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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과 하벨, 냉전 세대가 지고 있다"

[해외시각] 하루 차이로 운명 달리한 김정일과 하벨

지난 18일과 19일 하루 간격으로 전 세계는 두 개의 죽음과 마주했다. 18일(현지시각) 체코의 민주화 지도자 바츨라프 하벨이 향년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소식에 이어 19일 정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는 북한의 발표가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미국의 외교·안보분야 싱크탱크 '포린 폴리시 인 포커스'의 존 페퍼 소장은 19일(현지시간) 하루 간격으로 숨진 두 정치가의 공통점에 주목했다. 체코 민주화의 상징인 하벨과 대를 이어 독재 정치를 편 김정일은 정치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 서 있지만, 반대로 어려운 상태에 놓여있던 국가의 안정을 추구했고 결국 큰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맥락이 닿아있다는 것이다.

페퍼 소장는 그런 차원에서 김정일이 김일성과 김정은 사이에 끼인 과도기적 인물로, 하벨은 정치 엘리트로서 임무를 수행하던 시절보다 정치 엘리트에 저항하던 반체제 인사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또 둘의 죽음은 냉전 시대를 거친 세대들이 무대로 내려오는 현실을 상징한다며 한반도의 분단현실도 냉전 세대의 퇴장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 희망했다.

다음은 페퍼 소장이 '포린 폴리시 인 포커스'에 올린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원문 보기)

두 명의 지도자, 두 명의 죽음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의 젊은 시절. ⓒ연합뉴스, AP=연합뉴스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과 체코의 지도자 바츨라프 하벨은 정치 지형상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한 명은 부패한 공산주의 정권과 싸웠고, 다른 한 명은 공산주의 지배를 공고히 했다. 한 명은 현실 정치에 도덕성을 주입하려고 시도했고, 다른 한 명은 도덕성과는 무관한 정치 목표를 추구했다. 둘 다 초기에 예술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어떤 의미에서는 둘 다 우유부단한 정치가였다. 권력을 잡았을 때 둘 다 힘든 시기에 놓였던 국가를 안정화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개혁을 위한 그들의 노력은 인상적이지 못했다.

김정일은 북한의 두 번째 지도자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는 자신의 부친이자 북한을 세운 김일성의 그늘 속에서 북한을 통치했다. 김정일은 김일성식의 카리스마도, 권위도 부족했다. 김일성은 식민지 시절 일제와 싸우는 게릴라로 활동했다. 그의 전투가 북한이 선전하는 것만큼 인상 깊진 않겠지만 적어도 혁명의 역사에 등장한다. 전투 경험이 없는 김정일은 가짜 혁명 기록을 만들기 위해 출생지를 바꿀 필요성까지 느꼈다. 북한의 공식 역사기록에 따르면 그의 출생지는 백두산으로 되어있지만 그는 사실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김정일은 김일성의 독립군 활약상을 블록버스터 영화로 만드는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쌓았다. 그는 항상 카메라 앞보다는 뒤에 서는 게 편안하다고 느껴온 것 같다. 그가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해주는 군부에 의존했다. 김일성 사후 지도자가 된 김일성이 처음 실행한 주요 정책은 부친의 3년상이었고, 그 기간 동안 북한은 서서히 기근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몇몇 경제 개혁을 지지하다가도 스스로 뒤집어버림으로써 개혁에 별다른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줬다. (민간 시장을 인정했다가 탄압으로 돌아서고,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면서 엘리트들에게는 사용을 독려하는 모습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영화 필름을 모으거나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보다 북한 지배계급의 권력을 지키는데 있었다. 아무리 좋게 봐도 그는 속으로 공산주의 혁명 슬로건보다는 북한식 국가주의라는 비유를 더 편하게 여겼다.

김정일은 많은 면에서 예상을 벗어나는 인물이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후 북한 정부는 붕괴하지 않았고 심각한 식량 위기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김정일은 중국과 러시아와의 동맹을 유지하고 남한을 구슬려 상당한 규모의 경제적 투자를 끌어오려 애썼다. 또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만들고, 세르비아나 이라크, 리비아의 지도자들이 미군에 의해 체제 전환의 고통을 겪던 시기 미국을 미사일 사정거리 안에 두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김정일은 근본적으로 북한을 개혁하거나 중국·남한에 대적할 만한 대안 경제·정치시스템을 제안하지도 않았다. 궁극적으로 그는 무자비했지만 개혁적이었던 김일성과,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북한의 미래를 아직 결정하지 않은 김정은 사이의 과도기적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바츨라프 하벨은 동세대의 다른 누구보다 반체제 지식인의 권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벨은 자신의 극본과 에세이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시스템의 기만과 어리석음을 훌륭하게 드러냈다. 그는 감옥에도 갇힌 적이 있다. 그는 그의 조국뿐 아니라 동유럽 지역 전체를 바꾼 1989년 '벨벳 혁명'의 핵심 주체인 시민사회를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하벨은 1989년 말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 됐다. 그는 마지못해 출마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얼마나 주저했건 간에 빠르게 그 직책에 익숙해졌다. 하벨의 전기를 집필한 존 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나중에 분리된 체코에서) 총 13년 동안 4명의 대통령을 지냈던 하벨에게 실제로 정치권력은 일종의 최음제가 됐다"며 "그에 대한 어떤 훌륭한 부고기사도 하벨 자신은 '대통령 시절이 자신의 정치 경력에서 가장 최악의 순간이었다'고 쓰리라는 점을 지적할 것"라고 말했다.

물론 하벨에게 있어 최악의 시기는 다른 대부분 정치가들의 최고의 순간보다 상당히 나은 편이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초기에 민주제로 체제를 전환하던 시기, 그리고 1993년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던 시기를 효과적으로 이끌어갔다. 유럽연합(EU)에 체코를 가입시키겠다는 약속을 2004년에 지켜냈고 오늘날 체코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동유럽의 옛 공산주의 국가 4곳 중 슬로베니아에 이어 2위다.

그러나 하벨이 자신의 엄중한 도덕적 원칙을 대통령으로서 현실 정치에 적용하려고 시도했을 때 세상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알았다. 그는 시민사회와 함께 지리 디엔스트비에르, 알렉산더 본드라와 같은 자문단을 꾸려 도적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려 했다. 그는 중국 정부와의 외교관계 단절 위험을 무릅쓰고 달라이 라마를 체코슬로바키아로 초청했다. 1990년 1월 디엔스트비에르 외교장관은 체코가 더 이상 무기를 수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했다. 그리고 체코는 나토(NATO)를 대체할 새로운 유럽 안보질서를 제안했다.

결국 하벨 행정부는 무기 수출 금지 약속을 뒤집었고,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를 출범시키는 대가로 나토를 지지했다. 하벨은 계속해서 티베트와 중국의 반체제 인사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하지만 체코 공화국은 한편으로 중국 정부와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했고, 고위급 방문을 추진했으며 중국의 투자를 끌어내려 노력했다.

하벨은 조국을 안정화시켰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그 역시 정치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그는 결국 그가 정치 엘리트의 일부가 됐을 때 했던 일보다는 정치 엘리트에 맞서 글을 쓰고 저항했던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위에서 지배하고 밑에서부터 저항하는 냉전 세대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나, 러시아와 서방을 갈라놓은 냉전의 단층선들 또한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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