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 32장 제주 포로수용소장
잡초가 우거진 들판에 표지판이 하나 말뚝에 박혀 바람에 시달렸는지 빼뚜름히 아무렇게나 서있었다. 제주도포로수용소. 벌판 한쪽에 풍향을 알려주는 초롱이 하늘 높이 떠서 바람을 한껏 먹은 채 빵빵하게 펄럭였다. 그 아래 비행장이 조을 듯이 펼쳐져 있는데, 철조망 안쪽에 낡은 비행장 청사와 격납고가 보이고 잔디로 덮은 봉긋한 무덤 같은 유류저장고, 탄약고, 검은 그물망으로 가려진 포 진지가 보였다. 격납고 옆엔 연락기와 수송기가 몇 대 서있고, 연이어 보안대 건물과 군인 숙소인 반달형 퀀셋이 붙어있었다. 그 뒤로 철조망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수용소 간판이 서있는 곳을 지나 평평한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타나고, 그 아래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파도는 일정한 간격으로 몰려와서 자갈밭에 부서져 하얀 포말을 남기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맑고 푸른 바다 위로 물새들이 평화롭게 날았다.
수용소에는 십여 개의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수용자는 10대 소년에서부터 7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 분포가 다양했다. 이들은 산에서 내려오거나 체포된 사람들이었지만, 마을에서 농사를 짓다가 붙들려온 농부와 바다에서 끌려온 어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용소와 철조망 주변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은 꾀죄죄한 행색이었다. 천막은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습기가 차올라 바닥에 깐 가마니가 축축했다. 벼룩과 이가 들끓고 밤이면 모기가 피를 빨아먹어 수용자들이 한결같이 피부병에 걸렸다. 포로수용소장 오민균 소령은 상황을 파악하고 식수 공급과 목욕 및 세탁물 처리를 위해 물탱크를 설치했다. 식량과 피복을 부족하지 않게 준비했으나 밀려드는 수용자 때문에 넉넉하진 못했다.
오민균의 첫 번째 임무는 수용자의 분류였다. 귀순자 중 용의자와 비용의자, 게릴라와 비게릴라, 일반 주민과 상인 회사원 등 직업 따위를 구분했다.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은 손과 발을 보고 파악했다. 농부와 어부의 손, 장사꾼과 사무직의 손, 그리고 학생, 이렇게 분류해 생계를 꾸려가는 농사꾼과 어부, 부녀자부터 풀어주었다. 그가 하는 역할은 수용자를 풀어주는 일이 주임무인 것처럼 보였다. 며칠 지나자 풍문이 돌았다.
“일하는 사람부터 풀어줘서 생계를 도와준다.”
“아니다. 폭도를 검증절차 없이 풀어주고 있다. 우리 부모를 해친 놈들인데 묻지도 않고 풀어준다.”
“좌익계만 풀어준다.”
“아니다, 우익계가 더 많다.”
개인의 유불리와 이해에 따라 각기 의견이 달랐다. 포로들은 각 부대에서 며칠 잡아두었다가 후방으로 이송했는데, 최종 집결지가 포로수용소였다. 그런 가운데 탈출자도 속출했다.
“경비가 허술하다.”
“탈출한 것이 아니라 풀어준 것이라니까.”
천막의 대표들이 가짜로 서류를 꾸미거나 초병과 짜고 수용자들을 내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오민균은 알고 있었지만 통제하지 않았다. 어차피 풀려날 사람들인데, 심하게 단속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어느날 연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석방자 중 폭도대에 다시 합류하는 자가 있소. 성분조사 하는 거요, 안하는 거요?”
오민균은 천막의 손수건만한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멀리 솟은 풍향탑에서 펄럭이는 깃발과 한라산의 우아하고 기품있는 자태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왔다. 주민들은 어느새 서로의 가슴에 원수를 키우며 살고 있다. 자격 심사를 한다고 했으나 가능한 한 풀어주는 것이 그의 수용소 운영 방침이었다. 그것을 악용하는 자가 있고, 속이는 자도 있다. 하지만 똑같이 고통을 겪는 이웃들 아닌가. 대립하고 증오하고 저주하는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 이웃이다. 그런데 어느새 각자 가슴에 복수를 키우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다. 그는 스피노자가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의 모든 악은 부분적인 앎에서 나온다...
“포로수용 규정집을 가져오라.”
상념을 멈춘 오민균이 책상에서 가르방을 긁고 있는 부관에게 지시했다. 부관이 가져다 준 포로수용 규정집에는 포로란 교전 중 체포된 적군으로 정의했다. 법률적 의미에서 볼 때에는 정규적인 군사 업무의 성원들로 분류되지만, 게릴라와 비전투원도 포함되었다. 무기를 들고 투항하는 민간인, 군대와 관계를 맺고 있는 비전투원, 교전국에 억류된 적대국의 국민도 해당된다.
범위가 넓다고 하지만 산에서 내려온 제주 주민이 포로일 수 있을까. 국제기준에 합당한 지가 불분명했다. 적인지 폭도인지, 불순분자인지 아닌지가 모호했다. 빨래터에 모이면 똑같이 다정한 이웃사람이다. 그래서 어차피 떠나보내는 사람들이라면 농번기 일손이라도 보태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생업에 종사하도록 도와주는 것도 필요한 선무 교육의 하나였다.
그는 규정집에서 2차 세계대전 포로수용소 운영 실태를 파악하고 오싹 하는 기분에 젖었다. 나치의 포로수용소나 연합군의 포로수용소나 운영 방식이 비슷했다. 나치의 포로수용소 운영은 포로를 아예 없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죽이는 것이다. 죽이는 방법도 다양한데, 나중에는 귀찮아서 독가스실에 집어넣어 수백명씩 한꺼번에 질식시켜 죽였다.
연합군 역시 독일군 포로를 잡으면 가혹하게 다루었다. 빵에 독약을 섞어 수백명을 독살하기도 했다. 지휘감독관은 불법인 줄 알면서도 복수라는 이름으로 묵인했다. 미국과 영국은 독일군 포로를 소련에 인계했는데 독일군과 가장 격렬하게 싸운 소련군은 이들을 시베리아 수용소에 배치해 하루 14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시키고, 노동력을 착취한 다음 근태를 이유로 즉결처분했다. 이렇게 해서 독일로 귀환한 포로는 30만 명 중 3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제주 수용소만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오민균은 마음 속으로 다졌다. 왜? 그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기 때문에. 동족이라서가 아니다. 죄악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해서는 안된다.
어느날 토벌대로부터 어승생악과 노루악 인근의 연대 작전구역에서 폭도 둘을 생포했다고 연락이 왔다. 심문 결과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다가 도망간 폭도들이었다.
“포로수용소장이 풀어줬소. 부모님은 병들어 누워계시고, 제가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호소했더니 풀어주었습니다. 산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풀려난 폭도들이 심문 결과 실토한 내용이었다. 수용소의 과오가 자꾸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 때, 일부 귀순자는 석방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편안히 먹고 지낼 수 있어서만이 아니라, 수용소 내에서 폭도대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세포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고 있었다.
최경산 연대장이 비상전화로 오민균 소령을 불렀다. 포로수용소는 독립적으로 운영됐지만 미군정과 연대 본부의 통제를 받았다.
“지금 연대로 들어오라. 들어오면서 부로자 문건 서류 가져오라.”
그는 화가 나있었다. 연대장 부속실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중앙에서 내려온 기자들이 소파에 둘러앉아 연대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오민균은 연대장실로 들어가 챙겨온 문건을 내밀었다.
“귀순자 석방 기준이 뭔가.”
최경산이 다자고짜 물었다.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 즉 어부, 농부, 학생, 아녀자 중심으로 분류해 내보내고 있습니다.”
“석방자 중에 폭도대 가담자가 있는 걸 모르는가. 도대체 기준이 뭐야?”
“엄격한 심사는 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나? 직무태만이고 직무유기야. 아니면 사보타진가? 끝까지 봐줄 성 싶나? 기자들이 대거 몰려왔어. 왜 그러는 줄 아나?”
오민균은 침묵을 지켰다.
“누군가가 신문사에 찌른 거야. 사사로운 인정이 사태를 그르친다는 걸 알라. 연대 내에서도 불만이 많다. 기껏 잡아다 주는 걸 풀어줘버리면 어떡하나. 석방자들이 다시 폭도대에 가담하면 말 다한 거 아냐? 기자들이 물고 늘어질 거야. 경찰이 데려온 거야. 뒤탈 없도록 하게.”
똑똑 노크 소리가 나고 부관이 들어와 회견준비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연대장이 무거운 얼굴로 접견실로 나갔다. 오민균이 그의 뒤를 따랐다. 최경산이 좌정하고 모두 발언을 했다.
“4.3 발생 이후 7월 현재까지 국방경비대 제주도방면사령부에서 취급한 부로 수는 1,800명 입니다. 그중 석방자가 1,600명이며, 현재 부로수용소에 수용된 귀순자가 200명 내외이며, 송청자(送廳者)가 46명입니다. 송청자 46명은 주모자로 인정되는 사람들이며, 그중에는 여성이 몇 명 있습니다. 여성들은 직장인과 주부가 반반인데 학력이 고녀 이상 출신들입니다.”
한 기자가 물었다.
“국방경비대 병력이 산에 올라가면 폭도대들이 발포하지 않고, 경찰 병력이 올라가면 발포한다는데 사실입니까.”
“그것은 사실입니다.”
최경산이 짧게 대답했다. 어이없다는 듯 기자가 물었다.
“왜 그렇습니까. 박 연대장 암살이 엊그제인데 벌써 군과 폭도대 사이에 다시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나요?”
“그들이 전술상 그렇게 하겠지요.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무책임한 발언이 아닙니까?”
“무책임하다고 해도 할 수 없소.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그럼 사태해결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최경산이 오민균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주도 사태에 있어서 무력 해결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소. 귀순자가 많은 것으로 입증되오. 내가 어느 지방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밝혔소. 그리고 지금 부로들을 관대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용소장에게 죽게 된 사람을 살려주었다고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연대장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오민균은 예상하지 못했다.
“폭도들이 풀려나는 것은 수용소 안에 동조세력이 있기 때문라면서요? 그들의 도움으로 풀려난다면서요?”
“단정적으로 말하지 마시오. 지금 여기 부로수용소장이 와있소. 보충 설명을 들어보세요.”
그러자 대답하려는 오민균을 제지하고 기자가 물었다.
“방금 연대장께서 부로수용소라고 하셨는데 포로수용소와 어떻게 구분됩니까.”
“포로는 전쟁포로를 의미하고, 부로는 부랑자들로 이해하십시오. 제주도에 전쟁포로는 없습니다. 포로수용소란 말이 싫어서 일부러 부로수용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법률적으로도 틀린 용어가 아닙니다.”
실내가 술렁거렸다. 최경산이 오민균에게 시선을 주자 오민균이 나섰다.
“수용소장으로서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방금 연대장 각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제주도 문제는 평화롭게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파리 잡기 위해 대포 쏘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기자가 물었다.
“산사람들이 발행하는 ‘혈서’라는 유인물을 보면, 요구 조건이 경찰관의 무장해제, 단정 반대의 자유 허여, 사설 청년단체의 즉시 해산, 제주도내에 있는 모든 행정관리의 본도민 기용이라는 것 등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제 답변 범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다만 요구는 요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중 한두 개 달성하면 그것만큼은 성공했다고 보고, 요구를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연대장이 보충 설명했다.
“여러분이 회견 전 무기고에서 산사람들로부터 압수한 무기들을 보셨을 거요. 일본군 구식 총과 권총, 일본군도, 와사탕기, 화약기구, 죽창, 톱, 의류, 전화기, 미싱기를 보았을 것이오. 전화기는 한라산 속 수많은 진지동굴에 연결되어 있는 통신기구이고, 미싱기는 산속에서 의복을 수리하고 제조하는 데 사용하고 있소. 이것들을 때려 부수려면 더많은 화력과 더많은 인명 살상이 요구됩니다. 옷을 깁는 재봉틀까지 부숴버려야 되겠소?”
“적과의 싸움에 한가로운 인간애군요.”
“그들은 이민족도 아니고 적도 아니오.”
“경찰은 강경책을 목표로 하는데, 군은 기피하는군요. 제주 현지의 경찰과 군인의 구성비는 어떻습니까.”
“본도 내에 경찰의 정상 원수는 300명 정도인데, 지금 응원 경찰이 2,000명이 들어왔습니다. 청년단 등 사설단체도 그 숫자만큼 들어왔으니 폭도대와의 구성비는 20분지 1도 되지 못하오. 화력은 100분지 1도 안될 거요. 그런데도 저것들 까부는군요. 우리 군도 지금 증원되고 있습니다. 2000명을 헤아릴 것입니다. 섬이 이들로 빼곡이 찰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해결이 난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군은 섬멸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강경토벌로 나가면 뒤에 제주 인민 30만명이 일어납니다.”
다른 기자가 물었다.
“군과 경찰이 왜 서로 갈등관계로 비협조적입니까.”
“진압 방법이 다르면 생각도 다르겠지요. 작전이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있구먼? 토벌 방식이나, 포로수용소 운영방식이나, 군경간에 협력 방식이나...”
그들은 경찰의 관점으로 질문하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최경산 연대장이 오민균에게 말했다.
“저것들이 어떻게 긁어댈지 모르겠네. 좌우간 포로수용소가 또다른 분쟁지역이 되면 곤란해. 전선이 확대되잖나. 잡아다 주면 관리를 잘해야지. 성분 조사 철저히 하도록. 생필품 부족한 건 없나?”
“미군 물자를 넘치게 받고 있습니다. 연대장 각하의 배려로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국 자선단체들에게 고맙다고 해야지. 벼라별 물건이 다 들어오지?”
“그렇습니다.”
오민균은 한 소년의 우스꽝스런 복장을 떠올렸다. 열서너 살쯤 되어보이는 소년은 미국 성인 신사복을 외투처럼 입고 쏴돌아디녔다. 한국 성인남자가 입어도 헐렁해보이는 자켓이었다. 소매가 밖으로 반이나 나와서 팔을 휘두를 때마다 허수아비처럼 팔을 팔랑거리며 다녔다.
“한 어르신은 식중독에 걸려서 매일 설사를 하더군요. 전염성이 강해서 서둘러 처치를 하는데 우유를 과도하게 먹은 탓이에요. 분말우유를 날로 먹고, 냉수에 타먹고, 연일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으니 위장이 놀랐겠죠. 미국인 위장과 한국인 위장은 다를 테니까요.”
연대장이 조용히 웃다가 물었다.
“무장대가 깊은 밤에 포로수용소에 잠입해 와서 동료를 불러낸다는데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알고도 방치하면 어떻게 되지?”
오민균은 침묵을 지켰다. 정작 할 말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어설픈 휴매니티가 막대한 지장을 준다는 것 알게. 다칠 수 있네. 매일 매복조가 대기하고 있고, 협조하는 초병들도 있다고 하니 주의하게.”
“알겠습니다.”
며칠 후 주요 중앙 일간지엔 ‘제주 포로수용소, 체포된 폭도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석방’이란 제목의 기사가 떴다. 오민균은 야릇한 절망감에 젖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제주기지사령부 정보고문 김종태 소령이 오민균 소령을 찾았다. 지휘관회의를 통해 몇차례 정보교환 차 만났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짚을 깐 바닥에 놓인 소파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바람이 천막을 때릴 때마다 거칠고 음산한 소리를 냈다. 천막의 천이 펄럭이는 깃발 같았다. 습내가 나는 쓸쓸한 막사였다.
“딘 소장이 주재한 제주 최고위급 회담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김종태가 뚱딴지같이 물었다. 비밀협상의 실패 트라우마는 오래도록 오민균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는데, 그가 상처를 덧내고 있었다. 오민균은 침묵을 지켰다.
“나 역시 비밀회담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소. 조병옥 경무부장이 포용적이었다면?”
“....”
오민균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갑작스런 방문에, 또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그는 오민균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듯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나는 김익창 연대장이 서툴렀다고 봐요. 혈기로, 단기필마로 뛰어들면 애마까지 죽이고 말지. 대책회의가 실패한 것은 회의 진행 스킬의 미숙 때문이오. 회의 주재자는 이미 정해진 결론을 가지고 끌어가는데, 이를 바꾸려는 사람은 치밀한 준비를 하고, 지휘관을 설득하기 위한 목소리, 표정, 제스처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아무런 준비없이 혈기와 당위성만 가지고 대들었단 말이오. 논리적인 강조보다 정감적인 표현수사법이 먼저 사람을 움직이지요. 그 대책회의가 얼마나 중요한 회의입니까.”
“그러게요.”
오민균이 쓸쓸하게 맞장구쳤다. 사실 그렇다. 30만 도민의 운명이 걸린 회의인데... 그도 5.5 대책회의를 두고 두고두고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좋은 기회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한국 사람들은 회의 문화가 빈약해요. 쌈박질로 끝나거든. 그러면 누가 손해요?”
“약자가 손해겠지요.”
“그렇죠. 아랫 사람이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면 상하 관계적인 분위기를 먼저 고려하는 것이 전달력의 기본이요. 통계 수치와 자료 사진 등 타당성 있는 근거들을 준비해서 조근조근 설득해야지. 그런데 이 중대한 시기에 혈기 하나로 한번 찔러보고 끝내다니, 무책임하지 않소? 회담에는 협상의 본질보다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나? 예법을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는 더욱 그렇지. 난 조병옥씨보다 김익창 연대장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안그렇소?”
그러나 회의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하더라도 잘 됐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강자의 의도대로 회의는 결론나게 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지금 되새긴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김달삼이 북으로 갔다는 정보를 알고 있소?”
“북이라니요?”
오민균은 수용소 일 외엔 아는 것이 없었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고, 쓸 생각도 없었다.
“수용소가 정보의 저수지 아니오? 여기 수용소엔 첩자들이 득시글거린다는데, 모른다고요? 이곳은 폭도들이 드나드는 비밀 루트 아니오?”
순간 오민균은 불쾌감이 확 들었다. 그가 무엇을 캐기 위해 방문한 것 같았다.
“드나든다 해도 난 나대로 관리하고 있소.”
경계의 태도로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제주 사태를 볼 때, 어떤 흐름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4월 29일 김달삼과 김익창 간의 평화협상이 체결되었으나 오라리 폭력사태로 휴전이 깨졌다. 뒤이어 열린 딘 장관, 조병옥 경무부장이 참석한 제주 최고위급 회의에서 수습 방안이 상정되었으나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파회 되었다. 김익창 연대장이 즉시 보직 해임되고, 후임 박진경 연대장이 부임하면서 강경토벌 작전이 강행되고, 그리고 그는 곧 암살되었다. 이때 김달삼은 동력선을 타고 제주를 빠져나가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로당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다. 살펴보니 사건은 일정한 맥락을 갖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김달삼은 내 대구 소학교 동창이오. 아버지가 대구에서 양조장을 경영한 부자였소.”
“그래요?”
오민균이 의아해서 물었다.
“내가 제주신문사 김영수 국장과 함께 별도로 김달삼과 비밀협상을 추진했소. 그런데 잡으러 간 줄 알고 그는 도망을 가더군. 이념은 이렇게 우정마저 갈라놓는 것이오. 그는 아버지를 따라서 어렸을 적에 대구로 이주해왔고, 그의 아버지가 양조장을 경영해서 유복하게 살았지. 소학교를 마치자 나는 가게 점원으로 들어갔는데, 그는 중학부터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소. 한 사람은 가게 점원이고, 한 사람은 일본 유학생.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지더군. 그런데 해방이 되어 귀국한 그가 나에게 먼저 다가왔소. 대구 10.1사건에 동창 친구들을 끌어들이는데 나는 점방 일도 바쁘고 해서 함께 하진 못했지. 얼마 후 그가 제주도 처가로 숨어들어가더니 한라산 빨치산 대장이 되었다는 거요. 나는 그가 본명 이승진을 버리고 김달삼으로 사는 것을 여기 와서 알았소. 그는 대구에서 같이 활약하던 문상길, 손선호를 불러들였던 것같소. 이걸 몰랐소? 나는 그렇게 알고 있소.”
“금시초문입니다.”
“내가 제주도 지도층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소. 그들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청산하고 민족의 역량을 한데 모아 중립국을 만들자고 하더군. 북한과 함께 인민공화국을 만들자고 할 줄 알았는데, 중립국 얘기를 하더군. 그렇더라도 좌우지간 위험하지 않소?”
“뭐가 위험하다는 것이죠? 어떤 체제도 따지고 보면 다 위험하고 불안하지 않습니까?”
“그게 현실성이 있냐는 거요. 미국도 소련도 아니고, 중립국으로 간다? 몽상가들 아닌가?”
“이런 세상에는 몽상가들도 필요하죠. 새로운 체제는 이상주의를 꿈꾸는 자의 몫이니까요.”
“몽상가들, 좋지. 제주 사건이 미몽의 한 전형이오. 너무 비현실적인데 무모하게 꿈을 꾼단 말이오. 제주 문제는 단순하긴 하지. 어렵게 만드니까 복잡할 뿐이지. 그들 식으로 살도록 내버려두면 간단히 끝나는 문제지. 좌파·우파·중립적 시각, 주민의 입장, 경찰의 입장, 군의 입장이 다 다르게 나오지만 진실의 눈으로 보면 단순하게 풀리는 거지. 그런데 그게 아니야. 바로 정의가 물구나무 섰기 때문이요. 내가 묻겠소. 정의란 무엇이오?”
그는 담론에 익숙한 사람 같았다.
“단순하죠. 어렵게 생각하니가 어려울 뿐이고, 실행을 못하니까 관념이 돼버리죠.”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가령 교사가 아이들에게 차별적으로 대한다면 차별당한 아이가 수용하지 않겠지요. 부당하다고 반발하는 그것이 정의의 본질 아니겠소? 이때 선생이 대든 학생을 체벌한다면 힘의 순서대로 가겠다는 것이고, 힘이나 무기의 순서대로 간다면 질서가 무너지겠지요. 정의란 억울한 사람에게 억울한 일이 없도록 행동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러나 정의가 신의 영역인 것처럼 모두가 어렵게 받아들인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가난한 자에 복이 있나니’라는 성경의 말씀도 꼭 그들이 옳고 정당해서가 아니라 소외받고 외롭고 고달픈 그들 편에 서겠다는 예수의 사랑의 표시 아니겠습니까? 누구도 보살펴주지 않는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낸다는 위로. 기존 기득 세력은 그들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 있고, 또 권력과 돈의 힘으로 약자를 쪄누를 수 있죠. 오만하게 군림하고 짓밟지요. 정의가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헌데 오늘날 정의의 칼이 너무 멀리 있고 무디지요.”
“나도 한마디 보내겠소. 철학자 존 슈트어트의 말입니다만, 정의란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옳지 못한 일을 저지하는 힘입니다. 해야 할 발언을 하지 않으면 옳지 못한 것이 되고, 해서는 안될 일을 하면 정의의 칼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서양의 보복과 응징의 법칙입니다. 이분법적이지만 그런 태도부터 가지고 시작하라는 것이지. 정의롭지 못한 그 순간 도덕적 권위는 사라진다는 것이지...”
화제는 이상한 방향으로 굴러갔다. 그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일본에 부역해 권력과 자본을 쌓은 자는 불의이고, 조국을 찾겠노라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정의라는 논리인가?”
오민균이 받았다.
“그렇게라도 단정해야 역사 정리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독립군은 보람을 얻게 되고 친일 부역자는 자숙해야 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바른 세상이 되고, 정의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그럼 역으로 묻겠습니다. 독립운동가를 가두고 모욕을 주는 현실이 정당합니까.”
“현실적으로 보세요. 그들 뒤엔 미국이 있소. 무턱대고 오만을 부리는 것이 아니오. 분단을 지렛대삼아 억압을 정당화하고, 분열과 대결을 조장하고, 그런 가운데 기득권의 성벽을 견고히 쌓는 거요. 제주도 사태도 자체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지만, 불화를 키워서 그들의 기득권의 성벽을 쌓는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오.”
그가 다시 이었다 .
“우리의 현실이 꼭 미국놈들, 일본놈들, 그 하수인들 때문만은 아니오.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우리가 더 뼈아프지. 오 소령, 임진왜란 때의 사대부 태도를 아시오?”
“잘 모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단숨에 한양을 점령한 왜군 수장이 했다는 말이 있소. 왜의 장수가 썼다는 ‘조선침략전쟁 참전기’요. ‘이것이 대저 나라인가. 싸움 한번 하지 않고도 우리는 한양까지 진격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 백성의 머리를 가지고 온 조선인이 많았다. 쌀 몇됫박 받아가기 위해 이웃 사람의 두상을 잘라 가져온 것이다. 우리는 당황하였다’ 라는 것이오.”
“지나친 자학도 병입니다.”
“과연 자학일까? 지금 현실을 보면 자학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그때 천막 밖에서 누군가 얼쩡거렸다. 아낙네와 단소 체구의 노인이었다. 초병은 어디로 새버렸는지 그새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오민균이 나가서 그들을 맞았다. 아낙네는 고구마와 감자가 담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있었고, 노인은 생선이 담긴 대나무 조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지요?”
“수용소장님, 나는 정뜨르 갯가에 사는 늙은 것입니다.”
“그래서요?”
“산에 있는 아들한테 양식을 갖다 주러 갔다가 붙잡혔지요. 그런데 수용소장님이 풀어주셔서 이렇게 살아났답니다. 하지만 다시 아들을 찾아야지요. 그래서 돔 몇 마리하구 문어를 가져왔습니다. 저 여자는 이웃동네 영바우 어멍이고, 내가 온다니께 따라나섰습니다요. 남편이랑 함께 잡혀갔다가 홀로 하산했는데, 메칠 전에 소장님이 석방시켜 주셨다고 하네요. 저 어멍도 남편을 찾는답니다,”
“그러셨나요. 들어오시죠.”
그제서야 그는 긴장을 풀고 노인과 아낙네를 천막 안으로 안내했다. 접이 의자를 내놓자 두 사람이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폭도집결소에서 다 죽는 줄 알았지요. 험하게 다루니까요. 그런데 포로수용소로 옮겨와서 살 것 같았습니다. 심사를 너그럽게 해주고, 집으로 돌려보내주셨지요. 집에 가자마자 바다에 나가서 갯것을 잡았습니다. 어부들이 바다에 없으니 고기들이 많습니다.”
“그랬군요.”
아낙네가 뒤따라 나섰다.
“사람들이 다시 수용소에 들어가겠다고 해요. 피복을 받고 식량배급을 해주고, 약품을 주어서 다시 오겠다고 해요. 피부병 걸린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나았어요.”
“미제 약품이 좋아서 그렇지요. 제가 낫게 해드린 것은 없습니다.”
“약을 주셨싱게 나았지 안주었으면 나았겠습니까요.”
오민균은 우울한 생각들이 한순간에 날아간 기분이었다. 그는 처우개선과 의사 존중, 강압적인 심사 배제 원칙을 지킨 것이 얻은 것이 많다는 결론을 내렸다.
“회로 먹어도 좋고, 구워잡솨도 되지요.”
“잘 먹겠습니다. 어려운 걸음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이때 한 소년이 바구니를 들고 왔다. 바구니에는 아직 푸른 기가 도는 귤이 들어있었다.
“아버지가 갖다 드리라 했습니다. 수용소장님을 모시겠다고 날짜를 받아 오라시네요.”
“오소령 정착하구려, 하하하.”
김종태가 부럽다는 듯이 말했으나 그는 돌아간 며칠 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폭도와의 비밀 접선이 이적 행위라는 혐의였다. 그가 한가하게 포로수용소를 찾은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쫓기는 사람은 어딘가 헛헛해보였다.
임신과 종말
오민균이 문상길의 처형 소식을 들은 것은 사형이 집행된 며칠 후였다. 신문에서 짤막한 사형집행 기사를 보는 순간 그는 정신이 아찔했다. 평온을 되찾으려 했지만 구토 증세까지 일어났다. 토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는 천막 밖으로 나가 웩웩 힘껏 토했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뭔가 쓸쓸한 것 같고, 허무한 것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동안 울었다.
자리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으나 혼란스러웠다. 면회 한번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재판 과정이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그의 처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막연히 지켜보는 사이 형이 집행되었다.
오민균은 그를 만나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귀관으로 인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강경 토벌의 명분만을 안겨주었다. 해결책이 강구되긴 커녕 문제를 더 복잡하게 헝클어놓았다. 나 역시 폭도대에 대한 강경진압책을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여우를 잡으려다 호랑이를 맞이하는 것이다. 약자에겐 사태해결이 갈수록 어렵고, 강자에겐 갈수록 쉬운 것이 이런 사건이 갖는 속성이다. 빌미만을 찾는 권력은 옳다구나 하고 이용할 것이다. 이념의 간판을 걸어놓고 피를 부를 것이다. 거기에 이용당하고 말았다...
도대체 이념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허깨비 같은 물건이 아니냐. 양심의 소명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모든 폭력을 강제하는 무기. 그 속에 우리가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문상길이 응답하는 것 같다. 대대장님, 이건 대한민국 정부를 향해 결행한 나의 혁명입니다. 오민균이 반박했다. 그건 살인행위를 정당화한 비겁자의 자기 변명이야. 그것이 두려워서 결행했겠습니까. 그러나 한 줄기 가느다란 협상의 문마저 닫아버렸잖아. 대대장님, 순진하군요. 저들은 협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시늉일 뿐입니다. 아직도 사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했군요. 이런 식이라면 제1, 제2, 제3의 문상길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의 자신의 안락을 기꺼이 헌납한 우리 선각자들의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를 보십시오. 개인적 고통을 딛고 희망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습니까. 넌 아냐. 거룩한 이름들을 가지고 자기합리화하지 말라. 동일시할 수 없어.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대대장님, 제주사건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나의 진정성을 모르시나요? 너의 진정성은 판만 키우고, 저들의 수에 말려들었을 뿐이야....
“소장님, 어디 편찮으세요?”
그의 곁에 현호영이 서있는 줄도 모르고 그는 한동안 상념에 젖어있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 보는 현호영의 눈빛이 애처로웠다.
“내가 잠시 혼란에 빠져있었소.”
“그냥 돌아갈까요? 메리야쓰하구 팬티, 양말을 새로 가져왔어요.”
현호영은 포로수용소를 찾아 누더기가 된 담요를 빨아 바늘로 깁고, 때로는 반찬거리를 가져왔다. 오민균이 눈으로 앞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미안해요. 오늘은 좀 쓸쓸하고 센티멘탈해져서...”
“그럼 우리 바닷가로 나가요. 쓸쓸할 때는 바다가 우리를 위로해줘요.”
두 사람은 포로수용소를 나와 무성한 풀밭을 지나 바닷가로 나갔다. 그녀는 언제나 단아하면서도 청순한 분위기를 풍겼다. 흩날리는 긴 머리칼 속에 큰 눈과 하얀 이마, 적당한 높이의 코와 꽃이파리 같은 입술. 보기만 해도 그의 마음이 싱그러웠으나 오늘은 그런 모습까지 슬퍼보였다.
“여기 앉아요.”
바로 눈 아래 바다가 펼쳐졌다. 파도가 밀려와 해변의 돌밭을 적시고 물러갔다.
“아이를 가졌어요.”
주어가 빠져서 그는 한동안 무슨 말인지 몰랐다. 현호영이 담담하나 또렷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군요. 알아요. 당신 약혼녀가 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내가 감당할 몫이니까요.”
슬픔의 내용은 그것과는 전연 상관이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비감에 젖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 이윽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도 덩달아 섧게 울었다. 한 사람이 가고, 한 사람이 온다... 왜 하필 이때 오니. 서로가 감당하기 어려운 시기에 오니. 내가 짊어질 운명이지만, 그것까지 감당하기엔 내가 너무 절망적이다. 그러나 절망의 시기에도 우주의 질서는 그렇게 변함없이 운행이 된다.
최경산 연대장은 2개월 복무하고 본래의 주둔지인 수원 11연대로 복귀했다. 육군본부의 명령을 따른다고 했지만, 그의 평소 언행을 볼 때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는 제주에 와있는 것 자체를 수치로 알았다. 평소 토벌을 귀찮아하던 품성대로 육군본부에 손을 쓰더니 제주 출신 병사들을 인솔해 수원으로 복귀해버렸다. 제주 출신 병사들을 육지로 빼돌린 것은 진압작전에 여러모로 걸리적거렸기 때문이었다.
부연대장 송요평 소령이 연대를 물려받아 새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11연대는 수원으로 가고, 제주는 다시 9연대로 원위치했다. 제주 출신 병사들 상당수가 11연대로 배속돼 제주 9연대는 육지인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대대급 병력이 외지로부터 들고 났다. 편제 구성과 이동이 어수선했다. 그만큼 9연대 병력은 안정되지 못했다.
토벌작전은 종전과는 양상이 달랐다. 해안에서 500m 이상의 산간지역엔 통행금지령이 내려지고, 주민 소개령이 떨어지고, 그 지역에 들고 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살된다는 포고령이 내걸렸다. 뒤이어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오민균은 우려했던대로 사태가 최악의 상태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서북청년회의 단원들 중 20여 명이 경찰관으로 편입되고, 그중 구대구는 순사부장인 경사 계급장을 달았다. 일제강점기 순사보 계급장만 보아도 공연히 쫄았는데 직접 경사 계급장을 다니 그는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계급장이 부착된 제모를 멋들어지게 한번 씌워드리고 싶은데 38선으로 가로막혀버렸다.
“너는 벼슬길하고는 먼 인간이니 지게나 져야디” 하시던 부모님께 제모를 씌워드리고 싶었다. 부모님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고 기절초풍하실 것이다. 그렇게 부모님을 놀래키고 싶었다.
그는 일본군 군조(하사관) 지망 시험에 응시했으나 매번 탈락했다. 구구단 따위를 외지 못한 것이 탈락의 이유였다. 그런 그가 파출소장급인 경사를 달았으니 부모님은 그의 성공을 눈물로 반겨주실 것이다. 그런 부모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통탄스러웠다. 그것이 운명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대신 나라를 내 부모님으로 삼자. 나라에 충성하고 이승만 박사를 즐겁게 해드리자. 이 박사는 우리의 국부가 아니신가. 그를 즐겁게 하는 일은 빨갱이를 많이 잡아올리는 일이다. 그는 금방 기분이 유쾌해졌다.
마침내 경찰 편입식 날이었다. 구대구는 신임 경찰 대표로 답사를 했다.
-제주비상경비사령관 각하와 제주경찰감찰청장 각하, 제주 지사 각하, 김재풍 제주도 서북청년회 위원장 각하, 서북청년회 부하 여러분!
저는 여러 어르신들의 음덕으로 저의 오늘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분골쇄신, 용맹정진,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서합니다!
문자를 총동원해 연설을 마치자 신입 경찰들이 줄기차게 박수를 쳤다. 서청 대원의 상당수가 경찰로 기용된 자들이었다. 저런 고상한 문자로 답사를 하자 마치 자신들이 말한 것처럼 의기양양해지는 것이다. 권력은 이런 맛에 쥐는 모양이다. 식이 끝나고 주요 간부들이 비상경비사령관실로 자리를 옮겼다. 차 한찬 마시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갈 참이었다. 모두 사령관실 응접실 소파에 앉자 김재풍 위원장이 큰 소리로 떠벌였다.
“여러 어르신들, 제주 사태는 통일 정부를 갈망한 수많은 민중들의 의지를 대변한 항쟁이래요. 이거 맞습네까? 뚫린 입이라구 이렇게 갖다 붙여두 되는 것입네까?”
그러면서 화가 난 표정으로 호주머니에서 유인물을 꺼내보였다. 유인물은 무장자위대가 찍어낸 삐라였다.
-희생자가 급증한 것은 무장자위대의 저항이 증가한 때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쫓기는 시기에 다발하였다. 학살 집행자인 파견 군대와 경찰, 우익청년단은 규율이 결여된 채 공사의 구분 없이 닥치는대로 폭력을 행사하였다. 여성에 대한 강간, 유희적인 살인, 무자비한 참수 등 반인도적·반인륜적 범죄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탄압에 저항하는 제주도민의 행동은 그래서 정당하다. 평화롭게 살겠다는 자치적 투쟁과 단독선거 반대라는 정치적 투쟁이 무엇이 틀렸다는 말인가. 항일 투쟁을 통해 정통성을 이어받은 제주 인민위원회 등 제 단체는 무자비한 탄압에 끝까지 항전할 것이다. 최후의 일각까지 피를 흘릴 것이다...
“이런 자들을 씹어먹어버려야디요! 내 실력으로 말해주가소!”
그들은 그들의 사무실로 돌아와서 실적을 올릴 일에 골몰했다.
“지금 김달삼, 강규찬이가 남로당 해주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네? 이래 놓구도 빨갱이가 아니라구? 구대구 순사부장, 이걸 봐주어야 하네?”
“봐주면 적화되디요! 우리는 니북에서 공산당에게 재산 몰수당하구, 교회당 뺏기구, 일자리 뺏가구, 집 뺏기구, 고래서 오로지 살기 위하여 남하했디요. 남한 사회가 빨갱이 세상이 되믄 우린 설 자리가 없디오. 그리 되면 서귀포 앞바다에 다 빠져죽어야디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하면 싸우다가 가야 하디요. 우리가 살래문 이것들을 바다에 쓸어넣어 버려야디요.”
“백번 천번 옳은 말이다. 진실적 말씀이다. 그렇구 말구. 서북청년회가 최선봉에 서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야디. 앞으로도 우리 단원들이 경찰에 대거 투입되어야디. 기래서 공을 세워야디. 분발하라우.”
“지당한 말씀입네다.”
미 군정청과 이승만 정부는 국립경찰 1700명을 제주에 투입했다. 군대도 수천 명 현지 입대시켰다. 이들 중 상당수가 서북청년회 출신들이었다. 서청 단원들은 개별적으로 현지 임관된 경우도 있었지만 단체 임관은 경찰전문학교에서 간단한 면접시험을 보고 배치했다. 취조 조서를 꾸미려면 ‘가나다라’ 정도는 알아야 했기 때문에 글을 읽는 단원은 경찰이 되고, 글이 서툰 경우는 국방경비대 이등병으로 들어갔다.
제주 성산포 일대에 주둔한 ‘200명 서청 특별중대’가 있었다. 이 중대는 군번없이 국방경비대 복장을 하고 소대 단위별로 취약지구를 찾아다니며 토벌전을 벌였다. 성산포 앞바다에서 28명의 고성리 청년들을 집단 학살한 것도 이들이었다. 이때 인근 소학교 교사 6명도 끌고 가 총살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전과로 기록돼 영전과 승진 자료가 되었다.
1955년 통계에 따르면 이북 출신 경찰이 24.3%를 차지했다. 이중 총경 40%, 경감 30.3%로 고급 경찰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처럼 이북 출신이 다수를 점한 것은 서북청년회 출신이 대거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이승만의 반공정권의 기둥이 되었는데, 점차 군대도 이북 출신들이 장악해나갔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5.16 이후 군의 이북 세력은 영남 세력으로 급속히 대체되었으나 그 이전은 압도적으로 이북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이상 김관후의 ‘서북청년단, 제주도 학살의 최선봉에 서다’ 일부 인용).
구대구 순사부장이 실적을 올릴 절호의 기회가 왔다. 밀대로부터 한라산 중턱에 거물급 인민유격대 인사가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를 제보받은 것이다. 그는 열 명의 대원을 이끌고 작전 지역으로 들어갔다. 겨울철이라 낙엽이 지고, 산이 훤히 드러나면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폭도들 거동이 그대로 노출되었고, 진지 동굴도 육안에 확연히 잡혔다. 이런 지형 조건이라면 그들은 종잇장 위에 서있는 지렁이 꼴이다.
“추가 병력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되가습네까.”
한 대원이 묻자 구대구가 응대했다.
“이 숫자로 충분하다.”
그는 별동대로 서북청년회 단원을 활용하고 있었다. 경찰 순사부장 직책이지만 그는 여전히 서북청년회 조직을 활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겐 변함없이 단장이었다.
“우리 공으로 돌려야디. 고래야 니네들도 경찰복 입디...”
밀대로부터 받은 첩보는 폭도대장이 사라지고 새 사령관이란 자가 들어서면서 조직을 재편했다는 것이다. 조직이 재편되자 들고 나는 사람이 있었다. 밀대가 인민유격대장 참모가 마을로 내려간다는 연락을 준 것은 그때였다. 그는 제주읍내를 오르내리는 게릴리들의 주로인 밧세미오름과 안세미오름의 골짜기에 두 명씩 네 조를 매복시켰다. 그는 대원들을 모아놓고 호주머니에서 제주도 지도를 꺼냈다. 안덕과 한림의 두 면 사이를 연필로 쫙 긋고, 그 반대편인 밧세미오름도 쫙 그었다.
“안덕지구가 중요하디만 요즘은 밧세미오름, 안세미오름 쪽이다. 엊그제만해두 한림 안덕은 반란군 본부와 분대간의 식량 보급선이었댔디만 상당수 대원들은 이 생명선을 버리고 은거지역을 산개시켜 나갔디. 새 폭도대사령관의 방침이다. 우리는 이 지역을 지키면 된다.”
구대구가 안세미오름쪽을 연필로 거칠게 내리찍었다. 연필심이 똑 부러졌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단장의 카리스마를 그런 식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밤이 깊자 산 위쪽으로부터 두런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대구는 바스락거리지 않도록 멧새 울음소리로 매복한 대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산사람들은 주의력 깊게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내려오고 있었지만 밤길인지라 자갈 부딪는 소리, 개울물에 찰방거리는 소리가 가감없이 들려왔다.
“선생님, 이제 돌아가면 만나지 못하나요?”
소년의 목소리였다.
“응, 넌 올라올 필요가 없다.”
“선생님은 언제 내려오실 거예요?”
“응. 난 내가 알아서 하마. 넌 지금 활주로 쪽으로 간다.”
“거긴 왜요?”
“가면 알아. 용강을 지나 봉개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거기서부턴 혼자 가거라. 우린 거기서 헤어지는 거야.”
“내려가면 뜨거운 밥 한그릇 먹고 싶어요.”
“그래, 실컷 먹어라. 하복 입고 발발 떠는 거 보고 나도 마음이 아팠다.”
“알아요. 지급된 옷을 입을 수 없더라구요.”
“왜?”
“헤진 일본군복이 맞지도 않고, 웬지 싫었어요. 그리구 하는 일도 없었잖아요. 땔나무나 하구, 마초(馬草)를 뜯었으니까요.”
“누군가는 하는 일이었으니 장한 일이다.”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심한다고는 했지만 그들은 돌을 차기도 했다.
“회담은 끝나버렸나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현호진이었다. 어느 진영이나 강경파가 세를 주도해나가는데, 현호진은 재무장을 반대하는 화평파였다. 참모진 구수회의는 새 지도부로 교체되면서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총알을 가지면 쏠려고 하는 욕구가 있소. 어차피 우린 패자요. 냉철하게 판단해서 후일을 도모합시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묻혔다.
“기회주의자는 나가시오!”
사령관이 교체되면서 대세는 더욱 강경해졌고, 그의 설자리는 없었다. 새 지휘부에선 그의 역할이 없었다. 비밀회담의 실패에 대한 책임만 돌아왔다.
“저 자들을 믿을 수 있습니까. 배신을 밥먹듯이 하잖습니까. 우리가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본부도 노출됐습니다. 새로 진지를 구축하려면 두 배 세 배의 작업을 해야 해요. 회담을 해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청년부장이 현호진을 비판했다.
“끝까지 항전입니다. 이미 떠나온 다리를 불태워버렸습니다. 돌아갈 길이 없어요!”
“비선이 아직 살아있긴 하오.”
현호진이 호소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그는 오민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도 교체되었소.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걸 모른단 말이오? 저놈들 오라리 습격사건 조작한 거 보시오! 뭘 믿으라는 거요?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데 협상이라니요?”
“휴전협상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소? 약하게 보이니까 더 밀어붙이지 않소? 신속하게 진지구축을 한 게 그나마 다행이오.”
“배운 자는 언제나 저렇다니까. 기회주의자에 회색분자 반동들이오! 하산하시오! 다 죽기 전에 당신이나 내려가시오! 우리가 생사를 걱정하고 여기에 왔소?”
“나약한 소리는 배부른 인텔리들이 항용 사용하는 방식이요. 일제강점기에도 가장 비열하게 변절한 놈들이 그놈들이오. 나약한 행태를 보이는 먹물들, 창백한 인텔리들, 더러운 기회주의자들...”
옳소, 옳소, 옳소...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를 따르던 학생 둘 중 하나가 더 강경했다. 그들은 통제 밖이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불퇴전의 용기로 싸워나갑시다!”
그들의 말을 뒤로 하고 그는 깜깜한 밤, 여름 옷을 입고 발발 떠는 병약한 소년을 데리고 하산길에 나섰다. 그는 소년을 내려보내고, 나약한 지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시 입산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자갈밭을 지나 풀밭에 이르러 편히 걸을 때 매복했던 구대구가 벼락같이 소리질렀다.
“공격!”
일시에 두 조원들이 양 옆에서 달려들어 두 사람을 죽창으로 찌르고 각목으로 내려쳤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목을 따라.”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구대구 순사부장은 대원들을 원대복귀시킨 다음 키가 작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땅개와 까실까실한 풀이름의 별명이 붙은 조뱅이라는 심복을 데리고 제주읍내로 들어갔다. 조뱅이는 보퉁이를 각목에 끼어 어깨에 걸치고 의기양양하게 걸었다. 그들은 관덕정 광장을 지나 이도동 작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통금시간인지라 사위는 먹물 풀어놓은 듯 깜깜하고 고요했다. 통금시간은 그들의 세상이었다. 신문사 총무국장 자리에 앉아봤지만 맞지 않는 잠방이를 걸친 것처럼 늘 꼴이 거북했는데, 야밤을 행군하며 이렇게 거리를 누비는 청년단장과 순사부장 자리는 적성에 딱 맞았다.
정원수가 우거진 집 돌담에 당도했다. 숲에 묻혀서인지 집안은 절간처럼 적막했다. 그는 담을 사뿐히 타고 넘어 집안으로 들어섰다. 땅개와 조뱅이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현관문을 열자 의외로 쉽게 문이 열렸다. 아마도 누군가 다른 식구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외지에 나간 식구가 언제든지 편히 들어오도록 문을 걸어잠그지 않고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누구냐? 이제 들어오니?”
안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응접실에서 낮은 촉수의 전등불 아래 의자에 파묻히듯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밖에 누구니?”
한번 더 묻는 소리가 났으나 구대구가 문을 단숨에 박차고 응접실로 뛰어들었다. 땅개와 조뱅이가 그의 뒤를 따랐다.
“누구요?”
“현문선 사장 맞디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구대구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낯익은 얼굴은 아니었다.
“현문선 사장님 안녕하십네까. 저는 사장님을 잘 압네다.”
“누구요? 이 밤에 무슨 일이요?”
“경찰이 빨갱이 잡는데 밤이 있고 낮이 있소? 당신 빨갱이 아들, 체포된 것 아시오?”
“못된 놈들.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빨갱이 새끼, 순사부장 앞에서 지금 뭐라고 했네? 사진봉은 사람이구 나는 거지 발싸개가? 그동안 사람 차별했디. 좌익 소굴이 선한 일한다구 폼잡구 어른 행세하구, 세상 말세였디!”
현문선이 사진봉 단장과 거래하고, 큰 돈이 오가고, 그 자식이 폭도대에 가담하고, 정용팔 부장이 이 집 며느리 집을 들락거리다 행불이 되고, 이런 저런 생각이 미치자 구대구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길게 얘기할 거 없수다. 우리 애국청년단원들이 작전수행 중 확인할 것이 있어서 물건을 가지고 왔수다. 확인하시오.“
그가 조뱅이로부터 보퉁이를 받아 던지듯이 탁자에 확 풀어놓았다. 보자기에서 목이 잘린 두 얼굴이 드러났다. 현문선 사장이 갑자기 아아아, 가슴을 쥐어잡고 격렬하게 몸을 흔들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탁자에 놓인 두상은 현호진과 소년의 목잘린 모습이었다.
한참 후 현문선 사장이 정신을 차리더니 소파 옆 서류함을 열어 손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들어 순식간에 발사했다. 구대구가 쓰러지고 조뱅이가 쓰러졌다. 땅개에게는 빗맞았다. 땅개가 달려들어 현문선 사장을 덮치더니 목과 가슴, 배를 칼로 마구 찔렀다. 찔리면서도 현문선 사장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총알이 떨어진 것이다. 땅개는 현문선 사장이 앞으로 고꾸라져 숨이 멎을 때까지 칼로 찌르고 보자기에 있는 두상을 다시 싸들고 황급히 밖으로 사라졌다.
총소리에 놀란 김혜자 여사가 불편한 몸을 벽에 기댄 채 응접실로 나왔다. 응접실에 이르러 처참한 광경을 보고 그녀는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뒷방이었다. 현호영이 울면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 엄마, 무슨 일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제서야 김혜자 여사가 정신이 돌아오는 듯 주위를 살피다가 큰소리로 울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냐.”
같은 말만 되풀이하다 한 순간에 그치더니 김혜자 여사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래선 안되겠다. 넌 지금 나가거라. 여기선 안된다. 떠나야 한다. 아이마저 죽인다. 진미호로 가거라. 북항으로 가거라. 두말할 것 없다. 어서 가거라.”
그녀는 차가울이만큼 냉정했다.
“엄마 엄마, 헤어지면 어떡해. 어떡해.”
“아니다. 다 죽는다. 어서 준비해라. 피해라. 씨는 살려야 한다.”
김혜자 여사는 언제 그런 힘이 있었더냐 싶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장을 열어 옷가지를 챙겼다.
“어서 가방에 옷 챙겨넣어라. 여기 통행증도 있다.”
그녀는 딸이 나가는 모습을 돌아보지 않았다. 보아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녀는 꼭 아들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들만 보면 다 잘 풀릴 것 같았다. 아들이 돌아오면 어느 망명시인의 시처럼 하얀 모시수건에 과일을 가득 담아 내놓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거뜬히 하얀 돛단배에 돛을 올릴 생각이었다.
다음날 아침 라디오에서 폭도대 참모장 현호진의 효수된 머리가 도청앞 거리에 전시되었다는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김혜자 여사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누구도 그의 집을 찾은 사람이 없었으나 경찰이 구대구 순사부장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가 안방에서 목을 멘 김혜자 여사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현란과 박정희
“내 다녀올 기다.”
박정희는 날이 선 군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선글라스를 눈에 붙이더니 짧게 말했다.
“언제쯤 오시기요?”
“내사 가봐야 알끼다.”
“몸조심 하시기요. 꿈자리가 사납지에이요?”
“무슨 씰데없는 소리.”
그는 작은 체구였지만 앞 가슴을 내밀고 대문 밖으로 당당하게 나갔다. 이현란은 그가 사라진 골목길을 바라보며 어떤 채울 수 없는 쓸쓸함을 맛보았다. 빈 골목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 가슴을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와 살림을 차린 지도 벌써 일년이 넘었다. 일년의 동거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 배는 남산만큼 불렀다. 출산 날이 한달밖에 남지 않았다. 신랑 신부로서 사랑의 씨앗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뿌듯한 행복감에 젖어야 하는데, 그나 그녀 자신 행복한 것 같지 않았다. 늘 불안하고 초조하였다.
그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간밤 그녀를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만삭의 몸 때문에 자세를 바꾸어서 그를 받아들였지만, 그는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격렬하게 그녀를 탐닉했다. 마치 마지막 밤을 불태우는 것같이. 그는 늘 그랬다. 때로 병적으로 느껴졌지만 어느새 그녀 또한 열락에 빠져서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면서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정사를 치르는지라 표정을 알 수 없지만, 그는 아마도 마지막 생애를 다 불살라버리듯이 뜨겁고도 진지했을 것이다..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그에게선 밝은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술이라도 한잔 걸치면 희미하게 웃을 뿐, 본심을 드러내본 적이 없었다. 뭔가 복잡하고 불안한 것들이 그의 내면에 깊게 침잠해있었다. 언젠가 그의 가족사를 들었을 때 그러리라 짐작하긴 했다.
어느날 그는 그녀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세상이 불공평한 기라. 그래서 확 엎어버려야 하는 기라.“
“무시기 말씀이요?”
좀처럼 속엣말을 하지 않던 그가 이런 말을 하니 그 말 자체가 위험하다기보다 그렇게 말한 것이 신기했다.
“너두 길이 막혀서 고향엘 못가잖나. 삼팔선이 왜 생겼나? 니 고향 원산 가는 길은 국경선 넘기보다 더 어렵게 되었다카이.”
“당신 갑자기 왜 그라오? 난 생각없이 살아요.”
“생각없이 살면 대학생이 아이다.”
“당신 땜에 접었잖아요. 당신이 날 가두었댔지요.”
그녀는 이화대학 2년 재학 중 박정희를 만났다.
“모두 시국 탓이다. 미국 놈들, 소련 놈들이 엉기붙어가 조선반도를 난도질하고 분탕질하고, 거기에 멋모르고 놀아나다 보이 모두가 불행해지는 기라. 해방이 되면 나아질 줄 알았더니 일제 시기보다 더 몬한 기라. 이러다 필시 한판 붙을 기라. 우리는 주변인으로 밀려나 전쟁 소모품이 되고, 삼천리 강토는 갈갈이 찢기게 될 기라. 일본 놈들한테 당했다면 알아차렸으련만 또 당하게 생긴 기라.”
“당신도 일본 칭송하지 않았나요? 일본군 장교였잖아요.”
“멋모르고 그랬던 기라. 철없던 때였던 기라. 지금은 아닌 기라.”
“나한테 좋으면 괜찮고, 나쁘면 못된 기라는 거, 당신 기회주의자 아닌기요”
“고따우 소리 말라우.”
“그래니 우리 편하게 살아요. 불안해요. 그리구 난 학업도 중단했잖아요. 삼팔선도 막히구, 고향 부모님과도 영영 헤어졌잖아요. 난 오직 당신 하나만 보구 사는 거야요. 다른 생각 말구 살아요.”
이현란은 안전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을 꿈꾸었다. 그는 그것을 충분히 해결해줄 것으로 믿었다. 작은 체구지만 빠짐없이 당찬 모습과 진지한 태도, 거기에 집념이 강하고, 사물을 궤뚫는 듯한 직관력과 지성이 있었다. 어딘가 허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친구가 8연대 경리장교 박경원과 결혼식을 올릴 때 들러리로 참석했는데, 그때 그녀는 박정희를 만났다. 그는 첫 만남에서부터 집요했다. 그녀 역시 서울 하늘을 이고 사는 데 지켜줄 남자가 필요했고, 나타나자 힘이 났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쉽게 태릉 인근의 민가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박정희는 춘천 8연대에서 국방경비대사관학교로 배속돼 교관 겸 생도대장을 맡고 있었다. 동료 장교들보다 아홉 살 이상 나이가 많았지만, 오히려 그게 선택의 기준이 되었다. 고아 신세가 되자 아버지 같은 연만한 사람이 그녀에게는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늘 불만과 고독 속에 묻혀있었다. 그래도 무뚝뚝한 한편에 자상함이 있어서 그것으로 그녀는 사랑을 키웠다.
“먹어보그라.”
퇴근해오면 그는 미군 야전식인 초콜렛, 사탕, 비스켓을 군복 주머니에서 꺼내놓았다.
“김학림 부인이랑 최주종·황택림·박근서·황엽 부인이랑 가까이 지내그라. 외로우면 언니 동생 하면서 가깝게 지내라우. 그러면 고향 생각도 덜해질 기라.”
그녀는 밤마다 원산 앞바다의 넘실거리는 물결을 못잊고 베갯머리를 눈물로 적셨는데, 그는 그때마다 그렇게 위로해주었다. 그의 말이 달콤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위로를 해주니 마음은 평온해졌다.
“책에서 보았지만 여행자는 늘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기라. 방랑을 통해 고향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는 기라. 당신도 고향의 소중함을 깨닫는 기라. 언젠가 가볼 날이 있을 거라면서 그리워하는 기라...”
그는 이렇게 감상적인 품성도 지니고 있었다.
“고마워요, 당신.”
“당신이 행복하면 내가 행복하지. 외로우면 멀리 바다도 보고 오라구. 8연대 시절 강릉에서 동해바다 원없이 봤데이. 여행은 일상을 떠났다가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제. 고향을 떠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제. 큰 깨달음으로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이제. 이 박정희가 당신의 영원한 고향이 될 기라....”
이렇게 말할 때는 꿈꾸는 것같았다. 온 몸이 저릴 정도로 그녀는 그에게 빠졌다. 나이도 여덟살이나 차이 나고, 부모형제와 떨어져 있으니 그는 단순한 남편이 아니라 그녀의 보호자이자, 후견인이자 고향이자 언덕이었다. 그가 없으면 세상도 없었다.
용산 군인 관사로 이사왔을 땐 더욱 그랬다. 강문봉 황엽 김학림 부부와 친교를 맺고 가까이 지냈지만, 그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슬펐다. 이상한 두려움과 초조함이 있었다. 아내들끼리 오순도순 지내고, 때로는 부부 소풍도 함께 가고, 영화관도 갔지만 그가 없으면 모든 것이 허전하고 시들했다. 그의 얼굴에 우울의 그림자가 어릴 때는 슬픈 운명이 그녀 앞길을 가로막는 것같아서 눈물지었다.
그런 어느날 그녀는 알게 되었다. 알고 난 뒤 그녀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고향에 딸자식이 있다면 아내가 있다는 뜻 아닌가요?”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 나는 당신의 내연녀야요? 첩이야요? 세컨드야요?”
그래도 그는 아무 말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난 이대로는 못살아. 어떻게 이런 식으로 살갔어요? 나두 원산의 대갓집 딸이야요.”
“조금만 참고 있으라. 어떤 수가 나올 기라. 아이가 다치지 않게 몸을 잘 다스리고 있그라. 걱정하지 말그라.”
그러나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정리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고민에 빠질수록 그녀는 더욱 안절부절 흔들렸다. 그러나 그가 떨어져나가면 그녀 자신 영영 낙오자가 될 것 같았다. 영영 인생 미아가 될 것이라는 처연함에 젖었다. 그래서 그럴수록 그를 흠뻑 받아들였다. 홀로 빈 자취집에 돌아가기가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던가. 그녀가 그에게 쉽게 동거를 허락한 것도 그런 쓸쓸한 집에 들어가기가 두려워서였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결핍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그를 더욱 처절하게 갈구했다.
그의 집안 얘기를 들었을 때, 이현란은 펑펑 울었다. 원하지 않는 막내 아들로 태어나 굶주리며 살았던 유소년시절,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던 사범학교 시절, 불만을 휴대품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던 시절의 세상과의 불화, 존경했던 중형이 경찰 총에 맞아 죽고, 그리고 해체되듯 다가오는 식민지의 절망...
초등학교 훈도를 하고, 군인의 길을 가기 위해 만주군에 배치되었지만 해방이 되자 그는 어느결에 정신적 무국적자가 되었다. 중국 대륙을 미친 듯이 헤매 다니다 귀국하고 보니 조국은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반토막이 나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미군정 시기는 바로 무정부 시기였다. 일부러 그렇게 방치하는 것 같았다. 의도적으로 해방 관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같았다. 그런 가운데 어찌어찌 육군 장교가 되었지만 불안감은 그의 성격인 듯 그것을 늘 몸 속에 키우며 사는 것 같았다. 젊은 장교의 야망과 좌절과 고독이 깊어질 때 우연치 않게 두 사람은 만나 사랑을 키웠다. 서로간에 결핍이 있을 때 사랑은 파멸하거나, 그 이상으로 폭발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서로 결핍을 어루만지고 보듬어줄 때 진정한 사랑은 꽃핀다. 이현란의 생각이었다. 불안정한 시국에 평화로운 가정을 꿈꿀 수 있는가. 이웃이 불행한데 내가 행복할 수 있는가. 하루살이 인생을 요구하는 세상인데 무슨 영화를 바랄 것인가... 그럴수록 그를 사랑해야 한다. 춥고 아프고 상처뿐인 그를 안아주어야 한다.
이현란은 쓸쓸하지만 이렇게 마음 속으로 다짐하며 만삭의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동족상잔 결사반대”
일단의 하사관과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장교단을 처치한 뒤 연대 병영을 점령했다. 뒤이어 군장을 꾸려 시가지로 나가 차례로 경찰서와 시청, 학교 등 관공서를 접수했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병란’을 일으켰다. 병란을 주도한 ‘제주도토벌 출동거부병사위원회’가 내건 호소문은 다음과 같다.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하여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자!
다음이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 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제주도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호소문은 서둘러 마련한 듯 두서없이 써갈겼지만 ‘거사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에 참여할 수 없으며, 제주도 동포를 토벌하러 가는 것을 거부하며, 갈등과 대립의 원인 제공자인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는 것이다.
오민균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제주도토벌출둥거부병사위원회의 호소문을 군복 주머니에서 끄집어내 박정희에게 건넸다.
“자국의 국민을 죽이러 가는 것을 좋아할 군인이 과연 존재합니까? 군인은 타국의 침략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임무인데, 자국민을 학살하러 가라고요? 진압군이 되고 토벌군이 되라고요? 역사에 무슨 죄를 지라고요? 그래서 나는 거부합니다. 아니 거부했습니다.”
오민균이 술사발을 들어 탁자에 탕 내려놓았다. 사발에 가득찬 술이 반은 술상에 흩어져 쏟아졌다. 박정희는 새카만 후배의 이런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평상시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그대로 수용했다. 어떤 묵시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달산 밑 목포의 허름한 선술집 골방에 마주앉았다. 박정희는 광주 4연대 작전참모실에 있다가 24연대장 최남근 중령을 만나러 마산에 내려갔으나 길이 막혀 만나지 못하고, 대신 목포로 나와서 오민균을 불러냈다. 제주에서 목포로 나오는 해로는 열려있었다.
“최남근 연대장이 행불이 됐다면서요?”
1948년 10월 21일 최남근 연대장은 긴급 출동 명령을 받고 여수 순천을 향해 마산 연대를 떠났다. 그는 광양군 옥곡면 백운산 기슭에 이르러 반란군과 대치했다. 교전을 벌이는 가운데 중대장이 전사하고, 병력이 갈팡질팡하자 최남근은 병력을 숲속에 매복시키고 일단 산 정상으로 올라가 망원경으로 교전상황을 정탐했다. 전세의 불리가 확연했다. 그는 즉시 부대에 후퇴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수송 차량 3대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것들을 수습해 오려고 조시형 소위와 함께 매복해 접근해 들어가다가 졸지에 반군에게 생포되었다. 포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는 6일 후 조시형 소위와 함께 하동의 화개장터에 나타났다. 누가 봐도 석연치 않았다.
두 사람은 체포돼 광주 여단으로 압송돼 심문을 받았다. 부대 통솔 중 실수로 반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기회를 얻어 탈출했다는 소명이 받아들여져 그는 11월 8일자로 4여단(청주) 참모장으로 전속된 것으로 행불 6일의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탈출한 과정에서 반군과 격렬하게 다투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것도 참작이 되었다. 박정희와 오민균은 이 사실을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최남근 연대장과 약속한 게 있었습니까?”
박정희가 대답없이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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