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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패배주의'가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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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내 안의 '패배주의'가 두렵습니다"

['프레시앙'이 되며] 최도빈 씨

지난 8월, 9만 명이 넘는다는 미국 내 한국 유학생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30대를 넘긴 지 오래지만, 군 복무 시절을 빼면 혼자 사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걱정도 앞섰습니다. 그래도 늦게 온 만큼 삶의 경험도 쌓을 테고, 유학 생활에 대한 충고도 많이 들었기에 당당하게 살아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 장벽과 고독, 그리고 혼자 살기에 대처하기 힘들었던 예기치 못한 사건 앞에서는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언어가 자유로운 미국 학생과 교수들, 그리고 깜짝 놀라게 만드는 방대한 서적과 논문을 보다보면, 하루하루 제 안에서 '패배주의'가 자라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가끔 '저 친구는 (지금 내가 하루에 겨우 몇 쪽 보는) 이 책을 소파에 누워서 보겠지. 그런데 나보다 더 열심히 하네. 게다가 원하는 책은 영어로 다 출판되는군. 그 많은 독서량을 따라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더욱 그 패배주의의 줄기는 굵어져만 갑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시절보다 더 뉴스를 찾게 됩니다.
  
  제 안에 자라나는 패배주의의 싹을 대체할, 적어도 제초제라도 뿌려줄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나라가 여기보다 부자는 아니지만, 이 나라가 지닌 장점을 받아들이고, 문제점을 답습하지 않는 올바른 역사적 발걸음을 딛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어 읽기에 지쳐 '빠른 읽기'가 그리울 때마다 챙겨보던 한국 발 소식은 아쉽게도 저의 희망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출국 직전에 비행기에서 읽은 신정아 씨의 학력 위조 사건 후폭풍으로부터, 영화를 놓고 벌어진 논쟁의 광포함, 김용철 변호사와 신부님이 결단한 삼성 비자금 폭로에 대한 언론 보도, 무엇보다도 내일 모레로 다가온 대선 문제까지. 한국을 떠난 지 4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내가 30여 년을 산 곳이 맞나?',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이질감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일 큰 고통은 그러한 굵직한 사건에 '읽을 만한' 기사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자사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부풀려 흥밋거리를 양산하고, 해악이 되는 일을 축소하는 데 도통한 거대 언론사의 뿌리에서 뻗어져 나온 기사들은 그들의 관심거리가 무엇인지만을 확인하게 해 줍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변죽만 울리고 정작 중요한 일들은 그냥 넘어가는 우리나라에 만연한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불신만이 팽배해 갑니다.
  
  '학교와 그 주변'만으로 스스로 삶의 틀을 좁혀버리는 유학생에게 인터넷 언론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고국 소식을 알게 해 주는 유일한 '창'인 동시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광경을 그 안에 가둡니다. 고국에서 문제를 직접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언론, 기자의 입장이 반영된 틀을 '독해'하는 식이기 때문에 작은 문제를 더 크게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양한 '창'이 필요합니다. 내가 어떤 일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에게 작은 창 하나도 아주 소중합니다.
  
  '프레시앙'이 되었습니다. 제 성향이 '진보'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리고 <프레시안>의 기사가 타 언론에 비해 '읽을 만한' 탓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견해와 정보가 공유될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하다는 믿음이 굳건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성숙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중립 언론', '언론 직필'을 부르짖는 언론이 반성하고 다시금 '직필'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과학자마저도 과학적 실험과 관찰은 입증하고자 하는 목적(가설)에 치우쳐서 해석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연구를 하는데, 어찌 사람살이를 다루는 언론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과학자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입증하듯, 언론사 각각 자신의 철학을 밝히고, 그것에 부합하도록 정정당당하게 기사를 통해서 논증과 논쟁을 펼쳐 주셨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패배주의와 싸우는 것은 너무나 힘듭니다. 20대에 부린 호기와 만용의 결과물인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 안의 패배주의가 오히려 타인에 대한 공격과 오만으로 나타나기는 것을 느낍니다. 사실 어제 한 학기를 끝내고 동료들끼리 모였는데, 제가 조언을 한다는 것이 한 친구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그 친구에게 대한 사과와 제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곳에서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기에 제 안의 패배주의의 싹을 자를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고국에 대한 이야기를 남의 설명을 통해 들어야 하는 저로서는, 다양한 창이 없다면 또 다른 패배주의가 제 안에서 자라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실과 진리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진실과 진리는 포장되고 가공될 뿐이다'라는 술집에서나 호기롭게 내뱉을 만한 말에 전적으로 귀를 기울여야 하는 패배주의 말입니다. 그때에는 한갓 동료에게 조언한답시고 잘난 척하는 못난 제 자신이 어떻게 악화될까 걱정이 됩니다.
  
  꼭 여섯 시간이 지나면 한국 행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합니다. 학기말 숙제를 한국에 들고 가지만, 아직 이곳에서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없기에 투표를 하려면 빨리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든 한 해를 보냈습니다. 올 한해 제게 가장 마음 속 깊이 박힌 한 문장을 꼽으라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였습니다.
  
  그 말을 철저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앞으로는 하늘을 가려야 하는 상황을 안 만들기로 다짐했습니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우리나라가 '확고한 진리와 진실이 있고, 알고자 하면 알 수 있다'는 확신만이라도 가능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초'가 없다면 남는 것은 항상 자신과 타인의 행동에 대한 불안과 불신만 커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좇는 꿈이자, 모든 인간이 삶에 지친 몸뚱이를 기댈 수 있는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업신여김을 당하면 삶이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아무리 경제가 살아난다고 해도 말이죠. 힘들었던 올 한 해, 투표로서 마감하고자 합니다.
  
  지금 새벽 1시 눈보라가 계속 몰아칩니다. 내일 항공편이 취소될까 걱정입니다. 일단 밀린 설거지를 하고 트렁크부터 꺼내야겠습니다.
  
  ☞ '프레시앙' 되기
  
■ ['프레시앙'이 되며] 보기
  
  돈이 없으면 독립도 없다-문정우 <시사IN> 편집국장
  
  <프레시안>을 울리지는 말아야지!-조원종 씨
  
  '진짜' 보수주의자도 <프레시안>으로 모여라-이형기 교수
  
  "자본주의 사회에 공짜는 없다"-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어둠을 탓하지 말고 촛불을 켜자"-이계삼 교사
  
  시장에 내던져진 언론, 누가 구하나?-언론인 손석희 씨
  
  "<프레시안>, '짱돌'이 되어라"-교사 김영복 씨
  
  "신뢰하고 또 신뢰하라…진실이 승리한다"-소설가 김곰치 씨
  
  "유시민 전 장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송기호 변호사
  
  "신세는 갚아야지!" -임종인 의원
  
  "그 놈의 '자본', 이제 내가 마련해주자" -대학생 허남설 씨
  
  "그때 누가 침묵의 카르텔을 깼는지 기억하자" -국민건강을위한수의사연대 박상표 씨
  
  "작은 새우가 역사를 바꾼다" - 한학수 PD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할 권리를 위하여 -시민 이도형 씨
  
  "날 닮은 그 모습, 왠지 정이 갑니다" -가수 이은미 씨
  
  "시민의 힘으로 '독립 언론'을 만들자" -홍성태 교수
  
  "그 '꿈' 잃지 않았으면…" -개그맨 황현희 씨
  
  "이 사악한 시대에 살고자, 나는…" -임옥상 화백
  
  "'좋은 세상', 공짜로 올 것 같진 않습니다" -정희준 교수
  
  "조합원들을 울리지 않기 위해…"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 먹지" -강주성 대표
  
  <프레시안>에 웬 <삼국유사>? -김대식 교수
  
  "<프레시안>, 망하게 내버려 두자" -시민발전 박승옥 대표
  
  "1만 원이면 한 아이의 생명 값입니다"-학생 김경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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