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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협회를 15년 전으로 되돌린 '낙하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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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무역협회를 15년 전으로 되돌린 '낙하산 회장'

〈기자의 눈〉 청와대의 정치적 개입설 분분

한국무역협회장에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 장관이 20일 열린 긴급 회장단 회의에서 차기 회장 후보로 단독 추대됐다. 협회의 관례대로라면 22일 정기총회에서 형식적인 승인을 거쳐 그가 신임 회장(26대)으로 확정된다.

***무협 회장 단독추대 관행에 중소회원사들 반기**

그러나 무역협회 회원사의 90%를 차지하는 중소 무역업체들을 대변한다는 '한국무역인포럼'이 20일 저녁 긴급 운영위원회를 열고 김연호 동미레포츠 회장(74)을 차기 무역협회 회장 후보로 추대하고, 경선으로 회장을 뽑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또한 정치권에서도 한나라당이 이 전 장관 추대에 대해 즉각 "낙하산 인사의 결정판"이라며 "당장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등 전례 없는 반발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무협 정관에 따르면 6만5000여 회원사 중 2000명 이상의 회원이 출석한 가운데 출석회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총회 안건이 의결된다. 과거에는 총회가 형식적이었기 때문에 실제 참석하는 회원 수가 매우 적었고, 안건 통과에 필요한 수의 위임장을 회원사들로부터 받는 방식으로 총회 안건이 처리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협 사상 처음으로 회장 선출이 경선의 방식을 띠게 됨으로써 위임장 대결 양상이 빚어지고 있다. 무역협회 관계자는 "총회 안건 통과를 위해 위임장을 모집하고 있으며, 이희범 전 장관이 쉽게 경선에서 이길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한국무역인포럼의 회원사 수는 아직 200여 개에 불과해 위임장 모집경쟁에서 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파장은 무시 못할 전망이다.

한국무역인포럼은 차기 무협 회장 선출 문제를 계기로 결성된 무협 내부의 별도 모임이다. 포럼 측은 "그동안 무협은 중소 무역업체와 제조업체들의 해외시장 개척과 현업에서의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데 인색한 반면 외형적인 자산 확대와 수익 극대화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곽재영 한국무역인포럼 대표는 "무역협회는 무역인들의 것이고, 관료 출신이 낙하산 식으로 회장으로 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현 회장단을 성토했다. 한국무역인포럼이 무협 회장 후보로 추대한 김연호 동미레포츠 회장은 국제종합상사를 상무로 퇴직한 뒤 스포츠용품을 제조, 수출하는 한 중소기업을 이끌고 있는 무역인이다. 그는 "무협 회장 선출도 이제는 민주적으로 바뀌어야 할 때"라고 경선에 임하는 각오를 밝혔다.

무역협회는 전체 회원 수가 6만여 명에 이르며 회원업체들은 매년 회사 규모에 관계없이 15만 원의 회비를 납부하고 있는데, 중소 회원들에 대한 홀대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 한국무역인포럼의 주장이다.

***한나라당 "순수 민간단체에도 낙하산 인사냐"**

공직자 인사의 문제도 아닌데 한나라당이 나선 것도 이례적이다. 김태환 한나라당 사무부총장은 21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정부 산하기관도 기업경영인 출신들을 공모하는 마당에 정부 지원이 없는 순수 민간단체인 무역협회에 산자부 장관 출신을 밀어붙인 것은 시대역행"이라고 비난했다.

김 부총장은 "무역협회는 업무총괄 상근부회장이 중소기업청장 출신이고 전무이사는 산자부 감사관 출신이니 이제 무협 내 '빅3'가 모두 낙하산 인사가 되는 셈"이라며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이 반영된 무원칙 인사의 전형"이라고 성토했다.

청와대는 공식적으로는 '청와대 내정설'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무역협회 관계자들조차 "정부가 사실상의 인사권을 행사했다"는 지적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실제로 7년만에 물러나는 김재철 회장은 몇 개월 전부터 "차기 회장은 회장단에서 나올 것이며 현 부회장들 가운데 능력과 경륜을 갖춘 분이 많다"며 무협 내부에서 차기 회장이 선출되는 것이 순리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 출신이 단독 추대된 배경에 대해 무역협회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특정 인물을 회장으로 내정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데, 업체 경영자들로 구성된 회장단에서 감히 나설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관료 출신이 무협 회장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5년 간은 업계 출신들이 회장을 맡았지만, 1991년까지는 남덕우 전 경제부총리 등 관리 출신들이 회장을 지냈다.

이처럼 15년만에 다시 관료 출신의 낙하산 회장 인사가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의 차기 회장 선출을 둘러싸고 전례 없는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무역협회는 정부로부터 한 푼의 예산도 지원받지 않는 대표적인 순수 민간 경제단체이고, 이희범 씨는 무역협회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산업자원부 장관에서 물러난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은 현 정부의 장관 출신이라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무협이 이제는 수출 주도 개발시대의 첨병도 아니고 독립적인 민간단체로 자리 잡은 지도 오래인데 현 정부의 산자부 장관이 퇴임하자마자 회장으로 온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다.

게다가 이희범 씨는 산자부 장관에서 물러난 직후 교육부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한 현 정부의 실세라는 점에서 그가 돌연 무역협회장에 추대된 배경이 석연치 않다. 정치권과 관가에서는 여권이 5.31 지방선거 출마자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김진표 교육부총리의 차출이 무산되면서 그가 갈 자리가 없어지자 청와대가 궁여지책으로 무역협회장을 맡게 한 것이라는 해석이 무성하다.

일각에서는 어려워진 수출환경을 감안해 정부와의 업무협조가 절실하다는 점에서 산자부 장관 출신이 협회장을 맡는 것이 나쁠 것 없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그러나 현재 무협의 2인자 격인 상근부회장 자리에 중기청장까지 지낸 이석영 전 산자부 차관보가 앉아 있고, 전무도 한영수 전 산자부 감사관이 맡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회장까지 산자부 장관 출신이 들어앉는 것이 정부와의 업무협조 개선에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의문시된다.

협회 일각에서는 이희범 전 장관 카드에 대해 "'자정 능력'을 상실한 무역협회를 환골탈태시키기 위해 현 정부의 실세가 회장을 맡아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는 '구원투수론'을 제기하도 한다.

무역협회가 이익단체이면서도 어느 정도 공익성을 무시할 수 있는 3대 경제단체의 하나라는 점에서 이같은 지적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규모 민간 경제단체인 무협의 회장을 포함한 '빅3'가 모두 산자부 출신으로 채워져야 할 필연성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수익사업의 단맛에 취한 무협**

다른 한편에서는 수익사업의 단맛에 물든 무역협회의 운영방식이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무역협회는 부동산 임대업 등 수익사업에 몰두하면서 현재 자산만 1조 원이 넘고 연간 2000억 원의 예산을 집행하는 거대 민간단체로 성장했다. 공시지가가 평당 3000만 원인 서울 삼성동 일대 노른자위 땅에 연면적 35만 평대의 건물을 보유하고 있고, 부산·광주·창원 등 국내뿐 아니라 미국 워싱턴에도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면서 매년 500억 원씩 수익을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김재철 회장의 재임기간 동안 무역협회가 수출업체들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노력보다는 하나의 기업처럼 수익 내기에 몰두해 왔기 때문에 내부 분열과 부패 등으로 외부의 입김에 더 취약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무협은 김재철 회장 임기 말기에 부동산 임대 사업과 관련된 각종 부패사건들이 검찰에 적발되면서 '복마전'이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급기야 차기 회장 선출을 앞두고 200여 개의 중소업체 회원들이 '한국무역인포럼'이라는 별도의 모임을 결성해 조직적으로 반발하는 사태까지 빚어진 것이다.

차기 회장을 선출하는 총회를 앞두고 있는 무역협회가 '주인 없는 황금알 기업'이자 '퇴직 관료의 보금자리'로 전락했다고 보는 따가운 외부의 시선을 극복해내고 내부 분열을 해소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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