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저축은행그룹이 저지른 천문학적 규모의 금융비리 수사는 저축은행 업계에 만연한 고질적 비리를 근절하고 금융당국과의 유착관계를 밝혀내 감독시스템을 재정비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저축은행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무려 17조원이나 되는 공공자금을 수혈받고도 부실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해 국민경제에 짐이 돼 왔지만, 썩은 환부를 제대로 도려내지도 근본대책을 세우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번 검찰 수사로 과거의 악순환 뒤에는 금융당국과의 오랜 유착과 업계에 만연한 불법영업 관행이 있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로 인해 정상적인 감독시스템이 전혀 작동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뒤 봐준 당국의 입김 = 2일 검찰이 발표한 종합수사결과에 따르면 부산저축은행그룹 비리를 수사하면서 기소한 76명 중에는 부산저축은행의 불법영업 과정에서 뒤를 봐준 전·현직 금감원 직원 8명, 국세청 공무원 7명, 공인회계사 4명이 포함됐다.
이밖에 누적된 경영부실로 퇴출위기에 몰린 부산저축은행그룹의 구명 로비에 가담한 청와대, 감사원,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등의 고위층 인사 5명도 기소됐다.
고교 선후배 사이인 박연호(61) 회장을 비롯한 부산저축은행그룹 핵심 임원들은 금융당국과 고위층의 비호 속에 서민들이 믿고 맡긴 수조원대의 고객예금을 `쌈짓돈'처럼 마구 탕진했다.
아파트 건설사업부터 휴양지 개발, 납골당 건설, 선박 투자, 해외부동산 개발 등 각종 투기사업에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없었고, '밑 빠진 독'처럼 고객의 소중한 예금이 투자실패로 대부분 공중으로 증발했다.
◇속속 불려온 고위층 = 검찰은 지난 3월15일 부산저축은행그룹 5개 계열은행(부산·부산2·중앙부산·대전·전주저축은행)에 대해 동시다발적인 압수수색을 하면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 1개월 보름만인 5월 초 7조원대 금융비리를 확인해 박 회장을 비롯한 은행 전·현직 임원 등 21명을 기소했다.
곧이어 수사의 칼날이 은행으로부터 금품을 받고서 검사 과정에서 적발한 비리를 눈감아준 금융당국을 겨누면서 전·현직 금감원 간부와 조사역들이 줄줄이 구속됐으며 김종창(63) 전 금융감독원장에 대한 소환조사로 이어졌다.
또 은진수(50) 전 감사원 감사위원, 김광수(54)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 청와대 정무비서관 출신인 김해수(53) 한국건설관리공사 사장 등 고위층 인사들이 속속 검찰에 불려왔다.
이런 가운데 국민적인 공분을 불러온 영업정지 전 고위층 특혜인출 의혹에 대한 수사도 병행돼 1천100여명의 예금 인출자와 저축은행 임직원이 조사를 받았으나 의혹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
◇로비스트 수사는 미완 = 6월 말부터 2개월 가량 소강상태에 있던 수사는 8월 말 캐나다로 도피했던 부산저축은행그룹의 핵심 로비스트인 박태규(71)씨가 자진귀국하면서 다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중수부가 물밑에서 숱하게 들인 공이 박씨의 귀국이라는 성과를 가져왔다.
박씨는 정치권은 물론 재계와 금융권까지 고위층 인사들과 두루 친분을 쌓아온 거물급으로 알려져 있어 입을 연다면 충격파가 상당할 것으로 관측됐다.
실제로 박씨는 은행측에서 구명로비 청탁과 함께 17억원을 받아 거액을 정관계 등에 뿌린 것으로 드러났고, 박씨에게서 금품을 받은 김두우(54)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구속됐다.
하지만 수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검찰은 지금까지 9조원대의 천문학전인 금융비리를 밝혀내고 76명(구속 42명)을 기소하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거뒀지만, 부산저축은행그룹이 박씨를 비롯한 8명의 브로커를 기용해 전국적으로 벌인 정관계 로비 의혹의 전모를 완벽하게 규명하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금품을 직접 제공한 브로커나 은행 임원의 진술이 주된 단서가 되는 상황에서 관련자들의 적극적인 진술이 없는 이상 의혹을 파헤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남은 의혹에 대해서는 저축은행 비리 합동수사단이 바통을 이어받아 수사를 계속한다는 방침이지만, 새로운 수사동력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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