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2차 협상을 앞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먼 나라의 대선 결과와 향후 정국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번 멕시코 대선은 '지난 12년 간 이어진 멕시코와 미국의 결혼생활', 즉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해 멕시코 국민들이 어떤 심판을 내리는가를 보여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승리한 국민행동당의 펠리페 칼데론 후보는 그동안 "자유무역의 원칙을 더 강화해 멕시코의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며 "지금의 나프타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나프타를 '업그레이드'하겠다"고 말해왔다.
0.57%포인트라는 근소한 차이로 고배를 마신 민주혁명당의 로페즈 오브라도르 후보는 그동안 "미국과 나프타를 체결한 후 멕시코의 농촌경제가 피폐해졌다"며 핵심 공약으로 '나프타 재협상'을 내걸었다. 오브라도르 후보는 특히 멕시코의 주곡인 옥수수와 콩에 대한 나프타의 규정을 전면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나프타의 원칙
우리나라의 시민사회단체들, 특히 농민단체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현재로서는 한미 FTA가 발효했을 때 농업부문의 피해가 확실하다. 이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분명하다. 국가경제 전체의 발전을 위해 농업부문의 희생은 불가피하며, 더 나아가 세계화 시대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농업부문도 한미 FTA라는 외부충격을 통해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우리 국민들도 상당한 공감을 표시하는 분위기다.
'농업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말로 정리될 수 있는 이같은 정부의 입장은 사실 농업정책에 대한 정부의 역할에 대한 고전적인 입장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식량이 국민의 생존과 국가의 존립에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국내의 농업부문을 일정 정도 보호해 자국의 식량안보를 지키려고 해왔다. 따라서 농업부문의 정책만큼은 다른 산업분야와 다르게 취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자유무역협정(FTA)은 농업 역시 다른 산업과 동일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새로운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즉 공장식 대규모 농장, 포장·가공 공장을 건설해 '규모의 효율성(economy of scale)'을 제고하며, 국가의 공급조절 기능을 없애고, 국내의 수요량과 상관없이 곡물 생산량을 최대화하고, 이렇게 생산된 과잉식량을 수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 속에서 우선시되는 것은 국내 수요의 충족과 식량안보의 확보가 아니라 해외시장을 확장하고 수출을 늘리는 것이다.
'과잉생산과 덤핑'의 악순환
그러나 이런 논리를 내세우며 미국과 FTA를 체결한 멕시코에서 나타난 것은 내세운 논리를 입증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도 아니었다. 나프타가 발효한지 12년이 지난 현재 멕시코의 식량경제는 상당 부분 미국에 잠식당한 상태다. 미국으로 농산물 수출이 늘어난 것도 아니다. 게다가 멕시코의 음식값은 일본 도쿄보다 높다는 서울의 음식값과 비슷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그 비밀은 '과잉생산과 덤핑의 악순환'에 있다. 카길 등 미국계 초국적 곡물 유통업체들은 멕시코의 추수기에 저장해놓은 멕시코산 곡물을 미국의 추수기에 맞춰 미국으로 수출한다. 이때 미국의 농민들이 내다파는 미국 내 농산물의 가격은 형편없이 낮아지지만 미국 정부가 엄청난 보조금으로 보상해 주기 때문에 미국 농민들은 대량생산을 계속할 수 있다.
이렇게 대량 생산된 곡물은 다시 곡물 유통업자들에게 싼 가격에 팔려 나간다. 미국에서 과잉생산된 곡물은 유통업자들의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가 이번에는 멕시코의 추수기에 맞춰 멕시코로 싼 값에 수출된다. 그러면 미국 농민들과 달리 정부 보조금을 받지 못하는 멕시코 농민들은 덤핑되는 미국산 농산물과의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결국 땅에서 쫓겨나야 한다.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미국계 초국적 농산기업들이다.
고전적인 자유무역 이론은 자유무역으로 일부 농민들은 손해를 보게 될지 모르지만 경제 전체는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소비자들에게 제공되는 식량의 소매가격이 낮아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멕시코에서는 농민들에게 제공되는 옥수수의 가격이 70%나 떨어졌는데도 멕시코의 주식인 옥수수 또르띠야의 가격은 오히려 50% 이상 상승했다. 옥수수의 유통을 독점한 미국계 초국적 유통업자들이 담합해 가격을 올린 탓이다.
멕시코의 오염된 농산물로 미국 시민들도 고통받아
또한 나프타는 미국의 초국적 농산기업들이 멕시코로 생산·유통 기지를 이전하도록 하는 유인(incentive)을 준다. 나프타는 이런 기업들에 대해 멕시코의 값싼 땅에 곡물을 처리하는 공장과 유통시설을 짓고,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고, 미국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독성 제초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면서도 이들 기업의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성은 전처럼 높은 수준으로 보장된다.
이에 따라 멕시코 국민들은 물론이고 미국 국민들 역시 전보다 더 건강에 위험한 농산물을 먹게 됐다. 1998년 미국 미시간 주의 중등학교들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오염된 멕시코산 딸기로 인해 간염에 걸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2001년에는 2명의 미국인이 멕시코산 멜론에 들어있던 살모넬라 균에 감염돼 죽었다. 2004년에는 멕시코산 파로 인해 약 100여 명의 미국인들이 간염에 걸렸다.
멕시코의 생물다양성(biodiversity) 역시 위협받고 있다. 멕시코 농민들은 지난 5천 년 동안 41종의 옥수수를 재배해왔다. 하지만 나프타가 발효된 후 이제 멕시코에서는 미국의 곡물회사가 원하는 옥수수 2~3종만 재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농산기업들이 멕시코 정부에 로비를 한 결과 유전자 조작(GM)을 금지했던 멕시코의 규제가 폐지됐다. 덕분에 이제는 멕시코 슈퍼마켓에서도 '유기농(Organic)' 마크를 붙인 농산물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80년간 유지되던 헌법 조항마저 수정시킨 미국의 '선결조건'
멕시코에서 사라진 것은 정부의 독립적인 농업정책, 식량주권, 식량안전만이 아니다. 1917년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토지재분배 조항인 '헌법 27조'가 나프타를 계기로 상당 부분 수정됐다. 미국 정부가 나프타 체결을 위해 이 조항의 수정을 '선결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 법은 대지주들이 독식했던 땅을 국가소유로 전환하고 그 땅을 잘게 쪼개고 경작권을 소작인들과 토착 지역사회에 고루 분배해주는 것이었다. 이른바 '에히도'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극도의 양극화가 진행된 지난 80년 간을 견디며 멕시코의 농민들과 극빈층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나프타를 계기로 이 시스템이 일시에 사라지면서 카길 등 미국계 초국적 농산기업들은 멕시코에서 대단위 공장식 농장을 지을 수 있었다. 반면 땅에 대한 경작권을 소유하고 있던 농민들은 미국 농산기업들의 임시직 노동자로 전락했다. 이런 비정규직 고용의 기회조차 잡지 못한 농민 1500만 명은 길거리로 내밀렸다. 이는 멕시코인 6명당 1명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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