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31장 호남신문 “짓밟힌 平和鄕!”
제주 9연대는 수시로 재편성되었는데,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김익창 연대장이 해임된 직후(1948년 5월5일) 후임 박진경 연대장이 부임해오자 11연대로 개편되었다. 9연대는 본래 제주도가 전라남도로부터 독립해 도(道)로 승격된 직후 전국 각 도 연대 편성 중 맨 나중 창설된 부대였다(1946년 11월16일).
이때 광주 4연대 병사들이 차출돼 9연대에 배속되었는데 인원은 중대급 정도였다. 어느 부대나 마찬가지지만 차출 병력은 기존 부대에서 말썽 많은 자들을 쫓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차후 충원된 대전 3연대, 부산 5연대, 대구 6연대, 청주 7연대 병력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그러했다. 그들은 평소 해방의 부조리에 대한 반발이 있었던 데다 제주도로 좌천되었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러니 사기는 떨어지고, 부대로서의 응집력도 결여되었다.
차츰 제주 출신 병사들이 충원되었지만, 그들 역시 바로 눈 앞에서 고향 사람들이 학살되는 광경을 보고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갈등과 분규가 심화돼 지휘관이 근무하기를 꺼리니 자주 교체되고, 사고 또한 빈발하면서 연대 명칭도 자주 바뀌었다. 연대장만 하더라도 장창국 중위-이치업 소령-김익창(렬) 소령(제주연대장 시절 중령 진급)-박진경 중령(제주연대장 시절 대령 진급)-최경산(록) 중령-송요평(찬) 소령-장도영 중령-윤춘근 중령 등 불과 2년 사이에 8명이나 교체되었다. 짧게는 두 달을 못채운 사람이 있었고, 길어도 1년을 가지 않았다. 주둔지도 제주-수원-대전-서울-문산-개성-인천-수색 등 전국을 맴돌았다. 이중 박진경과 최경산은 11연대장으로 제주에서 복무했다. 그 이후 연대는 제3여단에 예속되고, 다시 제2여단, 수도경비사령부-제7사단에 예속되어 포천으로 이동한 뒤 사라졌다. 지휘관, 하급 장교, 병사 할 것 없이 실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이런 혼란상 때문에 제주 주둔 연대를 흔히 대구 6연대와 함께 ‘사고연대’로 부르고 있었다.
며칠 후 오민균의 숙소 현관문 앞에 웬 신문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뭍에서 건너온 지방 일간지였다. 호남신문. 이 신문이 오민균 앞으로 특별히 배달될 이유는 없었다. 누가 보냈을까?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신문을 가져와 살피는데 한 면에 ‘동란의 제주도를 찾아서’라는 현장 르뽀기사가 실려 있었다. 신문 분량이 많은 것은 시리즈로 연재된 신문을 모두 모아 보내주었기 때문이었다.
오민균은 제주 상황에 관한 한 그간의 신문 보도들을 불신했다. 현지 상황과 동떨어진 내용들이 너무 많았다. 그가 아는 한 신문이란 공정하고 편견없이 사실을 보도하고, 권력의 남용에 맞서 세상을 밝혀주는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이 왜곡되고, 편파적이었다. 정확한 사실 전달로 여론을 환기하고, 사회 감시를 통해 밝은 미래를 향한 담론 시장을 형성하고, 국민을 계도해야 하는데 동떨어진 현실 인식과 추상적 해결책만이 열거되었다.
그런데 이 신문을 살펴보니 좀 달랐다. 제주도에 파견돼 직접 취재한 김삼화 기자, 이경모 사진기자가 7회에 걸쳐(1948년 7월15일-22일) 보도한 현장 르뽀 기사는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있었다.
그중 제1신은 사건을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2신에 최경산 11연대장이 사태를 보는 관점이 담겼다. '짓밟힌 平和鄕!'이라는 제목 아래 기사는 7월 1일 열린 제주지사·군수·읍면장·군책임자 연석회의에서 최경산이 이 시간 현재 피해상황을 보고했다. 소실 가옥 421호, 양민 사망 292명, 경상 98명, 납치 35명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피해상황이 구체적으로 적시된 것은 이 기사가 처음이었다.
최경산 11연대장은 기사에서 "사태수습은 무력만으로 진압시키기는 곤란하니 각 행정 기관에서 교화해야 한다. 국방경비대는 어디까지나 동족상잔을 피하도록 행동한다"고 말했다. 또 “폭도측으로부터 압수한 무기가 패전한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로 쓰지 못할 정도로 파괴된 것이 태반이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며 "무기라고 해야 요따위 것으로 과히 염려할 것은 아니며, 육지에 유포된 팔로군이 왔느니, 일본 패잔병이 있느니 하는 것은 무책임한 허위 날조의 풍설"이라고 보고했다. 상당히 색다른 시각이었다. 경찰은 지금까지 폭도대는 엄청난 규모의 중화기로 무장했다고 발표해왔었다.
제4신은 조천과 함덕의 상황을 담았는데, 조천 모 지서는 4.3 이후 4차례에 걸쳐서 습격을 받아 총구멍이 지서 건물에 무수히 박혀있다고 생생하게 현장상황을 전했다. “조천과 함덕 지역에서는 청년은 구경할 수 없고, 정들어 살던 집은 텅텅 비어 있다. 시계를 뺏고, 처녀를 내놓으라고 조르고, 가재 도구를 부시고(부수고), 돼지를 잡아가버렸다"고 주민이 호소했다고 보도했다. 취재단은 '상식적으로 생각도 안되는 이런 만행은 도대체 누가 범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물었다.
제5신은 '복수 행위를 삼가라'라는 제목으로 구좌·세화에서 서귀포·한경 저지마을까지 돌아본 주민 참상을 소개했다. 구좌·세화에서 지서원이 자신의 가족에 대한 가해 혐의를 놓고 혐의자의 가족과 친척에 이르기까지 복수하면서 목숨을 빼앗았다고 했다. 산사람들이 면사무소, 구장 집, 사설 단체(서청이나 대청) 주택에 방화해 타버린 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산사람들의 만행을 고발했다. 저지마을은 치열한 전쟁터 마냥 전체 300호 중 200호가 좌우 양측에서 복수적으로 방화한 것이라고 했다. 취재진은 폭도란 용어를 '산악부대'라고 칭하며 “왜 이렇게까지 집권자에 대해 총검을 겨누고 봉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나”라고 되물었다.
제6신은 '도민의 진정 파악이 수습의 요체'라는 제목으로 "제주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봉건제도가 이입·발달할 기회가 없어 사회적으로나 가족적으로 어느 특권층을 용납 안할 뿐더러 무리한 제압이 있을 수 없는 균등 사회다“고 보도했다.
제7신은 '폭도 이외의 무고한 양민엔 교화 선무책이 긴요'라는 제목으로 "도민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육지에서 파견한 토벌대를 조속히 육지로 돌려보내고, 민중의 원한에 있는 각종 기관의 행동을 시정하는 동시에, 당국의 잘못은 잘못대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런 대안 제시가 기존의 신문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신문은 남로당 계열의 정치 야욕에 대해서 비판했다. “1947년 2.7 총파업이 벌어졌는데 이 틈을 타서 남로당 계열이 정치야욕을 채우려고 암약했으리라는 점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당국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남로당 계열의 책동이라고 하더라도 왜 민중이 그 책동에 따라갈 구실을 주게 했느냐는 것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한라일보 2018.12.10일자 인용>
오민균은 신문을 읽다 말고 신문지를 말아 들고 연대장실을 찾았다.
신임 최경산 연대장은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박진경 연대장 암살 혐의자를 잡아내는 일은 미군 CIC(방첩대)와 CID(범죄수사대) 주도 아래 통위부 정보국 수사요원들이 파견되어 진행하고 있었다. 자기 부하들을 모조리 죄인시하는 것이 연대장으로서 허수아비 같은 존재라는 기분이 들어 조금은 불쾌해하고 있었다. 신임 초이고 현지 파악이 안되어서 지켜보고 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있는데, 오민균 소령이 급히 연대장실을 찾았다. 같은 고향 출신에 일본 육사 6기 후배여서 최경산은 부임하자마자 그를 챙겼다.
“어서 앉아.”
그와 마주 앉자 오 소령이 신문을 내보였다.
“각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용기있게 말씀하셨는데, 소신입니까?”
“그래. 그 신문 내가 보낸 거야.”
최경산 연대장이 스스럼없이 말했다.
“각하께서 보낸 것이라구요?”
“그래. 현지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고, 문제점과 대책을 적시하는 신문도 있어서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나.”
오민균은 연대장의 말뜻을 얼론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대장이 생각하는 수습책이 무엇인가?”
“연대장 각하께서 도 수뇌급 회의에서 발언하신 말씀이 해결책 아닌가요? 신문을 저에게 보내주신 것은 그런 의견에 동의를 구하자는 뜻 아닙니까?”
“내 멘트에 기대지 말고 오 소령의 미션과 솔루션을 말해봐.”
“미국의 실체를 알 수 없습니다.”
“뚱딴지같이 그게 무슨 말인가. 오 소령은 지금 뭔가 잘못 짚고 있어. 미국은 조선에 대한 편견을 애초부터 갖고 있는 나라야. 사실은 그것이 맞고 말이야.”
“그것이 맞다니요?”
“한 예를 들어보지. 미국의 군 급식은 A,B,C,D 등급으로 나누지. A,B레이션은 소고기, 돼지고기, 채소 등 조리 기구가 필요한 취사용 군 식량이지. 후방이나 주둔 기지에서 여유있게 먹는 지휘관급 급식이야. C레이션은 전투 현장에서 먹는 병사들의 간편한 야전식이야. D레이션은 C레이션조차 먹기 힘든 상황에서 먹는 비상식(非常食)이고. 그런데 군의 위계에 따라 우리 군에 지급되는 급식이 모두 태부족한 거야. 연대장, 중대장, 소대장, 병사들에게 150% 할당해 지급하는데, 그래도 여전히 부족해. 알고 봤더니 뒤로 빼돌리고, 훔쳐가고 하는 것이지. 급식만이 아니야. 직분에 상관없이 피복, 모포, 군화, 하다못해 팬티까지도 빼돌린다는 것이야. 위생불량에, 속이고 거짓말하고, 약속 지키지 않고... 어느 것 하나 믿을 수 없다는 거지. 쥐새끼 같은 조선놈과 정직한 일본놈으로 비교되네. 맥아더사령부가 일찍이 일본의 자문을 받아 조선 관리를 하는데, 과연 그게 맞다는 거라. 일본이 야만시하고 조롱하고 경멸한 것이 다 맞다는 거야. 민나 도루모데스(모두 도둑놈)... 미군은 일본군에게서 조선 사람의 부정적인 측면만 들었을 것 아닌가. 미 고문관한테서 직접 들은 얘기야.”
오민균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반발심이 생겼다.
“부분을 가지고 일반화하면 오류가 생기지요.”
“천만에. 악마는 항상 그런 디테일에 있어. 거대 담론이나 고상한 이론에서 찾지 않지. 군림하는 입장에서는 늘 샤덴 프로이데’라고, 짖궂고 고약한 악마적 속성을 갖고 있지. 그렇게 편리하게, 그들 유리하게 사물을 봐.”
그들이 조선을 보는 눈은 유구한 반만년 역사와 전통과 차원높은 예법이 빛나는 나라가 아니라 소소한 단편적인 행태를 보고 인식을 규정해버린다. 그러면서 조롱한다.
“그러나 각하, 그것이 그렇다고 해서 해방 관리를 이런 식으로 해야 되겠습니까. 이건 깡패국가지 정상국가가 아닙니다.”
그러자 최경산이 다르게 물었다.
“자네, 단독정부·단독선거를 반대하나?”
“정치성향을 물으십니까? 당연히 반대합니다.”
“그건 남로당의 지침 아닌가?”
“저는 남로당원이 아닙니다. 하지만 남로당이든 아니든 옳은 것은 옳은 것이지요.”
“단정·단선 반대라면, 그것은 미국이 원하는 바가 아니야. 좌익이자 죄악이야.”
“그거야말로 궤변입니다. 단정·단선 반대는 남로당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양심 세력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걸로 제압의 프레임을 짜는데 그것이 온당치 못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분단을 막자는 몸부림 아닌가요? 분단은 미국의 책임이 더 큽니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미국이 먼저 협상을 파기했습니다. 그것을 지적하는 게 반미입니까?”
“당연하지. 소련은 대일 전쟁을 단 열흘 수행하고 한반도 북반부를 획득했지만,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주도했지. 그래서 절대적 권리가 미국에 있는 것이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태평양전쟁 승리를 이끌어오고,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미국이 한반도에서 소련이 미국을 제치고 소비에트식 국가를 세우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주재국민의 의사결정도 중요하지요. 어째서 나라의 주인이 배제되어야 합니까?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정치제도를 말하지 않습니까?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이 과연 거기에 충실합니까?”
“뭘 모르는 소리. 설사 강대국이 분단을 획책해도 성숙한 국민이 막는 것이야. 투쟁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익은 감이 입안에 톡 떨어지는 법은 없어. 그런데 우린 과연 준비되었나? 한반도 분단은 미소간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한민족 내부 분열이 잉태한 산물이야. 시시각각 변모하는 내외정세와 상호 관계를 보지 못하고 분열하고 대립만 키우고 있으니 우리의 통일 지향은 파멸의 길로 가지. 우리가 이런데, 외세가 이용하지 자상하게 돕겠나? 좌우 세력이 모두 자신들이 주도하는 국가 수립으로 끌어들이려고 가루가 되도록 싸울 때, 외세에 빌붙어서 느긋하게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있잖나. 그리고 그들은 국가관리 노하우가 있고, 항일독립운동 세력들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야. 정의감과 당위론만 주장하면 뭘하나.”
“그들이 능력이 없다는 것은 저자들의 프로파간다에 말려드는 것이죠. 그리고 한반도 관리에 관한 한 소련이 미국에 비해 더 유연합니다.”
“그것도 잘못 본 거야. 땅을 빼앗긴 지주 세력과 예수 믿는 수백 만명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잖나. 이들이 탈출하니 북은 반대세력이 사라져서 별다른 저항없이 토지개혁 따위 변회를 모색하고, 일제 청산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주민 환시리에 정부를 세워나가는 것이야. 남한은 북에서 내려온 세력과 남의 친일세력이 결합해 미국과 이승만 박사를 등에 업고 반공정권을 주도해나가고 있네. 반기를 든 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분쇄하지. 북에서 온 세력까지 합해서 남이 훨씬 혼란스럽지. 그래서 오 소령을 만나면 자중하라고 타이르려고 했네. 4.3은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따라 그들 통일 전략의 일환으로 일으킨 반란 아닌가?”
“4.3은 남로당 중앙 조직과 무관합니다. 4.3이 광범위하게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은 경찰의 폭력성, 청년단의 약탈, 친일세력의 재등용, 단독정부 수립에 따른 통일의 저해, 그런 사회·정치적 불만이 누적되어서 터져나온 민란입니다. 남로당이나 북한식 통일전략이라는 것은 모략입니다. 미국이 소련을 지렛대 삼아 남한을 반공의 전초기지로 삼으려고 극우 집단이 퍼뜨린 데마고기이자 마타도어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게. 미군이 들어왔으면 민주주의 체제로 가겠다는 것이니 따라야지.”
“당연히 따라야죠. 국가 정체가 군주제가 되든, 왕정제가 되든, 혹은 총통제가 되든 군인은 국가의 명령에 충성해야지요.”
“공산국가가 되어도?”
“저를 시험하십니까?”
오민균은 함정을 파놓고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불쑥 대들 듯이 반문했다.
“철이 없군. 귀관은 좌야? 우야?”
그는 사무적일 때는 ‘귀관’이란 호칭을 썼다.
“저는 이념과 관련이 없습니다. 좌도 우도 아닙니다.”
“아끼니까 하는 말이니 잘 들어. 내가 신문에 그런 코멘트를 한 것도 실상은 일종의 내 보호막이야. 며칠 전 폭도대인지, 좌익 군인들인지 정체불명의 자들이 나의 숙소를 습격했네. 데리고 있던 세파트가 짖어대서 위기를 모면했지. 그래서 생각했네. 이런 혼란한 지역에선 내가 누구에게든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일 수 없다고. 그래서 호남신문 기자가 취재 왔길래 폭도대들이 좋아할만한 멘트를 해주었던 것이야. 치졸하지만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보호막이야. 일종의 트릭이지. 내가 부임한 이후 당번병도, 부관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최후의 승리자는 장수자 아닌가. 오래 살아야 자기 인생관의 성취를 이룰 수 있어. 천재가 요절하면 뭘하나. 화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자기 철학을 완성하지 못하잖아. 오 소령이 젊은 엘리트고, 중립적 위치에 있다고 보니까 내 인터뷰가 인용된 신문을 보낸 것일세. 보고 느낀 것이 있었을 것이야.”
연대장은 기회주의자? 그러나 오민균은 연대장이 새카만 후배에게 솔직하게 자기 심중을 털어놓는 것도 하나의 용기라고 생각했다. 생존을 위해 비열한 트릭을 썼다는 약점까지도 스스럼없이 고백하는 진정성은 그를 신뢰케 했다. 오민균이 생각에 잠겨있자 최경산이 말했다.
“잘 듣게. 나 역시 좌파 대 우파라는 이분법적 인식 지형이 아니야. 그러나 걸려들면 약도 뭣도 없어. 격류가 휩쓸려갈 때는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거기에 휩쓸려가버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좌가 되거나 우가 돼버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하네. 알겠나? 눈치 빠른 기회주의자가 되라는 것이 아냐.”
“연대장 각하, 좌다 우다, 지긋지긋하지 않습니까. 모함하고 음해하고 배신하는 식민지 통치 프레임...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연대장이 정색을 했다.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이 제주도에서 힘을 길러 북상한다고 보고 있어. 부임해보니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들이 여기저기 많이 비축되어 있더군. 성능은 떨어지지만 수량이 엄청나더라구. 군사 이론에 질을 충족하지 못하면 양으로 대비하라고 했어. 그들이 공산혁명을 일으킨다고 미국이 오해할만하지 않나?”
“한반도 최남단의 섬에서 공산혁명을 일으켜 북상한다고요? 만화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보자면, 공산혁명의 승산은 육지가 더 높지 않을까요?”
“미군정과 경찰은 남로당 중앙이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보지. 육지다, 섬이다 하는 공간개념은 없어. 하면 한다고 보니까. 4.3이 남로당 중앙의 지령이라는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신촌회의야. 4.3 전에 남로당 조천지부에서 열렸던 회의를 급습한 경찰이 노획한 문건에서 이 자들은 중화기로 폭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경찰 간부와 고위 공무원들을 암살하고, 무기를 탈취하자고 결정했던 것이지.”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오민균이 보는 견해는, 4.3은 남로당 제주도당 차원에서 벌인 경찰 지서 습격사건이었다. 제주도당 자체적으로 회의를 열고 다수결에 의해 무장투쟁이 결정되었다. 이반된 민심을 이용해 5·10단독선거 반대투쟁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했다. 남로당 중앙의 지시가 있든 없든 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제주 주민을 자극한 것은 그들 입장에서 하나의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제주 주민은 어떤 누구라도 손을 내밀면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4.3의 원인을 따지자면 한 해 전 열린 3.1운동 기념식에서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한 사건이 시발점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육지 세력이 미군정에 업혀서 탄압하는 데 대한 저항이었다. 제주도는 학교, 은행, 관공서, 심지어 일부 경찰까지 총파업에 동참했다. 경찰은 육지로부터 응원경찰과 극우 청년단체를 대거 투입해 주민들을 몰아 가두었다. 그런 가운데 엉뚱하게 착취와 약탈, 강간이 자행되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진압 세력은 제주 사람은 다 빨갱이라는 편견을 가졌고, 그런 적대적 인식은 섬사람에 대한 멸시와 하대로 나타났다. 억울한 사건이 나도 해결하는 데 제주 출신 경찰을 배제했고, 도청 간부들까지 3.10 파업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미국과 경찰은 남로당 중앙이 획책한 반란이라고 이미 결론 내리고 토벌작전을 벌이고 있지 않나. 귀관은 명심하게.”
“각하, 제주 인민의 입장에선 경찰과 그들의 행동대인 청년단은 이민족입니다. 또 그들 스스로 민족이란 단어가 등장하면 생리적으로 짜증을 냅니다. 그런 그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도 일본군 대위 출신이야. 단순하게 사물을 보지 말란 말이야. 민족이 우리 의식의 상위 개념은 아니야. 그리고 그들만이 민족을 독점할 수 없어. 민족이란 이름 앞에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들한테도 일말의 아픔이 있겠지. 그런데 상처난 부위를 자꾸 건드리면 어떻게 되겠나? 힘 가진 자들인데 가만 있겠나? 더 짓밟아버리지.”
“그걸 알기나 할까요? 그리고 태도가 문제죠. 선배님과 같이 자기성찰과 자숙의 과정을 거치면 누가 비난하겠습니까.”
“난 자숙한 것이 아니야. 침묵할 뿐이야. 내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확립되어서 일본 육사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친일인지 아닌지도 몰랐어, 여건이 주어졌기 때문에 들어갔던 것이고, 그러나 지금은 충실히 배우고 익힌대로 군무에 충실할 뿐이야.”
“저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십시오. 암담하지 않습니까.”
중앙정치 무대는 백색테러가 백주에도 대놓고 벌어졌다. 무법천지였다. 독립투쟁 운동자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항일 투쟁 시 좌우 가담은 인과관계에 의해 편의상 부적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장식품 정도였을 뿐, 인생을 걸 만큼 중요한 가치 체계가 아니었다. 최상의 가치는 조선의 해방과 독립이었다. 항일운동을 위해 차용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그것이 족쇄가 되었다. 한 사람의 영혼과 의식을 파괴하는 흉기가 되었다. 일제에 쫓기던 사람이 이번에는 미군정에게 배척당했다. 이런 초라한 초상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현주소였으니 그들의 선택지는 사실상 어디에도 없었다.
“연대장 각하, 저는 미국을 등에 업고 일제 때 익힌 사상범 척결의 노하우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경찰놈들을 인정 못하겠습니다. 빨갱이로 몰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 통치 비용으로는 염가이겠지요. 하지만 비참하지 않습니까. 35년 식민 체제를 유지해온 기둥이었던 사상범 사냥, 이 무기로 세상의 주류로 복귀하다니요. 잔인하지 않습니까. 미국은 차도살인이라는 중국식 정적 제거 방식에 고무되어 있고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손쉽게 정치적 패권을 달성하는 것, 얼마나 유쾌합니까. 경찰과 관료 집단은 사상범을 척결한다는 사역으로 친일의 부끄러움을 세탁할 기회가 생겼고, 정국 장악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더욱 오만하게 군림하면서 백성을 밟습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같은 영광이 재현되니 외세의 충견이 되어서 칼춤을 추고 있습니다. 고통의 역사를 침묵하면 야만의 역사는 계속된다잖습니까.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으면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넨 너무 사변적이야.”
“제 얘기를 더하겠습니다. 지금 제주 인민들이 그것을 용납 안한 것이지요. 그들은 깨어있을 뿐, 좌익이 아닙니다. 좌익이 이용할지라도 본질은 모순을 극복하자는 몸부림일 뿐입니다.”
“귀관의 정체가 뭔가. 반미하자는 거야?”
“왜 제가 반미주의입니까. 철두철미 친미주의자입니다. 진정한 친미주의자는 그들의 오류와 불법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똥개처럼 맹종하는 자들을 좋아하는 것같지만 이용할 뿐, 경멸하고 조롱합니다.”
“김종석, 최남근, 박정희, 조병헌, 김태성, 이정일, 김학림, 이상진, 황택림, 곽종진... 이 자들과 선을 대고 있나?”
“선을 대고 있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수뇌부에 차트가 돌고 있어. 미국에 대항하면 공산당이란 것 모르나?”
“그것이야말로 야만이죠. 반항하면 공산당이다? 일제가 만든 탄압 프레임에 빠져들다니요?”
“계보를 미군정이 가장 싫어한다는 것 알지? 군벌 체제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미군정 방침이야. 귀관이 나를 신뢰하고 소신을 굽힘없이 말한 것은 고맙네. 하지만 누구한테든지 말하면 다쳐. 음해와 모략이 일상사가 되었어. 그래서 트릭이 있는 거야. 잡혀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가는 수가 있어. 영원히 사라지거나 병신이 되어 나오네. 공포사회라는 것 알잖나. 그것은 부모도 보증을 서줄 수가 없어. 내 금명간 포로수용소를 차릴 계획이야. 그곳 수용소장으로 가게.”
“싫습니다.”
오민균은 단번에 거절하고, 연대장실을 나왔다. 2선으로 물러나라는 것은 야전군에게 지휘봉을 빼앗는 것과 같다.
문상길 서울 압송
영내에 비상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고, 뒤이어 스피커를 타고 비상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모든 병사들은 완전 군장을 하고 즉시 연병장으로 집합하라!”
이런 비상소집은 불시에 있었다. 탈영한 동료 병사 스무명을 집단 처형하고, 곧이어 연대장이 암살되고, 방첩대와 범죄수사대가 대거 투입되고, 그 사이 병사들은 비상소집으로 기계 부품처럼 움직였다. 명령이 떨어지면 반사적으로 움직여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중앙에서 총포 연구자들이 내려오고 정보국 수사진과 미고문단이 들이닥칠 때, 장병들은 너나없이 연병장에 집결해 품행검사와 총기조사를 받았다. 헌병들이 열 세워놓고 앞뒤를 돌아다니며 총기 상태가 불량하거나 태도가 석연찮으면 무조건 주먹으로 갈겼다. 미심쩍으면 열 밖으로 끌어내 조진 뒤, 헌병대로 끌고 가 죽을만치 두둘겨 패고, 어떤 병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깻단 털 듯 털면 결국 누군가 자복할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채명산은 이런 게 싫었다. 증거주의는 소멸하고 적대감으로 병사들을 겁주고 주먹질로 범인을 색출하려 하니 공포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부당하다고 나설 수 없었다. 연대장 암살은 그 어떤 것을 압도하고도 남는 엄중한 무게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는 제주도내 몇 군데로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부산 5연대 소속의 1개 대대는 제주읍에, 대구 6연대 1개 대대는 성산포에, 주력인 대정 연대 본부에는 제주 토박이와 광주·대전·수원병력이 섞여 주둔했다. 연대 명칭이 9연대가 11연대로 재편성되고, 어느날 11연대는 수원으로 원대복귀하고, 다시 9연대로 명칭이 돌아오고, 그 사이 병사들도 하루가 멀다하게 들고 났다. 그래서 혼란스러울 뿐, 연대의 색깔이 무엇인지, 병사 스스로가 어느 소속인지 헷갈리기만 했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숨 막히는 공포감과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장교단의 하나지만 채명산은 이때처럼 무서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모두들 떨고 있는데, 투서 한 장이 연대본부로 날아들었다.
-2대대 3중대장 문상길 중위와 하사관들을 문초해보라. 그들 안에 범인이 존재할 수 있다.
밑도 끝도 없이 써갈긴 투서는 그러나 연대 내의 팽팽한 긴장감을 단숨에 깼다. 범인이 특정된 투서가 날아드니 나머지는 혐의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구타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맥이 탁 풀렸다. 분명 병사 중에서 누군가 눈치를 챘거나, 사건에 연루된 자가 밀고했겠지만 막상 드러나자 이렇게 쉬운 걸 가지고 온 구성원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시달렸나 해서 허무한 마음까지 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병사들을 집합시켜 가혹한 체벌을 가한 것이 야비하지만 단서를 잡아내는 중요한 수사기법의 하나였던 셈이다. 지겹게 시달리느니 누구라도 벌떡 일어나 나요! 라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 병사들이 어디 하나 둘이었던가.
당장 문상길과 하사관들이 체포되어 연대 헌병대로 연행되었다. 문상길 중대의 소대장 채명산 소위도 연행되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에 갇혀 취조를 받았다. 정보국에서 나온 수사관이었다.
“귀관은 박진경 연대장이 직접 선발해서 제주에 파견된 자다. 박 연대장 사람으로 알고 있고, 그래서 연대장 암살에 가장 분개심을 갖고 있을 것이다. 문 중위와 가까운 사이인가?”
“교회를 같이 다녔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그랬더니?”
“혐의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군요.”
“병신 새끼, 옹호하는 거야? 두둔하는 거야? 너 도대체 군생활을 어떻게 하는 거냐?”
그는 배속된 지 두 달밖에 안되는 데다, 직속 상관인 문상길이 외출증을 끊어주고 한적한 바닷가에서 해녀가 따온 전복을 먹고, 여학생을 만나도록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이라서 호감을 갖고 있었다. 박진경 연대장이 취임한 이후에는 소대별 작전에 투입되어 여러 날 산속에서 함께 비트생활을 했다.
“오민균 소령의 지침을 받은 것이 뭔가?”
무엇을 전제해놓고 묻는 것 같아 그는 기분이 언짢았다.
“지시 받은 것 없습니다. 제 소속 대대장도 아닙니다. 합동작전에 함께 참여했을 뿐이죠.”
“배후 몰라? 문상길-손선호-신상우-양회천 배후에 오민균이 있다는 거 몰라?”
금시초문이었다. 채명산은 수사대가 오민균을 때려잡을 구실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무슨 꼬리를 잡았을까. 얼론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그가 좀 다르긴 했다. 폭도 토벌작전에 미온적이었으며, 경찰과의 합동작전에 비협조적이었다. 그러나 그만 떼어놓고 보아서 그렇지 장교단의 상당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채명산은 그를 지적인 장교의 전형으로 보았지, 불온하다고는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명색 우파의 상징인 선망하는 일본 욱사 출신이 빨갱이 사상에 물들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오민균 대대장은 존경할만한 분입니다. 민족의식이 투철합니다.”
“병신 새끼, 박진경 연대장이 총애했으면 그 값을 해야지 물정모른 막내자식처럼 정보 탐지는 팽개치고 순진하게만 놀아? 당장 꺼져!”
채명산은 취조실을 나왔다. 제주 연대의 수사는 한계에 부닥쳤다. 주변인들이 한결같이 입을 닫았다. 하긴 다들 인과관계가 있으니 침묵했을 것이다. 수사가 지지부진하자 통위부 정보국에서 혐의자들을 모두 서울로 압송했다. 윌리엄 딘 미 군정장관의 범인 체포령을 이행하려면 속전속결이 필요했다.
정보국은 명동의 옛 명치좌(구 국립극장)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1층에 헌병대와 방첩대, 유치장이 있었고, 2층에는 별도의 수사과와 행정실이 있었다. 김창동은 곱상하고 얌전한 얼굴의 청년장교를 앞에 두고 조금은 여유를 가졌다. 이런 자 다루기는 쉽다. 닳아진 놈 같으면 애 좀 먹을텐데 순진해보이는 것이다.
“관등성명은?”
“국방경비대 11연대 2대대 3중대장 문상길 중위입니더.”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입니다.”
그는 가능한 한 표준말을 쓰려고 노력했다.
“나이는?”
“스물셋입니다.”
김창동은 머릿속으로 셈을 해보았다. 자신보다 딱 열 살 아래였다.
“응, 자료를 보니 대구 6연대에 들어가서 하사관으로 있다가 국방경비대사관학교 3기생으로 임관했군. 그럼 나 모르네?”
“.....””날 몰라?“
그래도 가만 있자 김창동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겁부터 주어야 한다. 문상길이 정강이를 싸안고 주저 앉았다.
“일어나라우. 나는 부산 5연대에 입대했다가 3기로 들어가서. 날 보라우. 나두 3기야. 모르가서?”
3개월의 짧은 교육 기간에 400명이 되는 생도들이 바구니 속 미꾸라지들처럼 바글거렸으니 같은 구대 소속이 아니면 잘 알지 못했다. 김창동이 다시 말했다.
“옷 벗어!”
문상길이 군복을 벗었다.
“팬티도 벗어!”
팬티도 벗었다. 김창동이 그의 몸 위아래를 살피더니 쓰게 웃었다.
“가냘픈 몸매에 고걸 좆대가리라구 달고 다니네? 어린 놈이군. 씹은 할 줄 아네?”
순간 문상길이 김창동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김창동은 거들떠도 안보고 그에게 다가가 그의 성기를 부수수하게 덮고 있는 털을 확 손으로 잡아챘다. 한꺼번에 털이 한웅큼 뽑혀져 나왔다. 인간은 성적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 상대의 자존심을 무참히 밟고, 굴복시키는 데 효과가 있다. 그는 무수한 수사 경험을 통해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네 가슴에 빨간 물이 든 거이 뭐네?”
“부적을 붙였습니더.”
“왜 부적을 붙였네?”
“어머니가 절에서 부적을 하나 받아와서 가슴에 붙이라고 보내주셨습니더.”
“넌 기독교 신자 아니간?”
“맞습니더.”
“그런데 왜 불교 부적을 붙이네? 이상하지 않네?”
“어머니도 기독교를 믿지만 불교적인 정서를 갖고 있습니더.”
“하긴 고렇디. 수천 년동안 내려온 우리네 신앙 풍속인데 쉽게 바뀔 순 없디. 고양숙이 너의 뭐간?”
“약혼녑니더.”
“사랑으로 뭉친 거이 아니구, 사상적으루 뭉쳤더군. 고양숙의 에미나이가 좌익 아니간?”
“사랑하는 여자의 부모가 좌익이냐 우익이냐를 따지고 사귀진 않습니더.”
“뭬이라? 요새끼, 입은 그럴사 하군. 고럼 고양숙이 씹맛을 보구 사귀네?”
“왜 고따우로 말하십니꺼? 수사 내용과 상관없는 얘기는 대답하지 않겠소.”
“고래? 어디 그렇게 되나 보자.”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나고, 대답도 나가기 전에 사복 차림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김창동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김창동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돟아. 계속하라우.”
사복이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옆방에서 아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났다. 아악, 아아악, 으흐흐흐... 괴성이 계속 이어지고 꺼억꺽 숨넘어가는 소리가 나더니 곧 잠잠해졌다.
“전류가 몸에 들어가면 저렇게 절규하다가 기절하디. 바로 너의 부하다.”
김창동이 문상길을 노려보았다. 너도 각오하라는 뜻이었다.
“고생하디 말구 이쯤되면 불 때가 되지 않았네?”
문상길은 부하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굳게 마음 속으로 다졌다. 무너지면 안된다.
“옷을 입겠소.”
“누구 맘대루? 네가 김달삼의 지시를 받구, 하사관을 시켜서 연대장 각하를 살해한 거다. 아니간?”
“아닙니더.”
김창동이 그를 노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위층인지, 건너방인지 모를 방에서 또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손선호 목소리 같기고 하고, 양회천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때 시커먼 작업복 차림의 사복조 둘이 들어왔다. 그들은 다짜고짜 문상길을 패기 시작했다. 패는 것만이 임무인 양 말없이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눈에서 불이 나고, 코피가 터지고, 가슴을 맞고 숨이 막혀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천장에 매달린 희미한 전구의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낮에도 조사실은 어두침침해서 사물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전등불빛이 웬지 친구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바로 앉아라.”
바로 앉자 책상 뒤에 취조관이 숨듯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구석진 곳이라 문상길은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임무를 교대한 그는 문상길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발버둥쳐 봐야 끝났어. 다른 놈들이 다 불었다.”
문상길은 침묵을 지켰다.
“넌 빨갱이 중에서도 핵심이야. 중앙 올구라구? 그것으로 다 증명되지 않니?”
“난 빨갱이가 아니오.”
“그럼 뭐냐.”
“9연대 중대장이오.”
“말장난하나? 빨갱이는 가슴까지 빨갛군. 니 가슴팍을 한번 보아라.”
부적의 흔적은 여전히 그의 가슴에 남아있었다.
“왜 근래 부대에 출근하지 않았나?“
“약혼녀 집에 있었습니더.”
“왜?”
“몸이 불편해서 쉬고 있었심더.”
“그 처녀 벌써 여기 잡혀왔다.”
수사진은 잡혀온 고양숙을 돌아가며 집중 심문했다. 김창동이 맨 나중 수사실에 들어가 고양숙과 마주 앉았다.
“문상길이 처니 집에서 뭐했나?”
“쉬었어요.”
고양숙이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 나이 열여덟이었다.
“이 난리에 집에서 씹이나 하고 있었단 말이가? 그게 말이라고 하네?”
고양숙은 대답도 못하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한창 물오른 나이의 고양숙은 스물세 살의 젊은 청년과 골방에서 단내 나는 육체의 향연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연대장이 암살된 난리가 난 가운데 청년장교를 숨겨두고 사랑에 빠졌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큰 죄를 저지른 것 같았다.
“넌 살인범을 숨겨둔 중대범죄를 저질렀다.”
오들오들 떨던 고양숙이 마침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목숨만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사실대로 자백하면 목숨을 참작할 수 있디. 그동안 문상길이의 동태를 샅샅이 고백하라우.”
그녀는 문상길과의 관계를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에 무슨 의심과 불신이 있겠는가. 그가 시키는대로 심부름을 했고, 사람을 연결해주었다.
“돼서.”
김창동이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체포된 자가 물이 고여있는 씨멘트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어지간히 당한 모양이었다.
“일어나 앉으라우.”
그가 꿈틀대더니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관등성명 대라우?”
“하사 신상우입니다.”
“사실대로 자백할 때도 되지 않았네?”
“....”
“이 새끼가 아직도 상황을 모르누만. 다 자백했는데두 니가 무슨 항우 장사라구 버티네?”
“정말 나는 모릅니다.”
한심하다는 듯 김창동이 그를 고정된 철제의자에 앉힌 다음 끈으로 상반신을 꽁꽁 묶었다. 전선이 연결된 집게를 그의 귓볼에 물렸다. 벽의 스위치를 올리자 그가 아흐흐흐, 억억억 기묘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꽈배기처럼 몸을 꼬며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마구 흔들었지만 집게는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몸에 전기를 흘려 육체적 고통을 준다는 것, 그것은 힘 안들이고 효과를 백프로 달성할 수 있는 괴력을 갖고 있다. 수사기법 치고는 너무나 시원한 기법이다. 전기를 감전시켜 고통을 주면 배겨내는 자는 거의 없었다. 김창동이 스위치를 내렸다. 그는 축 늘어졌다. 김창동이 물었다.
“누구야?”
“모, 모, 모릅니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신상우가 더듬거렸다. 김창동이 이번에는 신상우의 두 팔목에 전선의 집게를 물렸다. 순간적으로 신상우가 그것을 털어내려고 하자 당장 군화발이 그의 발등을 찍었다.
“가만 이서. 정말 모르네?”
“사, 살려주십시오.”
김창동이 두말 없이 전압을 최대 출력으로 올렸다가 내리고, 또 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피의자는 온 몸을 비틀며 절규하지만 김창동은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고기 타는 냄새가 나고, 그의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신상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이정우 하사입니다.”
“이정우?”
“네.”
그러나 이정우 하사는 체포 직전 도주하는 바람에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도망간 이정우를 댄 것이고, 함께 체포돼온 자들을 불지 않았다. 김창동이 보조를 불러 확인하더니 “니가 나를 기만하구, 능멸해?” 하면서 그의 신체 여러 부위에 코일을 감고 타올을 올린 다음 바케쓰 물을 퍼부었다. 전신으로 전류가 잘 통하도록 조치한 다음 다시 스위치를 올리려 하자 신상우가 소리질렀다.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못견딜 일이었다. 이 처절한 고통의 터널을 어떻게 빠져나가랴.
“연대장님의 무고한 토벌전을 막기 위해 저지른 일입니다.”
“그걸 모르네? 그러니까 누구냐구? 겉돌면 안되디.”
그는 체념하고 “손선호 하사입니다” 하고 말했다. 김창동은 사무실로 돌아가 서류철을 챙기고, 보조 하나를 데리고 건너편의 조사실로 들어갔다. 구석에 손선호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바로 앉아!”
그가 무겁게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았다.
“관등성명은?”
“11연대 2대대 선임하사 손선호입니더.”
“고향은?”
“경상북도 경주입니더.”
“이 새끼들은 한결같이 동향 놈들이야. 너 대구 폭동에 가담했다가 야산대 들어가서 활동하다가 국경에 들어온 놈이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의 신상명세, 활동상황 여기 다 쓰여 이서. 다 파악해뒀디.”
김창동이 서류철을 책상에 올려놓더니 입에 침을 발라가며 한 장 한 장 제끼며 읽기 시작했다.
“손선호, 대구 10·1폭동에 가담하였음.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야산대에 들어갔음.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자로서 선산·칠곡·김천경찰서를 습격하였음. 남로당 세포로서 무장투쟁의 선봉에 선 자, 에라이 나쁜 놈!”
그길로 달려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의 입주둥이가 찢어져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다.
“죽여라, 개새끼야!”
손선호가 바닥에 침을 칵 뱉자 이빨이 두 대 피에 섞여 뱉어져 나왔다.
“그러잖아두 죽게 돼이서. 니 공모자가 다 자백했대서. 무슨 의리 지킨다구 버티나. 다 너를 배신 때렸는데 너만 의리 지킨다구? 미친 넘, 대질시켜 줄까?”
그러나 그들과 함께 사건의 전모를 퍼즐 맞추듯 얘기한다는 것은 치욕이고, 견딜 수 없는 수모다. 버티다 죽으면 그만 아닌가. 넘어가지 말자.
“난 범인이 아니오.”
“넌 강성이라 그럴 줄 알았디.”
김창동이 널빤지 위에 그를 눕히고 끈으로 몸을 꽁꽁 묶었다.
“이게 칠성판이란 거디. 장례 때 사용하는 장례용품이다. 너희같은 역도들을 혼내주라고 개발된 고문기로 진화한 거이야.”
그의 신체 부위에 코일을 설치하고 스위치를 넣자 그가 순식간에 칠성판을 들썩이며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몇분 지나지 않아 그가 늘어진 채 잠잠해졌다.
“찬물 끼얹으라우.”
곁의 보조가 바케쓰 물을 그의 몸에 끼얹었다. 그가 으스스 몸을 떨더니 의식을 회복했다.
“정말 안불 기가?”
이제는 말할 힘조차 없어서 그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독종이군. 전기 침을 놓아라.”
보조가 그의 허벅지, 성기, 가슴, 젖꼭지 겨드랑이, 닥치는대로 전기침을 찔렀다. 손선호가 본능적으로 비명과 괴성을 질렀지만 보조는 표정 하나 구기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 고문으루 내가 비적떼를 모두 잡아들였디. 내가 고저 맨입으루 헌병 오장까지 올라갔갔니? 명색 독립운동한다는 비적 떼들 여기에서 다 무너졌디. 없는 혐의도 씌워버렸디. 불라우! 네가 쏘았댔디?”
“네, 네, 내가 쏘았십니더.”
이윽고 손선호가 자백했다. 김창동은 이마의 땀을 씻고 비로소 휴-, 긴 숨을 내뿜었다. 그러면 그렇지. 사실 그는 혐의자 모두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쏜 사람은 분명 한 사람일테니 똑같은 질문을 하면 그중 하나는 다른 공모자가 분 줄 알고 체념하고 자백하게 된다. 자백한 것을 토대로 육하원칙에 입각하여 사건을 하나하나 꿰맞춰나갈 때의 쾌감. 그것은 하나의 황홀감이다. 김창동이 나무라듯 나직이 말했다.
“죽은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네? 박진경 연대장이 네놈들 부식비를 떼먹었네? 담배를 빼먹었네? 니 애인을 가로챘네? 니 부모를 쏘아죽였네? 그런데 왜 쏘아죽이네? 폭도들을 쓸어버리구, 제주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시대의 영웅을 쏘아죽인 이유가 뭐네? 공산 정권을 수립할 목적이었다구? 에라이 간나 새끼! 제주도를 평정할 기회를 빼앗은 네놈들이야말로 만고에 역도디! 하지만 니 놈이 주모자라구 생각진 않는다. 반드시 배후가 있을 거야. 대대장급, 연대장급이 아니면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지르지 못하디. 태생부터 빨갱이인 넌 빨갱이 소굴 6연대 물이 철두철미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하수인일 뿐이야. 더 큰 화가 미치기 전에 색출해서 다행이다만, 너는 단순한 행동대일 뿐이야. 안그러네?”
손선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좌익계라고 말하는 조선국군준비대(국준) 출신이었다. 총사령 이혁기, 부사령 박승환, 경리부장 이재복, 정보부장 장도용, 감찰부장 송태익이 이끄는 군사단체였다. 손선호는 일본군 하사관으로 복무하다 해방이 되어 귀환하자 국준에 들어갔다. 국준은 총사령부·각도 사령부를 갖추고 상비군 1만7천의 조직체를 갖춘 국내 최고의 군사단체였다. 경기도사령부 외 8개사령부, 인천 지대 외 82개 지대 등 체계있는 군사조직 체계를 갖추었다. 그중 하재팔이 조직한 경북지대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학병동맹, 해방병단, 학도대, 보안대, 한국혁명군, 조선임시군사위원회 등 크고 작은 군사단체들이 난립하자 미군정은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을 계기로 1946년 1월 군벌 체제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이들 군사단체를 해산했다. 뒤늦게 환국한 광복군도 해체되었다. 그렇더라도 일본군·관동군·국민혁명군·팔로군·광복군 출신자들은 북한 지역과 서울·인천 등 지휘관의 지역 연고에 따라 분산, 분포되었다.
국준이 좌익 계열 군사단체였기 때문에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당시 모든 군사단체가 해산될 때 함께 해산된 것이고, 국준은 초기 우익 단체와 마찬가지로 신탁통치 반대 노선이었다. 국준 지도부는 좌우익부터 일본군, 만주군, 팔로군 출신이 고루 망라되었다. 이들은 진보적 민족 진영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잠깐 명멸했던 인공을 지지했다.
국준은 미군정의 해체 명령에 따라 해산하긴 했지만 규모가 커서 쉽게 흩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해산에 항의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미 군정은 극우 청년단체를 동원해 태릉(현 육사)의 국준 훈련장을 습격하고, 명동으로 옮긴 본부도 습격해 조직 와해에 나섰다.
이때 이혁기 총사령이 체포돼 끝내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에 국준은 더욱 미군정과 대결적 위치에 섰다. 탄압이 가중되자 대원들이 흩어지면서 주로 대구 6연대와 부산 5연대로 들어갔다. 대원들이 5연대와 6연대에 많이 들어간 것은 이재복·하재팔 등 영남 출신 지도자들의 본거지고, 그 지역이 사회주의 성향이 짙어 보호받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대구 지역은 국준 경리부장 이재복, 참모장 하재팔의 고향이었다. 이재복은 박상희·황태성과 함께 항일독립투쟁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남로당 군사부장을 지내면서 친구인 박상희의 친동생 박정희에게 남로당 군책(軍責) 임무를 부여했다.
대구 6연대 군사들은 10.1 대구항쟁을 겪고, 쌀 공출에서부터 주민 탄압 등 일제강점기보다 못한 미군정 정책을 현장에서 직접 목도하며 분개했다. 10.1 항쟁에 참여한 젊은 청년들이 경찰에 쫓기면서 상당수가 이들 휘하의 군대로 숨어들었다. 청년들이 피신처 삼아 6연대로 몰려드니 연대는 자연 사회 불만 세력의 집합소가 되었다. 손선호, 문상길도 그중 하나였다.
1946년 2월 창설된 대구 6연대는 태생부터 저항의 숙명을 안고 출범했다. 연대 창설의 산파역은 하재팔이었다. 그는 대구 국군준비대 참모장을 하다가 해산되자 군사영어학교 1기로 들어가 소위 임관해 고향인 대구로 내려와서 김영환과 함께 6연대 창설에 나섰다. 이때 표무원, 강태무, 곽종진, 이정택, 이상백 등 좌익계 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6연대 연대장(창설 당시는 대대장)은 초대 김영환, 2대 최남근, 3대 김종석, 4대 심언봉, 5대 다시 최남근으로 이어졌다. 이중 초대와 4대의 재임기간은 통털어 3개월이었고, 김종석과 최남근이 1년 여 번갈아 연대장을 맡았다. 김종석은 대전 2연대장으로 있을 때 군에 입대하려고 찾아온 일본 육사 후배 장지성에게 “미국놈 앞잡이 노릇 말고 서울대학에나 들어가!”라고 호통치면서 쫓아버렸던 사람이다.
그는 일본군 장교로 있었던 것을 자성하고 있는데, 또 외세의 장교가 된 것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다. 그는 본래 윌리엄 딘 미 군정장관이 박진경 연대장과 함께 한국의 군대를 이끌어갈 엘리트로 지목한 사람이었지만, 길은 달랐다.
대구 연대 초대 연대장 김영환 구타사건이 일어났다. 부임한 지 한달이 안되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사표를 쓰고 서울로 올라가버렸다. 후임 연대장 대리로 부임한 원기섭 소위 역시 살벌한 분위기를 못견디고 예편해버렸다. 어떤 지휘관도 대구 6연대의 텃세를 견디지 못했다. 대구 연대에서는 항명과 테러와 린치가 일과처럼 일어났다.
대구 10.1사건이 터졌을 때, 6연대는 출동하지 않았다. 대구 6연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였기 때문에 미 군정은 이들의 출동을 막았다. 대신 멀리 떨어져있는 대전 2연대가 진압작전에 투입되었다. 미 군정이 우려했던대로 내연하고 있던 6연대가 마침내 폭발했다. 1948년 11월 2일 반란이 일어났다. 제주 4.3과 여순사건에 지원 병력이 차출되고, 200여 병력만 연대에 남아있을 때, 연대본부가 남로당 세포라고 지목한 곽종진 준위를 체포하려고 서둘렀다.
위기를 느낀 그는 정보과 이정택 상사와 함께 “경찰이 몰려온다”고 병사들을 선동해 장교 2명을 사살하고, 헌병 6명을 사상한 뒤, 6연대를 점령했다. 대구 주둔 미 1연대 병력이 중화기로 무장하고 출동하자 이들은 5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경찰 타도’를 외치며 연대를 빠져나가 대구 시내를 거쳐 칠곡-동명-가산의 경찰 지서를 습격하고 사흘 뒤 김천에 나타났다.
국방경비대 총사령부는 청주 7연대 병력을 진압군으로 현지 출동시켰다. 반란 병력은 7연대 병력과 교전하다 팔공산으로 들어가 게릴라 활동으로 전환했다. 이정택 상사는 6.25 직전인 1950년 봄 국군의 태백산지구 토벌 시 사살되었다. 이들의 빨차산(야산대) 활동이 얼마나 긴 기간 동안 집요하게 활동해왔나를 알 수 있다.
2차 반란은 1차 반란 한달 후인 1948년 12월 초 일어났다. 지리산 토벌을 마치고 귀대 중 연대 본부의 지시를 받은 차갑준 대위가 하사관과 병사들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했으나 일부 병사들이 불응했다. 이들은 좌익계였다. 좌익 혐의를 받고 있는 이동백 이하 하사관과 병사들이 무장해제 명령을 받자마자 숙청당할 것을 우려하고 도리어 역습에 나선 것이다. 바로 군 숙청의 1차 시기이 일이었다.
이동백 상사와 좌익계 병사들이 군 차량에 분승해있던 장교 9명을 사살하고, 병사들을 쏘아 처치했다. 이동백은 일당을 지휘하여 경북 달성 지서를 습격하고, 팔공산으로 들어가 10.1폭동에 가담한 야산대와 합류했다.
3차 반란은 2차 반란 한달 후인 1949년 1월 하순 일어났다. 6연대 4중대는 포항 연일비행장 경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연대 본부는 중대별로 차례로 좌익계를 숙청한 뒤 4중대를 숙청하기 위해 그들을 연대본부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1차 반란 후 팔공산에 들어간 곽종진, 이정택이 4중대 경리 선임하사관과 접선한 끝에 숙청 첩보를 입수하고 돌아가면 다 죽는다고 알리자 이들이 먼저 기습해 소대장 백달현 소위와 하사관 등을 사살했다.
이들은 대구 시내 좌익계와 함께 6연대를 습격해 무기고의 중화기를 탈취해 팔공산으로 들어갔다. 미리 입산했던 곽종진·이정택과 합류하니 이들 세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같은 연대에서 연거푸 세 차례나 반란이 일어난 것은 군대 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대구에서만 이같은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내부의 좌익계와 외부 좌익계의 접선과 응집력이 강고한 결과였다. 10.1항쟁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영향이었다.
이런 일 때문에 지휘관들은 6연대 배속을 사지로 가는 것으로 여기고 기피했다. 이 바람에 6연대는 한달이 멀다 하고 연대장 교체가 단행되었다. 지휘부가 취약하니 내부 좌익계가 더욱 준동했다. 박정희와 같은 엘리트 장교를 고향에 투입하면 금방 진정시킬 수 있었는데, 그 역시 의심받고 있었기 때문에 6연대는 계속 사고 연대로 남았다.
대구 10.1사건은 제주 4.3이나 여순사건과 같이 지역 ‘폭동’이었다. 지역사회의 모순을 타파하자는 울분의 저항일 뿐, 국가를 전복할 혁명 의지는 없었다. 그러나 후일 기득 보수 세력은 국가전복 세력이라고 매도했다. 국가전복이 가능하려면 점이 선이 되고, 선이 거대한 용틀임으로 분출해야 하는데 그런 횡적 유대는 없었다.
대구 10.1항쟁 세력과 대구 6연대 반란 세력이 연합해 경찰과 군의 진압작전을 피해 태백산 줄기로 들어가 줄기차게 빨치산 활동을 편 것이 색다른 면이었다. 이들은 6.25 때까지 준동하며 남침한 북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이들이 한국 빨치산의 원조였다.
그런데 훗날 군부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같은 역사는 묻혔다. 정권을 장악한 세력들이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회피했다. 이들은 반공과 남북 대결, 지역분열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비(前非)를 숨기고, 다른 지역의 좌익 활동을 내세우며 공포정치로 권력을 유지했다. 특히 집권자 박정희가 그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전력 때문에 해당 지역의 좌익 활동은 더욱 가려지고 숨겨졌다.
박정희는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지만 미국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다. 그의 좌익 경력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좌익 경력을 세탁할 필요를 느꼈다. 그것은 과거 좌익 경력이 있는 자들을 일망타진하는 일이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전향을 말해주고 싶었다.
박정희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집권하자마자 피바람을 몰고 왔다.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키겠다”고 혁명공약에서 언명했으나, 역설적이게도 구악 세력인 3.15 부정선거 원흉들과 부패한 자유당 간부들, 비리 기업가, 부정축재자보다 진보인사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박정희는 사회개혁 세력인 혁신계와 청년·학생들은 다수 체포, 구금, 장기 복역시켰고, 그중 일부는 형장의 이슬로 보냈다.
1961년 육군중령으로 박정희가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을 지낸 이석제(차후 감사원장)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961년 5․16 직후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상황을 점검하던 중 미국이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배경을 뒷조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고백했다.
이석제는 “미국의 사상공세를 일거에 역전시키기 위해서 비상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혁명군이 강력한 반공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만큼 미국 측에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보여줘야만 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도연맹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반공에 대한 의지를 미국에게 보여주고자 결심했다”고 적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의 군경, 헌병대에 비상을 걸어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으며, 나중에는 보도연맹 관련자들뿐만 아니라 소위 혁신 정당 관련자, 좌파 이데올로기에 물든 지식인, 사회단체 지도자, 노조 지도자 등 4000여 명에 이르는 사회 불만세력과 좌익 활동 경력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해 체포, 수감했다“고 적고 있다. (김성수 전 씨알의 소리편집위원 <박정희 정신 외치는 황 대표님, 58년 전 이 죽음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일부 인용)
어쨌든 연이은 폭동으로 대구 6연대는 ‘반란 연대’라는 오명을 쓰고 숙군이 일단락된 1949년 4월 15일 해체되어 22연대로 편입되었다<사사키의 ‘한국전쟁비사 건군과 시련’ ‘제6연대’편 일부 인용>.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김창동이 문상길 조사실로 향했다. 문상길은 바닥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그 역시 고문을 못이긴 채 온 몸이 누더기처럼 너덜거린 상태였다. 김창동은 이미 배후를 캐냈기 때문에 느긋하게 심문했다.
“배후가 김달삼이니?”
“나는 그의 지시를 받는 지체가 아닙니다.”
“고렇디. 빨갱이들은 위계질서가 분명하디. 어차피 전모가 밝혀진 이상 니 몸이 성해야 할 것 아니가? 김익창과 오민균의 지시가 없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갔디. 안그래니?”
사건 전모를 안 이상 이제 배후를 캐내는 일이 남았다. 도저히 단독범행일 리 없었다. 그리고 김익창 오민균을 어떻게든 엮어넣어야 했다. 그러면 큰 뉴스가 될 것이고, 그는 대어를 낚았다는 것으로 영웅이 될 것이고, 일계급 특진은 따놓은 당상이다.
“이제 고문은 없다. 할 말 소신껏 하라우. 인생 별거간? 제주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니?”
“제주 문제는 총칼이 아닌 대화로 진정시킬 수 있는 사안입니다. 전임 지휘관 김익창 중령의 정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고렇디. 고래서 군과 남로당이 합작한 게디?”
“쓸데없는 얘기 마소.”
“좋다. 자식, 고집은 있어개지구...”
며칠 후 수사본부는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암살사건에 연루된 범인은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양회천 상사, 이정우 하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등 9명이며, 직접 총을 쏜 자는 손선호라고 발표했다. 범인들은 산으로 도주한 이정우를 제외한 전원 체포되어 군사 재판을 받았다. 암살 이유는 문상길, 손선호 일당이 남로당 중앙의 지시를 받아 제주에 공산혁명 기지를 세울 목적으로 신임 연대장을 암살하고, 군을 장악하려고 기도했다고 발표했다.
신임 연대장이 강경 토벌작전으로 대규모 살상이 이루어지고, 6천 여 주민이 체포되고, 강경 진압에 불만을 품은 제주 출신 하사관과 병사들이 탈출해 그중 20여명이 체포돼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되었다는 배경 상황은 생략되었다. 탈영병 집단 처형은 철저히 극비에 붙여졌다.
1948년 8월 8일 남산의 군기대사령부에서 박진경 9연대장 암살 사건 재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이응준 대령, 법무사 김완룡 소령, 검찰관 이지형 중령, 관선변호사 김홍수 소령, 민선변호사 김양, 증인 김익창 중령, 문상길의 애인 고양숙이었다. 피고인석에는 피의자들이 모두 앉아있었다. 이 재판은 몇 차례 더 계속되었다.
-박진경 대령 살해범 공판 제3일. (8월)13일 상오 9시부터 개정되었는데 제2일인 12일 주범 문상길 중위의 기소문은 전기고문 끝에 눈을 막은 후 조서에 대한 기록 여하를 모르고 강제적으로 무조건 날인한 것이라고 부인하는 심리서를 낭독하고...(중략) 한편 전 제9연대장(현 제13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모든 군사행동은 당시 최고작전회의 참모이던 드루스 미군 대위의 지휘였고 박 대령 살해는 전혀 나는 모른다”는 중대 증언으로 상오 군법재판은 일단 휴정하였다(11시 20분).’
-국제신문 1948년 8월14일자
선고 공판은 1948년 8월 14일 열렸다. 속전속결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하루 전이자, 광복절 하루 전이었다. 재판정은 마지막 사실 심리를 마치고 판결 주문이 낭독되었다.
문상길 신상우 손선호 배경용은 총살형, 양회천에게는 무기, 강승규(강찬규)에게는 징역 5년, 황주복 김정도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군사재판인지라 단심제였다(사형 집행 전 배경용, 신상우는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문상길이 최후 진술을 했다.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할 것이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김관후의 4·3칼럼(17) ‘제주사회에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킨 박진경’ 중 자료 인용>
장내가 한동안 수런거렸으나 이내 조용해졌다. 곧 손선호의 최후 진술이 이어졌다.
"박 대령의 30만 제주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 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했다...사격 연습을 한다고 하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난살하였으며, 폭도가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였다.
(중략)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장태욱 ‘우리나라 고급장교 살해사건 1호는?’ 오마이뉴스 2008.5.9 인용>
1948년 9월 23일 오후 3시 35분. 경기도 수색의 산기슭에서 문상길, 손선호의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문상길은 사형 집행 전 하나님의 가호를 비는 기도를 올렸으며, 손선호는 “내가 좋아하는 군가를 부르고 저 세상으로 가겠다”며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는 용진가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기독교 신자로서 “하나님, 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국방군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뒤이어 총성이 울렸다.
한국현대사 연구가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박진경 연대장의 토벌작전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박진경의 무차별 체포 작전은 경비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일반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그들을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전은 민중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들을 더욱 깊은 산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사태를 오히려 장기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였다.
박진경 연대장 암살사건은 제주에 보복의 ‘혈풍(血風)’을 몰고 올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집권세력에게는 제주 평정의 좋은 구실이 되었다. 오민균은 자신에게도 누군가로부터 목을 조여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연대장실을 찾았다.
“연대장 각하, 저번 제안하신 제주포로수용소장직을 맡겠습니다. 일선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나 역시도 이곳을 빨리 뜰 것이다.”
최경산 연대장이 오민균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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