로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같은 재계 움직임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자칫 재계의 요구가 옥석 구분없이 수용될 경우 IMF사태후 어렵게 토대를 마련한 시장경제의 근간이 밑둥채 흔들릴 위험성도 크기 때문이다.
한 외국계펀드의 CEO는 "재계의 요구를 보면 말로는 시장경제 창달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IMF사태 이전의 구시대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하게 읽힌다"며 "시장경제의 근간인 기업의 투명성, CEO의 책임강화, 주주가치 극대화까지도 불필요한 규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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