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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이장이 된 경영학 교수 "'풍요' 대신 '가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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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이장이 된 경영학 교수 "'풍요' 대신 '가난'을!"

[인터뷰] 강수돌 고려대학교 교수

마을 이장과 대학 교수.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 <이끼>를 봐도 마을 이장은 산전수전 다 겪어 이문에 밝은 동네 어른이고, 교수는 현실에서 약간 물러나 세계를 조망하는 이미지를 갖는다. 더군다나 그 교수의 전공이 경영학이고, 동네에서는 농사꾼이며, 아파트 건설에 반대하는 이장이라면 고개가 더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다.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 교수' 겸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신안1리 전 이장'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런 '갸우뚱함'을 안고 시작됐다. '생태'와 '환경'을 외치는 목소리는 꾸준히 커져왔다. 하지만 이를 경영의 관점에서 볼 경우 인본주의를 외치며 실제로는 자본주의에 충실한 기업들의 허울 좋은 구호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는 기업의 성과를 위한 학문을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움에 어떻게 적용했을까?

ⓒ프레시안(최형락)

시골 마을의 콘크리트

7월 26일 푹푹 찌는 날씨 속에 조치원역에 내렸다. 택시를 타고 5분여를 달리니 주위의 회색 건물이 사라지고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철길 세 개를 건너 신안1리에 도착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처음 마주한 풍경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마을을 둘러싼 야산이 무색할 정도로 높게 지은 아파트다.

지난 2007년 첫 삽을 떴지만 약 1100여 세대 중 15채만 분양되면서 지난해 하반기 공사가 중단됐다. 뼈대에 콘크리트만 굳힌 채 시간이 멈춰버린 구조물의 텅 빈 유리창에는 아직 창틀에서 벗겨지지 않은 파란색 비닐들이 버려진 공사장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강 교수가 지난 5월에 쓴 <나부터 마을혁명>(산지니 펴냄)에는 마을 유지와 토건 세력, 관료가 영합해 개발 이익을 위해 전원 마을 한 복판에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마을 주민과 함께 이에 저항하던 그는 이장이라는 직함을 갖게 됐다. 마을에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오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풀뿌리 운동에 대한 그의 확신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됐다.

단지를 두른 펜스를 따라 오르막길을 5분 정도 오르니 벙거지 모자를 쓴 강수돌 교수가 보였다. 그를 따라 아파트 단지 맞은편 샛길로 들어섰다. 샛길을 오르는 중간에 고인 샘물로 얼굴을 씻으니 더위가 조금 가셨다. 산 중턱에 그가 직접 지은 흙집이 보였다.

최근에 낸 책 <이장이 된 교수, 전원일기를 쓰다>(지성사 펴냄)와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생각의나무 펴냄)에서 경제의 양적 성장을 넘어 인간의 삶의 질과 생태와의 조화를 꿈꾸는 그는 개발·교육·노동 등 사회 현안에도 목소리를 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흙집에 앉아 그와 나눈 이야기들은 콘크리트 빌딩 숲에 갇혀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들이 음미할 가치가 있다.

자본주의가 만든 사회적 DNA

-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생태나 환경에 주목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프레시안(최형락)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받았던 일차적인 느낌은 '이건 내가 배우고 싶었던 공부가 아닌데'라는 것이었다. 그 느낌의 뿌리를 파고보니 결국 이 학문이 추구하는 합리성이라는 건 결국 생산의 효율성이었다. 투입은 가급적 줄이고 산출은 늘리는 과정에서 사람과 자연이 망가지고 심지어 영혼까지 상처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돈벌이 경영에서 오는 뒤틀림 현상인 것이다. 경영학은 기업 단위의 분석을 많이 하는데 주로 경영자 입장에서 관리·정책 지침을 만드는데 치우쳐 있다. 그런 방법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노동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삶의 경영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돈의 경영 패러다임에서 보면 전혀 말도 안되는 이야길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 생태와 삶의 질을 외치는 목소리는 꾸준히 늘어왔다. 기업들도 제각기 나름의 '인간 중심 경영'을 표방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했을 때 따르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워낙 돈의 패러다임에 오래 젖어있다 보니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평소에 자주 쓰는 말인데 '사회적 DNA'가 그렇게 변해버린 상태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해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경쟁의 바다'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10년 전과 비교해서 현재가 조금 더 쾌적해지고 행복해졌는지, 아니면 가면 갈수록 경쟁이 격렬해지면서 피폐해지는지 성찰해야 한다. 우리가 늪에 빠졌는지 해방의 길로 가고 있는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받아들인 경쟁 패러다임이 점점 늪에 빠져들고 있다. 이 물결을 원천적으로 부정해서 진공 상태로 살아갈 순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직접적인 타격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을 쳐야한다. 다른 패러다임의 실현이 가능하다면 해내야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소위 '대안 언론'도 경쟁의 물결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진 않지만 그 자체가 답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무자비한 광고 자본에 빠져들지 않으려 애쓰는 것 아닌가?
"

"풍요가 해방을 억압한다"

강 교수가 말하는 '다른 패러다임'의 정체는 뭘까? 현재 인류가 구축한 풍요로움을 이제는 배분하는 데 신경 써야한다는 것일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풍요라는 말은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 지금까지 진보적인 이론 입장에서는 물질적인 풍요가 전제될 때 사회 관계의 해방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물질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또는 물질적인 풍요가 지나쳐 오히려 억압받는 것 같다.

일례로 지금 현재 첨단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위치 추적 기술이 노동 현장을 감시하는데 사용된다. 물적 진보, 과학 진보가 이루어지는 커다란 맥락이 자유나 해방보다는 명령과 순종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론에서 말하는 물질적인 풍요는 현실의 풍요와는 질이 다르다. 지금까지 진행된 물질적 풍요의 규정은 결국 자본이나 권력이 정했다.

주거나 먹을거리 등 생존의 문제로부터 해방되면 여유로운 문화 생활이 가능해지고,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개성을 살리는 창의적인 생활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더욱 더 빨리 인간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기술,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추출해나가는 기술이 주도적으로 발전했다. 돈 되는 고급 아파트는 넘칠 정도로 많이 짓지만 빈민을 위한 임대주택은 몇 채 짓지 않는다."


인류가 구축한 풍요가 정당한 과정을 통하지 않았다고 해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평한 분배를 통해 이익을 나누고 바람직한 성장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이번에도 강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풍요가 아니다. 빈곤 문제의 해결은-가난이라는 용어가 부담스럽다면-모두가 검소하게 사는 식으로 되어야 할 것 같다. 이미 마하트마 간디부터 시작해 많은 이들이 설파한 것처럼 전 세계가 미국의 중산층 수준으로 생활하려면 지구가 5개 있어도 부족하다.

현재도 이미 석유처럼 재생 불가능한 자원이 고갈되고 있다. 지구촌 사람들이 남의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전쟁하는 모습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검소해져야 된다. 일부터 찌들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소박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가난함이 가르쳐주는 것이 많다. 두려워할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한다. 가난을 풍요로 해결하려는 것은 인류의 미래가 아니다."


- 이야기하고 있는 '검소함'은 결국 '자기 통제'가 필요하다는 뜻인가.

"오히려 자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필요에 충실하게 감응하는 상태, 그게 자율이고 책임이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흙집 거실에는 30년 전에나 나왔을 구형 선풍기가 덜덜거리는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파이의 원천은 생태"

- 그런 '검소함'이 생태나 환경이라는 대안으로 나타난다는 건데, 사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와 닿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사회적 DNA' 때문인가? 일례로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그게 환경과 생태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정부가 표방하는 일련의 정책 방향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을 때도 있다.

"환경과 생태 문제는 경제나 정치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4대강 사업을 예로 들었는데 1차적 우려는 식수 오염이다. 식수 오염은 바로 경제적인 문제이면서 생태적인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식수가 오염되면 물을 사다 먹는 방법밖에 없다. 이미 생수 사업이 시작된 지 20년 가까이 됐다.

<살림의 경제학>(인물과사상사 펴냄)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주류 경제학의 성장 패러다임은 파이의 크기만 문제 삼고 있다. 파이의 크기만 무한정 키우면 저절로 나눠진다고 했지만 지난 수십 년의 경험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파이의 성장이나 분배냐는 차원에서조차도 파이의 원천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없다. 결국은 생태다. 성장은 경제적 문제이고 분배는 사회적 문제인데 생태는 이 두 가지를 다 아우를 수 있다. 파이를 아무리 키우고 공정히 나눠도 각 조각이 자연 훼손과 오염을 전제로 한다면 행복해질 수 없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사회·문화·교육 측면에서 얼마나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가가 핵심 문제다. 그 답이 '노(no)'라면 갈 길이 아닌 것이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측만 문제인 건 아니다. 샛강에 들어가는 온갖 오염물질들은 가정과 공장에서 나온다. 교육은 백년지대계지만 강물은 수천년지대계 아니겠나. 잘못된 것을 고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4대강 사업처럼 진행할 건 아니다. 오염의 원천을 없애고 이미 오염된 것을 조심스런 형태로 정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현재의 4대강 사업은 말 그대로 '사업'의 일종이지 '살리기' 운동은 아니다."


- 다시 한 번 검소함으로 돌아가서 현대인들은-'사회적 DNA'에 따르면-이미 소비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데 익숙하다. 검소함으로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무엇이 있나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이 표현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집 <월든>에 나오는 표현인데 이만큼 중요한 게 없다. 책이나 대화, 사색 또는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 정체성, 삶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들어가 보는 여행. 이런 게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무엇이 자신을 만족시킬지 몰라 일시적인 소비로 채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만남이다. 다른 이와의 만남. 소모임이나 풀뿌리 모임은 사회 변화에 중요한 요소다. 종교적으로 수양, 마음의 공부를 강조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사회 변화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는 어떤 모습의 삶, 자본 권력이 일방적으로 만들어주는 미래상이 아니라 참다운 인간상, 이웃과 자연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풀뿌리 모임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읽었던 책, 보았던 영화, 자기가 체험한 경험과 여행 등 모든 것을 포함해 이웃과 나누고 공감해야 한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배우다 한 차원 고양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삶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소비를 통해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거나 자아실현을 한다는 착각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다른 패러다임의 다른 인간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실천력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잔업을 더 해서 번 돈으로 대형 마트에 가서 구운 소금을 사는 것보단 그 시간에 가족들과 모여 소금을 솥에 구워서 먹어보는 것이다.

멜라닌, 환경 호르몬, 아토피 등 식량 위기에 관련된 사안들을 보면 현재 우리가 먹는 건 독약에 가깝다. 경쟁 시스템 못지않게 이런 데에 무감하면 파멸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발을 빼는 게 필요하다. 자신이 견디기 어려운 현실의 고통을 정직하게 바라보기만 해도 대안을 고민하게 된다. 또한 한발 앞서 실천하는 사람들과 결합하면 그런 구조에 반복적으로 휘말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강 교수는 5년 동안 이장을 맡아오면서 아파트 반대 싸움만 해오지 않았다. 마을 주민, 인근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골목 축제를 기획했다. 마을 아이들을 모아 글쓰기 교실도 진행했다. 마을에 도서관을 꾸며 문화 교양 강좌도 열었다. 단순한 즐거움이나 배움을 넘어, 함께 어울려 소통하기 위해서다.

ⓒ프레시안(최형락)

한 가지 궁금증이 남는다. 최근 펴낸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를 보면 외모나 말투에서 풍기는 느긋함보다는 날선 비판이 강하다. 한편으론 발을 빼고, 한 쪽 발은 담그는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그의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밑바탕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 크게 보면 대학 선생인 나 자신도 노동하는 형태가 다를 뿐 마찬가지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생산직 노동자의 경우 노동조합 대의원들이 서로 물량을 더 끌어오려고 경쟁하는 것이다. 또한 돈만 된다면 잔업, 철야 특근을 마다하지 않는 풍조도 있다. 임금 단체 협상 과정에서만 명시적으로 시급이나 복지에서 더 나은 대우를 쟁취하는 듯 하지만, 결국 노동의 굴레 속으로 더욱 빠져들게 되는 꼴이다. 노동권을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굴레로부터 벗어날 권리까지도 포함해야 자유·해방이 가능하다.

궁극적으로 노동 시간을 줄여야 하고 노동을 하는 관계가 자기과 세상을 죽이는 관계 속에서 편성되어선 안 된다. 자아실현 과정이 노동이 되어야 하고 인간적인 유대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관계가 노동 현장에 구현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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