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비상사태에서 우리는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까. 지난 12월 2일부터 2주 일정의 25차 유엔기후총회(COP25)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렸다. 개회식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 앞에 두 개의 길이 놓여 있다면서 '항복의 길'과 '희망의 길' 중 희망의 길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점진적 방식으로는 기후위기를 타개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환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 기후총회의 과제는 파리협정 이행규칙(rule book)의 완성이다. 파리협정에 따라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작동하는 신기후체제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방법론을 마련하는 것이다. 주요 협상의제는 국제탄소시장과 감축목표 이행 기간, 보고 투명성 등이다. 특히 국제탄소시장과 비시장적 접근은 폴란드 카토비체 총회(COP24)에서 합의하지 못한 쟁점으로 올해 최대 화두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후대응 수단으로 시장 기반 정책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공정한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기후정의 실현에 중요한 손실과 피해(loss and damage) 조항은 진전될 조짐이 없어 보인다. 기후위기의 책임이 큰 선진국의 국제법적 배상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기후변화 완화와 적응을 위한 지원 프레임을 좀처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국가가 제출해야 할 2030년(NDC)과 2050년(LEDS)의 온실가스 감축목표 및 관련 계획은 내년이 마감이기 때문에, 올해는 전초전이라는 느낌을 준다. COP24의 미결정 협상과 후속 결정을 위한 부속기구와 협상그룹 회의가 열리고 있지만, 부대행사와 총회장 곳곳에서 과거와 같은 활력은 없어 보인다.
이런 초반 분위기는 어느 정도 예상이 되기는 했다. 이행규칙이 중요하지만, NDC와 LEDS를 다루게 되는 2020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기후총회(COP26)에 비해 흥행 요소가 덜 하리라는 이유에서다. 더 중요한 변수는 당초 개최지였던 칠레가 행사 유치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칠레는 피노체트 정권 이후 처음으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할 정도로 민중적 저항에 직면한 탓에 국제행사를 치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한 달 남은 상황에서 칠레를 대신한 스페인 당국, 그리고 세계 곳곳의 기관들은 행사 준비와 참가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칠레(총회 의장국)-마드리드(총회 개최지) COP25는 기후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럽에서 기후총회가 연속 3회 개최되면서 남미 등 기후취약 국가와 지역의 상황을 대변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30년을 보낸 칠레는 사회정의와 기후정의가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는지를 보여줬고,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이행전략과 새로운 사회협약 없이는 기후위기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개회식 영상에 등장한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한편으로는 자국의 비상 국면을 미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야심찬 기후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놨다.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을 접한 칠레 국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장소가 변경됐음에도 칠레 기후운동 진영은 오랫동안 준비한 포럼과 행사를 산티아고에서 진행하고 있다. 비록 유엔이 주관하는 공식 공간은 아니지만 생태적, 사회적, 경제적 위기를 해결하는 최전선에서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를 실천하고 있다. 우리가 칠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마드리드에 모인 기후정의 조직과 활동가들은 총회 안팎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칠레와 연대를 시도하고 있다(Cumbre Social Por El Clima 링크 https://cumbresocialclima.net/). 마드리드가 칠레의 실상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기후정의가 지구 차원에서 횡적으로 연결되길 의도해서다.
기후위기는 자연의 실패가 아니라 체제의 실패 결과다. 그렇다면 국제기구, 국가, 지역과 현장이 기후 비상사태의 탈출구로 여기는 신기후체제에 진입할 준비는 얼마나 되어 있을까. 안토니오 그람시는 낡은 것이 소멸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는 상황을 진짜 위기로 진단했다. 2009년 코펜하겐 총회(2009년) 이후 10년은 기후 파국 직전까지의 인터레그넘(interregnum, 대공위시대)이었다. 교토체제를 대체할 신기후체제가 바람직한 과정과 결과로 이어질지 장담하기 어렵다. 어떻게든 이행규칙에 합의하더라도 1.5도로 상징되는 위기극복의 전망은 암울하다. 온도상승 제한 목표와 각국의 감축공약 합산과의 배출 격차(emission gap)도 크지만, 현재 계획된 화석연료 생산을 고려하면(production gap) 그 격차는 더 벌어진다. 따라서 일각에서 제기해온 화석연료금지조약이 더 현실적인 수단일 수 있다. 기후위기를 정말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순배출제로를 제대로 달성하려면 행동할 대상을 직시하고 그에 맞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국제사회에서 정의로운 전환 개념은 상식화되고 있고, 일부 국가와 지역은 실제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운영하고 있다. 총회 논의 기구인 대응조치 포럼(Forum on Response Measures)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지 관심사다.
이제 정의로운 전환은 기후변화에 영향 받는 노동과 지역사회에 초점을 맞추는 협의의 관점에서 보다 넓은 의미의 사회-생태적 시스템 전환으로 옮겨가고 있다. 물론 근본적인 전환(deep just transition)과 개량적인 전환(shallow just transition)이라는 경로의 차이도 존재한다. 연구자들은 현상 유지적(Status Quo), 관리 개혁적(Managerial Reform), 구조 개혁적(Structural Reform), 변혁적(Transformative) 접근으로 구분하면서 정의로운 전환의 이론과 실천을 재구성하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이 심화할수록 식량주권, 녹색일자리, 녹색교통, 기본소득, 공유화(물, 토지, 에너지 등), 순환-연대경제, 자원의 권리를 포괄하는 확장성을 갖게 된다.
이런 체제 대안적 프레임은 공식 회의 테이블에서 기대할 수 없다. CO25 중반부터 마드리드 주요 거점에서 시작될 다양한 형태의 역동적인 기후정의 움직임들이 새로운 영감을 줄 것으로 예상한다. 그린뉴딜에서부터 체제전환에 이르기까지 그저 살아남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흐름에 힘을 모을 것이다. 우리는 기후레짐의 변화 속에 여러 병리적 증상들의 출현을 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칠레 민중운동의 노래이자 구호처럼,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정부 역시 COP25에서 기후외교를 펼치고 있고 각종 부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2주차에는 조명래 환경부 장관의 고위급 회의 연설이 예정되어 있다. 이 자리에서 한국의 대응 태세를 전달하고 2차 녹색성장 및 글로벌 목표 2030을 위한 연대(P4G) 정상회의 개최(2020년)도 소개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는 2030년 감축목표를 상향 조정할 의지가 없고, 현재 작업 중인 2050년 장기전략 수립에도 소극적이다. 지난 9월 국제기후파업을 계기로 결성된 기후위기 비상행동은 기후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국가 전반의 대대적인 개조를 요구하고 있다. 2020년까지 정부의 전향적인 변화가 얼마나 가능할지 낙관하기 어렵다. 국제적 이니셔티브에 동참해 정의로운 전환을 국내 계획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할 과제도 남아 있다. 여수 등 지자체가 28차 기후총회(COP28) 유치를 희망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정부도 유치전에 힘을 보탤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서 이명박 정부가 저탄소 녹색성장과 함께 기후총회(COP18) 유치를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던 경험을 돌아보자.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고 할 수 있겠지만 기준도 바뀐다는 점을 명심하자.
전체댓글 0