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말이면 4년 임기를 마치는 박승 한국은행 총재만큼 부동산과 인연이 많았던 공직자도 드물 것이다. 그는 6공화국 초 청와대 경제수석과 건설부 장관을 맡아 주택 200만 가구 건설의 밑그림을 그렸다. 3저(低) 호황이 집값 폭등으로 이어지자 정부는 서둘러 분당ㆍ평촌ㆍ중동ㆍ산본 신도시계획을 마련했는데, 한강 이북에도 신도시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 따라 일산이 포함됐다. 5개 신도시 건설이 동시에 진행돼 건자재 파동이 일어나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으나, 1990년대에 수도권 집값이 안정세를 유지한 것은 이런 주택공급 물량 증가에 크게 힘입었다.
***박 총재와 부동산의 인연**
한은 총재로 공직에 복귀한 뒤에도 부동산과의 인연은 계속된다. 2002년 3월 취임 직후 기자실을 찾은 박 총재는 둘러앉은 기자들에게 자산운용의 흐름에 대해 한 마디 조언했다. "여러분, 앞으로는 주식의 시대가 될 겁니다. 부동산의 시대는 끝났어요. 앞으로는 절대로 부동산으로 돈을 벌지 못할 겁니다." 선진국일수록 개인의 금융자산 비중이 높아지는데, 우리도 부동산 대신 주식이 각광을 받으리란 예측이었다. 실제로 2~3년 뒤 적립식 펀드 열풍이 분 데 이어 최근 한국 주가에 대한 리레이팅(재평가) 얘기가 나오는 것을 볼 때 그에게 혜안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박 총재의 예언대로 부동산의 시대가 가지는 않았다.
박 총재가 취임하기 반년쯤 전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부동산 가격은 아직도 그 불길이 완전히 잡히지 않았다. 가격 평가에 신중한 편인 국민은행의 통계를 보더라도 서울의 아파트 매매가격은 박 총재의 취임 이후 지금까지 36.5%(전국 28,1%) 올랐다. 2002년 한 해에 30.8%(22.8%) 올랐고 이듬해인 2003년에 10.2%(9.6%) 올랐다. '10.29 대책'으로 2004년에 1% 내리며 숨을 돌린 아파트 가격은 2005년 들어 다시 9.1%(5.9%)의 가파른 상승세로 돌아섰고, 올 1월에도 전월대비 0.9%(0.5%) 올랐다. 아파트 가격이 '8.31 대책' 이전 수준을 회복하고도 더 오를 기미를 보이자 정부가 강남 재건축 규제를 중심으로 한 후속대책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임기 중 경기 고려해 저금리 정책에 치중**
부동산에 대한 박 총재의 예측이 빗나간 것은 한은 스스로 시행한 통화정책과도 적지않은 연관이 있다. 박 총재는 취임한 지 두 달 만에 신용카드 빚이 바탕이 된 소비열기를 걱정하며 콜금리를 올렸으나, 이후 4차례에 걸쳐 콜 금리를 모두 1%p 내리는 저금리 정책으로 돌아섰고 임기 막바지까지 이를 고수해야 했다. 2003년부터 가계부채 문제가 터졌고, 여간해서 줄지 않던 민간소비가 뒷걸음치는 등 극심한 내수불황이 닥쳤기 때문이다. 물론 부동산 가격상승은 주택의 수요ㆍ공급, 교육정책, 투기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오락기계의 두더지처럼 대책을 비집고 나오는 상승세의 바탕에는 저금리 정책과 풍부한 단기 유동성이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금융연구원 박종규 선임연구위원은 "(그동안 한은이) 경기회복 때까지는 금리가 오르기 힘들 것이란 기대심리를 너무 많이 심어줬다"고 말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이 주택 구입을 위해 대출 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고, 은행이나 보험사도 주택담보 대출 경쟁에 나선 결과로 넘치게 된 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을 교란했다는 얘기다. 그는 "2002년과 2003년 초에 좀 더 공격적으로 통화를 흡수하는 노력이 아쉬웠다"고 덧붙였다. 올릴 때 올리지 못하니까 나중에는 부동산 거품이 터질 것을 걱정해야 했고 빚을 많이 진 서민들도 생각해야 했기에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박 총재는 부풀어오른 부동산 가격을 후임자인 벤 버냉키에게 물려주고 떠난 미국 연준(FRB)의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과 닮은 점이 많다. 그린스펀은 1990년대 말의 정보기술(IT) 열풍이 꺼지며 디플레이션 쇼크가 밀려오자 정책금리를 사상최저 수준인 연 1%까지 내리는 급진적인 완화정책으로 이를 극복했다. 하지만 '저금리- 부동산대출 갈아타기(리파이낸싱)- 소비증가'로 이어지는 일련의 위기극복 과정은 급격한 민간 부채증가 및 주택가격 거품과 동전의 앞뒷면 관계였다.
***작년 하반기부터 선제적 금리인상**
그렇다고 박 총재와 한은이 부동산에 대해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2002년 말에 부동산 가격이 너무 가파르게 오르자 재경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콜 금리를 올리려 했다. 부동산 가격에 다시 불이 붙은 지난해 여름에도 박 총재는 "한은법에 규정된 은행대출 직접규제 장치를 발동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하며 종합적인 대책 마련을 정부에 촉구하기도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작년 하반기부터 내수경기가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자 10월과 12월에 '선제적'으로 금리를 올린 것도 과잉 유동성 제거의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하지만 부동산은 몇 달 잠잠했다 다시 고질병처럼 고개를 들었고, 그때마다 "백약이 무효이니 금리를 올리는 게 가장 확실한 부동산 처방"이란 목소리가 나왔다. 이에 대해 박 총재는 "경제 전반에 영향을 주는 통화정책적 대응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밝혔다. 사실 통화정책이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자산가격 거품에 대응해야 하는지는 미국 같은 선진국 중앙은행들도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주제다. 금융연구원 하준경 연구위원은 "금리만 갖고 강남 등 문제가 되는 일부 지역의 집값을 잡기는 어렵다"며 "다만 집값이 미래 가격상승에 대한 기대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금리를 약간만 올리더라도 이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시그널 효과'를 낼 수는 있다"고 말했다.
***2~3월 금통위의 역할 주목**
박 총재는 올 신년사에서 "단기화돼있는 시중의 풍부한 유동성이 자산가격을 자극하거나 금융시장에 불안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밝혀 부동산 가격에 대한 경계를 주문했다. 최근 공개된 회의록을 보면 지난해 12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도 여러 위원들이 부동산 가격 재상승을 우려하고 있다. "8.31 부동산 대책이 예상대로 미약한 효과를 보이고 있어 투기자금의 비용을 높아지고 있고 투기를 억제할 필요가 여전히 존재한다"거나 "그 동안 지속해온 통화완화 정책이 과잉 유동성을 유발하고 자산가격 상승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면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등의 발언이 그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수를 중심으로 경기가 회복 사이클에 진입해 한은이 이번 주(9일)에 열리는 2월 금통위 또는 3월 회의에서 콜 금리를 한 차례 더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올 들어 가팔라진 환율 하락과 함께 수출 증가세가 둔화되는 조짐이 보이고 국제유가마저 고공행진을 하는 게 부담이다. 교보증권 공동락 책임연구원은 "한은은 부동산 문제에 대해 원초적인 부채의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며 "한은이 부동산 때문에 금리를 올린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부동산이 금리 인상을 재촉하는 촉매 역할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기 내내 경기부진과 싸워야 했던 박 총재에게 부동산 가격 상승은 원치 않는 부메랑이 되어 임기 막판에 고민을 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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