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너지는 토건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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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제조업체가 호황기 때 무리한 경영판단에 따라 생산한 제품이 경기가 식으면서 대규모 재고로 남게 됐다. 그렇다고 정부가 이들 기업의 재고를 대량으로 사줘야 할까. 말도 안 되는 질문 같지만 현 정부는 올해 '4.23 대책'과 '8.29대책'을 통해 이 같은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적어도 건설업계에 한해서는 말이다. 물론 실수요자와 국민경제를 걱정하는 척했지만, '강부자 정권'이 일반가계들을 제물로 삼아 자신들의 '스폰서'인 부동산 부자들과 건설업계에 준 당근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지금 건설업계 지원이 필요한 때인가. 그렇지 않다. <도표1>에서 볼 수 있듯이 건설업계의 대표적인 이익단체인 대한건설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4270개이던 종합건설업체 수는 2001년 이후 1만3000개 수준으로 세 배 이상 늘어난 상태를 현재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 1998년 522개 업체가 부도났고, 2000년대 부동산 호황기에도 매년 150개 전후가 부도로 쓰러졌다. 그런데 주택시장이 침체하고 외환위기 이후 사상 최대의 경제위기를 맞은 지난해에 부도업체 수는 87개에 불과했다. 이들 건설업체들의 평균수주액도 부동산 호황기였던 2003년 78.8억 원이었으나 주택시장 침체가 본격화된 2008년과 지난해에는 정부의 대대적인 토건 부양책 등으로 95.4억 원, 96.4억 원으로 늘어났다.
<도표1> 건설업체 현황
▲ 대한건설협회 자료로부터 KSERI(김광수경제연구소) 작성 |
물론 우리 연구소가 여러 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같은 지표 이면에 건설업체들 가운데 상당수는 골병이 들어 있고, 빠른 속도로 '좀비기업'들도 늘고 있다. 성원건설과 남양건설뿐만 아니라 중견건설사들의 부도위기설이 잇따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지표들이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정부의 막대한 건설 및 부동산 부양책과 구조조정 회피로 한계선상에 이른 건설업체들의 구조조정이 지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백보를 양보해 2008년 말~2009년 초에는 워낙 경제적 위기감이 증폭돼 있었기에 일정한 건설 및 부동산 부양책이 필요했다고 하자.
하지만 정부 주장대로 지표상으로 경기 회복세가 완연한 이제 건설업계에 대한 추가적인 지원책으로 구조조정을 지체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언제까지 온 국민이 공공부문에서는 대규모 토건사업으로, 민간부문에서는 고분양가 아파트 사재기로 외환위기 이후 세 배 이상 늘어난 건설업체들을 모두 먹여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또 다시 건설업체들을 먹여 살리는 일을 택했다.
그러면 일부 언론이 걱정하는 시나리오 대로 건설업계의 연쇄도산으로 PF대출이 부실화될 경우 금융권에 미칠 파장은 얼마나 클까. 금융권 PF대출 잔고는 2009년 말 현재 82.4조 원에 이르며 이 가운데 은행권이 51.0조 원으로 가장 많다. 이어 저축은행 11.8조 원, 보험사 5.7조 원, 증권사 2.7조 원 등이다. 이들 PF대출의 연체율을 보면 금융권 전체로 3.58%에서 6.37%로 계속 증가하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PF대출의 부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융권별로 세분화해 살펴보면, 증권사 연체율이 2008년 6월 6.57%에서 30.28%로 급등했고, 보험사는 2.37%에서 4.55%로 증가했다.
하지만 보험사와 증권사의 PF대출 비중이 8.4조원 정도로 크지 않고 보험사와 증권사의 자본금 및 자산 규모 등을 감안할 때 크게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 PF대출의 60% 가량을 차지하는 은행권의 경우 연체율이 2008년 6월에 비해서는 올랐으나 1.67% 정도로 비교적 낮을 뿐만 아니라 2009년 6월에 비해 떨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건설업체 자금난의 직접적 타격을 받을 것으로 집중 거론되고 있는 저축은행의 경우 연체율이 2009년 말 10.6%로 2009년 6월말에 비해서는 소폭 상승했으나 2008년 6월 14.28%보다는 낮아졌다. 물론 이 같은 연체율이 저축은행 실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저축은행들이 PF대출 부실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실 PF대출을 회수하지 않고, 추가 대출 등을 통해 연체율을 낮추고 있고 자산관리공사가 저축은행 전체 PF대출의 15%가량에 해당하는 1.7조 원 가량의 부실 PF대출 자산을 매입해준 점 등을 감안하면 실제 PF대출 부실율은 이보다 훨씬 더 높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주택시장 침체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PF대출 부실과 주택가격 하락에 따른 가계대출 연체 증가가 현실화할 경우 상당수 저축은행 또한 도산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저축은행 PF대출 규모와 연체율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도 이것이 금융시스템 전반에 큰 충격을 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 동안 부동산 버블에 기대 무분별하게 난립하며 PF대출과 주택대출을 늘려온 저축은행 또한 부동산 버블이 꺼지는 과정에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저축은행 위기는 업계 안에서 구조조정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순리다.
▲ 뉴타운개발에 들떴지만, 희망이 곧 절망으로 바뀐 경험을 한 주민들이 많다. ⓒ프레시안 |
상황이 이런데도 현 정부는 특정계층과 업계의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현재 한국경제 위기에 대해 전도된 인식을 보이고 있다. '8.29대책'만 하더라도 정부는 DTI규제를 상당 부분 풀었다. 지금 한국경제 위기의 핵심은 800조 원을 넘나드는 가계부채의 위기이지 건설업계의 위기가 아니다. 상당수 신문들이 금방이라도 금융시스템 마비를 불러올 것처럼 침소봉대하는 저축은행의 PF대출 규모는 11.2조 원이다. 전체 예금취급기관 대출액의 1%, 가계부채의 1.4% 정도 규모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가계부채 다이어트'를 유도하기는커녕 가계가 빚을 더 내서라도 건설업계를 떠받쳐야 한다는 식이다. 이는 현 정부가 건설업계를 부양한다는 명목으로 얼마나 국민경제의 위험성을 높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정부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정부는 허황된 '건설업계 대마불사' 논리를 제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 지금 우리보다 경제상황이 나쁜 미국과 유럽도 금융업계의 대마불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우리보다 훨씬 더 경제상황이 나쁜 미국과 유럽의 경우 금융업계의 대마불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규제를 다시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금융시스템의 한 축도 아닌 특정 업계를 살린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심지어 재벌급 건설업체들인 10대 건설업체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무너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특히 건설업계와 저축은행의 부실을 막기 위해 DTI규제 완화 등 한국경제 위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가계부채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물불 가리지 않는 매우 위험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같은 건설업 구조조정을 지연하면 할수록 오히려 현 정부가 우려하는 일본식 장기침체를 초래할 가능성을 높인다. 왜 그럴까. 건설업계를 제때 구조조정하지 않으면 살아남은 건설업체들이 이미 고갈된 수요 이상의 공급물량을 쏟아내게 된다. 이미 공급 과잉인 상태에서도 수급 조정이 지연되는 것이다. 또한 좀비처럼 살아남은 건설업체들이 지속적으로 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부실 채권이 계속 늘어나게 된다. 이런 현상이 현재 건설업계 및 부동산업계 및 이들의 대변지격인 기득권 언론들이 주문한 결과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처럼 정부가 개입해 부동산 시장을 교란하고 구조조정과 부실 정리를 지연시킨 탓에 일본의 주택시장이 자연스러운 복원력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부동산 버블 붕괴의 충격이 컸던 탓도 있지만, 초기에 각종 토건부양책으로 재정을 탕진하고, 살아남은 건설업체들이 수요 대비 과도한 주택 공급을 지속해 부동산 시장이 복원력을 잃어버린 가운데 주택수요 연령대 인구가 급감하고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돼 잃어버린 10년을 넘어 20년까지 치닫게 된 것이다. 또한 1980년대와 1990년대초 미국에서 저축대부조합(S&L) 사태가 계속 부실 규모를 키웠던 이유도 초기에 재빠른 구조조정을 통한 '시장 청소'를 미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건설 및 부동산 부양책이 아니라 시장퇴출이 실제로 일어나는 건설업계와 저축은행의 과감한 구조조정이다. 부동산 거품에 취해 희희낙락했던 건설업계와 금융업계, 그리고 아파트 분양 광고에 목을 맨 언론들에게 돌아갈 단기적 충격을 줄이기 위해 중장기적으로 한국 경제 전체에 돌아올 충격을 키우는 우를 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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