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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마음 열고, 일본은 경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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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마음 열고, 일본은 경청하라"

<월드컵 정치학> 파이낸셜타임스 '같은 경기, 다른 목표들'

한일관계 갈등해소를 위해 시급한 것은 무엇일까. 사상 최초로 월드컵을 공동개최하는 한국과 일본에 대해 세계 언론의 관심은 월드컵이라는 행사뿐만이 아니라 양국간의 정치적 관계나 갈등상황 등에 집중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25일 '같은 경기, 다른 목표들'이라는 장문의 기사를 통해 지난 해 12월 아키히토 일왕이 '일본 왕실에 백제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발언한 것은 내심 한국방문 의사를 피력한 것이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그러나 한국 언론이 이 발언을 대서특필한 한 반면 일본 언론들은 거의 묵살했고, 또 한일간의 역사적 앙금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사상 최초의 일왕 방한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또 재일교포들의 지문채취 거부 등 지위향상 노력, 한일 정부의 월드컵을 통한 관계개선 노력 등 한일관계의 현주소를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재일동포 피아니스트 최선애씨와의 인터뷰를 인용해“한국인들이 마음속에 두고 있는 것을 모두 뱉어버릴 수 있다면, 그리고 일본인들이 편견없이 이를 경청할 준비가 돼있다면, 그것이 두 나라가 진정한 동반자가 되는 첫 걸음”이라며 기사를 매듭짓고 있다.

다음은 파이낸셜타임스 25일자 '같은 경기, 다른 목표들' 기사의 주요 내용.

68회 생일을 맞은 일왕이 일본인이면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했다. 즉 8세기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일본 왕실은 고대 한국의 왕조 백제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이는 일본 왕실에 한국의 피가 일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일왕이 사실상 시인한 것이다.

지난 해 12월에 있었던 아키히토 일왕의 역사 관련 발언은 한국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한국인들은 그의 발언이 비록 때늦은 것이긴 하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 빚을 인정한 것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이를 거의 무시했다.

게이오 대학의 오코노키 마사오 교수는 “왕실과 한국의 관계는 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며 “일본 언론이 충격을 받아 어떻게 할 바를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일본 학자 고쿠분 료세이는 “이는 일본 언론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왕의 말은 한일 양국이 월드컵 공동 개최를 통해 적대감을 청산하려는 마당에 자신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일본의 한국 강제점령 이후 일왕의 한국방문은 한번도 없었다.

조세형 주일한국대사도 월드컵이 한일 양국간 해빙을 가속화할 것으로 믿고 있으며 '일본 문화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수용적 태도로 양국관계가 더 좋아졌다'고 말했다. 조 대사는 요즘 350만명 이상의 양국 국민들이 상대국을 방문한다고 말했다. 한 한국 관리는 1980년만 해도 독특한 냄새로 일본인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던 한국의 김치가 지금은 일본에서 인기식품이 됐다고 말했다.

조 대사는 몇주 전 일왕의 월드컵 개막식 참석을 낙관했다. 그는 "나는 아직 그의 방한을 희망하고 있으며 한국도 그를 환영할 것이므로 일본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 변경이 없는 한 아키히토 왕의 방한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방한에는 월드컵 공동개최와는 다른 측면들이 고려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그가 한국에 오면 당장 반대 시위가 일어날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있고 35년간의 한국 점령에 대한 진정한 사과문제도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지금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인접국인 두 나라가 친숙하게 지내는 게 국제 외교 측면에서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에는 6십5만명의 한국 교포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80년 전 일본에 온 한국인들의 3세대 내지 4세대들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한국말을 거의 못할 뿐 아니라 고국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외양으로는 일본인과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인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 어정쩡한 처지로 살아가는 '잃어버린 세대'들이다.

최선애(42)씨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피아니스트인 그녀는 재일교포의 지위향상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제일 먼저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지문 채취에 반대했다. 1950년대 초 일본으로 피난한 목사를 아버지로 둔 그녀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문화를 접하면서 처음에는 일본에 동화하려고 했다. 그녀는 “나는 어릴 때 일본인과 다른 이름 때문에 많이 괴로워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최씨는 두 차례의 사건을 거치면서 변했다. 첫 번째 사건은 14살 때 일어났다. 선생님이 그녀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발음하도록 권했던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알게되면서 그녀는 거부하기로 작정했다.

두 번째 사건은 6년 후 대학에서 발생했다. 동료 학생이 그녀를 '부락민'이라고 야유한 것이다. 외국계 일본인이라는 말인데 한 마디로 일본 사회의 천민이라는 얘기다.

1980년대에 그녀는 지문채취 거부 때문에 법원에 많이 불려 다녔다.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그녀가 필요한 재입국 허가없이 미국과 일본을 오갔기 때문이다. 약 2만명의 재일동포들이 그녀의 지문채취 거부에 동조했다. 이들은 1989년 히로히토 일왕의 사망을 계기로 사면됐다. 최씨는 “우리가 일왕을 용서하려 했는데 일왕이 우리를 사면해 주었다”며 웃었다.

일본인과 결혼한 재일교포중 85%가 일본에 귀화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최씨는 일본에 귀화하지 않고 있는 수십만명의 재일교포중 한 사람이다. 최씨는 한국말을 하지 못하며 한국적인 속성도 거의 없다. 단지 이름과 여권이 한국 국적으로 돼 있을 뿐이다. 최씨는 “어렸을 때 일본인이 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나는 부모님의 긍지가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재일동포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오사카의 정기환씨는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이주했다. ‘경제 난민’이었다. 당시 일본식민지였던 한국에서는 농사지어 먹고 살기가 어려웠고 일본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었다.

정씨는 현재 투표권도 없지만 자신을 한국인이라기 보다는 일본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세자녀를 두고 있는 정씨는 “첫째 아이는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둘째는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는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 이번 월드컵 대회를 공동개최함으로써 보다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월드컵을 계기로 일본은 단기체류 한국인에게 비자를 면제해주고 있고 한국은 일본 대중음악의 국내 방송을 허가해 주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도 한국의 입장과 일본 국민의 감정을 신중하게 고려해 올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기술적으로' 했다.

최선애씨는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한일 두 나라가 최종적인 화해의 길로 접어들 것으로 믿고 있다. 최씨는 “한국인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들을 모두 뱉어버릴 수 있다면, 그리고 일본인들이 편견없이 이를 경청할 준비가 돼있다면 그것이 바로 두 나라가 진정한 동반자가 되는 첫 걸음”이라며 “두 나라가 진정한 동반자가 되면 내 (한국)여권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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