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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오블리주를 실천하면 누구나 노블레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10)] 희망을 주는 국내 사례들

미국과 같은 기부문화 형성의 가능성이 우리에게도 없는 것은 아니다. 선조들의 희생정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계승하는 기업가 노블레스와 시민 노블레스가 서서히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희망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 기부문화의 활로를 모색해본다.
  
  기부도 벤처 경영처럼 하는 정문술
  
  정문술(鄭文述)의 인생은 유난히 기복이 심하다. 젊은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에서 근무를 시작해 상당한 고위직에 올랐던 그는 신군부의 쿠데타로 강제퇴직을 당했다. 45세의 나이에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 창업을 했으나 사기를 당하고 사업에 실패해 자살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재기해서 사업을 키웠으며,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나스닥 상장까지 이루었다. 그리고는 나눔으로 눈을 돌려 회사의 경영권을 가족이 아닌 종업원들에게 물려주고, 이제는 재산의 사회환원에 나서고 있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델이다.
  
  정문술은 193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1957년 익산 남성고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1961년 육군 하사로 제대한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중앙정보부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중간에 대학을 다닌 기간 외에는 계속 중앙정보부에 재직하여 3급 공무원의 위치에까지 오른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의 위세에 비추어 보면 소위 '출세'를 한 것인데, 그의 시련은 1980년대와 함께 시작된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퇴직을 당한 것이다. 한 직장에 20년 가까이 근무하다 40대 중반에 갑자기 쫓겨난 사람이 느끼는 좌절감은 충격에 가깝다고 한다. 그것도 직장이 권력기관이었다면 충격은 배가 될 것이다. 게다가 그 충격은 퇴직 직후 잘못 인수한 빚더미 회사의 실패로 더욱 커진다.
  
  그러나 정문술은 오히려 "창업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해 45세의 늦은 나이에 반도체 생산설비 업체인 미래산업을 설립하여 자신의 미래에 승부수를 띄운다. 그는 이때 다른 제품을 모방하고 나중에 기술을 배울 것이 아니라, 먼저 기술을 확보한 뒤에 고품질의 제품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일본 반도체 회사에서 은퇴한 기술자를 초청해 파격적인 임금을 지급하며 기술을 습득해 반도체 조립장비인 '리드프레임 매거진'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 제품은 1년 만에 국내시장을 독차지하는 성과를 올린다. 그 다음에 그가 도전한 것은 반도체 웨이퍼(집적회로를 만들 때 쓰는 직경 5~10cm의 실리콘 단결정의 얇은 판)를 자동으로 검사해 주는 장치였다. 이 제품의 개발을 위해 그는 그때까지 벌어 놓은 3억 원을 쏟아 붓고 10억 원을 차입했는데도 자금이 부족해 집안의 패물 등을 처분하고 친척들의 돈까지 빌려 썼다.
  
  우여곡절 끝에 기술개발에는 성공했으나 제품의 속도 문제로 인해 상품화에는 실패한다. 그 결과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고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그는 가족 동반자살을 염두에 두고 약을 사 모으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죽을 수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상품화에는 실패했지만 기술은 남아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 기술을 가지고 팔릴 만한 다른 제품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개발한 상품이 '테스트용 핸들러'였다. 이 제품이 국내시장을 석권하면서 정문술은 재기하게 된다. 그는 "그때 이후 사업의 결정적인 무기는 기술이라는 점을 늘 잊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이후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미래산업은 한국 반도체설비 업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부상하고 우량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거부가 되었다.
  
  그는 철저하게 실용주의 경영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래산업의 핵심 엔지니어는 대다수가 고졸 출신이며, 회사가 아무리 커져도 사장 위에 회장 자리를 두지 않아 자신의 직함은 항상 사장에 머물러 있었다. 비용절감을 위해 비서를 두지 않은 탓에 미국 비자가 만료된 줄도 모르고 공항에 나갔다가 되돌아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원복지에는 아끼지 않고 투자를 했다.
  
  그는 창업 초창기에 경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좌충우돌할 때 우연히 집어든 아들의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본 내용대로 회사를 운영한다고 한다. 즉 "더불어 살아야 한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성실해야 한다,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식의 뻔하고 따분한 경구대로 경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의 반대로 해야 성공을 한다는 세상에서 그런 '공자님 말씀'을 따르는 그의 경영방식을 두고 '거꾸로 경영'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융통성 없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한 그는 원칙에 충실한 경영자였다.
  
  정문술은 그렇게 키운 분신 같은 회사의 경영권을 "착한 기업을 만들어 달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자식이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늘 자식들에게 '유산은 독약'이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어려움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이 행복인데 자식들에게 유산을 많이 남겨주는 것은 자식들의 행복권을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다.
  
  회사를 떠난 그는 한동안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한 '마지막 벤처 프로젝트'를 모색한 끝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300억 원을 쾌척했다. 평소 인탐(人貪)이 많은 경영자답게 그는 바이오테크 분야의 고급 인재를 키우는 사업에 써달라며 거액을 기부한 것이다. 그는 돈만 내놓은 것이 아니라 KAIST와 과학기술부에 첨단학과 신설과 교수, 시설, 기자재의 유지 및 관리에 필요한 예산지원을 요청했다. 기부도 기업 경영하듯 용의주도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 KAIST는 '바이오시스템학과'를 신설하고 그의 기부금을 재원으로 바이오테크 연구동을 신축하게 되었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고 설파한 앤드루 카네기에게 감명을 받았다는 그는 카네기의 교훈을 따르면서 "죽음이 목전에 닥쳐서야 떨리는 손으로 뭉칫돈을 내놓은 일은 정말 하기 싫다"는 자신의 지론도 동시에 실천한 셈이다. 그는 KAIST에서 열린 '정문술 빌딩'의 기공식에는 물론 준공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정문술 빌딩'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도 본인이 하도 펄쩍 뛰어 학교 측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고 한다. '도덕경영주의자'다운 행동이다.
  
  정문술의 치밀하고도 구체적인 기부방식은 우리나라의 기부문화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좌절에서 나눔으로 발돋움한 그는 우리 사회가 지금 필요로 하고, 따라 해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델이다.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한국의 록펠러, 관정 이종환
  
  관정(冠廷) 이종환(李鍾煥) 교육재단은 출범 때부터 우리나라의 사회사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이유는 재단의 출연규모가 그때까지 존재하던 모든 재단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2000년 출범할 때는 10억 원 규모였지만 2003년에 3000억 원, 2004년에는 4000억 원으로 늘어나면서 순식간에 우리나라 최대의 재단이 된 것이다.
  
  게다가 그 출연자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회장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이 더욱 컸다. 현재 삼영화학그룹의 매출액은 연간 4000억 원 규모다. 그는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의 1년 매출액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장학재단에 쾌척한 것이다. 기업 규모에 비해 유명무실한 장학재단을 운영해 오던 재벌들이 민망해 할 것 같다.
  
  그의 쾌거는 한 세기 전 미국 땅에서 카네기나 록펠러가 자선재단을 세웠을 때의 파장에 견줄 만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 카네기 재단이나 록펠러 재단의 출범이 미국 기부문화의 발달에 시동을 거는 신호탄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관정의 재단도 그런 역할을 하리라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재단이 장학사업 규모로는 국내 최고라고 들었습니다. 누구나 최대나 최고의 기록을 오래 유지하고 싶겠지만, 저는 이 기록이 빨리 깨지길 바랍니다"라며 국내에 장학금 기부를 비롯한 기부사업이 좀 더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종환 회장은 그런 믿음을 갖게 한다.
  
  이 회장은 1959년 서울 영등포구에 삼영화학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50년 가까이 국내 석유합성수지 가공제품산업을 선도하면서 현재의 삼영화학그룹을 키워낸 기업인이다. 삼영은 초박막 필름과 포장용지, 합성지 등을 생산한다. 그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삼영화학의 중국 진출을 진두지휘하는 등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회장은 "과거의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었고 지금의 중국이 세계의 시장이라면 미래의 중국은 세계의 심장이 될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진취적이며 안목과 식견이 있는 기업인이다.
  
  그는 평생 '전쟁하듯' 기업을 일구고 재산을 모으는 데 진력했지만 일흔 살이 넘으면서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식들에겐 자립을 위한 최소한의 것만 남겨 주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과 마찰도 있었다. 이 회장은 2000년 부인으로부터 이혼 청구 및 재산 분할 소송을 당하기도 했고, 사재 출연에 반대하는 가족들과 불협화음을 빚기도 했다. 지병으로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둘째 아들이 마음에 걸려 한때는 최고의 자선병원 설립을 검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결국 장학재단으로 결론이 났다.
  
  이종환 회장은 '인재와 기술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기술 없이는 경쟁력도 없으므로 이공계 인재를 잘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은 매년 150억 원을 장학사업에 투입하고 있다. 국내 장학생 1000여 명과 국외유학 장학생 1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고, 장학지원 대상자 중 70% 이상을 이공계 학생들에게 집중하고 있다. 국내에선 최대 규모이고,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히는 규모다.
  
  이 회장은 빠른 시일 안에 개인자산을 더 투입해 재단의 기금을 6000억 원 안팎으로 늘릴 생각이다. 그 정도 규모는 되어야 오래 지속하는 장학재단으로 자리를 잡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지금도 이면지를 사용하라며 직원들을 닦달하고 점심시간이면 직원들과 함께 자장면을 즐겨 먹어 '구두쇠' 소리를 듣는 이 회장이지만 사람 키우는 일에는 이렇듯 배포가 크다.
  
  그는 장학재단의 운영에 대단히 엄격하다. 장학생 선발기준도 객관적이다. 저명한 교수진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전권을 갖고 영재급 인재들만 선발한다. 이 회장 자신도 장학지원 대상 학생 선발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회장은 장학금과 관련된 청탁이 들어오면 재단이 아닌 개인 비용으로 처리할 정도로 철저하고 투명하게 재단을 관리하고 있다.
  
  그는 기부문화의 정착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우리도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한데 기부가 좀 더 활성화되어야죠. 기부문화는 사회안정에도 도움이 됩니다. 아쉬운 건 행정적 지원입니다. 규제가 너무 많아요. 기부에 대한 세제혜택도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 사립대학들이 오늘날 크게 발전한 까닭도 기부문화 활성화와 정부의 행정적 지원이 있어서입니다"라고 주장하는 이 회장은 주변의 평가처럼 분명 한국의 록펠러다.
  
  그의 소망처럼 관정재단이 지원한 인재들 가운데서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이 회장의 뒤를 잇는 제2, 제3의 재단들이 수없이 등장할 날을 꿈꿔 본다.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천사, 김군자 할머니
  
  우리 사회가 김군자(金君子) 할머니께 해드린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할머니의 것을 빼앗기만 했을 뿐이다. 할머니께서 열세 살에 부모를 잃고 끼니를 잇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할머니를 돕지 못했고, 할머니의 일곱 살짜리 어리디 어린 동생이 남의집살이를 갈 때에도 수수방관했다. 할머니께서 나이 열일곱에 일본 놈들에게 정신대로 끌려가실 때에도 우리는 구경만 하고 있었고. 스무 살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이 땅에 돌아오셨을 때에도 우리는 할머니를 보살피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 사회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뿐이다. 그런 할머니께서 우리를 원망하기는커녕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고 있다. 할머니는 천사다.
  
  강원도 평창군에서 딸만 셋인 집의 맏딸로 태어난 김군자 할머니는 10살에 아버지를 잃고 13살에 어머니마저 잃었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 어린 동생들을 남의집살이로 보내고 자신은 이모 집에서 16살 때까지 얹혀 살다가 강원도 철원의 어느 집에 수양딸로 들어갔다.
  
  그 집 아버지는 순사였는데, 할머니가 열일곱 살 되던 1942년 3월에 "돈 벌러 가라"며 웬 30대쯤 되는 한국 남자에게 할머니를 딸려 보냈다. 그렇게 끌려간 곳이 바로 중국 지린(吉林)성 훈춘(琿春)이었다. 그곳 일대에서 지긋지긋한 위안부 생활을 3년이나 하던 할머니는 해방이 되자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귀국한 뒤에도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이 집 저 집 떠돌며 가정부나 술집 생활을 하면서 힘들게 지냈다. 1996년 매스컴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수소문한 끝에 1998년 3월 나눔의 집에 입주할 수 있었다.
  
  그런 할머니께서 2000년 8월 아름다운재단이 창립할 때 "배우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데 집안환경이 어려워 그럴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며 거금 5000만 원을 기부하셨고, 평소에 학교에 다니지 못한 것이 한이었으니 그런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는 뜻을 밝혔다. 할머니의 5000만 원은 정부배상금 3150만 원에 매달 정부에서 지원받은 돈을 푼푼이 모은 것이었다. 할머니가 입고 싶은 옷, 먹고 싶은 음식을 마다하고 정성들여 모은 돈인 것이다.
  
  그렇게 조성된 '김군자 할머니 기금'은 보육소를 퇴소하는 18세 이상 아이들의 대학 등록금으로 사용되었다. 대학에 합격을 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꿈을 접어야 했던 아이들이 할머니의 도움으로 화가, 디자이너, 엔지니어로의 힘찬 첫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할머니의 도움을 받은 아이들이 "고마운 할머니께"로 시작하는 감동적인 편지를 보내 할머니를 위로한다고 한다.
  
  그런 할머니께서 올해 또 아름다운재단에 5000만 원을 기부하였다. 이번에 기부한 돈은 할머니가 6년 동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받은 월 85만 원의 생활안정지원금을 아껴 모은 것이라고 한다. 김 할머니는 올해 3월에도 나눔의 집이 추진 중인 전문 요양시설 건립비로 1000만 원을 내놓은 적이 있다. 할머니는 이번 돈은 고아로 자라는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쓰이기를 원했다. 자신이 고아로 자랐기 때문에 부모 없이 큰다는 것의 아픔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 할머니는 이번에 기부를 하면서 "2000년 기부금으로 혜택을 받은 아이들이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가끔 찾아온다"면서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할머니처럼 남을 돕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요즘 건강이 많이 나빠지신 할머니께서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전 재산을 쾌척한 것이다.
  
  할머니의 5000만 원은 다른 사람들의 5000억 원보다 큰돈이다. 할머니의 기부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첫 번째 메시지는 기부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못 가진 자'다. 평생 모든 것을 빼앗기기만 한 할머니가 기부를 하는데 기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말이다. 할머니의 기부는 '세상에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한 사례이다.
  
  김 할머니의 두 번째 메시지는 '오블리주는 노블레스의 책무가 아니라 오블리주를 실천하면 누구라도 노블레스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노블레스 정도가 아니라 천사다. 할머니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희망'이다. 김 할머니는 우리에게 어떤 절망도 헤쳐나갈 수 있는 희망을 선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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