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원짜리 동전이 40년 만에 바뀐다고 한다. 원료인 구리와 아연의 가격이 올라 동전 액면가치의 4배나 돼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금이나 은 같은 실물로 만들어졌던 화폐가 가치는 없지만 지폐처럼 정부가 권위를 부여한 법화(法貨)로 바뀐 이래 화폐의 제조원가, 즉 실질가치는 늘 액면가치를 밑돌았다. 법화의 개념이 없었던 로마시대에도 네로 황제가 은화의 은 함량을 액면가치보다 적게 만들도록 했다는 것을 보면, 실질가치 이상의 액면가치로 화폐를 발행하게 하는 유혹이 그 뿌리가 깊음을 알 수 있다.
***달러의 신뢰도 상실이 낳는 파장**
지폐는 정부가 발행한 차용증서에 불과하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가치가 유지된다. 신뢰가 바로 실질가치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신뢰를 갉아먹어 위기에 몰리고 있는 화폐가 있다. 바로 기축통화라고 불리는 미국 달러다. 올 연초부터 원/달러 환율이 8년 만의 최저까지 떨어져 국내 수출기업과 중소기업들이 울상을 짓고, 당국이 연일 수억~수십억 달러를 들여 환율 방어에 나서는 '법석'을 떠는 것도 결국은 달러의 신뢰도 상실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이미 국내총생산(GDP)의 6%를 넘어섰다. 일란성 쌍둥이라 할 수 있는 재정적자와 합치면 국내총생산의 10%를 훌쩍 뛰어넘었지만, 줄어들기는커녕 해마다 불어나고만 있다. 경상적자가 GDP의 5%를 넘으면 외환위기가 온다는 게 동남아, 남미 같이 호되게 당해본 나라들의 경험칙이다. 쌍둥이 적자는 한마디로 실력보다 소비를 많이 했다는 얘기다. 저축률이 1%대로 역대 최저인 상태에서도 미국의 국민과 정부는 시간당 7000만 달러, 연간 6000억 달러를 빌려 레저용(RV) 승용차나 디지털TV를 장만하고 해외에서 전쟁을 벌이는 데 쓰고 있다.
이런 빚잔치가 가능한 것은 '달러의 리사이클링'이라 불리는 국제 자본흐름 덕분이다. 1990년대에는 강한 달러정책에 이끌려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간 민간자본이 미국의 경상적자를 보전해줬지만, 미국인들이 투자보다 소비에 정신이 팔려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진 2000년대에는 일본, 중국, 한국 등 아시아 국가 중앙은행들이 대신 미국 경상적자를 보전해주는 역할을 해 왔다. 이들 아시아 국가 중앙은행들이 대미 수출로 번 막대한 달러를 미국 국공채 같은 미국 자산에 투자한 것이다.
***미국의 빚잔치가 유지되는 구조**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이렇게 한 것은 자국 통화의 절상(달러가치 급락)을 막고 미국의 소비경제를 유지해 계속 수출증가세를 유지하자는 계산에서다. 아시아는 생산하고 미국은 아시아의 돈을 빌려 소비한다는 구조다. 미국은 좋게 말해 세계의 '성장엔진' 노릇을 하고 아시아는 달러 가치를 지탱해준다는 암묵적 균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공멸의 두려움이 이 균형을 유지해준다는 뜻에서 이를 '금융공포의 균형'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달러의 위기는 1971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달러의 금태환(요구가 있으면 금으로 바꿔주는 것) 정지를 선언했을 때부터 예정된 것이란 얘기가 설득력이 있다. 발권이 금 보유란 속박을 벗어나면서 '지폐의 시대'가 왔고, 국제교역의 불균형을 간단히 달러를 찍어 벌충하는 도덕적 해이가 도를 더해가며 미국의 경상적자가 부풀기 시작했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미국 정부는 인쇄라는 '굉장한 기술'을 갖고 있는데, 이 기술로 돈 들이지 않고도 원하는 대로 달러를 찍어낼 수 있다"고 비꼬았다.
리처드 던컨은 그의 책 〈달러의 위기-세계경제의 몰락〉에서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이후 30년 동안 미국에 3조 달러 이상의 누적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됐다"며 "미국의 부채 대부분이 상환될 수 없기 때문에 현재 (위기가) 터지기 직전"이라고 밝혔다. '카드(달러)로 지은 경제'는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위기의 뇌관은 아시아 등 경상수지 흑자국의 중앙은행들이 더 이상 미국 달러 자산을 사줄 수 없을 때 터지게 된다. 그래서 2조 달러 이상의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고 그 중 60~70%를 미국 단기 국채 등에 투자해 온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중앙은행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국제금융시장에서 주시되고 있다.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아시아 국가들**
가장 두려운 유령은 '외환 보유액 운용의 다변화'다. 지난 10일 중국의 후샤오렌 외환관리국장이 "외환의 자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외환투자 영역을 넓히겠다"고 한 것이 다변화를 암시한 것으로 해석돼 한바탕 시끄러웠다. LG경제연구원 신민영 연구위원은 이따금씩 나오는 중국의 외환운용 다변화 관련 발언에 대해 "미국의 위안화 절상압력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있는 것 같다"며 "하지만 무역구조를 고려할 때 달러를 벗어나 다른 데 투자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에는 한국은행이 외환보유 통화구성의 다변화를 언급했다가 한은발(發) 국제금융 쇼크를 일으킨 적도 있다.
중앙은행이 약해질 것이 뻔한 통화로 표시된 자산을 들고 있는 것은 일종의 국부유출이다. 달러 가치가 10% 하락하면 한국은 GDP의 3%, 싱가포르와 대만은 8%의 자본손실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외환보유액을 달러 위주에서 금이나 유로 등으로 다변화하고 싶지만 너도나도 그러면 달러가 붕괴되고 국부도 반토막난다는 점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금융 저널리스트 애디슨 위긴은 〈달러의 경제학(The Demise of the Dollar)〉에서 "미국 소비자들이 과소비에 중독돼 있듯이 (대미) 수출국들은 미국으로의 상품 수출에 중독돼있다"며 "구매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판매자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체제가 굴러갈 수는 없다는 데 고민이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현재 GDP의 6%인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8%에 이르면 달러에 대한 신뢰가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현재의 적자 규모로도 세계 잉여저축(경상흑자)의 80% 이상을 빨아들이고 있는데 이 비율이 8%를 넘어서면 세계의 잉여저축 전부를 자본수지 흑자로 흡수해야 보전이 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경상적자가 계속되면 2008년까지 필요한 해외자금 수요가 4조 달러에 이르고 2조4000억 달러인 아시아 중앙은행들의 외환보유액은 2배인 5조 달러가 돼야 한다는 계산이다. 실현가능하지 않은 현실이 불과 2~3년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 결과는 미국의 '외환위기'다. 자국 통화를 해외부채로 갖고 있는 미국의 외환위기는 미국 조폐창의 인쇄시설을 24시간 가동해 달러를 찍어서 해외 중앙은행에 진 빚을 갚는 상황을 말한다. 현재 미국이 갖고 있는 대외준비자산은 부채상환 요구에 단 10분도 버티지 못할 만큼 적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도 갖고 있지 못한 특권(시뇨리지: 지폐생산 비용과 액면가의 차이 만큼의 이익)을 누리는 것이지만, 세계경제는 실타래처럼 엉클어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증발된 통화량만큼 달러 가치는 수직 하락할 것이고, 미국이 해외자금을 끌어들이려면 미국 내 금리는 치솟게 된다. 이럴 경우 부동산 등 자산거품이 꺼지고 소비도 줄어들며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오게 된다는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이런 위기가 현실화될지, 아니면 국제적인 협조와 조정을 통해 해소될지는 누구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애디슨 위긴은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이 "느리게 성장하는 경제는 돈을 유출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는 돈을 유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가하게' 말하는 한 위기의 해소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아시아판 유로로 '아쿠(ACU: Asian Currency Unit)'를 내놓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기축통화로서 달러가 누려온 위상의 약화와 맞물려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기업이나 개인이나 수십 년 간 누적된 모순의 폭발로서 달러 가치가 붕괴할 위험을 먼 일로만 볼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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