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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개혁욕구'와 '김현종의 야망'이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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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개혁욕구'와 '김현종의 야망'이 만났을 때

[한미FTA 뜯어보기 26] '평화의 동북아' 꿈을 날려버린 한미 FTA

17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정부 대표단과 미국정부 대표단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2차 사전협상을 시작했다. 때맞춰 그동안 한미 FTA의 문제점을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해 온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 비서관이 〈프레시안〉에 글을 보내왔다.

정태인 전 비서관은 이 글에서 한미 FTA는 노무현 대통령의 '끝없는 개혁 욕구'와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동시다발적 FTA 체결' 야망이 만난 합작품이라고 정의한 후 이 위험천만한 합작품이 '평화를 향한 동북아시아의 꿈'을 깨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전 비서관은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협상이 이미 시작된 상황이니 한미 FTA를 '미국형 FTA'가 아니라 '중간 수준의 FTA'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한국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에 미치는 한미 FTA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정 전 비서관은 "동북아시아의 꿈은 아직 살아 있다"면서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을 내비치며 이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의 FTA 협상 속도는 늦추는 대신 일본, 중국, 러시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등과의 경제협력 협상은 서둘러,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나라가 숨쉴 공간을 넓혀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4월 18일 발간되는 〈시사저널〉 861호(4월 25일자)에도 동시에 게재된다. 〈편집자 주〉

欲識他年分鼎處
先生笑指畵圖中.

뒷날 천하삼분이 된 것을 알려거든
선생이 웃으며 가리킨 지도를 보게.

〈삼국지 4〉(나관중 지음, 황석영 옮김)

***'마지막 한 표'를 버리다**

분명 한미 FTA 뿐만은 아니다. 동북아의 꿈을 더 직접적으로 깨뜨린 것은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이다. 2005년 11월 17일의 '경주 공동선언'은 이 두 가지의 줄기다. 누구에게나 인생을 죄우하는 어떤 결정적인 기간이 있듯이 참여정부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작년 9월부터 11월까지인 듯하다.

2005년의 '9.19 베이징 공동성명'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가능성의 일단락이었다. 무엇보다도 동북아 6개국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넘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전역의 평화와 안정'을 제시함으로써 동북아 다자간 안보 틀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 다자간 안보 틀은 참여정부가 애초에 추구했던 동북아 구상의 기초조건, 즉 상호이해와 조정의 장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는 강대국 간의 소리 없는 전장으로 급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한국의 동북아 구상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이해조정자(coordinator)', 나아가 '균형자'로 다소 강하게 표현되기도 했던 '마지막 한 표를 쥔 자(casting voter)'로 남아 있을 때, 아니 그러한 역할을 의식적으로 추구할 때 실현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한국은 '마지막 한 표'를 스스럼없이 내던지고 조정자의 역할을 포기하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흥미롭게도 당시 주 러시아 미국 대사로서 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뒤이은 시장경제로의 깜짝 전환 쇼가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를 충분히 관찰했던 로버트 졸릭 미 국무부 부장관이 고비마다 출연했다.

***부처님 손 안에서 논 손오공**

졸릭은 지난해 9월 흥미로운 이론을 내놓았다. 이른바 '이익상관자론'이다. 얘기인즉, 중국은 미국 주도의 세계 체제에 순응하는 한도 내에서만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감히 '화평굴기'(和平掘起, 2003년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이 미국의 '중국위협론'을 완화시키기 위해 채택한 외교노선으로 '평화적으로 일어선다'는 뜻-편집자 주)라니, 계속 미국의 품 속에서 '도광양회'(韜光養晦, 1980년대 덩샤오핑이 추진한 외교전략으로 '칼집에 칼날의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는 뜻-편집자 주)'나 하라는 말로 들린다.

'거대경제권과의 동시다발적 FTA 체결'이라는 로드맵을 실현하기 위해 더 이상 부지런할 수는 없겠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미국을 누비고 다니던 김현종을 만났을 때 졸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동북아에서 미국 주도의 세계 체제에 중국을 순응하게 만들 대리인,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 손오공이 거기 있었다.

무역대표부(USTR)의 로버트 포트먼은 보다 구체적으로 '당신의 능력을 보여달라'며 4가지 골칫거리들, 즉 스크린쿼터의 축소, 의약품 가격의 재조정 금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금수조치 해제, 배기가스 관련 규제의 완화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부시가 2006년 2월 3일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새롭게 단장한 국방전략을 내놓은 그 날, 오비이락일까 김현종 한국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 의회에서 한미 FTA 협상을 개시한다고 선언했다. 김종훈 한미 FTA 수석대표가 "한미 FTA는 한미 간 상호방위 조약에 뒤이은 경제동맹"이라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내친 김에 그는 "중국·일본에 앞서 미국과 거래를 탄탄하게 해놓는 것이 동북아에서 한층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라며 한 발 더 나간다.

언제나 솔직한 부시는 "한국과의 FTA는 미국의 아시아 개입을 증대시킬 것"이라며 기꺼움을 감추지 않았다. 결국 '한국의 주도'란 더욱 증대된 미국의 아시아 개입, 좁게는 중국에 대한 관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2005년 '포괄적·호혜적·역동적 동반자'를 내세웠던 경주 공동선언이 다음해 1~2월 전략적 유연성과 한미 FTA 협상의 개시 선언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한국은 '마지막 한 표'를 버리는 것을 통해 그 넓게 열려 있던 동북아의 꿈을 버리고 한쪽 편 현실에 발을 깊숙이 들이민 것이다.

***"외부 쇼크에 의한 개혁"**

투자, 서비스, 지적재산권이 일반 상품보다 더 중요한 교역대상이 된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후 FTA는 더 이상 국경에서의 관세 철폐에 관한 논의가 아니게 됐다. FTA는 두 나라의 국경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경제·사회 체제를 송두리째 바꿔놓는 것이다. 강한 나라의 제도가 상대방 나라의 내부를 뒤흔들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미국형 FTA는 말 그대로 '외부쇼크'다.

김현종 본부장은 너무나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미 통용되지 않는 일본식 경제성장 모델에서 벗어나 (…) 미국과의 FTA를 통해 (…) 한층 업그레이드된 한국경제를 달성하자는 것이 한미 FTA를 추진하는 핵심입니다." 그 바쁜 와중에 일본식 경제모델은 언제 공부했을까.

유럽형 경제체제를 선호하고 유럽연합(EU)형 공동체를 꿈꿨던 노무현 대통령이 왜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대변신을 했을까. 그 누구도 노 대통령의 개혁 성향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노 대통령은 아래로부터의 개혁 욕구로 당선된 대통령이다. 당연히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대타협이 노 대통령의 초기 개혁노선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난 2년 간 계속됐던, 보수언론과 재벌 등 기득권 세력과의 지리한 싸움에 지친 노 대통령은 지난 여름에 갑자기 '대연정'을 들고 나왔다. 아직은 유럽에 미련을 둔 것이었던 것일까. '상하 간 사회적 타협'의 전통에서 나온 '옆으로의 타협' 방안이 언제나 대선 국면인 한국에서 통할 리가 없었다. 위·아래도 해도 안 되고, 옆으로 해도 안 되니 이제 바깥을 생각할 수밖에….

지치고 지친 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코스타리카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손오공이 '4가지 선결조건'이 주렁주렁 매달린 선물 보따리를 들고 나타났다. 그 선물 보따리는 사실 '판도라의 상자'였는데도 어떻게든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노 대통령 눈에는 여의봉으로 보였다. 개혁을 위한 '외부쇼크'를 발견한 것이다. 김현종의 전략 없는 FTA 로드맵과 노무현 대통령의 끝없는 개혁욕구가 만난 순간이었다.

노 대통령에게는 4대 선결조건과 맞바꿈직한 다른 어떤 것도 없었다. 내부개혁이 바로 그 대가로 보였기 때문이다. 외교안보적 고려조차 없었다. 노 대통령은 미국의 대 아시아 전략을 내부 개혁의 프리즘으로 바라봤을 뿐이다. 그 결과 동북아의 꿈은 저 멀리 건너가고 있다.

***날개를 접을 것인가**

이미 우리 국민은 준비 없이 맞은 외부쇼크가 어떤 충격을 주는지 충분히 경험했다. 그러나 한미 FTA가 우리 내부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는 다음으로 미루자. 여기서는 현재의 상태에서 동북아 공동체의 꿈이 영영 사라졌는지, 아니면 솟아날 구멍이 있는지만 얘기하고 마치자.

현재 미국의 전략은 유럽 공동체가 형성될 때의 전략과 사뭇 다르다. 미국은 당시의 냉전 구도에서 소련을 견제할 세력으로서의 유럽 통합, 언제 호전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독일을 아예 그 안에 품어버리는 존재로서의 유럽 통합을 지지했다. 그런 조건 하에서 서유럽 국가들은 유럽 공동체의 꿈을 자유롭게 이뤄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소련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틀림없이 미국을 위협할 중국이 존재할 뿐이다. 미국은 유럽처럼 별개의 존재로서 아시아를 방치할 이유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택할 수 있는 길을 무엇일까. 현재처럼 졸속으로 미국과 FTA를 맺는 것이 최선의 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최근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찰머스 존슨이 잇따라 지적했듯이 우리가 새로 갈아탄 길은 대단히 위험하고 목적지 역시 허점투성이다. 로버트 라이시의 통렬한 지적처럼 그곳에는 양극화와 공공성의 파괴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갈 길은 여전히 '마지막 한 표'를 쥐고 동북아의 새로운 경제·사회 모델, 그리고 장차 세계의 모델이 될 공동체적 민주주의를 찾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느 한 쪽 편에 서면 안 되며 한미 FTA가 미국형 FTA의 금과옥조가 돼서는 더더욱 안 된다.

***중간 수준의 FTA로 가자**

그렇다고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어 담을 수도 없다. 현재 가능한 한 가지 방법은 가능한 외부 충격을 줄일 수 있는 중간 수준의 FTA로 가는 것이며, 그것이 실제로 달성 가능한 수준일 것이다. 미국을 외면할 수 없지만 중국, 일본과의 협력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큰 손해를 입는다.

중국이나 일본과의 FTA 논의를 한층 진전시켜야 한다. 중국과의 민간연구를 산·관·학 합동연구로 격상시키고 일본과의 FTA를 재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의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CEPA) 역시 발전시켜야 한다. 동남아시아연합(ASEAN)과의 FTA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로서는 중국과 미국 사이의 중간지대가 넓으면 넓을수록 숨쉴 공간이 커진다.

한국, 미국, 일본의 관계가 밀착됨에 따라 '도광양회'의 중국도 러시아, 북한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한-중-일'의 남방 삼각형과 '북-중-러'의 북방 삼각형의 대립으로 치닫게 되면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 과거 냉전의 최전방에서 대립하던 남·북한이 이번에는 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열강의 대립을 대신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모든 나라들과 같이 할 수 있는 모든 경제협력 사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 중국, 러시아가 최근 설치하기로 한 훈춘·하산 지역의 경제자유지대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이곳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북방의 전략적 요충지다. 고려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이곳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 철도(TKR)의 연결지점일 뿐 아니라 장차 북한의 나선 지역을 발전시킬 교두보 역할을 할 곳이다.

우리가 갈 길이 그려져 있는 지도에는 한미 FTA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목표지점들이 그려져 있다. 동북아의 꿈은 아직 살아 있다. 정부가 미국의 일정에 발맞춰 억지로 한미 FTA를 추진하지 않는 한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 정부에 꼭 필요한 '안티고네'의 경구와 이탈리아의 속담을 선사한다.

천천히 서두르라 (Festina lente).

천천히 가는 사람은 실수 없이 간다; 실수 없이 가는 사람은 멀리 간다 (Chi va piano, va sano; chi va sano va lont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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