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5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34장 박정희의 인연들
이재복의 심복이자 군사 연락책 김영식이 체포되었다. 육본 정보국은 한동안 매수해 전향시킨 그를 풀어놓았으나 이재복이 낌새를 알고 먼저 깊숙이 잠복해버렸다. 김영식을 풀어놓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순간, 정보국은 그를 영창에 집어넣어 매타작부터 시작했다. 그것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법이었다. 연일 죽을만치 두둘겨 맞는데, 그 사이 이가 부러지고 어깨가 탈골되었다. 그 결과 이재복의 행선지를 알아내는 데는 이틀이 가지 않았다.
이재복은 1948년 12월 18일 서울 신당동산 377번지 골방에서 체포되었다. 정보국 김창동이 김영식을 통해 그의 몇군데 은신처를 알아내고 부하들을 매복시킨 보름만에 체포한 것이다.
이재복은 1948년 당시 46세였다. 박정희의 절대적 후견인이었던 그가 체포됨으로써 박정희는 더욱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이재복, 박정희 두 사람이 작성한 군 계보가 드러날 것이고, 조직은 일망타진되고, 그와 동시에 사람이 무수히 다칠 것이다.
리스트에 오른 명단은 대부분 박정희를 따르는 일본 육사 후배들이었다. 연령상으로는 스물한두 살이었다. 박정희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검거망을 피해 다녔다.
이재복의 범죄 사실과 신상명세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재복의 본적은 경북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이고 영천에 중앙교회를 세워 목회자로 시무하고 있었다. 그의 주 활동근거지는 영천과 대구였다. 그는 1939년 이재봉이라는 이름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로 건너가 동지사대학을 졸업한 뒤 평양 숭의여학교 출신 간호원과 결혼한 지식인이었다.
해방 이후 여운형의 인민당에 입당하고 경북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을 거쳐 경북의 북로당 계열이 붕괴되자 박헌영의 남로당에 합류해 군사부 총책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이재복과 함께 활동한 인물은 대구 경북 지역의 박상희, 황태성, 하재팔이었다.
이재복은 대구 10·1 항쟁, 제주 4·3 항쟁, 여수 14연대 10.19 사건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1949년 5월 26일 수색 기지에서 15연대장 최남근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러나 대구 폭동에 모두 개입했다는 객관적 근거는 없었다. 나머지 사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사건들은 모두 연계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이며 개별적이고 자발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박정희는 남로당 조직책 이중업과 접선했다. 이에 관해서는 미 메릴랜드주 소재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전 미국 외교관 그레고리 핸더슨의 보고서(1963)가 그 근거를 제시해준다.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이 독점 보도한 ‘발굴-현대사 뒷모습 <1>박정희의 좌익 전력 "살아남은 사람은 박정희 뿐"(2001.11.15일자) 기사의 주요 대목을 발췌한다.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 5백명의 동기 가운데 성적 최상위자로 선발되어 자마에 있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이곳은 한국 출신의 학생들이 일본이 실시하는 엄중한 전시 통제에 반발해 좌익의 영향을 받기 쉬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좌익의 영향력은 박정희가 속한 57기보다 한 기수 위인 56기에서 시작되었으며, 일본이 패망한 뒤 자마의 사관학교를 폐교한 것과 더불어 일본에서는 끝났다.
박정희가 사관학교를 다니던 2년 동안 좌익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9명은 박정희의 후배로, 동양적인 제도에서는 특히 그의 영향을 받게끔 되어 있었다. 이들 후배들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훗날 박정희가 지휘한 공산주의 음모에 개입하게 되었다. 한국 사관학교 교관들로 그와 공모했던 사람들 가운데 7명은 그 결과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와 그의 동기생들 사이에 좌익 영향의 징후는 생도 시절에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도쿄에서 2년제, 혹은 4년제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의 엘리트가 박정희와 더불어 좌익으로 돌아섰다.
남한에서는 1947년 말에서 1948년 초까지 남로당 최고사령부가 활동했다. 그 이후에도 남로당의 일부 주요 지도자들은 1950년 4월에 박헌영의 직속 참모였던 이주하와 김삼룡이 체포될 때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북한은 1950년 6월 10일에 남로당의 이 두 요인과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당의 당수이며 평안도 지방 민주주의 사상가들의 우두머리인 조만식을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이 문제는 미 대사관의 정치부를 통해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한국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이주하와 김삼룡은 남한이 서울을 버리고 떠날 때 남한 당국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조만식은 북한이 평양을 버릴 때 북한에 의해 살해되었다.
남로당 공산주의자들 중 이주하, 김삼룡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면서 동일한 서열의 최고위간부로 이중업이 있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33년에 공산주의 활동으로 제적되었다. 그후 이중업은 박헌영, 이주하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활동했고, 해당 기간(47년말-48년초) 동안에는 남로당의 조직부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작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한국 국방경비대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1945년에서 1948년 9월 사이 이 조직에 침투한 것이었다.
이때 이중업은 박정희를 비롯해 많은 장교들과 접촉한 듯하다. 이중업이 접촉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비중있고, 가장 성공적으로 접촉한 장교는 박정희였다. 이중업과 박정희의 접촉은 박정희가 중국 광복군에서 김홍일과 (함께)근무하다가 1946년 5월에 귀국한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박정희는 1946년 12월에서 1947년 2월까지 (태릉)제1연대의 중대장으로서 사관생도들 중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모집하는 데 열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1연대는 당시 태릉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제1연대 건물에 새로 생긴 장교양성소(국방경비대사관학교)가 있었다. 당시 연대 장교들은 새로 생긴 장교양성소의 교관 역을 겸했다. 당연히 이 장교 양성 과정은 생도 시절의 젊은 장교들에게 사상을 주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회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사관학교에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참모를 많이 포함시키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고, 박정희는 이런 노력에 앞장 선 듯하다. 1947년 3월과 4월에 졸업한 제3기생들이 교육을 받은 건 박정희가 이 연대에 있을 때였다. 제3기는 주로 사병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한국의 한 고위 장성은 공산주의 성향을 지닌 어떤 장교가 자신의 사병들을 장교 연수 과정에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말했다. 현재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한국군의 G-3(작전국)는 300명의 생도들 가운데 절반이 노골적인 불충분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1948년 10월 19일에서 27일에 여수-순천 반란을 일으킨 건 이들이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1948년 4월에 제주도 제9연대에서 처음 발생한 소규모의 전복기도를 비롯해, 1948년 11월 2일에 발생한 대구 제6연대 사건, 1948년 10월 20일에 발생한 제4연대 사건, 1948년 11월에 발생한 대전 제2연대 사건에도 개입했다. 이 사건들의 결과, 많은 장교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했으며, 많은 장교들이 여수 순천 반란에서 목숨을 잃고, 또 일부는 순천과 대구에서 달아나 게릴라가 되어 1949년 4월부터 한국 전쟁이 날 때까지 한국을 유린한 게릴라전을 지도했다.
박정희가 이 심각한 사건들과 전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확실하다. 그가 정체를 드러내고 1950년(1948년의 오기인 듯) 11월에 체포된 것은 이들 사건들, 특히 여수 순천 사건 때문이었다. 박정희 혼자 사관생도들에게 불온사상을 주입하는 주역을 맡은 건지, 이중업(혹은 이재복?)과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이들과 접촉하는 데 적극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박정희와 이중업은 이 기간 동안 친분을 유지했다. 이들은 워싱턴 주재 현 한국 대사인 김정열 중장에게 각각 친분 사실을 증언했고, 최경록 중장(퇴역)은 이들이 이중업이 즐겨 찾던 명월관에서 몇 차례 함께 술을 마시는 걸 목격한 바 있다고 증언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한 한국 정부 전복 도표를 본 어느 한국군 장교는 거기에 박정희의 이름이 주요 군 장교로 나타나 있었다고 회상했다.
박정희와 장교 양성소와의 관계는 짧은 기간으로 끝나지 않았다. 박정희는 1947년 9월에서 1948년 9월까지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학생 파견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중요한 직책에서 그는 공산주의 영향을 받은 교관들로 참모진을 구성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지도자로 생도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여수 순천 사건과 그 뒤를 이은 수사 결과 박정희 조직은 김창동 중위(나중 중장으로 진급)에 의해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독사”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김창동은 맹렬한 반공주의자로 일본군 시절에 헌병 사병을 지냈고, 그 자신 역시 육군사관학교 제3기생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생도들에게 접근하는 수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1948년 11월에 체포되어 광범위한 조사를 받고 김창동 수사대의 주무기인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49년 2월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박정희는 죄의 심각성에 근거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접선자 중 이중업과 이재복을 혼동한 것은 아닌지, 시제상의 불명확성 등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맥락이 틀린 것이 아니어서 학계는 이를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1948년 11월 초 박정희는 백선진-김창동이 주도하는 육본 정보국의 추격을 받고 있었다. 이재복-김영식 수사 과정에서 나온 리스트를 토대로 연대장급인 김종석은 물론 일본 육사 후배들인 오민균, 이성구, 김태성, 만주군 출신인 이병주, 이상진, 김학림, 황택림도 쫓기거나 체포되었다.
군부 내의 좌익분자 색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정보국 김창동·이한진 조가 박정희가 서울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밀대로부터 제보를 받은 것은 1948년 11월 10일 전후였다. 이한진 대위와 헌병대가 박정희 집 주변에 며칠째 잠복했다.
박정희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어느날 집으로 뛰어들어가 여러 가지 증거물을 파기했다. 농 깊숙이 숨겨두었던 비상용 45구경 권총을 꺼내 총신에 새겨진 총번을 씨멘트 바닥에 갈았다. 일련번호가 쉽게 지워지지 않자 줄톱을 찾아 갈았다. 암살용으로 사용할 권총의 총번이 지워져야 압수되더라도 출처를 캐낼 수 없는 것이다.
동거녀 이현란은 집에 없었다. 박정희는 쫓기는 데다 증거물을 파기하는 데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현란의 존재도 깜빡 잊고 있었다. 주요한 기밀문서를 불에 태우고, 치밀한 성격대로 주요 명단과 동선이 적힌 수첩을 불구덩이 속에 던져넣고, 집을 살핀 다음 권총을 옆구리에 찔러넣고 담을 뛰어넘으려는 순간, 정보대 헌병들이 그를 덮쳤다.
“꼼짝 마라!”
그는 나머지 휴대한 서류를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었으나 주먹이 먼저 아구창을 돌리는 바람에 고스란히 그것들이 뱉어져 나왔다. 포박을 당하는 중에도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조각을 발로 사정없이 밟아 뭉갰다.
“무장해제 시키라!”
이한진이 그의 옆구리에 찔러넣은 권총을 뽑아들어 위협한 뒤 헌병들에게 명령했다. 부하들이 그의 몸을 수색해 다른 용의품을 압수했다. 그는 포박당한 채 지프에 실려 명동의 구 명치좌(현 명동예술극장)에 설치된 육본 정보국으로 이송되었다. 정보국의 좌익분자 체포조는 헌병대가 맡았고, 대질심문, 자백 등 수사는 수사팀이 맡고 있었다.
박정희는 취조실에 들어서자마자 구석에 쳐박혔다. 헌병 둘이 달려들어 그의 바지의 벨트를 거칠게 뽑아내고, 상의를 벗겼다. 취조실에 쳐박혀서도 수갑을 채운다는 것은 그만큼 중범죄인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수갑이 채워지고 포박된 그를 놓아두고 잠시 밖으로 사라졌다.
박정희는 이현란을 만나고 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상황이 급박한지라 증거물부터 파기했던 것인데 한발 늦었고, 그 사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땅을 치고 싶도록 후회되었다. 그녀는 만삭의 몸이었다. 머릿 속으로 셈해보니 출산 일자가 오늘 내일이었다. 그녀와 꼭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로 약속했었다. 아아, 그런데 이게 뭔가. 그러자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으으으... 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치받쳐오르는 통곡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억울하고 분한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한편으로 가슴을 후비는 고통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운명은 왜 자신에게만 가혹한가. 가난, 배움에의 욕구, 야망, 중형의 죽음, 불공평한 세상, 탄압과 압제... 거기에 순응하며 살려고 해도 그에게 세상은 관대하지 않았다.
덕대 큰 장정 둘이 취조실로 들어서더니 다짜고짜 구타가 시작되었다. 박정희의 몸은 차돌처럼 단단했으나, 그래서 맞는 것도 착착 달라붙듯이 찰지고 탄력있게 주먹과 발길질이 몸에 엉겼다. 무수히 맞았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모두 이현란을 위한 감내다. 이 위기를 모면하면 이현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고통은 이현란을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다. 이현란만 만난다면 모든 고통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박정희는 이리저리 굴리며 무방비 상태로 맞았다. 콧등이 얼얼한 가운데 코피가 쏟아졌다. 거친 군화발이 그의 콧등을 여지없이 걷어찬 것이다. 고꾸라지자 허벅지와 옆구리를 밟고, 머리를 밟았다. 이때 다친 콧등이 평생의 흉터가 되었다. 날이 찌뿌뜨뜨하니 흐릴 때는 유독 검게 그을린 콧등이 시렸고, 목소리도 비음이 실렸다.
“물 끼얹어라.”
그가 정신을 잃자 고문조가 바케스로 그의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번쩍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그의 눈앞에 고문조가 버티고 서있었다. 정신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자 다시 구타가 시작되고, 또 늘어지자 이번에는 그의 상반신을 일으켜 밧줄로 두 팔을 묶어 철봉대에 끌어올려 매달았다. 이때가 가장 두렵다고 한다. 실제로 매를 맞는 것보다 이때 죽음의 공포를 더 느낀다고 한다.
“동조자를 대라!”
이름을 댄다면 그들도 자신처럼 죽도록 맞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혼자 당하고 말리라. 이상한 독기가 승부사처럼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
“안댈 거야?”
“때리지 말라!”
그의 첫 반응이었다.
“어라! 빨갱이 새끼 봐라?”
“왜 때리는가?”
“니가 묻게 돼있어? 우리가 묻고 니가 대답을 할 차례지, 니깟놈이 우리한테 물어? 이런 개새끼!”
철봉에 매달린 그를 내려놓고 다시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고문병이 군화발로 그의 가슴을 내질렀다. 숨이 꺼억꺽 넘어가기만 할 뿐, 뱉어지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휴우, 숨을 몰아쉰 그가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이놈들, 너희 상관을 대라!”
“상관?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는군. 여기가 군대냐? 영창에 상관이 어디 있냐?“
주먹이 그의 턱주가리를 갈겼다.
“오해가 생겼거나 누명을 쓴 것이다.”
“너 박정희지?”
“그렇다.”
“그러면 됐지, 뭐가 누명이고 모함이라는 거야?”
한 놈이 쇠좆메로 그의 등과 가슴, 엉덩이를 갈겼다. 쇠좆메로 후려칠 때마다 몸에서 뱀 몸뚱이처럼 선명한 자국이 났다. 줄기를 긋고 부풀어오른 피부에서는 일부 살점이 뜯겨져 나갔다. 덕대 큰 자가 송곳으로 그의 하복부를 찔렀다. 금방 피가 나왔다.
“그만하라!”
그때 장교 복장이 불쑥 취조실로 들어섰다. 고문조가 고문을 멈추고 말했다.
“군 빨갱이 책임자답습니다.”
“계속하라우.”
그리러자 용기를 얻은 듯 고문조가 그의 등에 송곳을 찔렀다.
“아아아, 아아아...”
옆방에서도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고문은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을 때는 눈알이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얼얼할 뿐 이젠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몸이 물푸대처럼 젖어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한없이 자고 싶었다. 그렇게 영원히 자고 싶었다. 이렇게 인생이 끝나도 고통만 없으면 될 것 같았다. 정말 그는 잠든 상태에서 영영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빠져나갈 생각도 없었고, 과거와 오늘을 반추할 생각도 잊었다. 이런 상태라면 누군가 시키면 시키는대로 로봇처럼 따를 것 같았다. 고문자의 똥 묻은 군화 바닥도 핥으라고 하면 주저없이 핥을 것 같았다. 한 인간이 이처럼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식사가 제공되지 않자 어느 순간 그는 짐승처럼 소리내어 울었다. 멍든 자국이 쓰리고 아리지만 밥을 먹지 못하는 고통이 더 컸다. 가난이야 어려서부터 남루처럼 달고 다녔지만 번연히 옆방에서 숟가락 달그락거리며 식사를 하는 소리를 들을 때, 사발에 담긴 따뜻한 보리밥 한 그릇이 그리워서 와크르 울고 만 것이다.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나면 소리쳤다.
“나도 밥 좀 주시오.”
하지만 어떤 누구도 그에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날 한 수사요원이 들어왔다.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밥 한그릇 주시오.”
그가 나가더니 사발에 가득 담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쌀밥과 김치가 쟁반에 받쳐 들어왔다. 그는 사냥한 동물을 핥는 호랑이처럼 밥을 혀로 핥았다. 밥의 향기가 코로 스며들었다. 따뜻한 밥 한그릇, 이것을 위해 살려고 발버둥치지 않았는가. 그는 또다시 눈물을 쏟았다. 밥을 먹어치운 한참 후 수사관이 다시 들어왔다.
“사실대로 말하라.”
“....뭘 말이오?”
“계보를 말하라는 것이야.”
“나는 계보라는 것이 없소.”
“아직도 정신 못차렸군.”
당장 귀싸대기가 올라왔다.
“따져봅시데이. 영관급을 이렇게 때려도 되나?”
“이 새끼야, 그래 가지고 살아서 나갈 것 같애? 불지 않으면 니 인생도 종치는 거야!”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거적에 쌓인 시체가 들것에 실려서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그는 직접 보았다. 수사관이 물었다.
“니놈들 세상이 될 줄 알았지? 세상이 그렇게 허술하냐? 이것들이 일정 때의 우리 관록을 개좆으로 안다니까. 난 손톱 뽑는 고문 기술자야. 그렇게 해주간? 나를 실망시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러니까 사실대로 불라구!”
박정희는 침묵으로 버텼다. 다음에는 전기 고문조들이 들이닥쳤다. 전기고문이 시작되자 먹은 것을 고스란히 토했다. 그것이 무척이나 아까웠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가운데 눈을 뜨자 그의 앞에 상반신이 큰 낯선 사람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박정희의 몸 구석구석을 훑듯이 살피더니 말했다.
“일어나 앉으시오.”
비틀거리며 박정희가 일어나 앉았다. 경어가 웬지 낯설었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조그만 호의도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의자에 앉으시오.”
그가 그의 앞 철제의자에 가 앉았다.
“나 모르가소?”
얼핏 스치는 게 있었지만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어느 부대에서 만났거나, 만주군 시절 스쳤거나, 아니면 경비사 교관시절 만났으리라 짐작하는데 얼른 떠오르진 않았다. 그는 눈밑에 난 기다란 흉터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잔혹한 인상이었다.
“나 김창동이야. 그래두 모르가서? 경비사 3기야. 당신은 교관이었댔디?”
이제 그는 반말이었다. 처음엔 점잖았지만, 이제 위치가 바뀌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조병헌, 오민균, 이병주, 김학림, 그리고 최남근, 김종석, 다 한 계보랬지?”
“나는 모르는 사람들이오.”
“신사적으루 대하려 했더니 형편없구만? 사내 대장부가 왜 그래니? 명색 영관급 장교가 거짓말하다니, 자존심도 없네? 님자가 지령을 내려서 지금 대구 6연대에서 또 반란이 일어났다.”
“뭐라구요?”
“악랄한 것들이야. 영천과 팔공산, 보현산을 무대로 반란을 일으켰어. 영천이 악질들 고장이디. 네 삼촌이라는 이재복 고향 아니간? 좌우간 이쪽 진압하면 다른 데서 일어나구, 저쪽 끄면 이쪽서 불이 붙는단 말이다. 여기저기서 뿅망치처럼 튀어나와. 대구놈들 에지간히들 하라우. 덩말 에지간히들 해. 그중에 대구ᐧ영천 놈들이 취미붙였어. 여순보다 더 악랄하디. 10.1폭동에서부터 지금까지 도대체 몇차례니?”
“나완 무관한 일이오.”
“니놈 고향에서 일어난 일이 너와 무관하다니? 리론이 되네?”
갑자기 포악해진 그가 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내질렀다. 그가 의자 아래로 쿵 나가떨어졌다.
“장난감같이 잘 나가 떨어지누만. 바로 앉으라우.”
그가 일어나서 바로 앉았다.
“님자 가족사를 보면 빨갱이가 본업이야. 고향의 6연대에 세포를 심어두구, 춘천 8연대 아이들 빨갛게 물들이구, 경비사 교관들과 생도들 선동선무해서 국가전복 기도하구, 그리고 여순사건이 나자 해당 지역으로 내려가 계선상의 최남근을 만나 지령을 주구, 목포로 가서는 제주포로수용소장 오민균을 불러내 지침 주구, 기래서 남한을 전복해 너희들 세상을 만들갔다? 그렇게 해서리 북한에 남한 땅을 헌납하겠다? 고래, 우리 수사기관이 고렇게 허수아비니? 고렇게 허용하도록 폼으로 있는 중 아네?”
박정희는 본능적으로 부정했다.
“오햅니더!”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면 명예가 있잖네? 곧 죽어두 정정당당하라우. 정직한 줄 알았더니 산골짜기에서 올라온 무지랭이 병사와 다를 게 없군. 정말 님자 일본육사 출신 맞네?”
박정희가 김창동을 노려보자 당장 주먹뺨이 날라왔다. 이런 모멸감이라니, 구타를 당한 것보다 더한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명예는 마지막 그의 자존심이었다.
며칠 후 그는 남산의 정보국 특무과로 이첩되었다. 명동의 헌병대는 많은 숙군 대상자들이 체포돼와 바글거렸고, 고급 장교를 가둬두고 취조를 하기에는 환경이 적절치 않았다.
남산 특무과에는 김안일 특무과장이 책임자로 있었다. 특무과는 SIS(Special Investigation Section)라 불렸다. 이 병과는 육군특무대로 확대 개편되고, 뒤이어 방첩대(CIC, Counter Intelligence Corps), 후에 보안사령부로 명칭이 바뀌고, 먼 훗날 다시 기무사로 변경되었다.
박정희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구형되었다. 군법회의는 단심제인데다 선고는 대개 구형량대로 선고되니 그는 며칠 내로 형이 집행될 것이다. 수색 기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이다.
김안일 소령은 김창동으로부터 취조 중 받은 박정희 진술서를 받았다. 박정희는 김안일과 국방경비대사관학교 2기 동기였다. 2기와 3기생은 반 이상이 좌익계여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안일은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은 데다, 2개월 정도 속성으로 훈련을 받고 200명의 생도들이 임관했으니 같은 구대원이 아니면 얼굴 한번 스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서로 아는 듯 마는 듯한 처지였다. 박정희를 취조실로 불러낸 김안일 소령이 존댓말로 물었다.
“1917년생인가요?”
“그렇습니다.”
김안일도 1917년 생이었다. 생일도 같은 달이었다.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고 그가 다시 물었다.
“대구사범 출신인가요?”
“그렇습니다.”
“나는 광주사범 출신이오.”
박정희가 눈이 희둥그래졌다. 뇌리에 일말의 빛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문경에서 소학교 훈도를 했습니다.”
그것도 김안일과 경로가 비슷했다. 김안일 역시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국방경비대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박정희는 그가 자신에게 알게 모르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어떤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기독교 신자라고 하지 않는가. 김안일이 계속 경어로 물었다.
“부인이 아들을 낳았더군요. 알고 있습니까?”
“네? 아들을 낳았다구요?”
박정희는 순간 감전이 된 듯 머리가 하얗게 새버린 느낌이었다. 아, 아들을 낳았구나. 그가 감격의 눈물을 쏟자 김안일은 그를 한동안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자식을 얻은 기쁨을 감옥에서 맞이하니,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 것이다. 그도 최근 자식을 얻었다.
“이한진 대위가 가혹하게 다룬 것 미안합니다. 하지만 어깨를 부러뜨리고, 골이 빠져나와버린 사람도 있소.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세요. 앞으로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니 마음 놓으시오. 그리고 사는 방법이 하나 있소.”
“무엇입니까.”
박정희가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으나 생의 기대와 집착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들을 낳았으니 행복해야지요. 처자를 생각해서라도 목숨을 하찮게 여겨선 안되오. 그러니 사는 방법을 생각해봅시다.”
“방법이라니요?”
그는 갑자기 갈증이 왔다.
-아, 사는 길이 있다면...
그가 속으로 애절하고도 절박하게 읊조렸다. 이현란과 아이를 생각하면 꼭 살아야 한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그동안 모멸받고 설움받았던 가난을 벗어나 악착같이 잘 살고 싶었다.
“자술서를 쓰시오.”
“자술서라니요?”
“남로당 군 계보를 깔끔하게 정리하시오. 그들을 개과천선시켜야 해요. 그러면 길이 있소.”
박정희가 주춤했다. 자기를 따르는 동료, 후배들을 제보한다는 것은 그들을 배신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김안일은 그가 의리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심문 장소를 조선호텔로 옮겼다. 호텔은 명동의 정보국 수사대와 지근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인적 물적 근거들을 신속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모처럼 목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깨끗한 침대와 맛있는 식사가 제공되었다. 아내와 자식과 함께라면.... 그러자 가슴이 메었다. 김안일은 이 점을 노리고 있었다. 따뜻한 식사와 편안한 잠, 행복한 가정생활, 그럴수록 생에 대한 집착이 강렬해질 것이다.
박정희와 마주 앉자 김안일이 말했다.
“박 소령, 동료·후배들도 어차피 체포되게 되어 있소. 일찍 자수하도록 하면 그만큼 형량이 줄어들 것이오. 내 보건대 박 소령은 중형(仲兄)조차 경찰 총에 맞아 희생됐는데, 박 소령마저 그리 되면 집안이 어떻게 되겠소? 패가망신이 다른 데 있지 않소. 집안을 생각하시오. 사랑하는 부인과 갓 태어난 아들을 생각하시오. 박 소령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평생을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아시오. 얼마나 참담합니까. 그건 아비로서 할 도리가 아니지. 그래서 비굴도 치욕도 감내하는 것이오.”
한참 침묵을 지키던 박정희가 말했다.
“종이와 펜을 주시오.”
그는 종이를 받아 자술서와 함께 군 계보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방법이 없었다. 군은 곪아있었고, 충돌 요인이 상존했지만 승부는 끝났다. 어떻게든 인명 손실을 막고 볼 일이다. 그렇게 써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다음날 김안일이 박정희를 불렀다.
그는 편지지 열 장에 걸쳐서 쓴 자술서와 군 계보 명단을 제시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김안일은 이미 확보한 남로당 군 계보, 횡선, 종선, 계선을 비교해 확인했다. 대충 맞았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상부에 보고하면 많은 군인들이 다칠 것이 분명했다. 제보한 자의 진정성은 믿을 수 있지만 사람 다치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올바른 일인가를 회의하며 그는 잠시 묵상에 잠겼다.
“올리나 마나.”
그는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러나 이것도 외면하면 다 죽는다. 결론은 보고자의 진정성을 믿고 상부에 보고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구제 문제는 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전투정보북한과장인 김점곤 중령을 찾았다. 직함이 길고 복잡하지만 그만큼 능력이 있어서 여러 가지 임무가 부여되어 붙여진 직함이었다. 직함에서 말해주듯 그는 대북한 공작과 국내 정보를 수집하는 책임자였다. 김안일보다 대여섯 살 연하였지만 그는 김안일을 깎듯하게 선배로 예우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가족사 때문입니다. 대구폭동에 가담했다가 피살된 형 박상희의 친구가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입니다. 박정희는 이재복의 지시에 따라 남로당에 가입하고, 후배들을 세포로 확보하고, 죽은 형의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시대 모순을 극복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는 이재복이 경찰에 쫓기자 남로당 조직부장 이중업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조직도는 그만 간직하고 있을 뿐, 하부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자술서를 읽어보니 이념적 공산주의자는 아니고 인간관계에 얽혀서, 또 복수심 때문에 당에 들어간 감상적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민균 등 후배들을 아끼지만 조직적인 움직임은 없어 보입니다. 후배들이 그를 따른다고 봐야지요. 10.1 대구폭동, 제주 4.3사건, 10,19 여순반란은 서로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어 보입니다. 박정희는 모순에 대한 묵시적 동조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적극적 가담자로서 지령을 내린 혐의는 없습니다. 좌익계 대부분이 그런 성향입니다. 군부 내의 비리에 저항하고 미 군정에 반발하고, 같은 군인을 죽일 수 없다는 항의입니다. 지금은 그의 아내가 아들을 출산했는데 내가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원산 출신으로, 북한 집단이 싫어서 남하한 사람입니다. 아내는 반공주의 규수입니다.”
그의 설명은 의외로 길었다. 두서없이 장황하게 말하는 것이 김점곤은 이상했다.
“박정희에 대해 너무 친절하군요. 나 역시 김창동과 이한진더러 감정적으로 혐의자들을 대한다고 해서 때리지 말 것과 먹을 것을 넣어줄 것을 지시해 놓았소. 그런데 박정희의 구명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 같은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소?”
“있습니다. 깨끗하고 청렴합니다. 여태껏 변방에 묻혔습니다. 군인 정신 투철한 실력에 비해 철저히 마이노리티입니다. 그러니 개인적 불만도 있겠지요.”
“그 문제에 대해선 장담할 수 없소. 개인적으로 동정하자면 어디 하나 둘이겠소?”
“구명을 조건으로 남로당 군 계보를 털어놓도록 지시했습니다. 계보를 확보했습니다. 폭로를 유도해놓고 외면한다면 그것 또한 국가 폭력이죠. 내부자 고발을 진작시키고 고무한다는 측면에서 몇몇 사람은 모범적으로 선처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요.”
“굳이 말한다면 내 개인적인 인연도 있습니다.”
“인연?”
“네. 그는 나와 같은 뱀띠입니다. 그리고 같은 사범학고 출신이고, 소학교 훈도도 같이 했습니다.”
“그래서요?”
“그런 것으로 보아서 그가 뼛속까지 좌익이 될 수 없습니다.”
“좌익 중에 뼛속까지 좌익이 몇 명이나 있소? 그리고 그것과 이것과 무슨 상관이 있소? 특정한 사람에 동정적인 것은 사심이 있다는 것 아니오? 혹시 동향이라도 되오?”
“아닙니다. 나는 전남 해남이고, 박정희는 경북 구미입니다.”
“그래요?”
김점곤이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듯하더니 말했다.
“나는 광주가 고향이오. 서중학교 출신이오.”
“등잔밑이 어둡다더니, 이런 인연도 있군요. 워낙 바쁘다 보니 알고 지낼 것도 놓치는군요.”
그들은 가볍게 웃었다. 갑자기 가까운 이웃이 된 기분이었다.
“알겠소. 김 과장 뜻이 그렇다면 정보국장을 찾아가봅시다. 그러기 전에 김창동을 설득해야 해요. 그 자 곤조가 보통이 아니니까. 그 자는 이 박사께 직접 보고하는 자니까. 그 자를 잘못 건드리면 낭패당합니다.”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김안일은 김창동이 틀어버리면 죽도 밥도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나 충분히 그를 설득하고 제어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그의 비리를 김안일은 너무나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꼼짝못할 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보통은 경쟁자의 비밀을 여러 루트를 통해 체크하는 것이 순서다. 그들은 서로를 믿지 못했다. 그래서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놓아야 하는 것이다.
김안일은 숙군 총책임자이자 정보국장인 백선진 대령을 찾았다. 1948년 12월초의 해질녘, 퇴근 무렵인데 김안일 과장이 그의 방을 찾았다.
급히 달려오느라 숨이 찬 그를 보고 백선진이 의자에 앉도록 권했다(이하 백선엽의 [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박정희 살리기, 중앙일보 연재 일부 인용)
“서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백선진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정의감에 입각해 수사를 진행하는 김안일 과장을 신임하고 있었다. 1연대의 정보주임 김창동을 데려다 수사팀에 합류시켰지만 과도한 수사와 혹독한 고문으로 사람을 못쓰게 만드는 경우가 있어서 그를 견제하도록 그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있었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오.”
“경비대사관학교 2기생 동기 중에 박정희 소령이라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남로당 군 계보를 확보했습니다.”
그 무렵 백선진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별도로 군에 침투한 좌익계 명단을 받아놓고 있었다. 그 명단은 김태선 치안국장이 경찰 조직망을 통해 작성한 리스트였다. 경찰은 군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경찰과 부딪친 군인들을 악의적으로 좌익으로 몰아붙인 것도 꽤 되었다.
“남로당 군 계보를 적어냈다고?”
“그렇습니다.”
백선진은 바로 두달 전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 반란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에 내려갔을 때, 먼저 송호성 총사령관을 수행해 내려와있던 박 소령을 만났다. 작전권을 빼앗자 불쾌한 표정으로 구석에 서있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여순사건 진압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여수 진압은 쉽게 되었으나 지리산으로 들어간 빨치산 토벌이 진척되지 않았다. 토벌 기밀이 매번 먼저 빨치산 쪽으로 흘러들어가버렸다. 그게 이 자의 소행이 아닌가?
헌병대의 수사를 통해 그가 광주-순천-광양-목포를 다녀온 것이 남로당 군 계보를 다스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으로 드러나자 더욱 그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김안일의 노력과 별개로 박정희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모든 혐의가 인정돼 사형을 구형받았다. 조서상의 혐의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군법회의 특성상 구형량은 대개 그대로 선고로 이어졌기 때문에 박 소령은 사형 선고와 함께 10일내 수색에 있는 처형장으로 끌려갈 운명이었다. 김안일이 다시 다급하게 백선진을 찾았다.
“국장님, 비록 남로당 군사책이라는 혐의를 받아 형이 확정됐지만, 아까운 사람입니다.”
백선진은 그가 신경군관학교 수석 졸업에 일본 육사를 나온 유능한 군인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김안일이 말을 이었다.
“박 소령은 군 내부의 좌익 색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입니다. 좌익 계보를 작성해 제보했습니다. 자신도 남로당에 가입한 것을 눈물로 회개하고 있습니다. 살려줄 수 없겠습니까?”
회개, 군대에서 쓰는 용어가 아니지만, 신선하게 들렸다.
“김 과장이 기독교 신자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안수를 받았습니다.”
백선진은 생각에 잠겼다. 기독교 신자인 김안일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목숨을 살리자고 건의한다. 왜 하필 그는 그에게 집착할까. 그 많은 혐의자 중에 그를 살리자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도 운명인가. 그러나 남로당 군사책으로 혐의가 밝혀진 박정희를 살리는 일. 사법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거나 질서가 잡힌 것은 아니지만, 그런 중대한 혐의자를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김점곤 정보참모 얘기 들어보았소?”
백선진은 춘천의 8연대에서 중대를 맡아 복무하면서 박정희를 소대장으로 데리고 있던 김점곤이 그의 인물 됨됨이와 능력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물었다. 그의 말에 따라 판단의 준거로 삼을 생각이었다.
“김 전투정보북한과장도 이응준 총참모장을 찾아가 구명을 탄원했다고 합니다.”
“뭐?”
이것들이 짜고 구명운동을 한다? 순간 백선진의 머리에 복잡한 상념들이 맴돌았다. 그렇다면 이들이 박정희를 구명하는 뜻이 분명 있을 것 같았다.
“사적인 인연 때문인가?”
“아닙니다.”
“그럼 뭔가.”
“그와는 지연ᐧ혈연ᐧ학연 아무것도 닿는 데가 없습니다. 다만 나이가 같고, 같은 사범학교를 나온 훈도 출신이라는 인연이 있습니다. 그런 직업적 동질성이 있습니다. 유능한 군인입니다. 버리기엔 아까운 사람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와도 인연이 닿는군. 나 역시 평양사범을 나와서 한때 소학교 교사로 근무했소.”
백선진이 희미하게 웃었다. 김안일은 순간 희망의 빛을 보았다. 같이 사범학교를 나와 보통학교 훈도를 한 유대감, 그것은 삶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또다른 인연법이다. 세 사람 모두 사범학교 출신에 훈도를 했다는 공통점은 결코 작은 인연이 아니었다.
“정보국장 각하께서 박정희를 한번만 만나주십시오. 그가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도 바란다고? 박정희는 어디 있소?”
“정보국 지하 영창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러면 데려와 봐요.”
김안일이 뛰듯이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후줄근하게 젖은 군복 차림의 박정희를 데려왔다. 당시의 군법회의 체계는 기결수 미결수 개념도 없었고, 사형수도 헌병대 취조실에 묶여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꽉 다문 입, 꼿꼿한 자세, 과묵한 표정... 흠잡을 데 없는 군인의 모습이었다. 박정희는 그가 여순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을 때 만났던 모습 그대로였으나 콧등이 멍들고, 얼굴이 피떡이 엉긴 상처 투성이였다. 순간 측은지심이 들었다. 시일이 꽤 지났는데도 구타와 고문의 흔적이 그의 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앉으시오.”
백선진이 책상 앞 소파를 가리키자 박정희가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백선진은 김안일을 통해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그가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마주 앉아 침묵을 지켰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순간, 박정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번 살려 주십시오.”
단순소박하고 무미건조한 말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눈자위가 붉어진 것을 백선진은 결코 놓쳐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말이 좀 어색했다. 한번 살려달라? 목숨을 여러개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한번 살려달라? 어법이 맞지 않은 것은 그만큼 당황하고 절박했다는 뜻이리라. 백선진은 그런 그를 신뢰해서였을까,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알겠소. 노력해보도록 하지요.”
김안일이나 김점곤에 대한 신뢰 때문에 나온 응답일 수도 있었다. 신임하는 정보 참모들이 앞장서서 구명운동을 하는데 그것을 막을 상관은 없었다. 더군다나 같은 사범학교 출신에 교사 경력까지 같이 한 동질감이 있었다.
박정희와 인간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은 김점곤 전투정보·북한과장이었다. 그는 박정희가 좌익 연루 혐의로 수감된 이래 늘 그가 어떻게 처리될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나이들의 깊은 우정과 약속을 똑똑히 지켜본 백선진으로서 그들의 그런 의리를 존중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김창동을 설득하시오.”
백선진이 박정희 곁에 서있는 김안일을 향해 말했다. 김안일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표시로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붙이고 박정희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박정희를 영창에 다시 가두고 김안일은 김창동을 불렀다. 김안일은 그가 김점곤 과장의 요원을 겸한데다 백선진 정보국장의 직보 라인이라는 것을 알고 말했다.
“이것은 두 어른의 뜻이오. 박정희를 정보국 차원에서 구명하도록 합시다.”
김창동은 재빨리 머리가 회전했다. 두 어른이라면 이승만 박사와 백선진 정보국장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 박사는 좌익을 가려내라고 엄명을 내리고, 그에게 두둑한 하사금까지 주지 않았던가.
“좌익의 자식들까지도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이 자라나면 무서운 독버섯이 되니까...”
그래서 크게 고무받았는데, 두 어른이 특정인을 넣고 빼라고?
“그럴 리가 수 없소! 두 어른이 누구요?”
김창동이 의심의 눈초리로 김안일을 노려보았다.
“꼭 말해야 되겠소?”
“알아야 조치를 취하든지 말든지 하지요.”
“김점곤 전투정보북한과장과 백선진 국장이오.”
그들도 바로 그의 직속 상관이다. 김점곤이 정보 유경험자라고 해서 1연대에 있던 자신을 정보국으로 차출한 사람이다. 하지만 국가적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선 안된다. 그는 단번에 거부했다.
김점곤이 춘천 8연대 독립중대장으로 있을 때, 그 밑에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박정희가 그럴싸하게 술 한잔 냈다.
“그동안 내가 매번 술을 얻어먹었는데, 오늘은 내가 술 한잔 내겠소.”
김점곤은 가난한 농촌 출신이란 것을 알고 술 추렴을 할 때도 박정희를 끼워는 줄망정 호주머니를 털라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두고두고 자존심이 상했던지 어느날 박정희가 술 한잔 내겠다는 것이었다.
원용덕 8연대장과 함께 술집으로 갔더니 웬 맥고모자와 보기 드문 담비 목도리에 첨단 유행의 값비싼 양복을 입은 신사가 먼저 술집에 와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하이소. 제 숙붑니더. 산판(벌목)을 해서 돈을 번 삼촌입니더.”
“이재복이라캅니더. 조카가 상관들이 고생한다 캐서 술 한잔 대접하고자 초대했십니더.”
술이 왁자하게 돌고, 술이 취하자 원용덕이 박정희에게 호통을 쳤다.
“박 소위, 그대는 불상놈이로군!”
그러자 좌중이 모두 긴장했다. 원용덕은 한 성깔 하는 지휘관이었다.
“연대장 각하, 내가 가난한 집에서 자랐지만 상놈은 아니올시다.”
박정희가 반발했다.
“뭐라고? 삼촌이라카몬 성씨가 같아야 하는데 삼촌은 이씨고, 자네는 박씨란 말일세. 이 무슨 변고인가?”
그때 순박한 박정희가 한동안 쩔쩔매는데 이재복이 여유있게 받았다.
“우리는 외가의 삼촌도 그냥 삼촌이라캅니더. 지방마다 다르지요.”
이것을 상기한 김창동이 말했다.
“그자들이 군부 내에 침투해 여러 가지 지령을 주고 받고 포섭한 것을 몰랐단 말입니까. 김점곤 과장도 그때 포섭되었을지 모릅네다.”
김창동은 모든 사물을 빨갛게 보았다. 그는 내킨 김에 길게 설명했다.
“이재복이란 자는 경북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을 거쳐 박헌영으로부터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라는 중책을 맡은 사람이오. 그리고 박정희에게 군 책임을 맡겼소.”
이런 사실을 김창동은 엿장수로, 때로는 담배장사, 메밀묵장사로 변신해 잠복 근무하고, 교회와 면사무소에 접근한 끝에 정보를 캐냈다. 때로는 영하 이십도가 넘는 혹한에 담벼락에 기대어 그들의 접선 동향을 살폈다. 그런데 살려주자?
“안됩니다.”
“정말 답답한 사람이군.”
김안일도 어떤 결심이 서면 물러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김 대위는 이주하 김삼룡 이중업과도 대작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들과의 접선 기밀을 유지하는 건 뭔가. 그자들로부터 음성적으로 군자금을 받아서 활동한다는 뜻 아니야? 내 그걸 동지로서 묵인했던 거요. 영등포 유부녀를 따먹고, 돈까정 가로채고, 인천의 사상 불온 노동자들을 뇌물 먹고 놓아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소. 나는 반공정신이 투철한 김 대위가 모함을 받는 것이라고 해서 일소에 붙였소. 그러나 의심하기로 한다면 끝이 없고, 나도 김 대위를 비리 척결 차원에서 수사하겠소. 여자문제가 복잡한데 사실을 까뒤집어볼까?”
기가 팔팔하던 김창동이 갑자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사실 유무를 하나하나 따지자면 어떤 것은 맞고, 어떤 것은 터무니없는 날조였다. 그만큼 그에게도 적이 많았다.
그가 수사하면서 소문만을 듣고 겁주고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내듯이 김안일이 그렇게 강압수사를 한다고 하면 그 역시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런 수사를 담당하는 사람은 인간의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이 무엇인 줄 안다. 김창동이 멋적게 손을 들었다.
“살려낼 방법이 있습네다.”
“말해보시오.”
“박정희가 남로당 군책을 맡은 것은 분명하디만, 다른 군인들을 포섭하고 조직에 끌어들여서 소위 거사를 한 행동은 나타나지 않습네다.”
“거 보시오. 구체적으로 군대 내부에서 남로당 조직 및 포섭 활동을 한 흔적은 없소. 그런데도 그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망을 수사팀에 한 자 빼놓지 않고 알려주었소. 그렇다면 우리보다 더 큰 공로가 있는 것이오. 우리야 한두 혐의자를 찾아 잠복하고 미행했지만, 박정희는 그것을 일망타진하도록 리스트를 모두 넘긴 것이오. 이것으로 그는 충분히 면죄부를 받았고, 명예회복을 했소.”
“그러면 이렇게 하디요. 상선(上線)을 움직이려면 몇가지 절차가 필요합네다.”
그들이 궁리하고 있을 때, 백선진 정보국장이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두 사람이 정보국장실로 달려갔다. 백선진 역시 박정희의 구명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를 풀어주기 직전에 수사진의 다짐을 받아둘 필요가 있었다. 자칫하면 독박을 쓸 수 있다. 김안일이 박정희의 구명을 직접 거론했다 하더라도 수사관들은 불리하면 말을 바꾸는 버릇이 있다. 박정희를 풀어주기 위해서는 이들로부터 ‘모든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는 확인을 받는 게 필요했다.
“구명안을 생각해보았다면 두 사람, 이리 와서 서명을 하시오.”
그들은 ‘무슨 내용의 문서냐’는 표정으로 백선진이 내민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정보국장이 말했다.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에 가입했지만 실제 활동한 내용이 없어서 형 집행정지를 받는다는 점을 보증한다는 문서요. 나와 셋이서 함께 서명해야 하오. 그렇게 만들어 갑시다.”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안일이 재빨리 바지의 도장집에서 도장을 꺼내 서류에 도장을 꾹 눌러찍었다. 김창동은 머뭇거렸다.
“왜 그러는가.”
“이렇게 쉽게 내보내면 안됩네다. 이렇게 해야 하디요.”
“어떻게?”
“그가 밀고해서 체포돼온 좌익분자들 방마다 들어가서 한 놈씩 대면을 시켜야 합네다. 그러면 그는 그자들을 배신하는 것이 되고, 그자들 또한 배신자라며 박정희에게 침을 뱉을 것입네다. 그러면 그는 그들에게 더 이상 돌아가지 못합네다. 그들 중 살아난 자가 있더라도 그들은 박정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갔디요. 그리고 박정희는 우리쪽에도 찍 소리를 하지 못합네다. 무슨 낯으로 얼굴을 들고 나다니갔습네까. 동지를 배신한 비열한 자인데...”
“그거 아이디어인데?”
백선진이 쉽게 동의했다. 박정희는 그 뒤 풀려나 김창동 수사대에 합류했다. 그가 폭로한 사람의 숫자와 신원은 ABC급으로 나누어 백여 명에 달했다. 그는 그의 후배들의 집으로 수사대를 직접 이끌고 갔다. 그중에는 가장 아끼는 젊은 일본 육사 후배들이 많았다. 오민균이 그중 중심 인물이었다.
당시 이런 상황을 관찰했던 미군 관측통은 백여 명의 좌익분자들, 주로 군 장교들이 이 사건으로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제거되었다고 했다(그레고리 핸더슨의 보고서 일부 인용).
이현란과 박정희와 그 아들
이현란은 갑자기 복통이 오자 당황스러웠다. 남편은 여지껏 소식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출산하지나 무섬증이 와락 들었다. 복통이 점점 심해지자 그녀는 보따리를 싸는둥 마는둥 해서 이웃인 김학림의 집으로 달려갔다.
“언니, 애 나올 것 같아요.”
김학림의 아내 강희원 앞에서 그녀가 쓰러지자 강희원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잖아도 현란씨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잘 왔어. 자취집 같은 현란씨 집보다는 우리집이 몸을 푸는 데는 훨씬 나을 거야. 잘 왔어.”
이현란은 안방에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출산 예정일이 열흘 정도 남았는데 긴장된 나날을 지내서인지 자고 나자 아침 일찍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날 변을 보지 않아 배가 아픈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계속 복통이 이어졌다. 진통인지 가진통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첫 출산이라 모든 것이 서툴렀다.
강희원이 잔뜩 찡그린 그녀 얼굴에 뜨거운 물수건을 얹어주었다.
“불쌍한 것, 아비도 없이 아이를 낳고. 고향은 삼팔선으로 막히고, 부잣집 외동딸이 이 무슨 변고람....”
정작 당사자보다 강희원이 더 안타까워서 목이 메었다. 강희원이 산고를 토해내는 이현란을 보고 그녀의 아래를 살폈다. 자궁 경관이 열리면서 태아를 감싸고 있던 난막이 벗겨져 생기는 갈색 출혈이 보였다. 진통의 강도가 점점 거세지자 강희원도 안절부절 못했다. 이러다 사고가 나면 어쩌지? 그녀도 서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양수가 터졌다.
“힘 줘봐. 더 세게. 세게.”
이현란이 안간힘을 썼다. 이를 갈고 버티자 강희원이 그녀 입에 삼베를 물렸다. 밑을 내려다보던 강희원이 소리쳤다.
“와, 머리가 보인다. 힘써봐. 와, 그렇지, 그렇지.”
선분홍색 피가 흥건히 바닥을 적셨다. 산모는 겁이 나 떨면서 울고 있었고, 강희원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그래, 그래. 한번만 더 용써봐. 얼굴만 나오면 다 나오는 거야.”
기진맥진한 가운데 마저 용을 쓰자 이윽고 온 몸에 피칠을 한 푸르딩딩한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어려운 자연 분만으로 태어난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아기는 요란하게 울음을 터트렸다.
“고생했어. 장하다 장해, 이현란씨.”
이현란이 아이 울음소리 못지 않게 요란하게 울음을 터뜨렸다.
“현란씨, 순산이야. 걱정하지 마. 정희씨 곧 올라올 거야. 지금 전선이 불안정하잖아.”
그제서야 이현란이 진정을 하고 우리 그이 괜찮을까요? 하고 물었다. 출산이 임박한 것을 안 그가 이토록 소식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녀는 출산을 앞두고 액이 낄까 싶어서 그동안의 악몽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고향 원산 앞바다의 하얀 모래밭과, 푸른 해원을 가다가도 험악한 동물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고 으르렁거렸다. 그곳을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다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해지곤 했다. 어느 때는 외줄을 타고 끝없이 올라가다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정말 우리 그이 괜찮을까요?”
그녀는 비로소 박정희의 무소식에 조바심이 났다. 남편이 좌익에 가담했다는 말을 얼핏 듣기도 했고, 세상에 불만을 품는 말을 더러 하기도 했지만, 그럴 리는 없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그에게 분명히 명토박았다.
“난 공산당이 싫어서 북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부모님이 원산의 갑부고, 거기 가면 편안하게 살 수 있지만 난 자유가 있는 땅에서 당신을 사랑하며 살면 그만이에요. 큰 무엇을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 아이 낳아 기르면서 행복하게 살아요.”
이때 그는 아무 말없이 그녀를 힘껏 안아 주었다. 그것이 더 깊은 신뢰감을 주었다.
이현란은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주인없는 집안은 여전히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런 어느날 이현란이 맨발로 강희원의 집으로 뛰어들었다.
“언니, 우리 아이가... 우리 아이가...”
그녀는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강희원이 이현란을 부축하고 그녀 집으로 달려갔을 때는 아이는 이미 죽어있었다.
“우리 아이가 죽었어.”
이현란의 눈이 까뒤집힌 채 정신을 잃었다. 강희원이 그녀 입에 데운 물을 떠넣고 몸을 주물렀다. 한참만에 제 정신으로 돌아온 그녀가 와크르, 울음을 터뜨렸다. 강희원도 함께 울었다.
두 사람은 남산의 소나무 숲으로 죽은 아이를 포대기에 싸안고 갔다. 얼어붙은 땅을 야전삽으로 파서 아이를 구덩이에 넣자 또다시 이현란이 통곡했다.
“애비 얼굴 한번 못보고 가다니, 이름도 하나 얻지 못하고 가다니, 이 무슨 운명이냐.”
한없이 우는 그녀를 강희원이 등을 쓸어주며 함께 울어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녀가 사라졌다. 누군가는 고향이 멀리 보이는 동해안 바닷가로 갔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이도 있었으나 누구도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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