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아! 또 다른 '盧정권' 때도 그랬었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아! 또 다른 '盧정권' 때도 그랬었지"

박명준의 '유럽에서의 사색'〈18> 노조의 정치파업

1990년대 이후 세계는 바야흐로 신자유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기존에 국민국가 단위로 발전한 '내셔널 비즈니스 시스템'의 변화를 유인했고, 세계 주요 국가는 EU, NAFTA, APEC 등 새로운 형태의 초국가적 경제블록의 활성화를 추진했다.
  
  각국에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이끄는 초국가적 경제동맹체의 신형 버전은 두 나라 간의 배타적인 무역협정을 의미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이는 체결 당사국 간의 경제 협력을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 특정 업종과 산업을 두고 심도 있는 규제 개혁을 통해 비교우위의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다자 간이든 양자 간이든 이러한 '국가 간 전략적 경제동맹'은 단순히 상호 간 무역 규제 완화 등의 조치뿐만 아니라 자국의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에 중요한 함의를 지니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 그 방향은 대체로 노동 측에 불리한 형태로 제도가 재구성되는 게 대부분이다.
  
  따라서 노동시장을 규제하는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로서 각국의 노동조합은 이러한 국가와 자본의 새롭고 발 빠른 움직임에 맞서 적절한 대응을 취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기존에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 발전한 노사관계의 관행과 제도에 여전히 갇혀 있는 노조는 국가와 자본의 초국가적 움직임에 맞서 해당국 노조 간에 초국가적 연대를 형성하는 등의 공세적이고 능동적인 대응을 통해 그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다만 노동운동이 강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존중 받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지난 1990년대 이후 이러한 초국가적 개혁의 진행과정에서 자국의 노동조합을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포함시키는 시도를 활성화했다. 이른바 '사회적 대화' 내지 '사회협약'으로 명명된 이러한 흐름은 기존에 노조의 정치 참여 수준이 높은 북ㆍ서유럽을 넘어서 상대적으로 그 수준이 낮았던 남유럽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로의 체제 이행을 추구하는 동유럽의 여러 나라로 대폭 확대됐다.
  
  일부 국가에서는 한번 협약이 체결된 후에 지속적으로 그러한 형태의 의사결정체가 재생산되고 진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유럽통합을 통한 초국가적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은 유럽 내 여러 나라의 노사관계를 새로운 형태로 재구조화하는 계기로 작용해 왔고 이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주지하듯이 우리의 경우도 지난 김대중 정부 하에서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의 과정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국가는 한편으로는 상식 이하로 낙후됐던 노동운동의 시민권을 정상화하는 조치를 약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초국적 자본의 구미를 만족시켜주는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에 대해 노동의 동의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끌어내며 사회협약을 체결했다.
  
  그 뒤 이런 형태의 협약은 노사정위의 제도화를 통해 더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는 듯이 보였으나, 그 운영의 미숙함과 신흥제도의 취약한 역량이 노출되면서 얼마 안 가 노동계로부터 신의를 상실했다. 그 이후 개혁정치의 장에서 이전에 버금가는 대규모 협약이 체결되거나 사회적 대화가 활성화되는 모습으로 이어지지 못하며 그러한 유럽형의 실험은 걸음마 단계에서 쇠퇴했다.
  
  한미 FTA, 진정한 '대연정'
  
  김대중 정부의 성격을 계승한 노무현 정부는 정권 초기에 이전 정부에서 스러졌던 사회적 대화를 부활시키려는 노력을 잠시 보이기도 했다. 네덜란드니 아일랜드니 하는 노사관계 모델을 침 튀기며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진전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노사관계 로드맵을 둘러싼 대치 국면이 지속되면서 노정 간의 신뢰 관계는 더욱 험악해졌고, 구조조정도, 노사관계 개혁도 합의적인 방식의 의사결정체의 활성화를 동반하지 못한 채 다 함께 물거품이 됐다.
  
  노무현 정권 후반에 접어들어 대두된 것이 한미 FTA다. 정부는 이 메가톤급의 초국가적 경제협력 구상을 추진하는 의사 결정 과정에서 노동을 끌어들이고 동의를 구하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사회협약이 물 건너 간 자리에 다시금 부각된 것은 우리의 토양에 뿌리 깊은 관료중심의 의사결정이었다.
  
  실로 FTA와 관련해서는 노무현 정부가 한때 꿈꾸었던 것 이상의 견고한 '대연정'이 실현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관료, 의회, 그리고 언론이 모두 똘똘 뭉쳤다. 그 과정에서 시민사회와 노동은 합법적으로 완전히 소외되었다. 한편에서 노무현 정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주장이 대두되는 근거가 바로 이 지점이다.
  
  국민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한때 현 정권의 성향을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표현했던 것을. 초반에 구조조정은 주춤한 면이 있었으나 후반에 적어도 FTA를 억척스럽게 추진하는 면에서 이 정권이 '신자유주의 정권'임은 명백할 것 같다. 그것도 신자유주의의 첨단버전으로 새로 대두되고 있는 FTA를 세계적으로도 앞장서서 도입해 나가는 모습은 신자유주의도 그냥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저돌적 신자유주의'라고 명명할 만하다.
  
  그렇다면 현 정부에게서 '좌파'는 무엇을 의미할까? 한나라당이 참여정부를 비난할 때 쓰는 '친북좌파'라고 할 때 그 '좌파'를 말하려는 것일까? 세계 최빈국인 이웃나라 북한에 대해서 전쟁의 살기를 지양하고 세계 10대 무역국이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맹국으로서 평화적, 인도주의적으로 지원하는 행위를 좌파로 매도하는 것은 일부 극우 반공주의자를 제외한 양심적이고 세력에게 있어 좌우를 막론하고 상식적인 일이 아니다. 아마 현 정부도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들이 좌파로 명명되는 것은 크게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경제정책에 있어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성장 위주의 논리를 역설할 때 이에 맞서 일견 복지를 강조하는 면에서 좌파라고 항변하고 싶은 건가? 그러나 아직도 사회복지의 규모나 그 깊이에 있어서 여전히 OECD 최하위의 수준을 벗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좌파정권의 보편적 반열에 참여정부를 포함시키기는 솔직히 스스로 멋 적을 것 같다. 그래도 노무현 정부를 좌파 신자유주의로 명명하고자 한다면, 눈곱만큼의 '걸음마 좌파'와 '최첨단의 신자유주의'가 비대칭적으로 결합된 형태의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는지 모른다.
  
  '좌파'라는 수식어를 당장 떼라!
  
  하지만 이 정부에 대해 그 정도의 수식어조차 붙이기 꺼려지는 모습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FTA를 둘러싼 정부와 노동계의 대결 형국에서 보이는 태도다. 금속노조의 반FTA 저항 시도에 맞서 정부가 보여주는 태도는 좌파 성향은커녕 역사를 퇴행해 권위주의 시절로 회귀한 모습이다.
  
  늘 크고 작은 일로 자신과 각을 세우던 보수언론의 등에 이 지점에서만은 기분 좋게 업혀 있다. 언론이 신흥 산별노조의 지도부와 기업지부 간의 취약한 관계를 이간질하고, 노동계급과 시민의 이해를 대치시키는 언술을 구사할 때에 정부는 거기에 편승해 초장부터 "공권력의 엄정한 집행(!)"을 내세우며 엄포정치를 편다. 파업의 진정성을 헤아려볼 여지는 아예 없다. 1989년쯤이었던가. 실정법을 앞세워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결국 민주적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던 그 시절 또 다른 노 씨 정부도 비슷한 모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노조의 정치파업은 정치권을 향한 '말 걸기'다. 자본은 로비도 하고, 정부는 법을 쥐고 흔들 수 있지만, 노동운동이야 노동계급 정당이 의회에서 수적으로 절대열세인 상황에서 파업 말고 사용할 다른 수단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사회혼란을 부추기고 국가의 미래를 나 몰라라 내팽개친 채 특권화한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국사(國事)를 논하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돈 있는 중ㆍ상류층이 국가 교육 체계를 공동체적으로 책임질 생각은 않고 나 몰라라 교육이민을 떠나는 등 국부를 해외로 유출하는 일을 서슴지 않으며 제 살 길만을 찾는 모습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대견한가? 정부가 FTA든 뭐든 먹고 사는 논리를 하루아침에 뒤바꿀 정책을 필 때, 그에 편승해 어떻게든 내 사리사욕의 극대화만을 따지는 국민들로 가득 찬 나라를 원하는가? 그게 명색이 참여정부의 이념이었나?
  
  국민 모두 '불법파업'과 '엄정한 법집행'의 비극적인 조우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정부가 '노동의 말 걸기'에 애써 귀를 닫겠다면, 이제 여전히 스스로 붙이고 싶을지 모를 '좌파'라는 수식어는 당장 떼어 버려라. 혹시 아직도 "한편으로는 첨단의 신자유주의를 추구했을지언정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로서의 일정한 면모를 함께 갖추었던 정권"으로 역사에 남고 싶은가?
  
  그렇다면 노조의 진정어린 말 걸기에 대해 무조건 법적 부당성부터 들이대며 진압하려 들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귀를 기울이고 의견을 존중하며 대화와 상생의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 결과적으로 그 과정에서 그 동안 실종된 사회적 대화가 활성화되고, 뒤늦게라도 FTA의 편파적인 내용성이 수정되며 거기에 조금이나마 민주적인 정당성을 가미시킬 기회가 마련된다면, 그래 좋다. 크게 양보해 이 정부는 '그래도 좌파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노라'고 기억해 주마.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