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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독점자본가에서 위대한 기부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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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독점자본가에서 위대한 기부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8)] 석유왕 록펠러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는 양극을 오가는 인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석유회사 스탠더드오일을 설립해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지만 사생활에서는 독실한 청교도인으로 성실과 경건함을 삶의 최고 가치로 여겼다. 그는 편법으로 석유사업의 동맥인 철도를 장악하고 리베이트와 뇌물로 경쟁자들을 쓰러뜨리면서 1870년 후반에는 미국 정유 능력의 95%를 독점해 경제발전에 수많은 폐해를 끼쳤다.
  
  결국 록펠러로 인해 독점금지법이 만들어졌고, 스탠더드오일은 여러 개의 석유회사로 분할된다. 회사가 해체된 후에 주가가 더욱 올라 사상 최고의 부자가 된 그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으며, 은퇴 후 죽을 때까지 검소하고 독실한 농부로 살았다.
  
  1839년 뉴욕 주 리치포드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록펠러는 기독교 근본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14세 때 클리블랜드로 이사 가 고등학교를 마친 뒤 휴이트 앤 터틀이라는 곡물도매회사의 경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당시의 그에게 일과 신앙은 삶의 기둥이었다.
  
  1859년 동료인 모리스 클라크와 함께 '클라크 앤 록펠러'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생필품과 음식을 팔아 엄청난 돈을 벌었고, 나중엔 미국에서 생산된 석유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부업 삼아 클리블랜드에 정유소를 세운 것이 록펠러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수물자의 운송이 필요했고 클리블랜드 인근 타이터스빌에서 유정이 발견되자 석유산업이 급성장하게 되었다. 록펠러는 석유운송과 정유사업의 전망을 좋게 보고 사업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그의 전망은 적중해 석유운송 사업에서 큰돈을 벌게 되었고 1870년에는 자본금 100만 달러의 스탠더드오일을 창업하기에 이르렀다.
  
  불황기에 철도와 석유사업자 간의 카르텔을 구성해 운송료와 석유산업의 마진을 조정했고, 이 카르텔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사업자는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전략을 통해 록펠러는 미국 석유시장의 95%를 장악하는 독점자본가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경쟁사를 무너뜨린 록펠러는 독점자본가로서 악명을 드높인다. 그는 자기 회사의 노동운동을 철저히 탄압했으며, 끊임없이 경쟁사들을 몰락시키고 시장을 지배해 나갔다. 1982년 40개의 회사를 트러스트로 묶어 독점의 횡포를 부리는 그에게 대중은 '당대에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주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는 "록펠러가 얼마나 선행을 하든 그 부를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 사회는 이 집요하고 잔혹한 석유 독재자를 결코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결국 록펠러로 인해 미국에 독점금지법이 생기게 되며, 1911년 미국 연방법원은 끝내 스탠더드오일의 해체를 명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이 석유 독점기업은 34개의 회사로 분할됐으며, 오늘날의 엑손, 쉐브론, 모빌, 아모코 같은 석유기업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 지분은 1896년에 4000만 달러 규모였으나 그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1897년에는 2억 달러로 늘어났다. 독점금지법 위반 판결로 회사가 해체된 후에는 주가가 더욱 올라 1913년에는 10억 달러의 재산을 갖게 된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사상 최고의 부자가 된 것이다.
  
  은퇴 후 록펠러는 자선사업에 몰두하게 된다. 자신의 재산 관리를 10년 동안 담당해 온 프레더릭 게이츠 목사의 영향도 있었지만 강철왕 카네기와의 자선사업 경쟁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인류의 복지 증진'이라는 거창한 슬로건과 함께 록펠러 재단을 출범시키는 한편 시카고대학 설립을 위해 6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하고, 그 후에도 3억5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록펠러 의학연구소와 다양한 교육재단의 설립을 위해서도 수많은 기부활동을 펼쳤다.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계산해 볼 때 그는 거의 60억 달러를 사회에 환원하였다.
  
  1920년대 말의 대공황 때에도 록펠러의 진가가 발휘되었다. 미국 정부는 대공황이 닥치자 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후버댐, 금문교를 건립했다. 이때 록펠러는 정부사업에 버금가는 사업을 벌인다. 1928년 착공한 록펠러 센터는 당초 계획보다 훨씬 큰 고층빌딩으로 확대 건축되어 실업 해소에 기여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의 탄생에 대해 국가 간 합의가 이뤄졌을 때 록펠러재단은 뉴욕 시내의 땅을 매입해 UN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무상 기증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선 돈을 쓰지 않았다. 그는 세계 최고의 부자이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수도승처럼 살았다. 술, 담배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파티나 극장에 가는 일도 없었다. 자식들 용돈도 같은 또래 친구보다 적게 주었다. 1937년 그가 97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의 생활은 주변에 사는 다른 농부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열심히 농사일을 하고, 해 떨어지면 바로 잠자리에 들고 일요일은 종일 교회에서 보냈다.
  
  기부의 규모로만 따진다면 현재의 빌 게이츠 재단이 더 클지 몰라도 부자들의 기부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일을 한 것은 100년 전의 록펠러와 카네기다. 그들이 기부의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록펠러가 부만을 쫓았다면 이 악랄한 기업가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변신했다. 54세 된 해에 병을 얻어 2년 동안 와병한 뒤 1937년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자선사업가로 제2의 인생을 살았다.
  
  시카고대학 록펠러 의학연구소, 일반교육이사회, 록펠러 재단 등을 통해 거액의 재산을 희사(喜捨)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따뜻한 시선을 던졌다. 기부정신의 대물림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록펠러의 기부는 당대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외아들 록펠러 2세를 자선사업가로 키우는 데 말년의 열정을 쏟았다. 록펠러 가문을 통해 흐르는 기부의 참뜻은 자발적 사회공헌이다.
  
  록펠러는 "신에게서 돈을 버는 재능을 부여 받았기에 신이 명하는 대로 더 많은 돈을 주위 사람들에게 써야 한다"고 말했다. 록펠러의 그런 약속에는 사람에 대한 따뜻함이 스며 있었다. 록펠러는 보이지 않게 사회사업을 했다. 시카고대학이 설립자 록펠러의 이름을 학교명에 집어넣겠다고 했지만 그는 극구 사양했다. 그는 자신이 기증한 건물에 이름이 새겨지는 것까지도 끝내 거절했다.
  
  록펠러는 자선을 베푸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다. 록펠러는 돈을 벌 때에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사회사업을 하면서 신경쇠약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돈을 달라고 내미는 손은 너무 많은데, 누구에게 어떻게 주어야 할지를 결정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선사업을 하면서도 자신이 지원하는 사회사업들이 자생력을 갖추는 데 가장 신경을 썼다.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해당 단체들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사업 조직이 록펠러의 돈에만 의지하지 않고 실질적인 사회공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지속적으로 기부를 받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록펠러는 한 번에 큰돈을 지원하지 않았다. 종자돈(seed money)을 먼저 지원한 뒤 사업진행 상황을 살펴보면서 제대로 굴러갈 전망이 서야 지원액수를 늘려갔다. 다른 경로를 통해 사업자금을 지원받도록 유도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록펠러 재단은 극빈자에게 직접 돈을 주거나 음식물을 지원하는 봉사활동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프리카에 있는 대학교에 장학금을 주기는 해도 아프리카 난민을 위한 음식물 제공은 하지 않는다.
  
  록펠러 재단의 식량안전사업도 아프리카에 음식물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량이 많은 종자와 토지를 비옥하게 하는 비료를 개발하고 제공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직접 기부도 필요하지만 진정한 자선사업은 빈자와 부자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란 뜻에서이다.
  
  빈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만들어 주는 게 더 좋다는 것이다. 록펠러재단이나 뒤를 이은 많은 자선단체들이 직접 지원보다 교육 사업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록펠러 방식은 실천하기 어려운 길이다. 돈을 그냥 쾌척하는 것과 달리 기업을 경영하듯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방식은 지원받는 단체들로부터 썩 좋은 소리를 듣기도 어렵다. 돈 많은 사람이 짜게 군다는 비난이 나오기도 쉽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돕는 길이라는 것이 록펠러의 기부철학이다. 그의 인생 전반부는 악명 높은 기업인이었으나 그 후반부는 위대한 기부자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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