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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과 민란 사이, 경찰과 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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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반란과 민란 사이, 경찰과 군 사이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28>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28장 제주 9연대, 첫 배속지

채명산은 첫 배속지가 제주 9연대로 발표되자 기분이 몹시 상했다. 생도시절 성적이 형편없거나 무슨 사고라도 치면 교관들은 곧잘 “너 제주도로 유배 보내버린다!”라며 호통을 쳤다. 제주도 배속은 누구나 귀양살이로 인식했는데, 하필이면 그곳으로 발령나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는 함께 배치된 다른 친구들을 찾았다. 모두 여덟 명이었다.
“이거 엿먹이는 거 아냐? 통위부(현 국방부)로 가서 경위를 알아보자구.”
1948년 4월 6일 국방경비대사관학교 5기생 졸업식과 함께 생도들은 소위로 임관되었다. 입교 5개월만에 졸업과 동시에 장교가 되어 배속지를 명령받았다. 채명산은 400명 생도 중 성적이 20위권이었다. 교과목은 물론 각개전투, 유격훈련, 총검술 등 어느 것 하나 실력이 빠지지 않았다.
채명산은 제주 배속자 네 명과 함께 서울 남산 밑 회현동에 소재한 통위부로 갔다. 인사참모 면회를 신청하자 박진경 중령이 나타났다. 그는 함께 간 김영작 소위와 대학 동기라며 반가워했다. 채명산은 박 인사참모에게 방문한 용건을 말했다.
“성적이 우수한 제가 왜 제주도로 파견됐는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박 인사참모의 안색이 금세 변했다. 새파란 신입들이 군대 명령을 무시하고 항의하러 오다니,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가 경상도 말씨로 물었다.
“그게 불만이가? 제주 파견을 원치 않나?”
“교관들이 성적이 좋지 않거나 행실이 좋지 못한 후보생은 제주도로 보내버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교과목이든 훈련과목이든 성적이 좋은데 제주도로 쫓아버리니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자 오해라는 듯 그가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귀관들을 배치한 것은 전적으로 내 뜻이다. 성적이 좋고 똑똑한 장교들을 일부러 선발해 제주도로 배치했다. 일부러 너희를 선발한 것인데, 그기 섭섭한가.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배속시켜줄까? 하지만 좀 지나보면 알 것이다. 어떤가?”
순간 인사참모가 자신을 인정해준다고 하니 채명산은 생각이 달라졌다. 월남한 이후 어느 누구로부터 대접받아본 적이 없었다. 홀홀단신 남으로 내려온 외로움은 컸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일본속담에 사내는 자기를 인정하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했습니다. 영광입니다.”
채명산이 말하자 다른 소위들도 동의했다. 박 중령이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더니 내밀었다.
“제관들이 와주니 나도 기쁘다. 오늘 월급날인데 이걸로 막걸리 마시그라”
따지고 보면 제주도로 간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었다.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으로서 남한 땅은 모두 낯선 땅이었다. 제주도는 경치라도 좋다. 그에게는 어딘들 특별히 좋고 나쁠 것이 없었다.
1948년 4월 10일, 인천에서 미 군용선을 타고 제주로 가는 26시간의 뱃길은 심한 멀미로 고생했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마음은 설레었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제주도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한라산에서 밑으로 내려올수록 푸른 숲과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선명하고, 붉은 꽃무더기들이 불붙은 듯 피어있었다. 폭동이 났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부두에 내려 인근 식당에서 요기를 하고 나오는데 길바닥 여기저기에 사람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비로소 전략지구라는 실감이 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칠 뿐, 크게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무표정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청년들이 죽창을 어깨에 메고 4열종대로 행진하는 모습도 보였다.
채명산이 9연대 2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한 다음날, 직속상관인 문상길 중대장이 전체 중대원을 연병장에 소집했다. 그는 채 소위에게 중대 병사들을 향해 취임인사를 하라고 시간을 주었다. 채명산이 단 위에 올라 “내가 오늘부터 여러분과 생사고락을 함께할 채명산 소위다!”라고 밝히며 일장 연설을 했다. 그런데 호기심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신임 장교를 바라봐야 할 병사들이 하나같이 그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증오의 눈초리라고 해야 옳았다. 섬뜩하게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인사말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단을 내려왔다.
“채명산은 이북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소문이 미리 퍼져 있었음을 그는 곧 알았다. 그들은 위대한 김일성 장군을 배신하고 남하한 반동분자로 그를 낙인찍었고, 이런 비애국자는 신생 조국의 장교로서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이변이 생겼다. 병사들이 몰려들더니 그의 손을 잡아보려고 소동을 벌였다.
“김일성 장군과 악수한 손이라면서요?”
그가 북한에서 김일성 장군을 만나 악수를 나누었다고 얼핏 말한 것이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그들은 신출귀몰한다는 전설적인 항일독립투사 김일성 장군을 흠모했고, 평양에서 연설했다는 것에 더욱 흥미를 갖고 있었다. 채명산도 평양에서 그의 연설을 듣기 전까지는 그가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인 줄 알았다. 그러나 백발이 성성한 60대가 되어있어야 할 식민지 소년들의 위대한 김일성 장군은 모습은 없고, 새파란 청년이 김일성이라며 연설장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도 김일성은 분명했다. 일제 시 항일 독립투쟁을 하던 선구자들은 위장용, 또는 신분세탁용으로 가명을 쓰거나 이름을 서너 개씩 바꿔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명산은 병사들에게 그가 동명이인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병사들을 실망시킨다는 것은 또다른 상처를 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의 존재감이 사라질 수 있다. 김일성 장군과 어떻게든 인연의 끈을 맺었다는 병사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취임 인사 때 쏟아진 싸늘한 시선을 돌이켜 볼 때, 그런 인연이라도 갖고 있는 것이 재산이 되는 것이다. 설사 그가 가짜라고 해본대야 믿지도 않을뿐더러, 공연히 오해를 살 수 있다.
이렇듯 정보가 빈곤하니 가짜뉴스가 진짜처럼 판치고, 군중들은 그에따라 들뜨고 환호하고, 반대로 실망하거나 절망했다. 정보가 없으니 자기 신념이나 기호에 따라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대세였다.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그런 것은 더욱 어지럽게 거리에 부유하고 있었다.
며칠 뒤 인근 산에 폭도들이 출몰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채명산은 재빨리 비상을 걸어 소대 병력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갔다. 병사들을 위장 복장 조치하고 산을 뒤졌다. 토벌대라는 신분노출은 또다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집중적으로 공격 목표가 되는 것이다. 폭도들은 그림자도 없고, 어느 골짜기에 이르자 소나무 숲에서 한 소년이 불쑥 토벌 병력앞에 나타났다.
“내가요, 산 속에다가 일본군이 버리고 간 탄약더미와 총기 수백 정을 발견했다고요.”
소년이 엉뚱하게 말했다. 소년은 소학교 6학년쯤 돼보였다. 채명산은 묵살하고 그에게 명령했다.
“산속에 있으면 위험하다. 즉각 하산하라.”“무기가 있다니까요. 그걸 내가 찾아냈어요.”
그에 아랑곳없이 소년이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그를 앞세우고 골짜기 깊숙이 들어갔다. 소년은 방향을 잃었는지 탄약과 장비가 은닉돼 있다는 장소를 쉽게 찾지 못했다. “너 이 녀석, 우릴 속이고, 함정에 빠뜨릴 작정 아니냐?”
이렇게 의심했으나 소년 스스로 실망하며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 중화기를 다뤄본 분대원 중 하나가 한 곳에서 코를 큼큼 하더니 소리쳤다.
“탄약 냄새가 납니다. 분명 인근에 있는 것 같습니다.”
수색을 계속하는데 한쪽 골짜기에서 “여기다!”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가 보니 과연 소나무 숲속에 가려진 천연 동굴이 나타나고, 그 안에 상당량의 군 장비와 한 리어카분의 탄약, 일제 구구식 소총 수백 정이 발견되었다. 무기를 노획한 것은 하나의 전과였다. 물자와 무기가 절대 부족인 군에서는 무기를 획득하면 적을 섬멸하고 온 것 이상으로 높이 평가했다. 적으로부터 무기를 획득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무기 노획자는 상이 주어지고, 배식도 한동안 달라졌다.
채명산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휴대했던 비상식량 C레이션 한 통을 주었다. 소년이 과자 나부랭이보다 껌을 꺼내더니 질겅질겅 씹으며 좋아라 했다. 안전지대에 이르러 모두 풀밭에 둘러앉았다. 큰 전과를 올린 듯 모두 기뻐하는데, 소년이 한쪽에 세워둔 대원들의 구구식 총을 움켜쥐더니 채명산을 향해 겨누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소년이 방아쇠를 당긴다는 것이 안전장치를 풀지 못해 실탄이 발사되지 못했다. 소년이 다시 장전하는데 이번에는 탄창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병사 한명이 뛰어들어 소년을 덮쳤다. 다른 병사가 달려가 찍어누르면서 소년을 생포했다. 소년을 포승줄로 묶고 무릎을 꿇린 뒤 한 병사가 외쳤다.
“즉결처분하겠습니다!”채 소위는 순간 머리가 아찔했다. 첫 부임지에 와서 새파란 소년을 즉결처분한다? 즉결처분은 생각해보지 않았고,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도 소년시절 서툴고 부족하고 허기가 졌다. 상점에 가서 훔쳐온 것을 친구들과 나누며 영웅이 된 기분으로 우쭐댄 적도 있었다. “살려 줘라.”
“네?”
“보내줘.”채명산은 일부러 남의 말처럼 말했다. 소년이 이상하게 자신의 분신처럼 느껴졌다. 연민의 감정이 싸하게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부하는 지지 않았다.“아닙니다. 총을 들어 공격했으면 적입니다. 군율을 지키기 위해서도 즉결처분해야 합니다.”“철딱서니 없는 소년이다. 분별력 없는 아이를 어떻게 죽이겠나. 대신 심문해보라.”병사들이 소년을 계속 무릎 꿇린 채 다그치기 시작했다.“넌 누구냐?”
“왜 소대장님을 죽이려 했는가.”
“사실대로 불라.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즉결처분이다.”
한참 후 소년이 말했다. 별로 두렵거나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딘가 좀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나는요, 산에 들어간 삼촌 심부름을 갔다가 마을로 내려가는 길인데 무기고를 발견했어요. 그것을 신고하면 선물을 받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인민유격대가 아니잖아요. 청년단이잖아요.”소년은 위장복을 한 군인들을 자신이 따르는 인민유격대나 입산자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서북청년단이나 대동청년단 무리다. 어린 것들도 청년단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처분해야겠습니다.”
처치가 분명해졌다고 본 한 대원이 주장했다. 그러나 채명산은 내키지 않았다.
“생포해서 함께 하산해. 어리석고 철모르는 녀석의 돌출 행동을 처단하기엔 저 인생이 불쌍하잖나. 저런 아이 죽여서 뭐하겠나. 모자란 놈 같은데...”“데리고 갈 바엔 그냥 내려보내겠습니다. 귀찮아집니다.”
“알았다. 조심해서 내려가도록 조치해라.”
소년은 석방됐다. 비탈로 한참 내려가던 소년이 잡목 숲 사이로 기어서 몰래 올라오더니 은닉 무기고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총을 한자루 메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멈춰!”
한 대원이 뒤따라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래도 소년이 달렸다.
“멈춰! 도망가면 쏜다!”
그러자 소년이 획 돌아서더니 소리쳤다.
“무기고는 내 거예요. 내가 발견했어요! 아저씨들 가져가지 마세요!”
그는 은닉 무기고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마치 산에서 죽은 꿩을 하나 주운 행운으로나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때 탕, 소리가 나고 소년이 아무렇게나 고꾸라졌다. 다른 소대원이 소년을 향해 쏴버린 것이다.
“누구야?”
채명산이 소리쳤다.
“안됩니다! 저놈이 무기를 휴대했습니다! 안보셨습니까? 소대장님을 공격했잖습니까.”
소대원이 소리치고, 쓰러진 소년에게 달려가 총을 수습했다. 채 소위는 귀대하자 수색작전 결과와 함께 소년 처치 상황을 보고했다. 소속 중대장 문상길 중위가 듣고 있더니 표정없이 차갑게 말했다.
“누가 쏘았나?”
그러나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가 재차 물었다.
“누가 쏘았냐니까!”
대답없이 한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 여전히 나서는 대원이 없었다.
“이 새끼들, 사실대로 말하지 못해?”
“제가 쏘았습니다.”
견디다 못한 채명산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부하에게 책임을 돌릴 수가 없었다. 당장 귀싸대기가 올라왔다. 문상길이 군화발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채명산이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다가 고통을 참으며 자세를 곧추 세워 우뚝 섰다.
“적인지 아닌지도 구분 못해? 그렇게 해서 선무공작이 되겠어?”
“상대가 총을 들었습니다. 나를 쏘려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의문의 여지없는 사실이었다. 생포하라고 했는데 부하가 쏘아버리니 어쩔 수 없었다.
“너 교인이지?”
그가 엉뚱하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 역시 교인이야. 살생은 범위와 기준이 있어! 어린 학생을 쏘아죽였다면, 그건 옳지 못하다. 묶어서 생포해 와야지, 이렇게 해가지고 대민 선무공작이 되겠어? 그 무기고는 우리가 보호한다. 누구에게도 노출시키지 말라.”
“알겠습니다.”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말기 제주도에 군단 병력을 주둔시키고 본토 결전에 대비했다. 나가스루 사비시게 중장이 이끄는 3개 사단과 1개 혼성 사단으로 구성된 병력 6만 여 명의 일본 제5군이다. 군단 병력이 무기를 비축했다면 엄청난 양이다. 이 무기를 패주 시 가져가지 못하고, 바다에 빠뜨리거나 한라산 동굴진지에 은닉하고 돌아갔다. 문상길이 말했다.
“유기된 무기들을 우리가 발굴했으니 철두철미 우리가 관리한다. 죽은 소년은 묘를 잡아 고이 묻어주라. 민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 오늘 일은 이것으로 일소에 붙인다. 해산하라.”
병사들 앞에서 위관이 뺨을 맞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채명산은 수치스럽거나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병사를 대신해 기합을 받는다는 것은 지휘관으로서 갖는 배려의 덕목이지, 결코 모욕이 아닌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다음날부터 소대원들이 그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주말, 스리쿼터를 타고 제주 읍내를 가는데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김익창 연대장이 신임 장교들을 회식시켜 준다고 해서 읍내로 나가는 길이었다.
“신임들, 제주도 구경할 만하지?”
상황은 긴장된 나날인데 연대장은 의외로 느긋했다.
“제주도는 경치가 그만이야. 인심 좋고 해녀들이 따온 전복을 초장에 찍어 먹는 맛이 좋지.”
그렇게 말하고 한 곳에 이르자 그가 갑자기 운전병에게 스톱 명령을 내렸다. 차가 멎자 그가 차에서 내려 밭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꿩 무리를 향해 총을 겨눴다. 가늠쇠를 목표물에 맞추더니 그대로 발사했다. 꿩들이 푸드득 날고, 한 마리가 바닥에서 퍼덕거리다 동작을 멈췄다.
“가져오게.”
운전병에게 명령하자 단련이 된 듯 운전병이 단숨에 밭으로 올라가 죽은 꿩을 가지고 왔다.
“오늘 회식이 푸짐할 거야. 가면서 몇 마리 더 잡지.”
실제로 가는 도중 다섯 마리나 잡았다. 두 마리를 식당 주인에게 주고 세 마리를 살을 발라 꿩 전골을 끓이니 푸짐한 술안주가 되었다. 술이 엔간히 돌자 연대장이 무용담을 털어놓았다.
“내가 지프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는데 말이야, 가까운 보리밭에서 꿩이 날아가는 기라. 내려서 한 방을 쐈더니 두 마리가 동시에 떨어지는 거야. 그걸 두고 일전쌍조(一箭雙雕)라고 하지, 하하하. 화살 하나로 꿩 두 마리를 잡았단 말이야. 운전병더러 주워 오라고 해서 갖고 오는데 개굴창 커브 길에 누군가가 돌덩이로 도로를 막아놓고 있는 거야. 폭도들이 그랬구나 하고 차를 세우니까 과연 폭도 4~5명이 총을 들고 구렁창에서 기어나오는 기라. 모두가 눈이 빨개져가지구 나를 노려보며 다가오더라니까. 요자식들, 밤잠도 못자고 활동하누나 싶어서 불쌍한 생각이 왈칵 들더군. 그래서 꿩을 건네주면서 가서 삶아 먹고 기운 차리라고 했지.”
어디까지 농담이고, 어디까지 진담인지 모르지만 그의 천연덕스런 말에 모두 웃기는 했으나 씁쓸했다. 토벌 대상자에게 기운 차리라고 꿩을 건네주다니, 전쟁 중인데 사냥 나온 포수처럼 이렇게 한가할 수 있을까. 그는 ‘육군 3대포’로 통하는 ‘경상도 낭만파’였지만, 그래서 그런지 인생관 자체가 군인 세계와는 먼 사람 같았다.

“국경(국방경비대)이 왜 개똥 취급받는지 제주에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채명산 소위가 투덜거리듯 뱉어냈다. 채명산의 옆자리엔 김이구 소위가 앉아 있고,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앞자리엔 선임장교 문상길 중위가 앉아 있었다. 문 중위가 신임 채명산과 전속 온 김이구를 축하하기 위해 모슬포의 한 식당으로 이끌어 자리가 마련되었다. 김이구는 문상길과는 고교 동기였다. 그는 사고를 쳐서 진급을 못했다. 그들은 막걸리를 몇 되 마셨다.
“개똥? 왜? 난 경찰놈들 떡실신이 되도록 패주었던 사람이야. 광주 4연대 시절이지.”
김이구가 말했다. 1947년 6월 광주 4연대 하사가 휴가를 받아 고향인 영암 신북에 갔다가 경찰과 시비가 붙어 영암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소식을 듣고 그를 인수하러 간 4연대 장교와 헌병들이 구타당하고 구금되었다. 이러자 4연대 병사 300여 명이 무장한 채 트럭을 나눠 타고 영암경찰서를 습격했다. 기관총이 난사되는 교전 끝에 4연대 병사 6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수습하러 출동한 연대장 이한림 소령도 구금되었다. 김이구는 이한림 소령의 부관이었다.
“내가 지서주임 놈을 납치했지. 그자를 월출산 골짜기로 끌고 가서 연대장과 우리 병력을 풀어주지 않으면 쏴버리겠다고 권총을 뽑아 그자 이마빡에 갖다 붙였지. 그자가 발발 떨면서 뒤따라온 부하에게 명령하더군. 빨리 가서 풀어주라고. 사내대장부가 그런 담력이 있어야지.”
그 후 진상조사를 요구했으나 유야무야되고, 그는 제주 9연대로 전속되었다. 이 충돌은 후일 여순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 14연대 병력이 경찰서를 타켓 삼아 집중 공격해 경찰관이 죽었다. 다분히 보복성 공격이었다.
“대구 10.1사건은 어쩐 줄 알아? 복잡하게 말할 것없어. 주민과 경찰간의 대결이야. 그러지 않겠니? 주민이 부당하게 당하는데... 이때 나는 대구5연대 소대장이었어. 쌀값이 폭등하는데 순사놈들이 야매로 쌀을 거둬들이는 거야. 그 난리 속에서도 이권에 개입하는 거지. 강제로 미곡 수집령을 내리고, 수집 가격이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하니 농민들이 항의하고, 그리고 쌀을 몰래 숨기지. 그러면 경찰력이 동원돼 가택을 수색하고, 잡힌 자를 싸대기 갈기고 연행하는 거야. 주민이 분노하지 않겠어? 이것을 보고 내가 경찰놈을 두둘겨 팼지. 대구사람들, 자신들 대신 패주니 얼마나 시원하겠어. 그러니 국경은 주민의 지지를 받는 거야. 사고 후 나는 광주로 쫓겨났다가 다시 제주까지 왔어. 이런 자부심으로 복무하는데 국경이 똥이라고?”
문상길이 정색을 했다.
“잘 들어. 일본 패망으로 선물처럼 우리에게 해방이 왔지? 하지만 외국 군대의 분할 점령으로 우리 국토가 양분되고, 이 시간 현재 나라 이름도 없이 백성들은 개처럼 끌려왔어. 이게 무슨 망발이냐. 이 땅엔 해방의 빈 공간만 있지. 점령의 시간만이 존재할 뿐이야.”
선동하나? 채명석은 의아스럽고 불안했다. 김이구가 받았다.
“미군정이 경찰에게는 양질의 무기를 지급하고, 복장도 세련된 서지 쓰봉인데 군인들한테는 구식 총에 헐어빠진 일본군복이지. 그래서 홧김에 그 새끼들 패버리는 거야.”
“미소 점령군이 한반도에 군인을 두지 않기로 합의한 것 모르나?”
“그런 것도 있었나요?”
채명산이 물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깍듯이 존대말을 썼다.
미국과 소련은 2차대전 종전관리 회담을 통해 점령 지역에 군대를 두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말이 그렇다 뿐, 음성적으로 군대를 양성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이 없었다. 북한은 보안대-평양정치·군사학원을 만들어 장교를 배출했다. 남한의 미군정은 남조선국방경비대라 이름짓고, 경찰의 예비조직이라고 규정했으나 내면적으로는 군사조직으로 편성했다. 겉으로는 감추고, 속으로는 군사단체를 만드는 이런 이중적인 어정쩡한 스탠스 때문에 군의 정체성, 처우 등 모든 것이 엉성하고 허술했다.
적으로부터 국토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군인이 교통안내를 하고, 도둑이나 강도를 잡는 경찰보다 지체가 떨어진다는 것 때문에 국경과 경찰간에 자존심 싸움, 나와바리 싸음이 잦았다. 차별에 대한 분개심은 하부 조직으로 내려갈수록 충돌로 나타났다. 미군고문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해방 이후 2-3년간 국방경비대와 경찰의 충돌이 1주일에 1회 꼴로 났다고 보고되었다. 외출 나가면 패싸움을 벌이고, 총격전까지 벌였다. 이는 좌익계가 선동한 측면도 있었다. 김이구도 그중 일원이었고, 사고뭉치 장교로 지목돼 이곳 저곳으로 전출되었다.
“경찰과 군인이 견원지간이 된 본질적 이유가 있지.”
김이구가 설명했다. 해방 직후 건준 등 소속 청년들이 치안을 맡았는데, 갑자기 일제경찰 출신들로 교체되었다. “호랑이가 온다”고 으름장 놓아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가 “순사 온다” 하면 뚝 그친다는 유래에서 보듯, 경찰은 일제강점기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강제징용과 일본군위안부 강제모집, 군 기피자 색출, 일제 저항자 추격, 사상불온자 검거, 그리고 전쟁물자 징발이리는 이유로 쌀 뺏어가고, 그릇 뺏어갔다. 창씨개명 안했다고 잡아가두었다. 일본 군국주의를 받쳐주는 핵심 기둥으로서 그렇게 역할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었다. 저지른 업보 때문에 이들은 한동안 숨죽이고 살았다. 그랬던 이들이 어느 순간 다시 등장하더니 신생 조국의 질서유지 최일선에 나섰다.
국방경비대에는 성분이 다양한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순혈주의의 경찰과는 확연히 달랐다. 신원조회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경찰에 쫓기면 군대로 피신하는 청년들도 있었고, 사회주의 운동자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미 군정은 초기 미국식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원칙을 세워 지원자는 성분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장교와 하사관들은 실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경찰과 맞짱뜨는 주체로 떠올랐다. 민족정통성이 결여된 집단과의 맞짱... 경찰에 불만을 가진 군인들은 처우가 열악할수록 이런 점을 내세워 경찰에게 보복하는 태도를 보였다. 처우와 시대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그런 식으로 표출되었다.
채명산은 술을 마시긴 하지만 뭔가 답답한 것이 목에 걸린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박진경 연대장 ‘화려한 진압’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적 선거를 보이콧해?”
제주의 제 정당, 사회단체들이 5.10선거를 전면 보이콧하자 윌리엄 피시 딘 미 군정장관은 격노했다. 제주 수뇌회담이 조병옥-김익창의 난투극 끝에 결렬되고, 5.10선거마저 전국 유일하게 제주에서 보이콧되자 그는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어느 면에서 그동안 폭도대와의 대화를 유도했던 것도 강경 진압을 위한 하나의 명분쌓기 포석이었다.
딘 장관은 수원에서 창설된 11연대 1개 대대를 제주에 파병하고, 5월 15일 9연대를 11연대로 합편했다. 4월 20일 부산 5연대에서 파견된 오민균의 독립 대대도 11연대에 편입시켰다. 11연대는 제주농업학교에 사령부를 두었다. 신임 박진경 연대장에게 지휘 권한을 부여하고, 병력과 화기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미군 구축함 크레이그호를 제주 해안에 급파해 해안 봉쇄에 나섰다. 미 6사단 예하 광주 주둔 20연대장인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임명해 파견했다. 제주를 전방위적으로 포위해 압박하는 양상이었다.
경찰 역시 빠르게 움직였다. 철도경찰과 제6관구, 제8관구 경찰관 등 수백 명을 경무부 지령으로 제주도에 급파했다. 경찰 보조조직 청년단을 증강, 재배치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4.3 사건의 치안수습대책을 발표하고, 경찰전문학교 정예부대와 유능한 형사대를 제주에 급파한다고 발표했다. 또 제주경찰학교 설립과 2개 경찰서 신설 계획을 밝혔다. 경찰조직을 재편하고, 육지 간부를 대거 투입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제주 지사까지 교체되었으니 행정도 일신된 분위기였다. 5.5수뇌회담의 결과는 이렇게 제주 상황을 백팔십도 바꿔놓았다.
신임 박진경 연대장 취임식 날이었다.
미 군사고문단이 내려오고, 제주 유지들이 하객으로 연대 연병장에 모였다. 연대는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전에 없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김익창 연대장 시절과는 완연히 비교되었다. 그땐 취임식도 없었고, 이임식은 더더군다나 있을 리 없었다.
브라스밴드가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연주하고, ‘올드 블랙 조’ ‘오수산나’를 경쾌하게 연주하는 가운데 각 중대별 사열이 있었고, 하객들은 병사들이 대오를 갖춰 연병장을 지날 때마다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박진경 연대장은 대학 영문학과 출신답게 영어 회화에 능통한 군 전략통이었다. 미군과의 관계가 밀접하게 된 것은 미국말의 힘이 컸다. 그는 통위부 인사과장의 요직에 있었으나 이런 인연으로 딘 소장이 직접 선발해 제주 연대장으로 부임해왔다. 제주 연대장 발령은 또 그가 제주도 지형과 일본군이 구축한 방공호, 산악 요새에 눈이 밝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그는 일제 말기 제주도에서 일본군 소위로 복무했다. 그가 4.3이 일어나자 미 군정 사무실에서 제주 지도를 펴놓고 토벌작전 계획을 브리핑할 때, 미 군사고문단은 브라보를 외쳤다. 미리 9연대 전속을 언질받은 그는 경비대사관학교 5기생 가운데 열 명을 골라 이중 여덟 명을 제주 9연대에 파견했다. 그에게는 빠릇빠릇한 수족이 필요했고, 장차 자신을 따르는 후배들을 기를 생각이었다.
미 군정은 박진경 연대장을 밀어주고 있다는 것을 그의 취임식에서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주요 계급들이 대거 입도하고, 제주지사, 경찰감찰청장, 지역 유지 등이 신임 연대장의 활약에 기대를 건다는 격려의 말을 보탰다. 박진경 연대장은 한없이 고무되었다. 실적으로 지지에 대한 보답을 하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졌다.
취임식을 마치고 장교단의 신고식이 있었다. 채명산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의 앞에 이르자 “2중대 2소대 채명산 소위 신고합니다!”하고 외쳤다. 그러나 박진경은 다른 장교를 대하는 것과 똑같이 기계적으로 악수만 청한 채 다음 장교를 맞았다. 채명산은 대단히 실망했다. 통위부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한 것이 헛 말이었을까? 나를 잊은 것일까. 반신반의했으나 기분은 좋지 않았다.
“하사관들도 소위를 우습게 보는데 뭐...”
하례가 끝난 뒤 김영작도 실망하는 투로 투덜대었다. 당시 신참 장교는 하사관들로부터도 대접받지 못했다. 하사관이 하대하고 장교가 경어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하사관은 일본군에서 전투경험이 많은 자들이었다. 채명산은 실망한 채 석반(夕飯)을 마치고 내무반에 들어가 취침을 준비중인데 갑자기 전령이 찾아왔다. 연대장실로 급히 오라는 것이었다. 연대장실로 달려가자 벌써 김영작 소위가 와있었다.
“자리를 옮길까?”
그들은 연대장의 지프를 타고 대정면 소재지 바닷가 횟집으로 갔다.
“내가 발령 냈는데 모를 리 있나. 오늘 마음껏 취해봐.”
그러면 그렇지. 여러 시선 때문에 신고식 때 연대장이 모른 척했던 것이라는 것을 그는 뒤늦게 알았다.
“제주 병영생활은 어떤가?”
“이건 군대가 아닙니다.”
채명산이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박진경은 놀라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보는 것이다.
“인민유격대가 습격해오는데도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습니다. 개입하지 말라는 투입니다.”
“그래서?”
“군대라기보다 패잔병들 소굴 같습니다. 장교단과 하사관들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장교단과 하사관이 움직이지 않는다. 제주 출신들인가? 문상길, 김이구 모두?”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관들을 미리 보낸 거야. 유념해서 동태를 살피기 바래.”
며칠 후 연대에 비상소집 명령이 내렸다. 병사들이 연병장이 꽉 찰 정도로 채워져서 비로소 연대다운 분위기가 났다.
“잔악한 폭도에겐 자비란 없다!”
단상에 오른 박 연대장이 도열한 장병들을 향해 포효했다. 병력이 증원되고 딘 군정장관이 직접 내도(來島)해 지원을 약속하고, 통위부 미군고문관 로버츠 준장도 제주를 시찰하고, 제주 주둔 미군사령관 브라운 대령 역시 힘을 실어주니 그는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쓸데없는 화평 회담으로 폭도대에게 무장 시간만 벌어주었다. 안일하게 사태를 보면 낭패를 당한다. 내일부터 제주도 서쪽에서부터 동쪽까지 쓸어버리는 빗자루 작전을 수행할 것이다! 소탕작전 병력을 편성하기 바란다.”
그는 브라운 제주사령관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너희들은 내가 제주도 땅굴 하나하나 세세히 알고 있다는 걸 모를 거다.
박진경 연대장의 토벌 전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며칠만에 제주읍 오동리와 애월면 광령 2리에서 218명의 불순분자를 체포했다. 입산자들이 피신해있던 은신처를 부수거나 불을 놓았다. '양민과 평민의 구분이 어렵다'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모조리 연행, 소개했다. 순식간에 국방경비대와 경찰에 의해 끌려온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포로 대부분이 10대 소년들과 부녀자와 노인들이었다. 귀순자 수용과 함께 선무공작을 병행했다.
무장폭도대의 저항도 심했다.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경찰지서가 불타고, 우익인사가 살해되고 집이 파괴되었다. 제주도는 매일 시커먼 연기가 한라산 위로 올랐다. 응징과 보복, 보복과 응징은 반복되었다.

중앙 올구와 토착 올구

“내 말 똑똑히 들으세요. 연대 내의 동조자들이 일을 내야 하는데 힘이 미약합니다.”
문상길 중위는 불쾌했다. 제주도당 올구(조직지도원)가 감히 이래라저래라 하니 화가 났다. 그들은 선창가 허름한 식당 골방에 마주앉았다.
“9연대, 아니 지금은 11연대라지, 그자들의 대대적인 소탕전을 묵과할 수 있소?”
제주도당부 올구 이을대는 대정면 보성리 출신 고승옥과 문덕오, 정두만, 류경대를 프락치로 입대시켜 놓고 있었다.
“지난 5월 내도(來島)한 중앙 올구 이명장 동무에게 활동상을 보고하여 지도 문제와 활동 방침을 전남도당(당시 제주도는 행정구역상 전남도에 속했음)에 가서 지시해 주도록 요청한 바 있소. 그러나 아무런 지시가 없었고, 그 후로도 재삼재사 지도에 관한 지시를 요청했으나 답이 없었소. 그래서 제주 도당부(島黨部)는 독자적으로 비선을 확보해 대정면당을 통해 국경(국방경비대)에 연락을 취했는데, 프락치 4명 중 정두만 동무는 탈출하여 일본으로 도망을 갔고, 류경대는 군기대로 전근한 이래 반동의 기색을 보여 이탈하게 되었소. 왜 이렇습니까?”
“그걸 왜 나에게 묻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오.”
문상길이 짧게 응수했다. 중앙 올구와 지역 올구는 지체와 신분이 달랐다. 지역 올구는 중앙 올구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할 수 없게 돼있다. 또 서로 알지도 못하게 돼있다. 그런데 어떻게 신분을 알아냈지? 혹시 이 자가 첩자인가?
“내 답답해서 하는 말이오. 4.3 투쟁 전술을 세우는 데 있어서 경찰감찰청과 일구서(1區署:제주경찰서) 습격에 국경을 최대한 동원하고, 나머지 각 지서는 유격대에서 담당하기로 양면 작전을 세워서 앞에 말한 프락치에게 연락을 하고, 동원 가능 수를 문의한 바 800명 중 400명은 확실성이 있고, 200명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 반동은 주로 장교급으로서 하사관 합하여 18명이니 숙청하면 문제 없다는 첩보가 있었소. 경비대가 동원된다면 연대에는 차가 없으니 다섯 대만 돌려주면 좋고, 불가능하면 도보로라도 습격하겠다는 것이었소.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낭패 아닙니까.“
장황하게 설명했으나 문상길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다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군대 정보를 정확히 짚는 것을 보니 지방의 올구라는 점은 분명해보였다. 군대 내에 제주 출신 뿌락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4.3 당일에 국경이 동원되지 않음으로 인해 이것을 이상한 일로 생각하고 있던 바, 국경 공작원, 즉 도상무위청년책(島常務委靑年責) 동무의 보고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진상이 판명되었소. 즉 파견원이 최후적 지시를 가지고 국경 프락치를 만나러 갔던 바, 프락치 2명은 영창에 수감되어 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비밀리에 상세히 내막을 알아보았는데 국경에는 문 중위를 중심으로 한 중앙 직속의 정통적 조직이 있고, 또 하나는 고승옥 하사관을 중심으로 한 제주도 출신 프락치로의 조직이 이원화되어 있다는 것이었소. 고 하사관이 문 중위에게 무장투쟁이 앞으로 있을 것이니 경비대도 호응 궐기해야 된다고 투쟁 참가를 권유했던 바, 문 중위는 중앙 지시가 없으니 할 수 없다고 거절한 바 있소. 사실이오?”
“말씀해 보시오.”
문상길은 함부로 자기 내심을 표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문 중위의 이 말을 듣고 도(島) 파견 국경 공작원은 깜짝 놀랐으나 이렇게 된 이상 어찌할 수 없다고 ‘제주도 30만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고, 또한 우리의 위대한 구국항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어코 참가해야 한다‘고 재삼재사 요청하였으나 문 중위는 중앙지시가 없으므로 어찌할 수 없다고 거듭 거절했다고 했소. 이리하여 4․3투쟁에 있어서의 국경 동참에 의한 거점 분쇄는 실패로 돌아갔소. 그렇지 않소?“
“그래서요? 계속해보시오.”
“그후 4월 하순 돌연히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가 내도(來島)하여 우리의 산속 부대를 포위 공격하게 되었으므로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된다는 긴급 연락이 있어서 군책이 직접 파견되어 문제를 수습하기로 했지요. 이때도 문상길 동무는 중앙 직속이므로 지방도당인 제주도당의 지시에 순종할 수 없다고 했소. 이 중차대한 시기에 중앙 따로, 제주도당 따로가 있소?”
그제서야 문상길이 침묵을 지켰다. 지방 올구가 말했다.
“사태가 급박합니다. 양자 행동 통일을 위하여 밀접한 정보 교환, 최대한의 무기 공급, 인민군의 원조부대로서의 탈출병 추진, 교양 자료의 배포 등의 문제에 호상간에 협조하자는 것이오. 그렇게 해서 최후적 단계에는 총궐기하여 인민과 더불어 싸워야 하지 않겠소? 또 9연대 연대장 김익창이 사건을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하여 인민군 대표와 회담해야 하겠다고 사방으로 노력 중이었소. 이것을 교묘히 이용한다면 국경에 의한 산 토벌을 억제할 수 있었단 말이오.”
“4월 하순 이미 군책과 김익렬 연대장이 면담했잖소.”
“면담에서 금반 구국 항쟁의 정당성과 경찰의 불법성을, 특히 인민과 국경을 이간시키려는 경찰의 모략술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은 다행이오. 김익창 연대장은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런데 문 동무가 소극적으로 나와서 투쟁에 약점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오.”
그는 문상길을 비판하면서도 어떻게든 공작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국경(국방경비대) 지도 문제에 있어서 일방에서는 제주도당(島黨)에서 지도할 수 있다고 하고, 일방에서는 중앙 직속이라고 하니 결국 이 문제는 해결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제주도당에서 박아놓은 프락치만은 제주도당에서 지도하되 행동통일을 위하여 각각 소속 당부의 방침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협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말이오. 제주도 치안에 대하여 미군정과 경무부, 통위부에서는 전면적 포위 토벌 작전을 지시하고 있소. 이것이 실행되면 제주도 투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오. 국경에게서는 포위 토벌 작전에 대하여 적극적인 사보타지 전술을 쓰고, 국경 호응 투쟁에 관해서는 중앙에 건의합시다. 특히 대내(隊內) 반동의 중심 박진경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최대의 힘을 다하여 상호간의 정보 교환과 무기공급, 그리고 가능한 한도 내에서 탈출병을 적극 추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장황한 설명이었으나 요지는 문상길이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거듭된 회유였다. 문상길이 짧게 응수했다.
“내가 할 몫이 있으니 간섭하지 말고 돌아가시오.”
“간섭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답답해서 그러하오이다. 통신수단의 장해, 중앙의 연락 두절, 그 사이 제주도는 불바다가 되어가고 있소.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안보이오?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오? 본떼있게 대처하지 않으면 그에 따른 책임을 면하기 어렵소.”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어설프게 헤어졌다. 문상길은 나름 마음속으로 다지는 바가 있었다.
<이상 ‘극비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인용. 위의 자료는 전직 경찰 문창송씨가 1995년 발간한 ‘한라산은 알고 있다-묻혀진 4.3진상-소위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를 중심으로’라는 책자를 인용한 것임. 문씨는 이 투쟁보고서가 1948년 8월 4.3사건 주모자 김달삼 일행이 해주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에서 행한 보고 내용인 것으로 추측된다고 주장. 문씨는 1949년 6월7일 경찰특공대가 이덕구를 사살하는 과정에서 투쟁보고서를 입수했다고 밝히고 있음. 문씨는 자기가 소장한 자료가 원본은 아니지만, 이를 베낀 필사본이며, 원본은 제주경찰청에 두었다고 증언. 제주4.3진상조사위원회는 제주경찰청을 방문, 자료수집에 나섰으나 경찰청은 ‘4.3사건 관련 자료가 없다’고 밝혔다. 따라서 원본의 확인없이 문씨의 책자를 그대로 전재했다고 밝히고 있음. 원본이 아닌 경찰관에 의한 필사본인데다, 당시 ‘인민유격대’가 사용하지 않던 ‘인민군’ 용어와 무장대 치적 중심의 일방적 기록이란 점에서 자료적 가치에 의문을 표시하는 견해도 있으나, 무장대의 당시 활동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용한 것임=작가 주>

해방정국에서 군에는 좌우익을 망라해 여러 파벌이 있었다. 그중 남로당 계열은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하는 장교 조직인 콤서클과 남로당 지방도당이 관할하는 병사 조직인 병사 소비에트가 있었다. 그리고 북로당(조선로동당 전신)이 경상도 일원에서 조직한 인민혁명군이 있었다.
남로당에서 군 안에 서로 다른 조직을 만든 것은 장교들은 이동명령이 잦기 때문에 지휘 체계를 일원화해 중앙에서 일률적으로 통제 관리하고, 사병들은 지방에서 모집하고 해당 지방에서만 활동하기 때문에 인사 이동이 거의 없으니 지방 당에서 관할, 지휘한다는 차원에서 분리 운영되었다. 이는 선을 서로 다르게 하면 직보(直報) 라인 이외는 기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공산주의 조직 특성이기도 했다. 이로인해 남로당은 장교 조직과 병사 조직을 별도로 관리해왔으며, 콤서클과 병사 소비에트 역시 그 일환이었다. 따라서 같은 부대 소속임에도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여수·순천 10.19사건=위키백과 인용).
이런 처지에 지방의 올구가 중앙 올구 문상길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것은 가당치 않았다. 지방 올구는 토벌대에 의해 무장대와 주민이 무참히 당하고 있으니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뿐, 중앙 올구를 지시할 위치가 아니었다.

반란과 민란 사이, 경찰과 군 사이

석식과 함께 일석점호를 마치고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채명산과 김이구 소위가 연병장과 연해있는 소나무 숲을 산책했다. 초여름밤이었다. 김이구는 이상하게 채명산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물었다.
“동족끼리 왜 싸우지?”
김이구가 새삼스럽게 물었다. 꼭 먼나라 이야기하듯 해서 최명산은 생소하게 들렸다. 현실과 동떨어진 말인 것이다.
“질서를 잡아야겠죠.”
채명산이 존대어를 썼다. 김이구는 문상길 중위와 고교 동기생이니 그보다 짬밥이 앞선다.
“그렇다면 왜 주민들이 저항하지?”
“공산주의자들이라잖습니까.”
단순명쾌하다. 그러자 김이구가 다르게 설명했다.
“이분법적으로 보지 마라. 이제 죽었구나 하고 지하로 숨어든 놈들을 불러다 다시 칼자루를 쥐어주니 미친놈 칼춤 추듯 난리 부르스 추고 있잖아. 이승만 세력은 약한 지지기반 때문에 친일 관료와 우익 청년단체들을 동원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다고 하지만, 백성들이 동의하나. 미군정은 그런 자들을 전면에 내세우니, 국민적 저항이 생기는 거지. 양심세력과 협상해서 신생 정부 만들면 다 끝나는 것 가지고...”
김이구는 미군정과 그에 기반한 이승만 정치에 비판적이다. 채명산은 경위야 어떻든 토벌을 정당화하고 있다. 채명산은 김이구가 얼핏 사회주의자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건국의 인적 자원이 부족하니 경험있는 관료들을 기용한 것 아닌가요?”
“쓸데없는 소리. 군을 예로 들어보자. 군 경력자가 일본군 출신자를 제외하고는 찾기 어렵다? 천만에. 그와 정 반대지.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의용군만도 3만명이나 돼. 항일독립군의 존재가 어마어마하잖나. 독립운동 세력을 홀대하지 않고 예우했다면 중국에 있던 독립군 세력은 북한이 아니라 통일 한국의 국군이 되었을 거야. 이거 가정이라도 대단하지 않나? 건준이나 임시정부 주도의 통일국가 건설이 선 아니겠어? 그런데도 미군정은 그 가능성을 배제하고 악을 선택했단 말이야. 그래서 음험한 전략이 있다는 거지. 가만 있어야 되겠나?”
“건준과 임정, 한민당, 제 정치세력은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사이라던데요? 공산당도 서로 찢어져서 다투고.”
“이런 때 미국의 선한 조정력이 요구된단 말이야. 그런데 미국은 분할된 한반도가 그들 이익에 부합한다고 믿는가봐. 우리가 거기에 놀아나지 말아야 했는데, 더 분열하니.., 그러구서 동족간에 싸운다? 제주에 공산당이라는 외부 조직이 들어와서 사태가 커졌다고 하지만, 사실도 아닐뿐더러, 위기에 몰리면 어떤 누구와도 손을 잡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 그렇게 묶어놓고 타격하고 있는 거야.”
“일종의 프레임 전쟁이다 그건가요?”
채명산은 이북에서 내려올 때 소련군의 공포스런 행동을 보았다. 남한사회에서도 똑같은 공포가 조성되고 있었다. 이는 모두 공산주의자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공산주의자가 없다면 갈등과 대립도 없을 것이다. 서북청년회 단원 시절, 그는 국내 상황을 대결로 몰고 가는 공산주의자를 척결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진실’이라고 하지. 맨먼저 진실이 파괴되는 것이야. 제주폭동은 공산당과 그 추종자가 일으킨 폭동이냐, 아니면 주민 불만의 저항이냐로 이분법적으로 볼 수 없어. 진영에 따라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면 오류가 나온다구.”
“그럼 어느게 진실이요?“
“사물을 이념 논리로 보지 말자 이거야. 자기 신념에 따라 해석을 하게 되면 진실을 볼 수가 없어. 자신도 선동질하는 이념 장사꾼이 돼버려.”
“그러면 어느 게 진실이냐니까요?”
“좀 거창하게 말하면, 제주 4.3은 한반도 분단 모순의 축도야. 그만큼 중층적이야. 사건을 캐보면 공산당의 준동으로 단순하게 볼 수 있지만 고무마 줄기같이 많은 문제들이 내재돼 있다고. 제주를 놓고 보자. 해방 초기 수많은 정당들이 난립했어. 그중 몽양 선생의 건준이 중심이었지. 제주 지역에서는 건준에 이어 명칭이 바뀐 인민위원회가 해체되지 않고 현실적 실체로서 존재했어. 이 단체는 중앙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 아니라, 지역 유지들의 뜻에 따라 독자적으로 움직였어.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지역 유지들이 질서를 잡고, 건국 토대를 잡아가려는데 외세가 끼어들어 건국의 진로를 막아버린 거야. 이들을 통해 해방 관리를 하고, 외세가 조력자 역할을 했으면 역사는 순항했을 거야.”
그런데 미국이 이들 단체를 부정하고 주민 정서와 민족 정서에 배치되는 세력에 의존해 통치가 진행되었다. 일제의 경찰조직이 체제유지의 첨병이 되었다. 특히 제주도가 정도가 심했다. 공권력의 무자비한 탄압과 극우청년단의 무법적인 행패가 자행되었다. 예로부터 착취와 수탈이 심한 곳인데, 해방이 되니 오히려 더했다. 저항하자 일제 시대부터 병균처럼 번져온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해 주민들을 가두었다. 4.3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아 벌어진 사건이라고 일정 부분 동의한다 하더라도, 잔혹한 탄압에 대한 주민의 저항이 훨씬 더 진실에 부합했다.
“경찰 지서가 불타고 경찰이 총 맞아 죽었소. 김 소위님 혹시 사상이 의심되지 않나요? 혹 뺑뺑이 돌린다고 돌아버린 것 아니오?”
채명산의 배짱있는 항변이었다.
“이 새끼가, 난 달라. 난 누구의 편도 아니야. 누구를 따르지도 않아. 오직 가깝게 모시는 오민균 대대장을 존경할 뿐이야.”
“오민균 대대장?”
“만나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채명산은 뭔가 비선이 작동하는 것을 느꼈다. 군부 내에 또다른 비밀조직이 있다. 그래서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신촌리 회의에서 빨갱이들이 무장투쟁을 결의했다잖습니까.”
“제주 4.3이 남로당 중앙 지령이라고 공권력이 내세우는 것이 신촌리 회의지.”
경찰이 1948년 2월 남로당 조천지부에서 열렸던 회의를 급습해 노획한 문건에서 2월 중순부터 3월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경찰 간부와 고위 공무원들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는 남로당 중앙당의 지침이 내려온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회의에서 김달삼이 주민봉기를 제기했으나 강경파와 신중파가 갈렸다. 신중파는 7명이고, 강경파는 12명이었다. 투표 결과 무력투쟁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중앙당과는 별개의 결정이었다. 중앙당과의 교류가 원활치 못하고, 지방 당 소속의 무장 병력을 자율권을 발동해 동원할 수 있다는 근거에 기초해 제주도당이 단독으로 습격을 결정한 것이었다. 습격 명분은 물론 주민탄압 종식과 분단 조국을 현실화하는 단독정부, 단독선거 반대이고, 제주 해방이었다. 제주도는 또 개인사적으로 수백 명의 제주해녀들이 북한의 동해안 지역까지 깊숙이 들어가 해산물 채취로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이념도 현실적 이해를 앞설 수는 없는 것이니, 이들이 이산가족의 운명이 되는 단정 단선을 반대할 이유는 충분했다.
“주민을 억누른 경찰놈들이 정부 수립의 주역이 된단 말이다. 점령군의 하수인들이 빨갱이 고장으로 몰아서 타격하고 있단 밀이다.”
그는 경찰을 증오하는 것이 체질이 되어버렸다. 또다른 도그마에 갇혀버린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도 입안의 혀처럼 놀아주는 충성 세력이 등장하니 좋겠지. 민족 운운하는 고리타분한 자들의 근엄한 태도는 짜증나지. 가해자 일본은 미국의 옹호에 힘입어 식민 지배의 책임을 면책받고 말이야.”
미국은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서 일제에 전쟁 책임을 묻고, 무력으로 탈취한 식민지 영토의 반환을 명하기는 했어도, 강제하진 않았다. 피지배 민족을 노예화하고 물적·인적 자원을 착취한 책임에 대해서도 방임했다. 종군위안부, 강제징용 따위 참혹한 인권유린 문제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식민지에 대한 몰이해와 식민지 해방에 대한 명확한 방침을 가지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전승 연합국이 식민지를 가진 나라들이 대부분이고, 전쟁 후 구 식민지를 회복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침묵한 측면도 있었다. 이에 대해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이 저항했다. 민족해방 투쟁이 거세게 일어난 것이다.
미국은 일본에 대해 전쟁 책임을 면책하여 관용을 베푼 반면에, 독일에 대해서는 과거청산을 최우선 과제로 하고 나치의 전쟁 책임을 묻는 이중성을 보였다.
“왜 그러했겠나. 미국 의회와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이 유태인들이지. 이들이 가만두지 않았던 거지. 이들은 미국 내에서 자본, 특히 금융자본을 장악하고, 유력 미디어 매체를 손에 쥔 세력이지.”
미디어는 2차 대전 당시 유태인 수난의 역사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대대적으로 고발했다. 여론 시장은 독일을 악의 축으로 몰아갔다. 반면에 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인과관계가 깊은 나라가 없었고, 식민지 국가는 더 그랬다. 대신 일본은 태평양전쟁 전까지만 해도 인적·물적 자원교류, 무역 등에서 미국과 매우 가까웠다.
식민지 약탈이 강화되던 1900년대 초에는 미·일이 각기 식민지를 나눠갖자는 가스라-테프트 밀약까지 체결했다. 미국이 필리핀을 집어먹는 것을 양해하는 대신에, 일본이 조선과 대만을 먹는 것을 양해한다는 밀약이다. 이런 우호 관계는 세기를 넘었고, 거기에 비해 양국의 전쟁 대결은 불과 4년이었다.
거기에 아시아 주요 식민지 국가는 공산화되었다. 식민지 국가들이 식민지 후유증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소련 팽창을 막는다는 구실로 미국은 공산주의·민주주의 진영으로 블록을 나누어 관리하면서 일본을 반공산주의 블록으로 배치했다. 따라서 독일에서처럼 일본에게 피해받은 식민지 국가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독일의 지성들은 말이야, 독일 패전은 나치 만행으로부터의 해방이고,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이고, 유태인 학살의 상징인 홀로코스트라는 문명의 파괴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반성했어. 그런데 일본놈들은 반성은커녕 식민지 범죄를 회피하고, 심지어 묵살해버렸지. 왜 그러는 줄 아나? 미국이란 전승국이 뒷받침해주니 그런 거야. 그러니 지금 오만을 부리고 있잖나. 그런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이지? 그런 미국을 우리가 따라야 하나? 존경해야 하나?"
최명산은 침묵을 지켰다. 그 대목에선 이의를 달 수가 없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범했던 식민지 범죄를 독일에서처럼 반성하고, 과거 청산의 요구를 이행해 나갔다면 아시아의 존경받는 정치 일등국가로 섰을 것이야. 그리고 그 방향으로 유도한 미국은 아시아 인민으로부터 절대적 신임과 추앙을 받았을 것이야. 그런데 일본은 죄악상을 눈감아주고, 그러니 일본은 스스로 아시아인임을 부정하고, 서방의 일원으로 편입해 우월적 위치에 섰지. 그 자리를 깔아준 나라가 미국이란 말이야. 미국은 '문명과 야만'이라는 인식의 이중구조 아래 전범 국가 일본을 비이성적이랄만치 우대하고, 식민지 국가, 특히 식민지 조선은 내부자끼리 피터지게 싸우도록 유도하고, 국토를 양단시켜 놓았다. 이렇게 나가다간 우린 필히 전쟁이 터질 거야. 제주에서 전쟁 예행 연습하는 것같아. 제주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그 때문이야. 막강한 자본과 무기를 갖고 있는 미국이 자기 중심주의적 세계질서를 재편해가는 과정에서 제주도가 서투른 이념 전쟁의 도구가 되고 있단 말이야.”
한반도 분단을 계기로 드러난 동아시아 위기의 근저에는 냉전 블록화가 있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공산 북한과 대결하도록 남한을 최선두에 내세워 무기를 증강시키면서 비무장인 일본을 방어해주고 있다. 이런 대결의 틀을 깨고 평화를 가꾸자고 나서는 사람들은 좌경이란 이름으로 사라지고, 이런 과정에서 평화의 인재 풀은 초토화되었다. 외세에 편승한 세력이 세상의 주류로 나서면서 권력과 자본을 독점했다.
2차 세계대전의 성격은 선발 자본주의 국가와 후발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시장ᐧ영토ᐧ자원 쟁탈이라는 제국주의 전쟁이기도 했으나, 그에 못지않게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도 대두되었다. 그래서 패배주의적으로 역사를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 토인비의 학설이다. 바로 도전과 응전의 법칙이다.
-성장기 문명에서 하나의 도전은 그것을 훌륭하게 극복하는 응전에 의해 극복되고, 그 응전이 또 다른 도전을 낳는데, 그 도전 또한 새로운 응전으로 극복된다...

제주 인민유격대는 1948년 3월 15일부터 25일까지 신속하게 무장대를 조직했다. 조직은 주력부대인 유격대 100명, 후속부대인 자위대 200명, 제주도군사위원회 직속 특경대 20명 등 320명으로 구성되었다. 유격대는 무장 조직과 비무장 조직으로 나뉘었다. 중앙당과 제주도당간의 연락체계가 마비되어 있어서 산으로 들어간 제주인민유격대가 독립적으로 주도했다.
지대(支隊)는 1948년 5월 편성되었으며 초기에는 제30지대(제주읍), 제31지대(애월면, 중문면), 제43지대(한림면, 대정면, 안덕면), 제50지대(조천면, 구좌면, 성산면, 표선면, 남원면) 등 4개 지대로 나뉘었다.
지대 명칭 중 숫자 30은 3·1 발포 사건에 항의하는 총파업을 시작했던 3월10일, 31은 3·1절 집회, 43은 4·3 무장봉기, 50은 5·10 단선 거부투쟁을 가리키는 상징 표기였다.
봉기 초기의 무기는 소총 30여 정과 죽창 등 재래식 무기였으나 9연대 장병의 집단탈영 때와, 경찰지서 습격 등으로 노획한 총으로 무장을 강화했다. 인원은 초기 320명에서 최대 500명까지 늘어났다.
인민유격대의 투쟁 취지는 ‘조직의 수호와 방어, 그리고 5·10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위한 투쟁으로 정리되었다. 이들은 4.3 이후 5·10 선거방해 활동을 집중적으로 펼친 끝에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선거 거부를 주도했다. 작전은 1차부터 6차까지 4개월간 수행되었다.<이상 서승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교수의 '동아시아 평화의 위기,무엇이 문제인가:인권의 관점', ‘제주도인민유격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인용>
“김 소위는 혹시 문상길 중대장과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습니까?”
최명산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와 학교 동기고, 제주의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으니까요.”
“그게 뭐라고 보니?”
“형체를 알 수 없는 뭔가가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음모 같은 것, 불안을 키우지 않습니까.”
“난 도꼬다이야. 내가 누구 말 듣고 움직이는 사림이냐? 채 소위가 맘에 들어서 얘기 나눈 것 뿐이야. 어쩐지 마음에 든단 말이야. 내 뜻에 동조하진 않지만 내 의사를 존중해준단 말이야. 넌 순진해. 좀 더 크게 봐. 세계관도 넓히고 말이야.”
이런 말을 나눈 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소대 병력 집단 탈영

“나가자!”
한 병사가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병장과 중대 내무반 앞에서 웅성거리던 수십 명의 병사들이 우루루 연대 북문쪽으로 쏟아져 나갔다. 그들은 대부분 무장하고 있었다. 더러는 카빈 총을 들었으나 구구식 총이었고, 장검을 총신에 부착한 자도 있었다.
병사들은 뚜렷한 지휘자가 없는지 갈팡질팡하는 듯하다가 군 트럭이 나와 쏜살같이 달리자 그 방향으로 길을 잡아 달렸다. 대정면 사무소에 이르러서 병사들의 일부는 걷기 시작했다. 더러는 희희덕거리며 총을 높이 쳐들어 환호하고 있었다. 해방감을 만끽하는 듯했다. 행인들은 늘 보듯이 병사들이 구보하는 것으로 알았다.
“반반씩 나눠서 행군한다!”
누군가 외치자 그제서야 병사들이 조를 짠 듯 두개 조로 나뉘었다. 면 사무소 건너 대정경찰지서에 이르러 누군가 총을 쏘자 기다리기라도 했던 듯 병사들이 일제히 지서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지서 안에 있던 사람들이 도망쳐 나왔으나 일부는 총을 맞고 쓰러졌다. 지서는 응사 한번 해보지 못하고 금방 조용해졌다. 총소리에 놀라 사람들이 급히 은폐물에 숨고, 그러자 거리는 갑자기 물을 뿌린 듯 고요해졌다. 그 순간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안에 들어가 살펴라.”
지휘자인 듯한 자가 명령하자 병사 넷이 두 명씩 조를 짜 거총 자세로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가더니 경찰 지서 마당을 살피고, 내부로 들어갔다. 잠시 후 빵 빵 하고 연거푸 총소리가 났다. 한 병사가 마당으로 나와 밖에 대기하고 서있던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일망타진! 개 넷, 급사 하나 즉사! 지서장 부상!”
개는 경찰을 말했다. 전과 발표가 나오자 병사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대고 마구 총질하는가 하면, 이리 몰려갔다가 저리 쓸리며 날뛰고 있었다. 이들은 분명 누군가의 선동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자! 올라가자.”
대정면 구억리에는 인민무장대 본부가 있었다.
“야, 그게 아냐. 서귀포 방향으로 멀리 돌아서 상산(上山)하라고 했어.”
누군가가 외쳤다.
“아냐, 모슬봉으로 해서 보성리 뒷산으로 빠져나가 구억리로 올라가자고.”
“멀리 돌아서 상산하도록 했다니까!”
의견이 나뉘었지만 병사들은 대정 경찰지서를 일거에 쓸어버린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고, 그래서 더욱 기고만장에 중구난방이었다. 그러다가 모슬봉 쪽을 타자는 병사들은 곧바로 이동했다. 서귀포 방향 경유자들은 느긋했다.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는 자도 있었다.
“씨발놈들, 강경진압만이 해결책인가? 완전히 제주도를 꼬실라버릴 모양이야. 우린 그렇게는 못당해! 어떻게 고향 사람들을 죽이냐고!”
그래서 탈영했다는 것인가. 누군가 투덜대자 다른 병사가 받았다.
“지긋지긋하다. 난 고향으로 가겠다. 배타고 부산으로 나갈 기다!”
“틀렸다 아이가. 해상봉쇄 됐다카이.”
“너거들도 죽었다 복창해라. 내 고향으로 가서 살자. 표선면과 남원면 쪽은 바닷물이 좋다.”
그들은 경상도 병사의 말을 흉내내며 노닥거렸는데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군복만 벗으면 그저 순수한 마을 청년들이었다. 그때 일단의 군인들이 몰려오더니 그들을 에워쌌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완전 포위됐다. 모두 무장해제하고 손들고 나오라!”
그제서야 병사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벌써 무장 군인들이 새카맣게 주변 주막거리에 깔려 있었다. 11연대(직전 9연대) 병사들의 집단 탈영소식을 접하고 군 지휘부가 비상을 걸어 그중 대대병력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43명의 탈영병(일부 기록엔 41명) 중 22명이 생포되었다. 군 트럭도 이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트럭에 실린 탄환 1만여 발과 병기들도 그대로 수습되었다. 이들은 다음날 모두 총살되었다. 총살당한 병사들은 육지 출신 몇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제주 출신이었다.
“병사들이 다 죽었다.”
연대에 무거운 공포감이 감돌았다. 모두 겁먹고 있었으나 누군가 침묵을 깨면 금방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어느 병사는 울고 있었고, 어느 병사는 멍청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머리를 짓찧으며 몸부림치는 병사도 있었다.
“도망갈 거야.“
“오늘밤이 디데이야. 나도 토낄 거다.”
“나가면 다 디징개 가만 있어 새끼들아. 목숨이 보리 모가지가 아닝개 쥐죽은 듯이 있으랑개! 나가면 다 디져부러!”
전라도 출신 병사의 꾸중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듯 병사들이 체념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편 다른 길을 탄 21명의 탈영병은 인민유격대에 합류했다. 총검을 유격대 본부에 반납하자 산에서는 함성이 일었다.
며칠 후, 밤이 깊자 제주도당 올구는 문상길을 불러냈다.
“스물두 명의 애국 동무들을 희생시킨 책임을 지시오! 수신호 하나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단 말이오? 이런 중대한 시기에!”
올구는 박진경 연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연대 내부자를 통해 주로 제주 출신 병사들을 상대로 탈영 전술을 수행했다.
“연락 체계를 병사들이 따르지 못했지 내 잘못이 아니오. 쉽게 사태를 보았던 것 같소.”
“중간 조책(組策)이 어떻게 됐소? 조직을 고따구로 관리하오?”
“이 새끼가 어따 대고 협박이야? 니가 뭔데 나한테 시비야?”
문상길이 비로소 화를 냈다.
“연대내에 400명, 아니 최소한 200명의 세포가 있다고 하지 않았소?”
문상길은 대꾸하지 않았다. 기분이 잡쳐버렸다는 듯 쌍통을 잔뜩 찌푸렸다. 엄청난 인명 손실을 가져온 마당에 일일이 대꾸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보였고, 마음 같아서는 자신도 자폭하고 싶었다.
“국경은 이번 탈영사건을 기화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일 것이오. 연대의 광견을 가만 둘 작정이오?”
광견은 연대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문상길은 그를 노려보다가 부대로 돌아갔다.
미 군정은 사태를 조기에 끝내려고 강공책을 퍼부었다. 박진경 연대장의 강경 토벌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막강 화력이 집중되니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그 공로로 연대장 부임 한달 보름만에 대령 진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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