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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업자의 질투심, 철도를 대박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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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운하업자의 질투심, 철도를 대박 내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7>철도 대체할 대운하 파자던 한국

지난 회에 대중교통을 위해 건설된 세계 최초의 철도인 영국의 스톡턴-달링턴 구간 첫 운행 때의 풍경을 소개했다. 1825년에 비로소 철도라고 부를 수 있는 교통수단으로 등장한 이 스톡턴-달링턴 철도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이번 회에서도 조금 더 소개하고자 한다. 세계 최초의 철도인 만큼 이 노선이 운행되기까지의 우여곡절과 사연들을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 전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살펴보고 가자.

"증기로 화물마차를 움직인다고? 당신 미쳤군"

어쩌면 철도 종주국의 자리는 영국이 아닌 프랑스가 차지할 뻔했다. 증기를 이용해서 기계를 작동시키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곳곳에서 있었다. 영국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솔로몽 드 카우스는 증기기관을 이용해 운송수단으로 쓰려는 생각을 품었다. 이때가 1640년경이었다.

하지만 솔로몽 드 카우스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사람이었다. 솔로몽이 증기를 이용한 육상교통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할수록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 취급했다. 솔로몽은 자신의 발명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리는 보고서를 들고 노르망디에서 직접 왕을 찾아갔지만 궁전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솔로몽은 이번에는 추기경을 찾아가 증기로 화물마차를 움직이는 방법을 설명했다. 추기경은 콧방귀를 뀌고 마귀가 들린 '이 정신 나간 인간'을 쫒아냈다. 솔로몽은 자신의 엄청난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며 계속 추기경을 쫒아다녔다. 추기경은 끝내 스토커처럼 귀찮게 구는 솔로몽을 파리의 비세트르 정신병원에 가둔다. 솔로몽 드 카우스는 정신병원에 갇혔지만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창살에 매달린 채 소리를 질렀다. "난 미치지 않았어! 정말이야! 조국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발명을 한 것뿐이라고!"

정신병원의 관리인들은 가끔씩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솔로몽의 이야기를 해줘야만 했다. "아, 그거요? 쓸데없는 물건이지요.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물을 끓이면 나오는 증기를 이용하는 방법이라는군요."

대중은 종교나 권력이 그 시대의 가장 현명한 이성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실상은 정반대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제 증기기관을 이용한 교통수단을 등장시키는 몫은 영국으로 돌아왔다.

▲ 철도가 막 등장했을 때의 사회상을 풍자한 그림. 사람들이 놀라고 있다. ⓒ영국국립철도박물관

운하 운송업자의 횡포 그리고 철도의 탄생

스톡턴-달링턴 구간의 철도는 우연과 필연과 행운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졌고 대성공을 거둔다. 당시 스톡턴과 달링턴의 탄광 지대에는 늘어나는 석탄 생산량을 감당할 운송수단이 절실히 필요했다. 운하를 통한 뱃길은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고, 운하 운송업자들의 횡포도 울며 겨자 먹기로 참아야 했다. 석탄 생산자들과 판매 상인들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했다. 이들의 대행자로 피스라는 사람이 나섰다. 피스는 스톡턴과 달링턴 지대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했다. 철도 건설 법안이 순조롭게 통과되진 않았다. 특히 운하 운송업자들의 반대가 심했다. 일부 의원들은 운하 운송회사의 소유주였다. 그러나 늘어만 가는 석탄 생산량을 감당할 운송수단이 필요해지자, 가까스로 스톡턴-달링턴 구간의 대체 운송수단 설치 법안이 통과된다.

법이 통과되었지만 피스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헤매고 있었다. 피스는 당시 쉽게 눈에 띄었던 목재 선로를 깐 트램웨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피스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등장한 구원투수가 바로 조지 스티븐슨이었다. 스티븐슨은 기관차와 선로에 대해 당시의 그 누구보다 뛰어난 기술과 식견을 갖고 있었고, 킬링워스에서는 이미 기관차를 이용해 운전을 해왔다. 스티븐슨의 등장으로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철도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821년 어느 날 피스는 자신의 집 문을 두드리는 두 사내의 방문을 받았다. 한 사람은 스톡턴-달링턴 궤도 법안이 통과된 사실을 알고 이 철도 건설 사업에 참여하고자 찾아온 조지 스티븐슨이었고 또 한 사람은 니콜러스 우드였다. 니콜러스 우드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스티븐슨의 '뻘쭘함'을 완화시켜줄 친구로서 피스의 집을 찾았다.

피스는 조지 스티븐슨과 운명적으로 만나면서 안개 속을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스티븐슨은 자신이 킬링워스에서 운행하는 기관차가 말 50마리의 견인력을 갖고 있다고 피스에게 설명하고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고 당부한다. 스티븐슨은 사실 애가 탔다. 왜냐하면 스티븐슨이 기관차로 화물마차를 견인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그를 프랑스의 솔로몽 드 카우스처럼 몽상가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증기기관을 이용하더라도 선로의 한 끝에 고정한 로프를 이용해 당기는 것이 유용하고, 이마저도 말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필요하다는 고정관념이 강하게 퍼져 있었다.

스티븐슨이 철도의 운행방식에 동력을 가지고 스스로 움직이는 기관차를 이용해 효율성을 높이자는 안을 법안에 추가하자고 했을 때 단번에 거부됐다. 일반 사람들은 비웃었고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은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스티븐슨의 움직이는 기관차 이야기는 신문에도 실려 웃음거리로 조롱당했지만, 새로운 논쟁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스티븐슨은 자신이 운행하고 있는 킬링워스 탄광의 기관차를 본다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확신했고, 스톡턴-달링턴 노선의 기획자인 피스도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스티븐슨과 동행했던 니콜라스 우드는 피스에게 자신이 본 스티븐슨의 기관차 이야기를 했다. "고정 장치와는 상대가 안 됩니다. 스티븐슨의 기관차는 정말 대단하다고요. 처음엔 눈으로 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피스는 스티븐슨을 만나서 그동안 전진을 가로막았던 수많은 장애물들을 하나씩 제거할 수 있었다. 킬링워스에서 스티븐슨의 기관차를 직접 본 뒤에는 기관차가 끄는 철도의 신봉자로 거듭났다. 확신에 찬 피스의 요구로 1823년 스톡턴-달링턴 철도의 수정법안이 관철됐다. 수정안에 추가된 내용은 스스로 동력을 갖고 움직이는 기관차를 도입하고 화물만이 아니라 승객도 수송을 하는 철도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스티븐슨은 지지부진하던 철도 건설에 새로운 추진력을 불어넣었다.

▲ 스톡턴-달링턴 노선을 달렸던 기관차 로코모션호와 화차를 재현한 전시 ⓒ위키백과

'우연과 관습이 결정한' 철도의 궤도 간격=마차 궤도 간격

세계 최초의 대중교통용 철도인 스톡턴-달링턴 철도는 이후 건설되는 철도의 표준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선로의 궤간은 오래된 관습과 우연이 합쳐져 결정됐다. 선로의 궤간이란 두 줄로 이어진 선로의 떨어진 거리를 말한다. 바로 이 궤간 위에 기차의 바퀴가 놓인다. 궤간은 기차의 성능과 크기 등 많은 기술적 요소들을 좌우한다. 그런데 이런 궤간을 결정하는 데는 별다른 고민이 없었다. 이미 수많은 트램 로드의 궤간이 있었다. 이 트램 로드는 영국에서 운행하는 일반적인 마차 바퀴의 폭을 따라야 했다. 영국에서 마차는 말 두 마리가 끄는 것이 기준이다. 견인 능력을 키우려면 두 마리나 네 마리를 종으로 더 연결시켰다. 요즘 고급 자동차를 이야기할 때 배기량의 크기가 기준이 되듯이, 당시 영국에서는 말의 마릿수로 고급 마차와 일반 마차가 갈렸다. 영국 처녀들은 6마리의 말이 끄는 고급 마차를 타고 결혼식장으로 가는 상상을 하기도 했는데, 요즘 결혼식을 끝내고 공항으로 향하는 허니문용 승용차를 중형차 이상의 고급으로 준비하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

마차에 말을 두 마리 연결하든 네 마리 연결하든 두 마리를 기준으로 앞뒤로 달리게 했기에 마차의 바퀴 폭은 말 두 마리의 엉덩이 폭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서는 이를 기준으로 1.4M의 폭으로 마차 바퀴 간격을 표준화했다. 현재 시내 곳곳에 자동차 경정비업소가 있듯이, 영국 곳곳에는 마차 수리업소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부서진 차체와 바퀴의 수리, 마차에 다는 각종 액세서리나 운행에 필요한 채찍 등을 판매했다. 이런 정비소에서는 규격을 표준화해야 당연히 수리의 효율성도 높아졌다.

원래 일반적인 궤도는 협궤에서 시작했다. 궤도가 널리 퍼진 곳은 탄광이었다. 탄광에서 채굴한 광물을 옮길 때 궤도가 그 무엇보다 효율적이었다. 파 들어간 굴속에서 쏟아진 석탄을 등짐으로 옮기는 것보다 궤도를 깔고 그 위에 운반차를 올려 미는 것이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비좁은 탄광 갱도에서 궤도를 놓으려다 보니 궤도 폭은 좁을 수밖에 없었다. 갱도의 석탄더미들은 굴 밖으로 나와 야적장까지 이어진 궤도를 이용해 운반됐다.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재탄생하기 위해 잡석을 골라낸 석탄은 이제는 마차나 트램 마차 길을 이용해 운반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철도의 궤간은 철도에 대한 기술적 고려나 미래 예측, 또 가장 적절한 치수 인지와는 무관하게 우연히 정착되었다. 즉, 영국의 표준적인 마차 바퀴의 폭, 또는 초기의 석탄 운반용 트램 로드가 영국 철도의 표준 궤간을 결정했다. 현재 한국 철도의 궤간도 영국의 궤간과 같은 1.4M를 쓰고 있다. 정확히는 1435mm인데 이것이 철도의 국제 표준궤로 정착됐다. 이보다 좁을 경우를 협궤, 넓을 경우를 광궤라고 한다.

왜 한국 철도는 표준궤고 스페인 철도는 광궤인가?

철도에서의 궤도 간격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철도가 확장되던 시기의 궤간은 많은 논란이 벌어진 주요 원인이었다. 궤간을 어떻게 하느냐는 건설비용부터 수송 능력까지 철도의 많은 것들에 영향을 미쳤다. 동아시아에서 철도를 처음 도입한 일본은 전체 노선을 협궤로 건설했다. 반면 일본 주도로 부설된 한국 철도는 표준궤로 건설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 뉴라이트 인사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한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식민지 모국인 일본은 협궤인데 한국 철도는 그보다 훨씬 유용한 표준궤로 건설해주어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궤도에 대한 궤변이다.

일본 내에서도 식민지 조선의 철도를 건설할 때 궤간을 어떻게 정할지를 두고 심각한 논란이 일었다. 협궤와 표준궤를 놓고 정부와 군부, 재계, 정치계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했다. 결과적으로 표준궤로 정해졌지만 이것은 식민지 조선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일본이 만주를 통해 동아시아에 진출하고, 식민지 수탈을 효율적으로 하려면 표준궤가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일본의 식민지였지만 바다로 둘러싸여 대륙으로 진출할 수 없는 대만의 경우, 일본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협궤로 철도를 건설했다. 표준궤로 건설된 조선 철도는 만주와 중국으로 진출했지만, 러시아 국경에서는 일단 발을 멈춰야 했다. 러시아는 1.5M 폭의 광궤를 썼기 때문이다. 러시아 철도를 이용하려면 객차 밑의 바퀴를 고정시키는 대차라는 장치를 모두 바꿔야만 했다.

스페인은 철도를 건설할 당시 광궤를 채택했는데,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경험한 스페인으로서는 프랑스 철도와 같은 표준궤를 선택하면 철도를 이용한 대규모 군사 이동으로 또다시 침략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궤간은 역사적 경험과 경제력, 사회 문화적 환경에 따라 나라마다 다양하게 결정되었다. 컴퓨터에 빗대면, 궤간은 동일한 운영 체제가 아니면 호환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 프랑스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우라는 운영 체제를 사용했다면, 이 네트워크와 연동성을 차단하기 위해 스페인은 애플의 운영 체제를 선택한 꼴이었다. 군사적 위험이 사라진 지금, 스페인은 새로 개통된 고속철도 노선을 표준궤로 하여 유럽 철도의 네트워크망에 결합했다.


운하 운송업자 덕에 대박 난 철도, 운하를 대체하다

다시 스톡턴-달링턴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성공하는 데는 아이러니하게 이 철도의 실패를 간절히 바랐던 사람들도 한몫 기여했다. 법안이 의회에 제출될 때 존 조지 램턴 공작은 한 가지 조항을 끼워 넣었다. 선적용 석탄을 수송할 때 톤당 요금을 1.5페니로 제한한다는 조항이었다. 선덜랜드를 중심으로 한 중북부의 항구에서 석탄을 선적하는 자신의 운하 사업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선적용 석탄은 톤당 4펜스를 받았는데 1.5페니로 철도 화물 요금을 제한하면 스톡턴-달링턴 철도회사는 곧 망하고 말 것이라는 계산이 깔린 술수였다.

철도회사 내에서조차도 톤당 1.5페니라는 요금으로는 도저히 수지 타산을 맞출 수 없다는 낭패감이 자리 잡았다. 운하 사업자들은 철도회사를 비웃으며 개통과 함께 파산할 운명의 철도에 애도를 표했다. 철도회사는 궁여지책으로 운송수입에 치중하기보다는 역에서 석탄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손실을 막으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운하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될 노선에서 1.5페니라는 형편없이 낮은 요금으로 수익을 낼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스톡턴-달링턴 구간의 철도 운행이 시작되자 천지개벽할 기적이 일어났다. 운하보다 훨씬 빠르게 달리는 철도는 금방 운하를 대체했다. 예상 수요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철도의 효용성을 눈으로 확인한 사람들은 앞다투어 철도로 몰려들었다. 게다가 톤당 1.5페니라는 싼 요금 덕분에 철도는 화물을 불러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비록 문제가 있더라도 싼 요금 때문에 철도를 이용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람들은 운하보다 훨씬 빠르고 편리한 철도에 푹 빠져 버렸다. 스톡턴과 미들스버러로 운반되는 석탄의 양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배를 이용한 연간 운송량이 1만 톤을 겨우 넘겼지만 철도로 운반되는 석탄의 양은 50만 톤을 넘었다. 망한 것은 철도 사업자가 아니라 운하 사업자였다.

승객 수송도 예측 수요가 빗나가긴 마찬가지였다. 스티븐슨이 "익스페리먼트(Experiment)"라고 이름 붙인 낡은 역마차를 구입해 개조한 객차는 이를 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익스페리먼트호는 한국 전쟁 당시 피난민을 태웠던 객차처럼, 객차 안팎에 달라붙은 사람들로 삐져나와서 멀리서 보면 고슴도치처럼 보일 정도였다. 익스페리먼트호가 목적지에 도착해 승객이 내릴 때면 집회가 해산돼서 사람들이 흩어지는 모양 같다는 목격담을 쓴 작가도 있었다. 이후 영국에서 승객 수송용 객차는 익스페리먼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스톡턴-달링턴 철도 덕분에 새로운 도시도 탄생했다. 더 넓은 석탄 야적지를 갖춘 항구가 필요했던 피스는 새로운 철도 노선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스톡턴 옆 미들즈브러라는 지역의 허허벌판을 사들였다. 미들즈브러는 단 몇 년 만에 영국 북동부해안의 가장 중요하고 번화한 항구도시로 성장했다.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비록 최초의 철도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철도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당시에는 누구라도 일정한 요금을 지불하면 이 궤도 위에 마차를 올려놓고 이용할 수 있었다. 스티븐슨이 제작한 로코모션호가 끄는 열차는 앞에 달리는 마차를 향해 증기가 내뿜는 "칙칙폭폭" 소리로 압박하며 달렸고 이 열차 뒤를 따라서 또 많은 마차들이 달렸다. 기관차가 화차와 객차를 연결해 달릴 때면 선로 변으로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과거 한국에서 구청의 방충차가 소독약을 분무할 때 안개처럼 분사되는 소독연기를 따라 달렸듯이, 증기기관차가 내뿜는 수증기를 덮어쓰고 길게 늘어진 기차를 따라 달렸다. 초기 철도 시대의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한국, 운하로 물류혁명을 이룬다? 제정신인가

▲ 한때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추진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 ⓒ뉴시스
최초의 철도가 운하를 대체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기계 문명 이전에는 가장 효율적인 운송수단이 배였다. 물길과 바람을 잘 이용하면 오직 인간과 동물의 노동력을 이용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철도가 등장하면서 당연히 운하를 이용한 수송이 몰락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21세기 한국에서는 국토의 내륙에 운하를 파서 물류혁명을 이루겠다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대륙의 한복판에 있는 나라도 아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에서 운하를 파겠다는 파격적인 발상은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범위를 뛰어 넘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컨테이너를 싣고 강을 따라 올라오는 선전용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내 눈을 의심했었다.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면 기껏해야 대여섯 시간 남짓이면 도달할 수 있는데도, 며칠씩 강을 따라 화물을 운송하겠다는 발상의 근원이 어디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22조 원에 이르는 돈이 시멘트로 변환되어 강에 발라졌지만 대운하는 간데없고 불신과 의혹만 남았다. 22조 원이면 화물 철도의 물류기지를 곳곳에 만들고 남북 철도 개량을 통해 대륙으로 연결할 수 있는 초석을 쌓을 수 있는 돈이었다. 최소한의 역사적 상식조차 고려되지 않는 사회가 감담해야 할 몫이란 사회적 불신, 사람과 자연에게 가해지는 고통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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