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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논쟁, '같은 통계'에 '다른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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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경기논쟁, '같은 통계'에 '다른 해석'

[이봉현의 경제스케치] 我田引水보다 易地思之를

이런 통계가 있다.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78년 1만8989달러에서 1999년에는 3만2439달러로 증가했다. 반면 시간당 소득은 같은 기간에 8.28달러에서 7.86달러로 오히려 낮아졌다. 현재 상황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1인당 소득 증가를 놓고 "번영이 계속되고 있다"고 풀이했다. 반면 비판적인 사람들은 "20년 동안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이런 두 가지 통계가 동시에 나올 수 있는 것은 맞벌이 가정의 증가 등으로 미국경제의 고용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통계가 스스로 말하지는 않는다
  
  <통계라는 이름의 거짓말>을 쓴 조엘 베스트 교수는 "통계가 스스로 말하지는 않는다"는 금언의 예로 위와 같은 통계를 인용했다. 통계가 '거짓말' 및 '새빨간 거짓말'과 함께 3대 거짓말에 속한다는 독설도 있지만, 우리가 자주 맞닥뜨리는 고민은 통계 작성의 오류나 조작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통계의 어느 부분에 주목해야 하고 통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를 놓고 빚어지는 '불화'다. "통계로 무엇이든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것도 증명할 수 없다"는 말이나 "통계는 법정의 증인과 같아서 피고를 위해서도 원고를 위해서도 부를 수 있다"는 말은 활용의 의도에 따라 통계의 의미가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올해 봄부터 불이 붙은 뒤 사그러들 줄 모르는 경기논쟁도 결국 통계로 잡힌 같은 숫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놓고 다투는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빠르게 확장하던 경기가 올해 봄부터 주춤하자 민간연구소와 언론들은 "활짝 피기도 전에 시드는 신호"라고 우려했고. 정부는 소프트 패치(경기상승 국면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정체기)일 뿐이라고 했다. 소프트 패치라는 말에는 경기가 곧 정상적인 상승궤도로 복귀할 것이란 희망이 담겨 있다. 한쪽에서는 "컵에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고, 다른 쪽은 "반이나 남았다"고 말하는 양상이다.
  
  특히 최근에 나오는 경기지표들이 연이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하반기에 경기가 본격적으로 꺾이는 신호탄 아니냐"는 비관론이 차츰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일부 언론은 "정부 혼자 안이하게 경기를 낙관하고 있다"고 힐난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통계청의 6월 산업활동 동향, 한은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기업경기 실사지수를 비롯한 각종 심리지수, 자동차 내수판매 등의 지표를 보면 그런 우려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그간 정부와 의견을 같이 해 왔던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지난 주말 "유가불안이 지속되는 데에다 미국 경기의 둔화조짐이 나타나고 있어 경기상승 속도가 둔화되는 추이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경기에 대한 정부와 한은의 진단
  
  하지만 정부 당국은 일관되게 경기가 일시적인 조정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권오규 부총리는 지난주 정례 브리핑에서 "상반기 중 우리 경제는 작년 초의 저점에서 벗어나 지난해 하반기 이후 비교적 빠르게 회복되면서 점차 잠재 수준의 성장세로 수렴되는 국면"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대외여건의 악화, 경기 부진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물가안정 속에 전년동기 대비 5.7%의 견조한 성장세를 나타냈다"고 밝혔다.
  
  한은은 최근의 부진한 경기지표가 실제 상황을 반영하는지 의문스러워 하고 있다. 경기선행지수(전년동월비)가 5개월째 하락해 경기하강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일부 심리지수가 혼선을 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해석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은은 올해 2분기 성장률이 예상에 못 미쳤지만 이는 재정의 균형지출로 2분기 공공부문 건설투자가 부진했기 때문일 뿐이라면서 소비, 설비투자, 수출 모두 건실하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반기 건설투자가 집행되면 경기가 상승탄력을 받을 것이란 얘기다. 굿모닝신한증권 이성권 이코노미스트는 "경기가 국면 상으로는 확장이지만 내용 상으로는 위축되는 상황일 때는 보는 각도에 따라 판단이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모든 통계는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특히 그 해석에는 해석하는 이의 주관과 편향이 섞일 수밖에 없다. 이는 통계가 돈이 되기도 하고 권력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몇몇 경제지표를 놓고 '경제가 망가지고 있다'고 언론들이 보도하니까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까지 나서서 민생회복에 '올인'하겠다고 한다. 당연한 순서로, 투자의 주체인 기업의 기를 살리자는 목소리도 커진다. 재벌기업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출자총액제한제도의 폐지 또는 보완, 투자관련 규제완화도 한층 속도를 낼 채비를 하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런 상황은 경기에 관련된 통계를 그동안 줄기차게 비관적으로 해석해 온 쪽이 원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면 당국도 나름대로 버텨야 할 이유가 있다. 정부가 지표를 줄기차게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이면에는 경기나 나쁘다는 말에 밀려서 결국 현 정부가 그동안 금과옥조처럼 내세워 온 '인위적인 부양책을 쓰지 않겠다'는 원칙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것 같다. 한은의 경우는 8월 이후 콜 금리를 한두 차례 더 올려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한 금리 정상화의 과정을 완결하고 싶은데 경제지표가 도와주지 않아 불만이다. 이와 관련해 한은은 국내 물가가 올해 들어 내내 관리범위의 하단에서 머물러 왔고 7월 물가 역시 안정됐음에도 "그래도 숨어 있는 물가불안이 적지 않다"는 말을 자꾸 반복하고 있다.
  
  통계의 해석도 역지사지하는 태도로
  
  이번 주에는 국내외에서 경기 및 향후 금리정책 조정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일정이 예정돼 있다. 미국 연준이 8일 열리는 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를 동결함으로써 지난 2년 간 이어 온 금리인상 행진을 마감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과 7월 고용동향에 관한 통계가 경기하강 추세를 보여주자 월가는 추가적인 금리인상의 중단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한은이 10일 금통위를 열어 콜금리 조정 여부를 결정하고, 재경부는 10일 민간 경제연구소 소장들과 만나 거시경제에 대한 시각을 교환하고 점검하는 회의를 가질 예정이다.
  
  모두 통계에 근거를 두지 않고는 한 발도 움직일 수 없는 일들이다. 나온 통계 숫자를 놓고 토론을 벌여 가장 합당한 판단과 행동방침을 정한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통계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든 민간의 경제전문가든 상대방이 통계에 대한 어떤 해석을 내놓으면, 그는 왜 그렇게 보는지에 대해 '역지사지'하는 태도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접점 없이 평행선만 달리는 경기논쟁은 안 그래도 무더위로 고생하는 국민들의 피로감만 가중시킬 테니까. (bonghyun.lee@reut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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